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동석 선생, 얼마 전 그날이 온다’ LP판의 표지 모델을 만나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났던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이번 인터뷰 기사에서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모국에서의 유학생활과 수감생활 속에서 얻게 된 것들, 그리고 또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날이 온다’ LP판의 주인공까지.

 

 어느 것 하나 영화 같지 않은 것이 없는 이동석 선생님의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 1)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인터뷰 중인 이동석 선생.

 

Q.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면서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게 힘드셨어요?

(이동석) 제가 재일교포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랐잖아요. 근데 어렸을 때, 내가 한국사람 그리고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스스로 알거나 부모님이 알려줘서 아는 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너는 조선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건 눈이 다른 거예요.

 

Q. 집에서 내가 부모님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나 주변 일본 사람들을 통해서?

(이동석) 재일교포 대다수의 부모님이 여유가 없는 거예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가난해서 일본으로 일하러 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거의 없거든요. 그랬거든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재일교포는) 마이너스 이미지였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는 일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나는 일본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오랜 고민을 거쳐서 모국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었어요.

 

일본에서의 정체성 혼란과 모국에서의 유학생활

 

(사진 2)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두번째 공판을 마치고 일본에서 함께 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과 법원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출처: 한겨레)

Q. 그러한 배경 때문에 선생님께서 모국 유학을 선택하시게 되셨네요. 그럼 그때 당시의 유학생활의 추억, 그리고 모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 그때 우리나라에 유학을 오겠다는 건 불어를 배우기 위해 오는 건 아니었어요. (웃음) 저는 우리나라 말을 배우고 싶었고, 우리나라를 알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 그때 불어를 열심히 공부하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외대 연극회에 들어가서 같이 연극하는 거예요. 연극한다고 해서 제가 발음이 안 좋으니까 무대에 서서 연극하는 건 아니지만, 같이 연습하고 구경도 하고 끝나면 같이 술 마시고 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Q. 선생님이 그때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좋으셨나봐요?

(이동석) , 추억이에요. 근데 그때만 해도 재일교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그 시대에 한국에 유학 오는 재일교포라면 돈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집은 아주 가난했어요. 그때 대부분의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부자가 아닌데 눈에 띄는 몇몇 재일교포들 때문에 한국 학생들도 재일교포에 대해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연극회에서 친구들 만나 친구가 되면 서로 그런 인식이 없어지는 거예요.

 

Q. 인간 대 인간으로?

(이동석)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구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즐거웠고요. 제가 구속이 되고 난 후에도, 그리고 석방하고 일본에 갔다가 10년이 지나고 나서도 제가 연락하면 다들 만나주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일본에 가시고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이동석) 만나주는 거예요. 제가 80 8 15일에 석방이 되어서 시골에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외대에 갔어요. 저 멀리서 연극회 후배가 절 보면서 너무 반가워해주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후배가 내일 다른 사람들한테도 연락해서 종로에서 모임을 가지자고 그러더라고요. 휴대폰도 없는 그 시절에 만나러 갔더니 친한 친구들이 10명 가까이 왔더라고요.

 

Q. 선생님이 출소했다고 하니까 연극회 친구들이 바로 그렇게 모인 거예요?

(이동석) , 제가 어떤 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는지 다 알면서도 그렇게 모인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그 친구들이 저 때문에 다 고생을 해요. 왜냐하면, 제가 출소하고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거기 왔던 친구들이 끌려가서 저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조사당했어요. 이런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저를 만나줄 정도로 서로 친하게 지냈어요.

 

(사진 3) 지난 2018년 10월,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출처: 한국외대 홈페이지)

Q. 선생님에게는 73년도부터 75년도까지 2년 반 정도 한국 친구들과의 유학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 같아요.

(이동석) ! 재미있었고, 한국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죠. 전공인 불어과 친구들보다는 연극회 친구들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이 있죠. 아무래도 매일 만나서 연습하고 술 먹고 하니까. (웃음) 그래서 구속된 후에도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감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 유학 온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고요. 한국에 오면서 제가 얻은 게 더 많다고 생각해요.

 

Q. 어떤 걸 얻으셨다고 생각하세요?

(이동석) 우선 우리나라라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우리나라 말을 배울 수 있었고요. 일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즐거움, 뭔가 해방감 같은 걸 느꼈어요. 물론 한국 내에서도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있지만, ‘, 우리나라구나라는 걸 느꼈죠.

