“[이숙희 선생님 인터뷰-] 힘들지 않았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송기복, 이동석 선생님에 이어 세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이숙희 선생님입니다. 이숙희 선생님은 지난 50년 동안 노동 전태일이라는 두 단어와 동거 동락했습니다. 1969년 평화시장의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로, 그리고 지금은 전태일재단의 교육위원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숙희 선생님은 최근까지 전태일재단이 서울시교육청과 MOU를 체결해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진행하고, 각 노동조합이나 특정단체들이 요청을 하면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이숙희 선생님의 일상은 물론 노동운동을 위해 바친 인생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직접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 사진-1 >  지난  4 월 이숙희 선생은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박민중 활동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Q.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숙희) 저는 지금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을 하고 있는데요. 코로나가 있기 전에는 바빴어요. 특히 재작년에는 엄청 바빴어요. 근데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는 조금 여유로워졌어요. 그래도 불규칙적이지만 교육이나 회의라든지 다양한 일들이 있으니까 항상 바쁜 듯 바쁘지 않은 듯 지내는 것 같아요.

 

팬텀싱어의 애청자

 

Q. 선생님은 노동 그리고 전태일과는 분리될 수 없는데요. 그래도 잠시 이 주제를 내려놓고, 선생님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좋아하는 드라마라든지, 시간이 있을 땐 어떻게 지내세요?

(이숙희) 제가 드라마는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요즘 드라마들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가슴을 졸이면서 봐야 하는데 저는 그걸 잘 못하겠어요. 그래서 오히려 음악프로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음악프로도 요즘 한창 인기가 많은 트로트 관련 프로는 안 보는데요. 제가 71년부터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었는데, 그때 저희가 했던 운동 중에 하나가 유행가 안 부르기 운동이었어요.

 

Q. 그런 운동을 한 이유는 뭐예요?

(이숙희) 예전의 유행가는 가사에서 여자라서 참아야 한다 등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가 많았는데요. 이런 유행가들이 은연중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듣지 말자고 했던 거죠. 그래서 최근에 우리 사회가 트로트 열풍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프로는 한 번도 안 봤고요. 그래서 제가 주로 보는 건, 가사를 못 알아들어도 팬텀싱어를 1회부터 계속 보고 있어요.

 

Q. 아 정말요? 그럼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또는 노래는 뭐예요?

(이숙희) 그런 것도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유행가를 안 부르니까 한동안은 보리밭을 많이 불렀고요. 그다음에 운동가요들을 많이 불렀죠.

 

Q. 신기해요 선생님! 그럼 같이 노동운동하셨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분들도 여전히 유행가를 잘 안 부르나요?

(이숙희) 다른 모임들은 모르겠는데요, 제가 속해 있던 팀은 그랬어요. 청계피복 내에서도 여러 팀들이 있었는데 우리 팀은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 팀은 술도 안 먹고, 유행가도 안 부르고 그랬어요. (당시 청계피복의 전체 모임은 아카시아였으며, 그 가운데 이숙희 선생님의 팀의 이름은 네잎클로버였다.)

 

<사진-2> 1970년대 당시 평화시장 옥상에 만들어진 청계 노조의 사무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숙희 선생님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이곳 청계 노조 사무실엔  여공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청계피복의 소녀 노동자가 되다

Q. 어떤 이야기를 해도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노동과 청계피복 노조는 빠질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되셨어요?

(이숙희)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저희 집이 정말 가난했어요. 교과서도 못 살 정도로. 그때 당시에 저희 어머님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저는 그걸 못 견디겠더라고요. 동생들도 저와 나이 터울이 10살 정도 났거든요. 근데 그때 양장점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제가 처음에 양장점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양장점을 갔는데, 보니까 만만한 곳이 아니더라고요. 양장점은 미싱 하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하고 그 외에는 다 제자라고 하면서, 3년 이상 일을 해야 겨우 일을 배울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데, 어떤 언니가 평화시장은 1년만 고생하면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평화시장으로 가게 된 거죠. 그때는 1년 고생해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나중에 중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엄청 반대를 하셨어요. 근데 저는 어머니가 길에서 장사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공장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그게 저의 첫 번째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웃음)

 

Q. 처음엔 양장점을 가셨다가 평화시장으로 재취업을 하셨네요. 그때 평화시장은 어땠어요?

(이숙희) 그래서 갔는데 평화시장을 딱 들어갔는데 대낮인데 굉장히 침침하더라고요. 그리고 공장에 갔더니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미싱에 붙여있는 번호로 부르고, 그리고 그때는 제단사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시다들한테 욕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이런 것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웃기는 게 재단보조들은 꼭 오빠라고 부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재단보조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오빠는 무슨 오빠야! (웃음)

 

< 사진-3 > 1960 년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채 공장에 들어온 여공들은 ,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돈을 벌었다 .  공장 사장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다른 공장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소녀들에게먹고 잘 곳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 ( 출처 :  한국일보  /  제공 :  국사편찬위원회 )

Q. 지금과는 많이 다른 노동환경이었네요. 그럼 어떻게 전태일의 죽음을 경험하신 거예요?

(이숙희) 그렇게 있다가 전태일 사건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는 그때 직접 현장은 못 봤고 그때 사장들이 뭐 깡패가 일하기 싫어서 죽었다, 폐병 걸려서 취업이 안 되니까 죽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죠. 근데 어느 날 회사에서 갑자기 저희한테 나가서 놀다가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유를 물었더니 사장이 제가 키가 작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아마 그때 근로감독관이 조사를 나왔었던 것 같아요. 전태일의 분신 이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그때 회사에서 나이 어린 사람을 쓰면 안 되는데 썼으니까.

