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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인터뷰

[이동석 선생 인터뷰-①] 프랑스에서 우연히 만난 ‘김치식당’.

[인터뷰] 이동석 선생, 어학연수 중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나다.

 

  지난 송기복 선생의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재일동포 이동석 선생의 이야기이다. 이동석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한국에 왔다. 2년 후, 1973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해 연극회 활동 등 모국에서의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1975 11 22일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이 하숙집을 들이닥치면서 행복했던 모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끝이 나게 된다. 1976년 당시 대법원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과 간첩죄를 인정해 이동석 선생에게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그렇게 끝이 날 것 같던 이동석 선생의 모국 유학은 2018년 새롭게 시작되었다.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2017년 민사소송도 끝이 나자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돌려주지 못하는 청춘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했다. 그리고 지난 2월 한국외대 불어과 졸업생이 되었다. 지금부터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의 첫 번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 사진  1>  지난  3 월  30 일 ,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다양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이동석 선생 .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반갑습니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동석) 제가 이번 2월에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했습니다. 75년도 당시 제가 구속될 때 한국외대 불어과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거든요. 그래서 2018년도에 4학년으로 재입학하고 지난달에 졸업했습니다. 4학년부터는 등록금 전액을 내지 않아도 신청과목 수에 따라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해서 한국에 오래 있고 싶어서 일부러 학점을 많이 신청 안 하고 1년 더 학교를 다니고 이번에 졸업했습니다.

 

< 사진  2>  지난  2018 년  10 월 ,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 ( 출처 :  한국외대 홈페이지 )

Q. 선생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럼 졸업하신 지 얼마 안 되셨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 안 지났어요. 근데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 졸업장만 받으러 학교에 갔거든요. 그런데 저를 알고 있던 학생지원센터의 여자 직원이 이번에 제가 졸업했다고 연락을 안 했는데 미리 알았나 봐요. 학교에 오시면 말해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졸업장 받으러 가는 날 아침에 연락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학생지원센터에서 일하는 그 직원이 꽃다발 준비해서 제가 졸업하는 걸 축하해준다고 사진 찍고 그랬어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은 없었지만은 그래도 학교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Q. 선생님이 한국외대에서는 이미 유명인사였네요! (웃음) 그럼 선생님, 2018년도에 다시 한국에 오셔서 다시 입학해서 학교 다니실 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요, 사실은 공부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웃음)

 

Q. 정말요? (웃음) 그럼 선생님 왜 다시 학교에 가셨어요?


(이동석) 제가 왜 재입학을 결심했냐면요, 재심으로 무죄를 받고 민사까지 다 끝나고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잖아요. 근데 그 보상금이라는 게 저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국가가 과거의 잘못된 일에 대해 무죄를 통해 사과는 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국가는 돈으로밖에 계산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국가로서는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책임을 묻지 마. 이 사건은 없었던 걸로 하는 거다.’ 그런 거잖아요? 그러면 그 돈을 제가 받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이제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재심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 내가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있었을 때, 학교에 가서 문의를 해봤어요. 만약 학교에서 안된다고 하면 제가 항의하려고 했어요. 내가 이제 무죄까지 받고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재입학이 안 되는 것인지 항의하려고 했는데, 아주 쉽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제가 안 한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웃음) 그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외대 불어과로 재입학했어요.

  

65세에 떠난 프랑스 어학연수, 그리고 만난 김치식당.

<사진 3> 2018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하고 한겨레와의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  이동석 선생은 자신의 대학시절 가운데 가장 즐겁게 보냈던 순간으로 ‘연극회’ 시절을 꼽았다. (출처: 한겨레)

Q. 그런데 선생님 기사를 찾아보니까 외대에 재입학하시기 전에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다녀오셨던데, 어떻게 프랑스까지 가게 되신 거예요?


(이동석) 제가 한국외대에 처음 불어과로 입학을 했는데, 제가 영어를 아주 싫어했어요. 그렇다고 불어를 잘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때 한국 학생들은 불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우리말로 서툰데 불어를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나서 재입학한다고 제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이가 20대라면 몰라도 이제 70 가까이 되는데요. 그때 제 나이가 65세였거든요. 저는 일본에서 일을 65세까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때 재판 후에 보상금이 나오고 퇴직을 하게 되면서 모든 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어를 해야 되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기 전에 프랑스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Q. 그래서 파리와 니스로 6개월 정도 다녀오신 거예요?


