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센터2017.05.30 10:35

2017년 UN 국제고문피해자 지원의 날과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숨" 개소 4주년 기념행사


일시: 6월 23일(금) 늦은 3시
장소: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2층)

고문·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과 회복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공감과 위로 그리고 연대와 희망을 나누는 자리에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숨' 공동대표 
함세웅, 인재근,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드림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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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2013.05.22 16:13

인재근 의원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연설문

 

2012년 6월 26일, 고문 생존자들의 모임인 '진실의 힘'은 '진실의 힘 인권상' 2회 수상자로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선정했다. 이 글은 인재근 의원이 남편 김근태를 대신해 상을 받으며 발표한 수상 연설문이다. 인재근 의원은 수상 연설문에서 치유센터 설립 의사를 밝혔다.

 

 

 

 여러분, 그리고 김근태를 기억해 이 자리에 오신 모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재근입니다.

 

 흥사단에 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30여 년 전 바로 흥사단에서 오늘의 인권상 수상자인 민주주의자 김근태와 결혼을 했습니다. 수배를 받던 시절이라 아들 병준이를 먼저 낳고 4개월쯤 되었을 무렵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 식구가 신혼여생을 버스를 몇 번인가 갈아타고 공주 우금치로 다녀왔습니다. 마치 엄마아빠를 위한 결혼 선물을 주듯 갓 백일을 지난 아들 병준이는 떼도 쓰지 않고 잘 울지도 않고 착하게 굴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고 30여 년 만에 다시 선 흥사단이지만 결혼식 때처럼 설렙니다. 진실의 힘 때문인가요. 오늘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30년 전 그 날보다 김근태가 더 강하게 느껴지고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남편 김근태가 살아있었다면 이 상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김근태는 늘 미안해 했습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고문 받고 다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분들이 너무나 많은 데 그분들에 비해 김근태 자신은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에 대한 보상과 치유, 그리고 그분들을 둘러싼 잘못된 역사바로잡기가 더디기만 한 것을 속상해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진실이 밝혀지고 보상을 받게 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남편 김근태는 인권상 보다도 진실의 힘의 존재 그리고 여러분과의 만남을 더 귀하게 여겼을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김근태는 미안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진심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고문피해자 분들과 그 가족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며 미안해하고 마음 아파했을 겁니다. 그리고 고문의 기억이 되살아나 며칠 몸살을 앓았겠지요. 바로 그것이 고문의 트라우마가 주는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함께 힘을 모아 스스로 치유와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 바로 이것이 진실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진실의 힘의 활동을 보고 직접 체험하였다면 김근태는 너무나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했을 겁니다. 김근태의 흐뭇한 미소와 믿음으로 일렁이는 눈빛이 이곳에 한가득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길고 빼곡한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이유를 보았습니다. 김근태와 인재근의 지난날에 크고 깊은 의미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수상소감을 어찌할지 궁리를 할수록 김근태가 진실의 힘 인권상을 수상하고 그 상을 이곳 흥사단에서 인재근이 해야 할 이유를 더 찾아오라는 시험문제를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늘까지 그 답을 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계속 답을 찾아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진실의 힘, 인권상, 김근태, 이재근을 화두로 삼고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의 첫 번째 화두는 남편 김근태의 갑작스런 소천 이후 인권상과 함께 찾아 온 진실의 힘은 과연 어떤 인연, 어떤 뜻인 것일까 입니다.

 

