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아이러니.. 자기성찰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명박정부의 탄생은 인민이 극우보수독재세력을 넘어 소위 진보적 성향을 지녔다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려 하지 않은 채 먹고사는 문제와 경쟁의 욕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세운 마몬의 제단이다.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 보자면 권력이 독재의 주먹에서 자본의 힘으로 넘어갔고 그 중간에서 이행과정을 충실하게 수행한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세력이었다. 더욱 극단적인 모습의 자본화를 진행시킨 결과가 이명박 정부임은 노무현 정권 이후의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진보세력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나아갈 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일정한 시간적 흐름 속에서 미세한 변화만 느껴질 뿐, 대체적으로는 지금껏 들어왔고 그렇다 생각해왔던 이야기들이다.

 

 진보세력의 주장이 지금껏 큰 의미차원에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경화된 사회에서 그들의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했는데도 알아듣고 이해해주는 사람 역시 늘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읽는 내내 옳고 또 옳은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내용에 있어 새로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런 좋은 이야기들이 왜 일반 서민과 인민들에게 쉽게 접근하고 스며들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복지확대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비현실적이라 쉽게 포기해버리는 인민들, 4대강 사업은 분명 대재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임이 분명한데 이를 적극 찬성하는 이들은 공사지역 인근의 평범한 지역서민들이라는 아이러니한 현실.. 대체 우리의 인민들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기제가 더이상의 사고를 가로막고 있으며, 진보는 왜 이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책 안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시작하여 의문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누군가가 이야기한 진보의 정의가 생각난다. "진보는 비현실적인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일이다." 애초부터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재화시켰기 때문일까?

 

 노무현에 대한 애증 역시 곳곳에서 묻어난다. 노무현이 망가뜨린 진보의 길이기에 더욱 비판하고 뛰어넘어야 할 일이지 않을까 싶지만 이 책은 노무현의 유작 <진보의 미래> 서평까지 실으면서 그에 대한 애증을 표현한다. 물론 현대사에 있어 노무현의 가치는 무게가 만만치 않고 그를 비판하여 뛰어넘어야 하지만, 애초에 그를 뛰어넘어 멀찌감치 갔어야 할 진보의 현위치에서 아직도 그를 의식한다는 것은 진보의 취약한 대중성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며, 그가 대통령 시절 벌인 정책들과 행동들 그리고 진보가 제시하는 이상향적인 정책과 대안들 사이에서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비교, 고민하는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재적 분위기에 의한 것이든 자본의 광대한 위력에 의한 것이든 한국이라는 여전한 우경화 사회 속에서 진보의 현실적 한계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모습니다.

 

 여전히 답답하다. 나 역시 진보를 지지하고 나의 삶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실천하며 살아가려 하고 있지만, 여전한 한계적 상황과 진보세력의 한계적 모습 속에서 과연 해결책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은 사실이다. 지금 한반도는 정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과 북의 정권들이 전쟁의 위협까지 유발시켜 체제유지에 골몰하고 있는데, 인민들은 여전히 그 분위기에 불안감만 느끼며 그들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생각이 한없이 가벼워진 이들은 내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차분한 고민보다는 곳곳에서 펼쳐지는 말초적 흥분에 쉽게 동화되어 두뇌의 작동을 스스로 정지시켜버렸다. 그나마 피었던 진보의 싹이 성장에 필요한 물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시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질문으로만 존재하는 우리의 고민. 제목에 적힌 진짜세상은 아직 꿈 속의 세상마냥 현실성이 없어보이는 요원한 세상이다.

 


이 글은 민욱아빠의 블로그(http://blog.daum.net/heroyw1)에 실린 글입니다.

 

 

백인들은 과연 인디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읽어나가면서 느껴지는 백인들의 교묘함과 폭력적 우월감, 그리고 그 앞에서 쫓겨나고 스러져가는 인디언들의 모습. 그 모습에서 문득 떠오른 것은 어릴적 내가 보았던 만화속에서의 인디언 캐릭터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의를 벗고 독수리 깃털을 길게 꽂고다니는 악역의 모습이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지, 절대 친구의 모습으로 둥장한 적은 없었다. 인디언들은, 철저하게 적이나 사라져야 할 야만인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야만 했다.

