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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센터 소식

[법률] 재심 무죄, 또 하나의 역사가 바로잡히다.

[법률] 재심 무죄, 또 하나의 역사가 바로잡히다.

-유정식 선생, 47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지난 7 7, 서울고등법원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바로잡혔다. 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데 무려 47년이 걸렸다. 1975년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무려 23년의 시간 동안 감옥에 갇혀 억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유정식 선생이 재심에서 비로소 무죄를 받았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 많은 동지들이 함께 참석해 유정식 선생의 무죄를 축하했다. (아래 사진을 참고해주세요.)

 

<사진 -1> 7 월 7 일, 서울고등법원 서관 앞에서 유정식 선생의 무죄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동지들이 재판에 참석했다. (왼쪽부터 박민중, 박순희, 이화영, 최양준, 김순자, 윤혜경, 이동석, 김장호, 이옥분, 유정식, 유정식 선생 아내, 신윤경, 장경욱-호칭 생략 )

이날 재판부였던 서울고등법원 형사 2(이원범 한기수 남우현 부장판사) 1975년 당시 국가기관의 불법구금과 고문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유정식 선생에 대한 간첩조작 혐의로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약 반 세기가 흐른 뒤 아무리 살펴봐도 범죄 혐의가 없는 이 사건을 가지고 1975년 사법부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하였고, 2·3심에서는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 하에 조작된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들이 그러하듯 유정식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이 화근이었다.

 

유정식 선생은 1967년 건국대 축산과 4학년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2년간 동경대학원에서 연구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후 5년 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던 찰나에 1975년 별안간 유정식 선생은 간첩단 사건의 주범이 되어 재일 한국인 6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수사기관의 발표처럼 유정식 선생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침투한 것이라면 당시 국가기관은 왜 5년 동안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1975년에 사건을 발표했을까.

 

1975년 전후로 박정희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대내적으로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겨우 90만 표 차이로 승리하면서 정권연장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에 이듬해 10월 유신헌법을 발표하면서 종신집권의 야욕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이 같은 선택은 오히려 수많은 시민들의 반발을 야기했고, 그 반발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단단해져 갔다. 대외적으로는 1960년대 후반까지 미소 냉전이 격화되며 남한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에 북한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에 서서 외교가 단순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미소 냉전의 데탕트가 도래하면서 국제정치의 변화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경제적인 수준도 북한이 우월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는 오랜 북한의 비동맹 외교로 인해 국제정치의 현장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국제사회에서 소위 친구가 많았다.

<사진 -2> 1975년 11월 22일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 에 대해 언론에 직접 브리핑을 하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이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렸던 유학생들은 40 여년만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는다. 유신시대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권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국민을 보호하는 의무를 정면으로 저버리는 조작 사건들을 양산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가기관이 바로 중앙정보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75년 당시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에 의해 발표되었던 “11.22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다. 유정식 선생의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유정식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하고 5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다가 별안간 1975년도에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조작된 그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이다.

 

유정식 선생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국가에 의해 간첩이 되어야만 했다. 중앙정보부, 검찰, 그리고 재판정에서까지 그 어떤 국가기관도 유정식 선생의 진실을 외면했다. 결국 진실은 불법체포, 불법구금, 그리고 고문에 의해 가려졌고, 당시 언론도 국가기관의 편에 서서 거짓을 선동했다. 그 결과, 1심에서 사형, 2·3심에서 무기징역, 23년의 감옥생활로 이어졌다. 이 참혹한 역사를 바로잡는데 무려 47년이 걸린 것이다. 이 억울한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7 7일 서울고등법원 서관 302호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유정식 선생은 물론 방청석에 앉아있던 동지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트렸다.

<사진 -3> 무죄를 받고 재판정을 나오면서 유정식 선생이 일본 구원회에서 보낸 꽃다발을 받고 있다 .

이번 재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재판부가 주문을 읽고, 유정식 선생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남겼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선고를 마치며 유씨가 걸어온 삶의 명예가 뒤늦게나마 회복되길 바란다. 앞으로 걸어갈 삶에서도 조금이나마 유익되고 가족들에게 위로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밝혔다. 유정식 선생이 겪어야 했던 그동안의 고초를 생각하면 너무도 가벼운 말이지만 그래도 사법부의 일원으로부터 이 같은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다른 하나는 검찰이 상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 재판은 고등법원에서의 2심 재판이었기 때문에 검찰이 상고하면 대법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의 사례들을 고려하면 7 7일 무죄를 받고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 이유는 검찰이 상고할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상고 마감기한인 7 15일까지 검찰이 상고를 하지 않으면서 유정식 선생의 무죄는 확정되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부분과 함께 여전히 재심 과정에서 아쉬운 점들이 더 많았다. 첫째, 여전히 재심을 개인이 나서서 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재심청구를 해야 한다.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지고,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기까지 짧게는 3, 길게는 5-6년 동안 국가폭력 피해자는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는 법정에 가서 다시 피고인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트라우마 재경험을 야기한다.

 

둘째, 언론의 권위적인 보도행태다. 이번 유정식 선생의 재심 관련 보도를 여러 매체에서 보도했다. 그러나 이 언론들은 처음부터 재판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선고가 있던 날에도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던 기자들의 기사는 역사성은 물론 권위주의적인 과거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고 말미에 재판부가 유정식 선생을 향해 했던 사과의 표현을 다루는 언론의 단어 선택은 경악스럽다. 뉴스1의 기사는 선고 직후 재판부는 (중략) 피고인과 변호인 모두 참으로 수고많았다고 격려했다.”고 했으며, 노컷뉴스는 재판부는 이날 재판 말미에 유 씨에게 (중략) 참 수고가 많았다라고 위로했다.“라고 표현했다. 1975년 사법부에 의한 사형과 무기징역이 잘못되었다는 판결을 고려하면 어떻게 사법부의 일원인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격려했다 위로했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이 표현은 재판부와 피해자를 동일선상에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재판부를 사대하는 언론의 권위주의적 사고의 결과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번 재판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47년만에 유정식 선생의 역사가 바로잡혔다는 점이다. 비록 너무 늦었지만, ()인권의학연구소는 지금이라도 유정식 선생의 일상이 회복되고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