 작년에 남편인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킨슨병으로 고생을 해왔는데 뇌정맥혈전증이 갑자기 찾아왔고 고비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저나 지인들 심지어 의사마저도 예상치 못한 급격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파킨슨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지긴 했어도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읽고 쓰기는 물론 말도 잘했고 축구나 산책 같은 운동도 하고 민주대연합 관련 대외활동도 활발히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을에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고 끝내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가을이었습니다. 남편 김근태는 가을만 되면 늘 며칠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고문을 받던 계절이 가을이어서 늘 고문의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못살이 나고 몸을 옴싹달싹 못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직접 겪어보지 봇한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고통의 시간들을 정신력이 워낙 강한데다 타고난 성품이 고운 사람이라서 짜증이나 화풀이 없이 혼자서 다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몸이 다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되는 느낌이었지만 남편 김근태는 미소와 넉넉한 눈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조차도 남편의 고통과 상처를 점점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 김근태가 떠나고 세상이 김근태의 인생과 파킨슨병에 주목하게 되고 민주주의와 고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께서 남편 김근태가 떠나는 길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이름으로 김근태를 기억하겠노라고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많은 분들이 김근태와 고문, 그리고 이근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보며 저 역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파킨슨병을 여러 이유 때문에 쉬쉬했던 점이 특히 후회가 되었습니다. 파킨슨병을 감추게 되자 파킨슨병의 원흉인 고문후유증도 감춰지게 되고 결국 고문을 국가나 사회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부하고 말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문의 개인적 차원조차 김근태의 강한 정신력과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치유가 아닌 불편함의 인내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병상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눈을 껌벅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남편 김근태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은 고문이 김근태를 너무나 힘들게 했엇고 그의 몸과 정신을 거의 다 허물어 뜨려 놓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상은 벼랑 끝에서 웃고 있는 김근태의 용기와 절규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내조차 넉넉함과 부드러움으로 오해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 문든문득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김근태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였습니다. 강한 정신력과 천성이 고왔던 것과 별개로 김근태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이근안을 만났어도 용서도 안 되고 치유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전문적이지 못한 즉흥적인 이벤트로 치유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고문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고 김근태의 인격을 높게 평가했던 주변 사람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고문은 이쯤 되면 용서할 때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깊은 연구와 관심 그리고 꾸준한 치료를 통해 치유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함세웅 신부님이 고문치유센터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저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형식으로 고문치유센터를 만들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진실의 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늦어서 죄송합니다. 남편 김근태와 함께 은페된 고문의 진실을 밝히고 현재와 미래의 고문을 막아내며 고문의 국가적, 사회적 치유에 좀 더 일찍 헌신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늦은 게 아니라 지금 시작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햐겠습니다. 김근태의 이름을 걸고 진실의 힘과 함께 고문이 없는 나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나라를 만드는 길에 매진하겠습니다. 그 출발은 바로 고문치유센터입니다. 진실의 힘과 김근태 인재근이 만나게 된 이유를 저는 고문의 치유와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제가 구한 첫 번체 화두의 대답입니다.

 

(중략)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진실의 힘 여러분, 그리고 동지, 동료 여러분, 감사합니다. 김근태가 영원한 민주주의자이듯, 저 인재근은 영원한 인권지킴이입니다. 인권상을 통해 케네디가문이 20세기 인권운동가 인재근에게 큰 힘이 되었듯이 진실의 힘은 인권정치인 인재근에게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비록 미약할지라도 제 모든 최선을 다해 진살의 힘의 좋은 친구로 남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근태와 저는 진실의 힘 인권상을 통해 고문에 대한 진실과 치유, 그리고 인권의 지킴과 증진이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명의 길은 함께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진실의 길, 인권의 길, 그리고 세상의 힘이 되는 길에 언제나 김근태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때론 왼발이 되고 때론 오른발이 될 때 진실의 힘도 영원하고 김근태도 영원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ijk.or.kr/rb/?m=bbs&bid=society&uid=58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622115012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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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센터2013.05.21 11:45

 1년 가까이 준비해 온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장소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 1번지 성가소비녀회 성재덕 관이 결정되었습니다.

 성가소비녀회(聖家小婢女會)는 1943년 12월 25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성재덕 베드로(Pierre SINGER, 1910-1992) 신부님에 의해 설립된 방인수도회입니다. 낮은 이들에게 내려오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항 강생의 삶을 이어가는 성가소비녀회의 사도 정신은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의 설립 정신과 잇닿아 있습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들어설 '성재덕 관'은 서울 성가소비녀회 내에 위치한 독립 3층 건물입니다. 2층은 역사자료실, 3층은 대강당이 있고,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주로 1층을 사용하게 됩니다.  