 

Q.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으로 유학을 오실 건가요?

(이동석) , 그럼요. 제가 석방되고 일본에 가서도 얼마나 우리나라에 오고 싶었는데요!

  

'그날이온다' LP판에 숨겨진 뒷 이야기

(사진 4) 인터뷰 도중 '그날이온다'CD를 들고 있는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오늘 모국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느껴지네요. (‘그날이 온다’ CD를 가리키며)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이 이 CD와 관련된 어떤 일화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동석) 이것도 김치식당(첫 번째 인터뷰 내용 참고)을 만난 것처럼 신기한 이야기예요. 제가 보안사에 잡혀 있다가 75년도 12 30일 날 서울구치소에 가게 되거든요. 가니까 겨울이잖아요. 그해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요. 서울 구치소에 가니까 너무 추운 거예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구치소에 있으면서 옷에 이가 생기는데, 속옷도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빨아서 입어요. 빨아도 마르지도 않고, 어쩔 수 없이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속옷을 입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있는데 제가 그때 1 옥사에 있었는데요. 그게 원래는 소년수들이 있는 공간이었었거든요. 근데 그때 워낙 반공법이나 긴급조치 관련 수감자들이 많아지면서 방이 모자라서 소년수 방까지 오게 된 거예요. 그때 제가 1옥사 상, 2층의 가운데 정도에 있었어요. 그때 1옥사에 긴급조치로 들어와 있던 외대 학생 한 명이 있었더요. 그때 제가 외대를 다녔기 때문에 그 친구한테는 제가 선배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친구가 제가 아무것도 없는 걸 알고는 칫솔이나 휴지 같은 걸 나한테 주는 거예요.

 

Q. 방이 달랐을 텐데, 어떻게 전달해준 거예요?

(이동석) 이것도 참 고마워요. 그 학생이 아침에 세수하러 갈 때, 몰래 주는 거예요. 저는 독방에 있었기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수할 수 있는 물을 조금 방으로 갔다 줬어요. 다른 수감자들은 다 같이 세수를 할 수는 없고 수감자가 직접 물을 떠 와서 자기 방에서 세수를 했거든요. 이때 그 친구가 아침에 세숫물을 가지러 갈 때 저한테 몰래 던져줄 때도 있고, 아니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나갈 때 시켜서 저한테 전달해주곤 했어요.

 

Q. 이것도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 정말 고마운 분이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나 고마운데요. 제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고, 어렵고 할 때니까. 그래서 제가 고마워서 한 번은 찾아서 그때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재심을 시작하면 한국을 왔다 갔다 하잖아요.

 

Q.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선생님이 그 후배를 찾고 싶으셨던 거죠?

(이동석) , 일본에 있을 때도 항상 머릿속에 있었죠.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재심할 때는 2 3, 3 4일 왔다가 가니까 찾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근데 외대에 재입학하니까 시간이 생겼잖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대수라는 분을 만났거든요. 그분을 알게 되어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당시에 긴급조치로 구속된 외대생은 아마 그 친구일 거라고 하는 거예요.

 

Q. , 한국에 계시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만나게 된 이대수라는 분이 그 외대생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동석) !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얼마 후에 그 사람이 일하고 있는 사당으로 이대수 씨랑 같이 가서 만났어요. 가서 보니까 40년이 지났는데도 약간 그때의 느낌이 있더라고요. 근데 그 친구도 저를 기억하고 있고요. 그래서 몇십 년 만에 만나서 다 같이 맥주를 한 잔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종종 만나고 있어요.

 

(사진 5) 레코드 ‘그날이온다’는 정치범이 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이  협동하여 전개했던 운동이 만들어 낸 것이다. 왼쪽은 70년대 출판된 LP판이며, 오른쪽은 최근에 다시  출판된 CD입니다. (세 명 중 제일 왼쪽에서 웃고 있는 수감자가 바로 이동석 선생님의 한국외대 후배다) 

 