 

 '우월한 문명'을 지닌 백인이 신대륙으로 진입하면서 보여진 역사적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잉카제국에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서면서 보여준 잔인한 살육이나 호주에 백인이 들어서면서 태즈매니아인들이 당했던 학살 등등에 이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백인이 들어서면서 보여준 학살, 달라진 건 백인이 세운 체제가 잔인함과 더불어 교묘함을 더한 것이랄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월한 문명'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폭력과 탐욕의 다른 말일까? 역사 속에서 백인의 영역확장 활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해왔던 토착민의 멸망을 초래했다. 인디언과 백인간의 갈등만 보아도 갈등구조는 순진함과 포용 대 교묘함과 폭력의 구도였다. 그 구도에서 백인의 승리를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인간정신을 자연에 의존하여 어우러지는 삶과 타인에 대한 포용을 말살해버리는 폭력과 탐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적 결과는 '우월한 문명'을 폭력과 탐욕에 기초한 인간정신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평화와 포용을 이야기한다. 인간역사의 이 딜레마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백인과 인디언과의 생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인디언에게 땅은 태어나 의지하며 살고 묻혀야하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고, 들소는 필요한 만큼만 잡아 식량과 살림으로서 활용하는 공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백인에게 땅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며 아무렇게나 파헤쳐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낼 대상이었고, 들소는 단순히 가죽을 벗겨 팔아먹을 수 있는 대상일 뿐이었다. 인식과 삶의 방식의 차이에서도 역사는 자본에 기초한 탐욕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한 딜레마를 안겨준다. 그런 방식으로 발전해 온 인간의 삶은 여전히 그런 방식에 의존한 삶을 살면서 자연과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잘못 들어온 것일까? 다시 되잡으려면 어느만큼 되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문명사회가 멸망시킨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과 사라져버린 삶의 모습들은 인간의 공존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스승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럽고 민망해도, 역사라는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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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에 발을 디디는 일은 마치 순례와도 같다. 수많은 정보와 소통수단을 통해 강정의 소식을 듣고 한달에 한 번씩 방문하여 변화와 분위기를 느끼는 일이나, 이렇게 책을 통하여 내가 볼 수 없는 또는 바라보지 못했던 내면을 알게 되는 일은 마음 어디가에 깊이를 하나하나 쌓으며 기도하는 일이다. 쌓은 기도는 마치 지층과도 같다. 과거의 어떤 날은 너럭바위의 부드러움과 바람에 실린 파도의 거침을 만나는 자연의 감동이었다. 어떤 날은 중덕삼거리가 막히고 구럼비가 파괴되는 아픔이었다. 어떤 날은 막무가내의 폭력 앞에서의 아픔이었고, 세상의 변화 앞에서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리고 기대와 다른 변화는 허탈함이었다.

 

 누군가의 강연을 만나는 날에 평화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었다. 성토를 듣는 날엔 현실에의 암담함이었고 누군가의 글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먼 과거의 역사를 지금의 현재에 끌어들여 이어지는 트라우마의 아픔을 듣는 일은 시공간속에서 현상의 입체감있는 이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만들어진 그런 이해는 기도의 지층을 한 층 형성하는 일이었다.

 

 4.3의 트라우마를 현재의 강정에 끌어들이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있음이 죄로 죽임을 당해야했던 시대와, 공사방해를 했다는 이유로 고착을 당하고 고소와 연행을 통해 구속이나 벌금형을 받은 현재가 같을 수는 없지만, 하나하나의 가족사에 공권력의 폭압이 아품과 막연한 두려움으로 새겨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오랜 시간 후에 다시 공권력을 마주하는 일은, 각인되었던 두려움이 어쩔 수 없이 가슴 한 켠에서 고개를 드는 일이며 잊고 지냈던 트라우마가 마음 어딘가에서 존재감을 강렬하게 발산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실 겪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이를 이해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하지만, 90세가 넘은 강정마을의 노인이 자신이 겪은 4.3과 현재의 해군기지 문제에 쉽게 말을 하진 않다가, 종이에 또박또박 죽은자의 이름가지 모조리 기억해 적어내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의견을 적어내는 모습은, 마을공동체를 관통하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아픔이 얼마나 깊고 거대하며 심정적인 연결선이 얼마나 굵고 질긴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 준다.