 

 

 

 아래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들어설 '성재덕 관' 1층 현관 전경입니다.

 아주 넓직합니다. 

 

 

 

아래는 아기자기한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사무실 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들어서 '성재덕 관' 1층에 넓은 강당 겸 회의실이 있어 다양한 치유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주위의 안온한 분위기와 포근한

치유환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이름없는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센터 건립을 위해

정성을 모아주셨습니다.

 

이제 오는 2013년 6월 26일 이곳에서 그 작은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목소리도 없이, 얼굴도 없이

 

이땅의 모든 고문피해자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후원자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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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2013.04.30 18:08

 

 

2012년 12월 10일(월)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공동대표 : 함세웅,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인재근)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의 밤 행사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이 땅의 수많은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포괄적 지원을 위해 김근태기념 치유센터가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의 밤> 

 

지난 한국의 현대사에서 고문은 일상적인 사건이었으나 그들의 희생으로 이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홀로 고통을 견디어 왔습니다. 김근태 님 역시 홀로 고통을 견디다 64세의 나이에 파킨슨병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날은 더 이상 또 다른 김근태들이 고통을 홀로 견디다 쓰러져 가지 않도록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사회 정의의 회복과 피해자 고통의 치유를 위해 약속하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1부 행사에서 인사말씀을 하시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 함세웅 신부>

 

 <1부 행사에서 인사말씀을 하시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 인재근 의원>

 

후원행사에는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장이신 함세웅 신부와 고 김근태 님의 부인이신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을 비롯해 과거 독재 정권의 억압에 저항하였거나, 그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국가폭력을 경험했던 희생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독재 정권에 저항한 이들을 지지하거나 희생자들을 지원하려는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 역사의 현장에서 각각 서있는 곳은 달랐지만 국가폭력의 부당함과 피해자의 치유에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남영동 1985' 영화에 출연한 박원상, 이경영 배우들과 정지영 감독도 참석하였습니다. 특히 "울릉도 1974" 책에서 소개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직접 책에 서명하여 후원 행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와 가족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소개한 '울릉도 1974'>

 

최창남 목사님의 사회로 1부 순서는 고문 희생자들을 위한 묵례로써 시작하였습니다. 함세웅 신부와 인재근 의원의 환영 메시지에 이어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김근태기념 치유센터의 필요성과 설립경과보고'를 통해 고문피해자의 고통의 내용과 포괄적인 치유시스템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현재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30만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으나, 국가가 양산한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구제법이나 치유센터도 없는 실정을 지적했습니다.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묵례를 하고 있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이경영·박원상 배우>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 경과 보고'을 하고 있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

 

2부는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다-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이란 제목의 연극 공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연극은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에서 기획, 초연되었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국 고문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세터로부터 한국의 고문피해자 사례를 추가하여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후원행사를 ㅜ이한 공연을 하는데에 합의했다고 합니다. 이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의 젊은 연극인들 9명이 모여 준비하였고 공연 후 재능 기부함으로써 치유센터 설립에 동참하였습니다.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다-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을 공연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젊은 연극인들>

 

김미화 방송인의 사회로 진행된 2부의 기부행사는 자선경매로 시작하였습니다. 함세웅 이사장님이 기부한 김서경 작가의 "촛불소녀", 효림스님의 서예작품인 "김남주 시인의 노래", 아산 조방원의 부채화를 비롯해 최창남 목사의 "노동의 새벽", "모두 여기 모여 있구나" 악보 원본,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책 등이 기증되었고 경매를 통해 모두 낙찰되었습니다. 이어서 진행된 giving pledge에서는 다양한 기부 서약들이 나왔는데 "후원회원 100명 모집"의 서약부터 "작곡한 노래의 저작권 기부", "무료법률상담", "매년 100만원씩 후원"과 함께 진행을 맡은 김미화 방송인은 진행비 일체를 기부하겠으며 더불어 다음 행사의 진행도 기부하겠다는 서약을 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손병희 가수의 선창으로 고 김근태 님이 즐겨 불렀다는 "사랑으로"를 함께 부르며 후원행사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2부 기부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김미화 방송인과 함세웅 신부>