Q. 신기하네요! 근데 선생님, 그 외대 학생분이랑 이 LP판이랑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예요?

(이동석) 그게 알고 보니까 이 LP판에 찍힌 사진의 주인공이 그 외대생이더라고요.  LP판은 70년 후반인가 그때 나왔거든요. 근데 재심이랑 새롭게 시작하니까 이걸 제작했던 사람이 LP가 아니라 CD로 다시 만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일본에서 한국에 올 때 10장 정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재판에서 만나는 분들이랑 몇 분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리고 딱 1장이 남았어요. 근데 작년에 그 외대 후배를 만나면서 보니까 이 CD에 나온 이 사람이랑 닮은 거예요. 그래서 혹시 이 CD의 젊은 학생이 지금 그 후배가 아닌가 해서 다음에 만날 때 제가 이 CD를 가져갔어요. 만나서 제가 이 CD를 책상에 올려놓자마자 그 친구가 CD의 사진을 보더니 바로 ! 이거 난데!’ 그러는 거예요. 그 친구도 이제 와서야 자기가 이런 CD의 표지에 실려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Q. 그럼 그분도 일본에서 출판된 LP판에 자신의 사진이 있다는 걸 몰랐었던 거예요?

(이동석) , 몰랐죠. 근데 이 사진을 보면 웃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보고 웃어줬다는 거예요. 그 후배가. 지금 긴급조치로 잡혀서 이게 지금 법원 앞인데. (웃음) 근데 이 사진이 어떻게 찍혔냐면, 당시 일본 구원회 사람들은 면회가 안되잖아요. 그래서 법원 앞에서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면 그 순간 몰래 찍는 거예요. 걸리면 사진을 빼앗기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 사진을 찍은 사람도 누가 누군지 모르고 찍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 버스에서 내려서 나오는 사람 보니까 일반 수감자가 아니라 정치범인 것 같아서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동석 선생님의 꿈 

 

Q.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생님은 김치식당도 그렇고 이 CD 이야기도 그렇고 참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네요. 정말 신기하네요. 그럼 이제 선생님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남은 인생 동안 선생님의 꿈이 무엇일까요?

(이동석) 제가 재심을 통해서 무죄를 받았잖아요. 무죄받고 국가에서 보상금을 받고 난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은 제가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국가가 과거에 잘못했지만, 계속해서 그것만 붙잡고 살 수는 없는 거예요. 보상금이 크든 작든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해서 유의미한 인생을 사는가 하는 문제는 제가 결정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찾기 위해서 지금 제가 한국에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의 문제죠. 맨날 친구 만나서 술 먹고, 늦잠 자고, 여행 다니고 할 수만은 없는 거예요. 산다는 것의 목적.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 이번 9월까지는 한국에서 살기로 정했어요. 그동안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찾는 게 제 꿈입니다.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를 만들어도 몇 편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났던 모국 유학.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국에서의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이동석 선생님은 그 속에서 인생의 귀한 의미들을 이미 발견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웃음과 감동을 잃지 않고 계셨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과연 인간에게 모국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곳곳에 녹아있는 따뜻한 이야기들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오는 9월까지 한국에서 인생의 마지막 꿈을 찾을 이동석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너무해도 너무합니다]

 

지난 2월, ‘재일동포 간첩사건’으로 사형을 받고 14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던 故 김병주 선생님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그날 이 재판을 직접 참관하고 저는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습니다. 재판부의 선고를 듣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2021년 재심에서 징역 4년형이 인정되었을까요. 아래 기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5498598&code=61121111&cp=nv&fbclid=IwAR0FbrwwDmAaGJPFc22iESnKYZoli4GcGRD3-dF7livXws4O7gsWh8OmyEo

 

1984년 법정서 한 “예” 한마디에 발목… 재심서 징역 4년

1980년대 ‘재일동포 간첩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재일동포가 재심에서도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불법 구금해 조사한

news.kmib.co.kr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이름, 김병진]

 

김병진 선생님은 1955년 고베에서 태어난 재일동포입니다.

당시 일본에서의 어린 시절은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그러나 김병진 선생님은 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에 김병진 선생님은 "재일동포들을 위한 모국어 교육을 위해 국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으로 최현배 선생의 학맥을 이어온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리던 모국에서의 유학생활.

 

​그러나 모국은 그를 환영해주기는커녕, 고문으로 간첩으로 만들었습니다. 1983년 갑자기 나타난 보안사,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수사관들에 의해 그는 강제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모국에서 그는 하루아침에 간첩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일본.

​청년 시절, 모국을 찾은 청년을 간첩으로 만들었던 한국.

