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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8시간, 졸속 재판과 조속 살해, 누가 국민의 자격을 정했는가? [특집] 18시간, 졸속 재판과 조속 살해, 누가 국민의 자격을 정했는가? 사형 확정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전례가 없는 사법살인이었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흥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8인은 채 하루도 못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2차 인혁당 사건, 이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을 조사하며 배후세력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이하 인혁당 재건위)’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이들이 정부 전복, 공산정부 수립을 기도 및 획책했다는 것이다. 인혁당 재건위로 몰린 이들 중에.. 더보기
[부고] 함주명 선생, 영면하시다. [부고] 함주명 선생, 영면하시다. 지난 4월 12일에 국가폭력 피해자 함주명 선생이 향년 92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정의를 구하는) 국가폭력 생존자회와 (사)인권의학연구소는 함주명 선생님의 부고를 접하고 정중히 조문하였다. 생존자회의 최양준 선생, 구명우 선생과, 인권의학연구소의 함세웅 이사장, 이화영 소장은 경희의료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고 유족을 위로하였다. 함주명 선생은 1983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45일간 불법구금되어 고문 등 가혹행위를 겪은 대표적 국가폭력 피해자이다. 이후 함주명 선생은 남영동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위장귀순 간첩으로 조작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결국 16년 간 투옥되었다. 함주명 선생은 수감 중에도 계속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98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 더보기
[단상] 최초의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추모하며 [최초의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추모하며] 지난 4월 24일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추모일’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1915-17년에 걸쳐 오스만 제국이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대량학살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최초의 집단학살, 제노사이드였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희생된 이들은 최대 150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수백만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단행하면서 누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죽음을 기억하겠는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과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끔직한 집단학살과 국가폭력이 재발되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4월24일 #아르메니아인대학살 #집단학살.. 더보기
[단상] 그들에게 간첩조작의 대상은 승진의 지름길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간첩조작의 대상은 승진의 지름길에 불과했다] 군사독재정권은 정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민주화를 위한 시민의 저항과 의식 확산을 막고, 공포로써 통치하기 위해 수많은 간첩조작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간첩으로 지목된 대상은 고문 끝에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문에 가담했던 가해자들은 이를 통해 부와 영예를 누렸습니다. 피해자들을 향한 국가폭력은 실로 무지막지하였고 얼토당토않았습니다. 간첩조작사건피해자들 중 다수의 제주도민들은 일본에 방문한 것이 조총련과 엮여져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그런데 양영배 씨는 그와는 일절 상관없이 간첩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양영배 씨는 보안사령부의 제주 지부인 ‘한라기업사’에 끌려갔습니다. 양영배 씨를 끌고 간 이들은 양영배 씨에게 북한에 가 폭탄제조법을 배운 .. 더보기
[이사회] 오프라인으로 진행된 2차 이사회 [이사회] 오프라인으로 진행된 2차 이사회 4.19 혁명이 일어난 지 63년이 되는 날, 인권의학연구소는 2023년도 제2차 이사회를 진행했다. 이번 이사회는 오랜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렸으며, 바쁜 가운데도 6명의 이사(함세웅, 이화영, 백재중, 유충희, 이상희, 이석태)와 1명의 감사(김성주)가 참여해 다양한 안건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동시에 오랜만에 보는 이사들은 환담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번 이사회는 다른 이사회와 달리 특별했다. 그 이유는 지난 14일 약 5년 간의 헌법재판관 소임을 마치고 인권의학연구소 이사로 복귀한 이석태 변호사가 참석했기 때문이다. 이석태 변호사는 지난 2018년 9월 김창종 전 재판관의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잠시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직을 내려놓았다. .. 더보기
[단상] 국민을 가리켜 간첩이라 하다 [단상] 국민을 가리켜 간첩이라 하다 “당시 한라기업사를 다녀오면 반병신 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내가 됐다.” 전두환 집권 시기 제주도에는 보안사령부의 지부로 민간 기업 형태인 ‘한라기업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한라기업사에 다녀오면 반병신이 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하나둘 사라졌던 사람들은 몸이 크게 상한 채 다시 나타나곤 했습니다. 양의남 씨는 소문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한라기업사 직원들에게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양의남 씨에게 간첩 서경윤과의 연관성을 캐물었습니다. 알고 있다 답하니 대뜸 다음 질문으로 몇 번 북한을 다녀왔는지를 물었습니다. 다녀온 적이 없기에 사실 그대로 다녀온 적이 없다고 말하니 돌아온 것은 무수히 잔혹한 폭력이었습니다. 양의남.. 더보기
4.19 혁명의 63주년입니다. 오늘은 4월 19일입니다. 4.19 혁명의 63주년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승만의 불의에서 촉발된 시민들의 4·19 혁명.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지키고 키우기 위해 많은 학생, 청년, 시민들이 피 흘렸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희생을 치른 분들은 대접받지 못하고, 권력에 기생했던 이들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행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기 위해 우리는 피의 희생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더보기
[특집] 그만 속숨허라, 그만 숨어라. 이제 숨 쉬어라. [특집] 그만 속숨허라, 그만 숨어라. 이제 숨 쉬어라. 제주의 근현대사는 4.3에서 간첩조작에 이르기까지 국가폭력이 반복되었고, 그 아픔은 여전히 지금도 곳곳에 있습니다. ‘속숨허라’ 제주말입니다. ‘숨을 속으로 삼켜라’라는 뜻이랍니다. 숨을 속으로 삼키면 말을 내뱉을 수 없습니다. 말을 내뱉기 위해서는 숨을 내쉬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속으로 삼키라는 말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숨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숨죽이고 살아야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주 4.3과 그로 인한 3만 여명의 죽음, 그 후 죽지 못해 살아나간 삶이 담긴 말입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의 제주는 과거 수탈의 땅이었습니다. 일제강점 간 전 국토와 국민이 일제로부터 수탈과 억압을 받았습니다. 제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당수.. 더보기
[부고] 함주명, 92년간 ‘ ’ 삶을 살아냈고 바라냈다 [부고] 함주명, 92년간 ‘ ’ 삶을 살아냈고 바라냈다 함주명 선생이 4월 12일 작고하였다.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생존자였다. 92년간의 ‘ ’ 삶이었다.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1931년 1월 23일 개성 만월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개성은 북한의 치하가 되었다. 전쟁으로 그는 한 쪽 눈을 잃었고 가족과 헤어져 생이별하고 말았다. 가족을 그리워하던 그는 가족을 찾아 대남공작원에 자원하였고 월남하였다. 1954년 4월 14일 휴전선을 넘자마자 즉시 자수를 하였다. 미군 CIC를 거쳐 원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재판 결과 가족을 만나기 위해 대남공작원으로 ‘위장’해 남파하고, 남으로 오자마자 자수한 것이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가족과의 재.. 더보기
[카드뉴스] ‘상처받은 치유자’, 그도 고문피해자였습니다. ‘상처받은 치유자’, 그도 고문피해자였습니다. 1970년대 그는 노동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80년대 그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78년 당시 참혹했던 노동 현실을 알리기 위해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펴냈습니다. 그 책은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과 대학생 사이에서 필독서가 되었으나 정작 저자는 독재정권에 의해 1981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37일 동안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이 남긴 후유증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오랜 시간 그는 노숙을 전전했고,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대인기피증을 겪었습니다. 그는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지난 상처를 조금씩 이겨냈습니다. 이제 그는 매주 일요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들’의 역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