 

<함세웅 신부가 기부하신 김서경 작가의 "촛불소녀"와 김미화 방송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기부하신 저자 유동우 님>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후원 약정서를 작성하시는 참석자>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후원행사를 통해 참석자들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나아진 인권 상황은 과거 억압정권에 저항하였던 이들의 희생의 결과이며 더 이상 국가폭력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 피해자를 치유하고 돌보아야 함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가혹한 신체적 고문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지만 고문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고문은 진행형인 것입니다. 고 김근태 님은 고문피해자이자 생존자였으며 이제는 치유의 길을 열고 있으니, 아직도 이 땅의 수많은 드러나지 않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를 통해 우리 사회에 널리 드러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동참할 것을 후원행사 참석자들은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고 사죄는 커녕 자신의 범죄행위를 애국으로 정당화하는 현실, 과거 독재정권의 권력자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부정의(injustice)는 피해자에게 극심한 분노를 일으키고 심리적 안정감을 해치기 때문에 정의(justice)의 실현은 피해자들의 치유를 위해 매우 중요한 요건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후원의 밤을 통해 인식된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피해자 고통에 대한 분노를, 이제는 치유를 위한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할 때 이 땅의 국가 폭력은 종식될 것입니다.

 

<고 김근태 님이 즐겨 불렀다는 "사랑으로"를 선창하는 손병희 가수>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올해 2013년 6월 26일(UN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에 개소할 예정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해 먼저 나선 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대표: 함세웅,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인재근

설립추진위원: 강창일, 김동규, 김민기, 김봉준, 김부겸, 김수정, 김영준, 김용익, 김형태,

                     문병호, 민병두, 박경욱, 박민규, 박순희, 박영선, 박재영, 석정각, 손창호,

                     송기복, 송기홍, 신인령, 신좌섭, 심재환, 양길승, 오영식, 유동우, 유시춘,

                     유영표, 유은혜, 유인태, 유종일, 유충희, 윤영전, 이낙연, 이명춘, 이부영,

                     이영문, 이왕준, 이재명, 이 철, 이 철(일), 임수경, 정강자, 정동영, 정성헌,

                     정인재, 정청래, 주영수, 차인현, 최규성, 천정배, 최인순, 최창남, 한명숙,

                     홍구, 함주명, 현승민, 황주영

집행위원: 남평오, 문국주, 염형국, 이상희, 임채도, 현창하, 이화영

 

정리: 이화영(인권의학연구소장)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국내 첫 고문피해자 전문 민간 치유센터로서

고문피해자들의 치유와 재활을 통해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001-808614

(예금주: 인권의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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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5공 반국가단체 조작사건 아람회, 오송회, 한울회 수기), 5공정치범명예회복회, 살림터, 1997년 5월>

 

 이 책의 공동저자인 박정석 선생님은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모진 고문과 함께 독방감옥 생활을 오래 경험하셨다.

 2011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수행한 '고문피해자 인권실태조사' 중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당시 박정석 선생님은 설문대상자로,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인터넷 신문기사 등을 조사하면서 아래의 기사를 발견하였다. 선생님이 걲으신 오송회 사건은 국어교사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실록 전북민주화운동사] 오송회 사건- 전두환정권 대표적 용공조작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이 '오송회(五松會)'라는 용공이적단체를 구성했다고 발표하여 교육계는 물론 지역주민과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들의 주요 혐의는 정부체제를 수시로 비판하면서 북한을 찬양하는 언행을 했고 오송회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는 것이었다.

 

증거물로 제시된 <병든 서울>의 작가 오장환은 일제 시대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일원으로 활동하다 48년 2월 월북한 시인이었다. ‘월북’과 ‘병든 서울’이 버무려지면서 이들의 ‘친북’ 성향과 반정부의식을 이미지화하는 데 극적 효과를 내는 소품으로서는 꽤 적절한 자료였던 셈이다.