 

​더 늦기 전에 기억해야 할 이름, 김병진 선생님.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06365&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fbclid=IwAR1lZfoey5umbc3nhz2OsAf0Y3YZqPfMvKjh4wnsLeFLK9UkPv-F0_ZZwrM

[2013년에도 국정원의 간첩 조작은 존재했다]

 

간첩 조작과 같은 공작은 과거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작은 2013년에도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 북한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으로 내몰려 7년 동안 재판을 받아 왔던 홍강철 씨(47)가 마침내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홍강철 씨는 2013년 8월 탈북해 2013년 9월부터 2014년 1월까지 국가정보원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에서 감금돼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검찰 수사를 거쳐 2014년 3월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다시는 이런 국가에 의한 폭력과 공작은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늦었지만 7년 동안 재판을 받으며 고생했던 홍강철 씨의 무죄를 축하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2251701001&code=940301&fbclid=IwAR1manSKn21uedg1G1Q7yjoByThn5loypPNpdhWuQZbaUNR_nSGslGTFm5c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화가 납니다]

 

피해자의 이름과 얼굴은 버젓이 공개하면서

왜 가해자의 얼굴은커녕 이름도 ‘A’씨와 ‘B’씨로 가려주나요?

 

8년 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는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6개월 동안 폭행과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유가려 씨를 협박하고 폭행한 국정원 조사관에 대한 공판이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에 대한 이름은 그냥 조사관 A, B 씨입니까?

 

피해자의 인권은 온데간데없고, 이들의 이름은 국가안보라며 여전히 공개를 거부하는 국정원, 행안부, 그리고 그걸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언론을 볼 때마다 화가 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news.tf.co.kr/read/life/1849139.htm?fbclid=IwAR3Y4SMDx54it9jGKXoFtShBW7tT9xL_DjC0bR2Vwz9MBg7HmV6t0JUr7E0

[오마이뉴스] 존경하는 판사님들, 역사 공부 하셔야 합니다

(보도일자: 2021.01.29)

 

지난 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519호에서 재일동포 고 김병주 선생에 대한 1심 선고가 열렸습니다. 

이날 재판부는 국가보안법 관련 40건의 무죄 이유를 증거 부족으로 밝힌 반면, 유죄에 해당하는 2가지 경우는 84년 4월 3차 공판 당시 김병주 피고인과 피고인의 변호인이 재판 과정에서 심문 내용을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재판부는 지난 1984년 당시 재판이 흠이 있다고 판단하여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2021년 재심 재판에서 다시 잘못된 84년 재판의 법정 증언을 근거로 이미 고인이 된 피고에게 징역 4년형을 내렸습니다.

 

 

해당기사 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15570

여보 미안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한테 사과할게.

 

지난 시간 송기복 선생님께서 어떻게 기적처럼 황인철 변호사를 만났는지 첫 번째 인터뷰를 전해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송기복 선생님의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Q. 서로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오히려 황인철 변호사가 선생님께 했던 말이?
(송기복) 황인철 변호사가 저한테 했던 말이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선생님 잘못 아니에요.”였어요. 그리고 저보고 선생님은 비록 여기에 계셔도 행복하세요.” 이러는 거에요.

  

Q. 황인철 변호사가 왜 그렇게 이야기 하셨죠?
(송기복) 선생님 남편 같은 남편이 없다고. 그러면서 저를 위로해주셨어요. 선생님 남편 때문에 자기가 많이 배운다고 하면서요.

 

(사진) 인터뷰 중인 송기복 선생

Q. 선생님 남편을 보면서요? 선생님 남편분께서 원래 군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송기복) 공군이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 헬기 조종사였어요. 그런데 제 사건이 터지고 바로 제대를 했죠. 그리고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는 매일 면회를 왔어요. 저를 조금이라도 운동시키기 위해서 매일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광주로 이감하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광주까지 면회를 왔었구요.

 

Q. 정말 로맨티스트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남편분께서 선생님께 사과를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송기복) 우리 남편이 나한테 무릎을 꿇은 적이 있어요. 제가 집행유예로 출소했거든요. 원래 집행유예로 나올 때는 그 날 저녁에 나온대요. 그러니까 12 24일날 저희 남편이 저를 기다렸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때 교도소 안에 제 제자가 있었어요. 제가 이제 나가려고 짐을 싸놓고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오더니 선생님, 오늘 못 나가신데요.’ 하는 거에요. 뭐가 내려와야 하는데 안 내려왔다는 거에요. 저는 그러려니 했는데, 바깥에서 우리 남편은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남편한테 들었는데, 그때 남편이 밖에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요.