 

 책은 가볍다. 읽기도 부담스럽지 않다.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과거와 현재의 트라우마를 마음으로 느끼고 난 후엔 강정에 대해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는 일이 조심스러워지고 부담스러워진다. 한 개인의 상처도 남이라는 입장에서는 함부로 말하기 어려울 일일진대, 길게 이어온 역사와 현재의 규모를 지닌 공동체라는 생물이 지닌 상처를 함부로 재단하고 입에 담는 것은 어떠한 말과 글이라도 상처에 생채기를 더하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이 책을 읽고난 이들이여, 혹시 강정에 대해 해군기지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과 생각을 말하던 사람들일지라 하더라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에는 내가 사는 세상의 아픔과 타인의 상처에 대해 한번쯤은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가? 입은 다물고 손은 모으고..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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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익숙함은 무료한 반복으로 채워진다. 반복은 너무도 매끄럽게 이루어져 인식의 마찰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가끔씩 다가오는 사소한 자극은 일상의 소소한 감정이나 감성을 불러일으킬 뿐, 사유을 유도하지 않는다. 반복의 미학이라면 미학이랄까.. 익숙해짐의 극대화가 만들어내는 같은 방향성의 극대화는 마지막에 가서 탈출이나 회피의 의지를 만들어 낼 뿐, 과정안에서 생각의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철학이 낯선 이유, 그것은 제도교육 안에서 만남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사회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극대화된 동일방향성의 반복 안으로 빨려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함을 철학의 기회로 이해한다면, 반복의 피로는 생각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함으로 철학의 기회를 철학의 시작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거리두기를 제안한다. 내 주변의 것들과 나를 거리두기, 사회를 타자화 함으로 또는 나를 사회에서 타자화시킴으로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그러다보면 신기하게도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보여진다. 철학은 이렇게 시작되고 생각의 깊이는 여기서부터 만들어진다.

 

 거리두기는 단순한 외면이 아니다. 거리두기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고 나와 거리를 둔 대상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친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아래, 하나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다 상처받아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독재시대의 경험뿐만 아니라 패거리문화 같은 동일성을 중시하는 사회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생각의 기회를 박탈하고 같은 발자국으로 다니다가 한두번의 틀어짐으로 얼마나 깊은 상처와 낙오감을 느끼게 했던가.

 

 저자는 거리두기의 대상을 우리가 아주 익숙해서 대상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가지 대상화시킨다. 가족, 국가, 그리고 공기와도 같이 우리를 감싸는 시스템 자본주의까지.. 역시 너무 익숙해서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대상들을 들여다봄으로서 익숙함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판적인 모습을 밝혀낸댜. 이 작업은 결국 철학은 혈연에 따른 공동체, 국가라는 합법화된 폭력, 그리고 자본의 불합리성 안에 존재하는 여러 사상의 근원이자 바탕임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낯설면서도 철학은, 은연중이라도 우리의 삶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두기를 통해 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삶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생래적으로 익숙함이 배어버린 대상들과 사회의 정형화된 틀을 통해 고착화된 삶의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서 생각을 자유롭게 만드는 작업. 이것은 행동과 판단을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물론 현실의 많은 요소는 생각의 자유로움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함의 순간 순간 피로한 자신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철학이 누구의 사상이고 법칙이고 하는 것은 어려운 철학자들의 교과서에나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이런 내용을 알기쉽게 정리해주는 책도 많지만, 이 책의 의미는, 철학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며, 개인의 삶 속에서 생각을 토대로 만들고 세워나갈 수 있는 친숙한 것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 속에 존재하는 철학적 가치를 이렇게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글은 민욱아빠의 블로그(http://blog.daum.net/heroyw1)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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