 

문학작품에는 문외한이었던 당시 공안 관계자들은 시외버스 안내양의 신고로 입수한 이 시집의 불온성 여부에 대해 당시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교수는 시집의 몇몇 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1981년 ‘학림사건’, 부산의 ‘부림사건’, 대전의 ‘아람회 사건’, 공주의 ‘금강회사건’ 등 당시 전국적으로 대형 공안사건이 경쟁적으로 터지면서 관내에서도 뭔가 크게 터뜨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은밀한 내사가 시작되었다.

 

시집의 원 소유자이자 중심인물로 군산제일고 현직 국어교사이던 이광웅 선생이 포착되었다. 경찰은 이광웅 선생을 비롯한 현직 교사들이 1982년 4월 19일 군산제일고 뒷산에서 4.19 위령제를 지낸 사실에 주목했다. ‘건’을 터뜨리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경찰의 행동개시에 의해 덫에 걸린 희생자들이 속속 연행되었다.

 

이광웅, 박정석, 황윤태, 이옥렬, 전성원, 채규구, 강상기, 엄택수 교사 등 나중에 경찰의 명명에 의해 ‘오송회’의 멤버가 된 현직 교사들이 먼저 잡혀 들어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11월 2일에 불법 연행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된 11월 25일까지 24일 동안과 이후 경찰에 송치된 12월 13일까지 43일 동안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평소 사회주의를 동경해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좌경 의식화교육을 해온 ‘빨갱이’ 로 조작되었다.

 

몽둥이로 전신을 때리고 수십 차례 뺨을 때리는 것은 점잖은 조사에 속했다.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비행기고문에 이어 발가락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는 전기 고문 끝에 용공단체 오송회는 5공 공안정권의 명을 받아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군산제일고 뒷산에 있던 소나무 다섯그루 아래서 모임을 가졌다는 데 착안해 ‘오송회’라는 작명을 해준 경찰에서는 이들 교사 모임을 고정간첩단 정도로 크게 키우려고 했다.

 

<2006. 7. 3.자 새전북신문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박정석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엿다. 또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과 관련해 사건에 연루된 이들과, 아람회, 한울회 관련자들과 함께 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 시작된 박정석 선생님의 '시 읽기와 쓰기'

 

 박정석 선생님은 산책을 나와 혼자있는 시간에 새와 꽃이 아닌 현실의 주제와 사회적 시선에 대해 시를 쓴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 하루 생각을 정리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랍속에 두고 발표를 망설인다.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와 같은 발언으로 같은 동료 교사에 의해 신고 당했으며, 우리사회의 끝니자 않은 '빨갱이', '용공세력'의 낙인이 이 "시"들을 통해 발표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하셨다.

 

 1972년 모교인 익산 남성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절친인 이광웅 선생님과 함께 시읽기와 독서모임을 하였으나, 점차 사회에 대해 관심을 두고 『전환시대의 논리』, 『들어라 양키들아』와 같은 서적을 통해 유신에 대한 관점과 식민사관의 극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국어교사는 단지 역사인식에 궤를 같이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선생님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결성 사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도 받았으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법조 영욕의 60년] 오심의 역사-1. 오송회 사건

 

법원의 오심은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범죄행위다. 행정부나 입법부의 오판은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통해 바로잡을 기회라도 있지만, 사법부의 오심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다.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오욕과 억울함만 역사로 남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남북 대치를 빌미로 정권에 적대적인 진영의 인사들을 숙청하기 위해 조작된 용공 사건들의 실체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등을 악용한 것은 경찰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검찰 등 수사기관만이 아니었다.

 

당사자들과 국민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 것은 권력 앞에 무릎꿇고 법복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과 폭압에 눈감은 사법부와 판사들이었다.

 

사법부 스스로도 이런 역사의 과오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사법 조작사건에 '공범'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 법정에서 공개 사과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대표적인 '번복판결'이자 '사과 판결'이 ‘오송회 사건’ 재심이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전북 군산시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로 구성된 독서 모임 회원 9명이 4·19 기념행사와 5·18 추모제를 지냈다며 공안당국이 이들을 ‘용공분자’로 내몰면서 터졌다.