 

Q.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니까.
(송기복) 이유도 없이 그렇게 되니까. 그때 저희 남편이 제가 고문을 받고 교도소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제가 나오면 저를 입원시키려고 병원 예약을 했었대요. 그게 12 24일이었어요. 근데 제가 안 나오니까 우리 올케 말에 따르면 우리 남편 얼굴이 창백해지더라는 거에요. 아마 저희 남편인 이게 안되는가보다, 다 쇼였나보다라고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제가 크리스마스 날 오전 11시경인가 출소하게 된 거에요. 그런 전례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나와서 다행이 남편이랑 예약한 그 병원으로 갔어요. 그때 우리 남편이 병원에다 저를 데려다 놓고는 저한테 큰 절을 하면서 여보 미안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한테 사과할께. 우리 남편이 저한테 그러는 거에요. 저는 그걸 보고 놀라면서 남편의 그 말을 받아들이질 못했어요. 근데 나는 왜 그걸 진심으로 못 받아들였는지. 지금 내가 미안해요. 그때 저는 남편의 그 모습조차도 위선자 같은 거에요.

 

Q. 오히려 의심이 들고?
(송기복) , 제가 남자들은 이중인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안기부에서 저를 그렇게 때리고 한 그 사람이 자기 자식이 아프다고 하니까 전화로 자기 와이프한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안기부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하는 저 손으로 어떻게 자기 자식들은 저렇게 사랑해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자들은 다 저런가?’하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그런 남자를 안기부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Q. 안기부에서 선생님을 때리고 고문하던 남자들이 자기 자식들한테 하는 걸 보면서요?
(송기복) 그럼요. 자기 자식들한테는 아니 세상에 없는 천사처럼 하는거에요. 자상한 아버지. 너무 훌륭한 남편인 거에요. 누가 자기 남편이 안기부 같은 곳에 가서 사람을 두드려패고 강제로 그런다는 걸 그 사람들은 믿을까? 그래서 제가 남편이 병원에서 저한테 큰 절을 하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제가 의심을 하고 믿지를 못했던 거에요. 그래서 그게 지금도 너무 미안해요.

 

Q. 그런 일이 있으셨구나. 근데 남편분이 정말 멋지신 분이네요.
(송기복) 그리고 저희 남편이 저에게 종종 비록 우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런 사건을 당하게 되었지만, 얼마나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느냐면서 그랬거든요. 그럼 그때 저는 나는 싫어, 나는 좋은 분들 안 만나도 되니까 그냥 그런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하면, 저희 남편이 나를 끌어안아주면서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서 위로해주고 그랬어요.

 

(사진)  화창한 봄날 연구소에 피어오른 예쁜 할미꽃을 찍고 있는 송기복 선생 

Q. 맞네요. 황인철 변호사님도 뵙고. 그리고 선생님께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함세웅 신부님이시죠? 함세웅 신부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송기복) 제가 함 신부님을 한강성당에 계실 때 처음 만났거든요. 그때 함 신부님이 오라고 하셔서 제가 갔거든요. 그때 제가 신부님을 처음 본거에요. 인사를 하러 갔는데 내가, 아이고 정말 내가 미안해. 신부님한테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래야 하는데, 제가 첫 만남에 신부님 왜 이렇게 조그만하세요?’ 그런 거에요. (웃음) 그래서 제가 그 말 하고 나서 저희 남편한테 혼났었어요. (웃음)

 

Q. 함 신부님을 처음 보자마자 선생님이 하신 말이 에게 이렇게 작으세요?’였어요? (웃음)
(송기복) , 나는 신부는 엄청 크게 봤거든.

 

Q. 이렇게 솔직하신 게 선생님의 매력시인 것 같아요. 그럼 저희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에요?
(송기복) 함 신부님 때문에 알았지 또. 함 신부님이 오라 그러면 오고, 가라 그러면 가야 되고 그런거지. (웃음)

 

Q. 연구소에 큰 금액을 후원하셨던데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후원하셨던 거에요? 쉽지 않은 결정이잖아요.
(송기복) 아니, 내가 한 게 아니야. 우리 송기홍 남동생이 했어. 멋쟁이야.