 

Q. 그때 선생님의 나이가 어떻게 되셨어요?

(이숙희) 69년도니까 16살이었어요. 그때 법에 따르면 만 18세 미만은 취업을 시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그때 16살이었으니까 사장이 잠깐 놀다 들어오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가 그랬어요.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가 되다

<사진-4> 1970년대 중반 '마을 노동 교실'의 풍경. 교실 가득 빼곡하게 채워 앉은 여공들이 중등교육과정 수료를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Q. 그럼 선생님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전태일의 죽음이었나요?

(이숙희) 크게 세 가지 정도 이유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첫 번째 이유는 전태일의 죽음이었죠. 그런 일이 있고 나중에 사장들이 그 깡패 엄마랑 친구들이 평화시장 옥상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맨날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때 제가 딱 꽂혔어요. 왜냐하면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사회시간에 선생님이 조합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면서 노동조합이 있다고 말씀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평화시장에 들어오면서 여기도 노동조합이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무역회사나 은행 같은 좋은 회사에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저는 그곳이 나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이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그리고 두 번째는 71 11 13일이었는데요. 아침에 출근을 했더니 시장에 불을 다 내리고 출근하자마자 퇴근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Q. 출근을 했는데요? 그런 전례가 없던 일인가요?

(이숙희) . 없죠. 평화시장은 70년대 전기가 약해서 불이 잘 나갔는데요. 그럼 한전에 전화를 해서 몇 시간 후에 불이 다시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노동자들은 그냥 기다렸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오늘 그 죽은 사람 1주기라서 일을 못하니까 그냥 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잖아요. 그래서 너무 깜짝 놀랐죠. 근데 놀란 건 잠시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해가 환할 때 집에 가는 게 처음인데 집에 가기 실잖아요. 그런 데다가 또 나오니까 앞에 젊은 남자들이 전태일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모란공원 추도식을 가는데, 관광버스로 왕복하고, 가면 빵 하고 우유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옆에 있던 친구 2명한테 같이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셋이서 모란공원을 갔죠. 그때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왜 전태일이 죽었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거예요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 72년도 봄에 노동조합에서 야간 중등과정을 한다는 거예요. 너무 가고 싶었어요. 제가 그때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였는데 평화시장 옥상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그때 10m만 더 가면 노조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거리를 용기가 없어서 못 가서 결국은 중등 교실을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참여하게 된 거죠.

 

Q. 선생님이 69년도에 처음 평화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셨고, 1970년도 전태일의 죽음이 있고, 71년도 1주기에 모란공원에 참석하면서 전태일의 죽음을 깨닫게 되셨네요. 그리고 이제 평화시장의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가 되셨네요. 그럼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떤 일들을 하셨어요?

(이숙희) 가장 먼저 시다들을 부를 때 번호가 아니라 이름 불러주기를 했어요. 그리고 서로 반말하지 않기. 그리고 이제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노동조합은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는 곳이구나라는 걸 깨닫고 소심했던 제가 옆자리에 있는 미싱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죠. (웃음)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노동조합의 핵심 멤버가 된 것 같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사진-5> 1975년 '새마을 노동교실'에 입학한 어린 여공들의 모습. '평화 새마을 교실'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중등 기초과정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Q. 선생님이 그때부터 노조의 핵심 멤버가 되셨네요.(웃음) 그럼 선생님, 그때 노동환경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도 해야 하고, 노조 활동도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선생님은 선생님만의 돌파구는 없었나요?
(이숙희) 힘들지 않았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왜냐하면 노조를 통해 신세계를 경험한 거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8시에 공장에 들어가서 밤 10-11시까지 일하고. , 추석이나 구정은 대목이라고 해서 약 2주 정도씩 공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철야하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가 노동조합에 갔더니, 이름도 불러주죠,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도 하게 되잖아요. 그때 노조에서 중등반만 한 게 아니라 교양교육 같은 것도 많이 했으니까. 예를 들면, 꽃꽂이도 하고, 등산도 하고, 회의 진행법, 이런 것들을 다 배우니까 하나의 학교였던 거죠. 그래서 그게 저에게는 신세계였던 거죠. 늘 공장에서 별로 말도 없던 제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거죠. 그래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Q. 그럼 일을 할 때도 노조활동들이 기다려지고?

(이숙희) . 그래서 매일 1시간의 점심시간마다 제가 일하던 5층 동아 상가에서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고, 노조 사무실이 있던 평화시장 4층 옥상까지 헐레벌떡 가는 거예요.

 

Q. 아무래도 그때는 실질적으로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부족했잖아요. 그때는 8시간 근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말에 쉬는 것도 아니고요. 주로 노조활동은 언제 하는 거예요?

(이숙희) 점심시간에 잠깐 가서 보고 오고, 저녁에 이제 모여서. 10시에 끝나도 이제 모여서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리고 그때 되면서 일요일은 쉬기 시작했어요. 노조에서 계속 단속을 하면서. 그러니까 일요일 날 교육 프로그램 같은 걸 하고.

 

Q. 그렇게 점심시간에 시간을 쪼개서 조금씩 만나고,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에도?”일을 할 때도 노조활동들이 기다려지고?

(이숙희) . 온전히 노조에 다 쓰는 거죠. 그래서 바빴죠. 근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이숙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감사했습니다. 그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탄압 속에서도 노조활동을 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하루에 8시간을 일할 수 있고, 주말에는 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노조활동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그 활동 자체가 당시 노동 운동가들에게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도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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