 

공안당국은 교사들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시를 낭송해 정치 현실을 비판했다며 이들의 모임인 오송회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했다. 5명의 교사가 소나무 아래에 모였다는 의미에서 ‘오송회’라고 칭했다.


 

이 사건으로 이광웅씨 등 교사 8명과 조성용 당시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이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경찰의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관련자들에게 1983년 12월 27일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피해자들 중 최고형인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이광웅 교사는 1987년 7월 사면조치로 4년 8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후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규명 운동’을 펼쳤다.

2007년 6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전형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규정, 법원에 소원을 청구해 2008년 11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무죄판결을 냈던 광주고법 형사1부(이한주 부장판사)는 “수사기록과 법정진술 등을 종합할 때 조씨 등에 대한 당시 검찰과 경찰의 조서는 고문·협박·회유에 의한 것으로 증거 능력이 없다. 조씨 등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과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읽고 암울한 정치적 현실을 비판했지만 북한의 정책과 사상을 동조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느꼈을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 고통에 대해 옛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이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 하겠다”고 법원의 이례적 반성을 보여줬다.

 

<2011. 7. 4.자 아시아투데이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97785>

 

지난해 겨울

 

 박정석 선생님은 2012년 12월 10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 참석하였다. 선생님은 겨울철에는 절대 외출금지의 척추혈관종을 앓고 있어서 절대 넘어지면 안되는 상황에서 지팡이를 짚고 목숨을 걸고 참석하였다고 한다. 척추혈관종으로 밝혀지기 전에 선생님은 척추암으로 진단을 받아 두번째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들었는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박정석 선생님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서 지난 시간을 마주하였다. 광주교도소에서 정신적으로 힘들 때 바륨 처방을 해준 이성희 선생님과 관련된 '울릉도 사건' 선생님들과도 인사할 수 있어서 좋았고, 송기복 선생님 등을 만날 수 있어서 더더욱 좋았다고 한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발표한 트라우마 치유 방안에 깊은 공감을 하고 선생님도 그런 치유의 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고 하셨다.

 

 

 

 

대공경찰은 사건 하나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사건의 제2인자 격인 박정석(朴正石)의 증언에 의하면,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들인 이들은 1982112, 전주 대공분실 지하실로 끌려가, 얼굴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흉터를 가진 신갑생이라는 고문기술자 등으로부터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체험을 겪는다.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을 무려 40일간이나 반복하여 받았다. 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때마다 고문의 강도는 높아갔다. 영향 받은 사람, 관계있는 사람을 대라는 고문에 문규현, 조성용의 이름이 신음처럼 튀어나왔고, 조성용은 그때부터 영문도 모르는 채 황소처럼 목이 매여 끌려나와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 합류하게 된다. 고문은 이들로 하여금 우선은 살고 봐야 하겠다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저들이 불러주는 각본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교사들은 난세를 사는 지식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놓고 고민했고
, 민주적인 교사, 깨어있는 교사이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또 산책을 좋아하여 햇빛 찬란한 날, 들과 산을 풋내를 띠고 돌아다녔다. 그 산책길에서 그들은 문학과 시와 세상을 이야기했다. 읽은 책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이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정열적인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길이라고 믿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슬그머니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되는 것이 그들이 눈에 비쳤다. 이는 국민의 저항의식을 두려워 한 반민주적, 반민중적 독재권력의 성격 때문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4.19날에 위령제라도 지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막걸리 10병과 오징어안주를 들고 학교뒷산에 올라갔다. 소나무 아래서 4.195.18 광주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식을 마치고 술 몇 잔씩 돌려 마시며 자연스럽게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를 토로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정의로웠는가를 놓고 토론하고 반성했다. 이때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일상적 삶과 가족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419 정신을 본받아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이광웅)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박정석)
약하고 용기 없이 살아 왔다.”(전성원)
한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온 비겁한 삶이었다.”(황윤태)
살아남을 권리도 없는 비겁한 놈이었다.”(이옥렬 