(이동석) 그렇죠. 근데 원래 불어를 배우려고 간 거였거든요. 제가 프랑스 갈 때는 옛날에 한국에 와서 우리말을 배웠던 생각을 하고, 프랑스에 6개월 정도 있으면 일상회화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간 건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웃음)

 

Q. (웃음) 프랑스에는 선생님 혼자 가셨던 거예요?


(이동석) , 혼자 갔어요. 언어가 잘 안 되더라고요. 니스에 2달 정도 있다가 파리로 갔거든요. 파리에 있으면서 보니까 불어가 아예 안 되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스스로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목적을 바꾸고 관광을 하자하고 마음을 먹었어요. (웃음)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니까 파리에서 미술관에 많이 다녔어요.

 

Q.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웃음) 65세에 어렵게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생각보다 언어가 늘지 않아 빨리 마음을 바꾸고 즐겁게 프랑스에서 여행을 하시다 온 거네요. (웃음) 근데 선생님은 과거에 국가로부터 엄청난 아픔을 경험하셨음에도 이렇게 활기차게 일상을 살아가시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인데요. 혹시 프랑스에서 재밌었던 일화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동석)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뭐냐면요. 처음 니스에 2달 정도 있을 때는 일본음식이나 한국음식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특히 한국음식이 먹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파리에 갔을 때,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 파리를 돌아다녔거든요. 돌아다니면서 파리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찾았어요. 저녁 6시쯤 되었는데, 골목에 한글 간판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그 간판 이름이 항아리였어요. 그래서 가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7시부터 영업을 한다고 잠겨 있었어요. 근데 안에 일하던 사람이 저를 보고 나와서 저한테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일본말로 대답을 했는데,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파리에서 한국 음식점 주인이 저를 보자마자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하는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에 몇 번 그 식당에 가서 자연스럽게 주인이랑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예요. 특히 왜 파리에서 일본 사람이 한국 식당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나누게 된 거죠.

 

Q. ! 그 한국식당 주인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었나요?

 
(이동석) 네 일본 사람이었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 주인이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의 이응노 화백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 식당이 원래 이응노 화백의 조카인 이희세 씨가 경영했던 식당이었어요. 그때 이응노 화백이 화가였던 조카 이희세 씨를 프랑스로 불러서 공부를 시켜줬던 거죠. 근데 1967년도에 동베를린간첩단사건(동백림사건)으로 이응노 화백이 윤이상 씨 같은 분들이랑 같이 구속이 됐잖아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파리에서 구명운동을 하신 거예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구명운동도 많이 하고 해서 그분들이 70년대 후반에 다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돌아오신 분들이 한반도의 통일과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유럽에 거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심코 갔던 그 식당이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었던 거죠. 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이었던 거예요.

 

Q. 선생님은 어학연수로 갔다가 우연히 그런 역사가 있는 식당을 알게 되신 거네요. 근데 그 이희세 씨랑 지금 그 식당의 주인인 일본 사람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나요?


(이동석) 그 시대에 이응노 화백, 윤이상 씨, 이희세 씨 모두 일본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말을 잘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식당을 하는데 그 일본 사람은 프랑스에 와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 그 일본 사람이 여권을 분실했던가 해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희세 씨가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있지만, 한국식당에서 같이 일하겠냐고 이희세 씨가 제안한거죠. 그런 인연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식당은 이희세 씨가 은퇴를 하면서 지금의 주인이 물려받은 거예요.

 

 <사진 4>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두 개의 한국식당.  이동석 선생은 우연히 항아리라는 한글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그 식당은 항아리 식당이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다.  김치식당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Q. 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 그럼 아직까지 그 식당은 한글 이름 항아리 예요?


(이동석) 이것도 재미있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항아리라는 식당은 옆집이예요. (웃음) 한국식당이 두 개가 있는데 가운데 항아리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위에 붙어 있는 간판만 보고 거기가 항아리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몇 번 가보니까 그 식당은 항아리가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던 거예요. (웃음) 김치식당!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운명인가 싶더라고요. 걷다가 우연히 만난 한국식당의 간판을 잘못 알고 다른 식당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까 그 식당이 1967년 동베를린간첩단사건의 이응노 화백의 조카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유럽의 거점으로 만들었던 식당이었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재일동포 2세로 고등학생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다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스스로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동석 선생. 그리고 모국을 찾은 재일동포에게 한국이라는 모국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그의 청춘을 빼앗아 갔다. 그렇게 흘러가버린 40년의 세월. 그러나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되돌려주지 못하는 자신의 청춘을 스스로 되찾기 위해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고 지난 2월 졸업했다. 이 이야기도 한 편의 영화 같지만, 어학연수를 떠난 65세의 이동석 선생은 그곳에서 19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거점 역할을 했던 김치식당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동백림사건의 이응노 화백, 그 조카 이희세 작가, 그리고 그 식당을 이어받은 일본인 주인과의 인연까지... 또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에는 이동석 선생의 두 번째 인터뷰를 전하고자 한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