 

<2006. 7. 3.자 새전북신문 참조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

 

박정석 선생님은 지식인이라면, 교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이 말 때문에 사건에 엮인다는 것 용공조작이 가능한 것 자체가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분단상황의 비극이라고 하였다. 이어 박정석 선생님의 고통보다 아내의 고충의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피해자들인 나도 억울함이 컸지만 가족들도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내가 출소를 한 후 이사를 갔지만 내 자식들이 동네사람들에게 '빨갱이 자식' 소리를 들으며 상처를 받았고, 여동생들은 국가보안법에 걸려 일자리, 결혼상대를 못만나면서, 늦게까지 고생한 여동생들에 미안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힘들어 했다"고 하였다.

 

2011년 8월 서울고법 제32민사부(김명수 부장판사)는 "영장 없이 강제연행 돼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변호인이나 가족의 접견·면회를 금지당했고, 고문과 회유·협박으로 겁에 질린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고 하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이뤄졌고 피해자가 석방 후에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주변 인물이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예를 쓰고 살아야 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지금까지 선생님이 떨쳐보내지 못한 부채감이다. 박정석 선생님 자신도 피해망상, 공황장애로 정신건강의학과 처방약을 복용하고 있고, 지금은 불면증 약까지 더해졌다고 한다. 

 

 

 

박정석 선생님에게 시 한편을 인터뷰 말미에 부탁했고 선생님은 한참을 망설이셨다. 그러나 다음날 박정석 선생님은 연구소로 시를 보내주셨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요순시대

요순시절이란

백성이 불안과 분노를 느끼지 않고

과로하지 않으며 일주일에 이틀은 쉬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웃으며 술 한잔 나누는것

강물은 절로절로 흐르고

늙은 나무에 산새들이 고이 잠드는 것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30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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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센터2013.04.18 13:43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을 위한 제5차 집행위원회가 지난 3월 22일(금)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열렸습니다. 남평오, 문국주, 이화영, 임채도, 현창하 위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제5차 집행위원회에서는 지난 해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후원의 밤" 행사 보고와 현재 후원금 현황에 대한 보고에 이어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개소 준비를 위한 장소 검토안과 조직 인선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4월부터 기획팀과 치유팀 각각 1명씩 선임하여 지원 프로그램 점검과 상담, 홍보 등의 실무를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모금 기획 자문회의에서 대중홍보와 모금을 위한 컨셉과 온라인 모금방법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블로그를 활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 집행위회의는 4월19일(금)로 정하였습니다.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후원금 총액은 현재 216,651,336원이고 후원해주신 분은 141명입니다.
 
함께하고 있는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들은 70명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함세웅,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인재근 (이상 공동대표)
 
강창일, 김동규, 김민기, 김봉준, 김부겸, 김수정, 김영준, 김용익, 김형태, 문병호,

민병두, 박경욱, 박민규, 박순희, 박영선, 박재영, 석정각, 손창호, 송기복, 송기홍,

신인령, 신좌섭, 심재환, 양길승, 오영식, 유시춘, 유영표, 유은혜, 유인태, 유종일,

유충희, 유해우, 윤영전, 이낙연, 이명춘, 이부영, 이영문, 이왕준, 이재명, 이철,

이철(재일), 임수경, 정강자, 정동영, 정성헌, 정인재, 정청래, 주영수, 차인현,

최규성, 천정배, 최인순, 최창남, 한명숙, 한홍구, 함주명, 현승민, 황주영(이상 설립위원)

 
남평오, 문국주, 염형국, 이상희, 임채도, 현창하, 이화영 (이상 집행위원)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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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과스트레스2013.03.22 12:34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개인의 치료와 사회적 치유의 연관성

 

 

이 영 문(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김근태기념치유센터설립추진위원)

 

 

 

올해로 제주 4.3사건은 64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보면서, 반성하지 않는 오만한 부패권력들의 잔인함과 뻔뻔스러움에 우리들 가슴은 분노로 뒤엉켜 있습니다. 개인의 심리적 성향이 중심이지만, 불가항력적인 폭력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속에 내재된 분노와 두려움이 일상생활을 뒤덮게 됩니다.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 이영문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

 

 

집단
에 가해진 무차별적 폭력에 대해 개인이 겪게 되는 정신병리에 대한 규명은 나치하의 “강제
수용소 증후군”과 같은 연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한 연구보고서에도 비교적 최근의 진술과 치료과정,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증상의 발현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 개인의 기억을 지배한 외상이 고통스러움으로 인식되고,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에 대해 개인적 치료가 가진 한계를 사회적 치유과정속에 어떻게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첫째, 개인에 대한 충분한 치료가 이루어졌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상에 대한 스트레스반응이 극심하여 지속적으로 정신의학적 증상으로 남아 있는가에 대한 규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확한 정신의학적 진단이 이루어져야 하고, 희생자는 이를 적극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사회적 치유과정에 대한 이행이 가능합니다.
둘째, 사회적 치유과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광주민주화 항쟁과 비교했을 때, 제주 4.3사건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더 늦게, 더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 이영문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

 

 

개인의 치료와 사회적 치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일정한 궤도에 맞물려 돌아갑니다. 가령 개
인의 정신력이 강하다거나, 정신건강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성숙된 경우라 하더라도, 사회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개인은 다시 절망하고, 회복됨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해 정신병리적 측면에서는 퇴행의 경로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프리모 레비의 삶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빅터 프랭클과 더불어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대명사로 거론되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빅터 프랭틀은 의미치료(logo therapy)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의 생명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많은 강연도 하였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버려짐의 경험(Being rejected)을 극복했지만, 잊혀짐(Being forgotten)과 사회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음에 절망했습니다. 개인의 위대함, 생존에 대한 강한 집념, 불굴의 의지력 등의 찬사와 더불어 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로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이 정치적으로 타협되고, 진정으로 반성되지 않는 독일과 유대인 공동체의 삶의 방식은 레비를 좌절시켰습니다. 진정한 사회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거론하며 삶을 마감합니다.

 

 

억압된 분노는 내면의 흐르지 못한 상처가 되고 자신만이 아닌 타인들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삶을 잉태시킵니다. 생존자들이 겪는 이런 반응은 집단에도 적용되어 공동체의 삶을 모두 부정하게 됩니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본능적 욕동에 대한 억압은 벗어던지게 하고,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이상을 포기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불가항력적 폭력에 노출된 개인은 집단의 반응에 따라 개인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개인화가 상실된 집단에 대한 사회의 배제가 뒤따르게 될 때, 그 내부에 속한 개인의 무기력감은 더 커지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사회적 치유의 힘이 왜 개인을 치료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폭력으로 상실된 개인화를 회복시키는 힘이 바로 사회의 관심, 적절한 심리적 보상, 버림에 대한 반성, 잊음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선행되어야합니다.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 이영문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

 

 

국가 폭력에 의한 외상의 개인 치료는 사회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두운 정신과 진료
실에서 은밀하게 치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과정에 수반되는 고통의 기억에 대한 내용은 개인의 경험으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하지만, 가해집단에 의한 용서를 통해 이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고, 사회가 이를 지켜보고 담보한다는 약속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치유는 관심만으로도 큰 효과를 지닙니다.
다시금,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의 정신의학적 치유가 개인치료만이 아닌 집단에 대한 치유, 더 나아가 사회적 치유과정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 이영문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 이영문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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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영문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1992년 이영문교수를 포함한 5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보건법안 제정을 위해 정신보건연구회 모임을 시작하여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1996년 경기도 정신보건사업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수용시설에서 지역사회로”를 내세우며 정신장애자들의 탈수용화를 주장한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의‘정신장애인 인권증진을 위한 국가보고서’사업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정신장애인의 '당사자 운동'의 길을 확보하였다. 2008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군대내 자살자를 대상으로 한 심리부검위원회에서 활동하여 군대 내 '의문의 자살’이 가혹행위에 따른 '불가피한 자살’여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 이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19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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