 

Q. 그때 동생이 후원을 결정했을 때,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동참하신 거에요?
(송기복) 동생이 멋지다고 생각했지. 제가 나중에 함 신부님한테 (동생) 5천만원만 해도 되는데 쟤 왜 저러는지 몰라 그랬죠. (웃음) 신부님은 그때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나는 미안해, 더 잘하고 싶고 한데. 아마 다 똑 같은 마음일꺼야. 이렇게 우리처럼 당하고 무죄를 받으면, 해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으리라고 생각해. 정말로.

 

Q. 그럼 선생님 혹시 연구소에 바라는 점은 없으세요? 예를 들어 이런 일을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든지.
(송기복) 크게 내가 바라지 않아도 잘할 거라고 나는 생각을 해. 우리처럼 이렇게 당한 사람들은 바라는 것도 생각을 못 할 거에요. 그냥 다 잘되기만을 바라지.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고 나는 고마운 게 나는 아마 함 신부님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꺼야. 우리 이화영 소장 너무 고마운게 누가 우리같은 사람 돌아보고 하려고 하겠어요. 밥그릇 차려줘도 안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진) 연구소에 봄을 알려주는 라일락 앞에서 송기복 선생과 박민중 활동가

Q. 연구소가 더 잘 되도록 앞으로 더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꿈이 뭘까요? 저는 선생님이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꿈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송기복) , 로또를 살까말까 고민중이야! (한바탕 웃음)

 

Q. 선생님 만약에 로또를 사서 10억이 생겼어요. 뭐하고 싶으세요?
(송기복) 나는 가끔가다 로또에 당첨되면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에게 커피 한 잔이고, 밥 한 그릇이고 다 사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우리 남편 형제분들. 그리고 우리 형제들. 그리고 우리 사건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분들. 그 분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 밥 한끼라도 사드리고 싶어.

 

Q. 그럼 송기복 선생님의 꿈은 선생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혹시라도 선생님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려웠던 분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게 선생님의 꿈이세요?
(송기복) 아이고 그럼요!

 

송기복 선생님과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기적같이 황인철 변호사를 만났던 이야기, 항상 그 자리에서 선생님 곁을 지켜주셨던 남편 이야기, 그리고 선생님의 꿈까지. 인터뷰하는 동안 오히려 제가 행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꼭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송기복 선생님, 꼭 로또 당첨되세요^^ 매일매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연구소는 선생님의 일상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김승효 선생이 극심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지난 12 26일 세상을 떠나 영면하였다. 고인은 재일동포 2세로 1950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1969년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 민족적 정체성을 찾고 한국의 문화를 배우고자 1973년 조국으로 유학 왔다. 김승효 선생은 1974년 서울대 교양과정부에 입학하자마자 같은해 5월 중앙정보부에 불법연행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조작됐다.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2년이 선고됐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유신선포 후 수많은 재일동포 유학생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일본에서 민족적 차별로 인해 고통받는 와중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조국의 언어, 역사, 문학 등을 배우기 위해 조국으로 유학 온 강제연행·구금하고 고문하여 간첩으로 조작했다. 이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까지 이어졌다. 민단과 조총련이 함께 거주하는 일본 상황상 군사독재정권에게 재일동포는 간첩으로 조작하기 쉬운 대상일 뿐이었다.

 

 김승효 선생은 6년의 복역생활을 마치고 1981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지만, 이미 감옥에서부터 고문에 의한 조현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교도소에서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하고 증세가 악화되어 석방 이후에도 20년 이상을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평생을 조현병으로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사진) 김승효 선생  (1950.4.16-2020.12.26). 강종헌 (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 ) 제공

김승효 선생은 2018 8 31 44년 만에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간첩 누명을 벗고, 무죄 사실을 알고 기뻐했으나, 고문후유증과 조국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인의 가족, 변호인인 장경욱 변호사, 신윤경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고인이 고문에 의해 조현병이 발생·악화하였다는 것을 밝히기 원했다. 이를 위해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함께 노력했다.

 

 2019 8 30일 ~ 9 1일에 인권의학연구소 치유지원팀장 손창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은성 사무국장은 장경욱, 신윤경 변호사와 함께 김승효 선생 자택을 방문하여, 고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면담했다. 그리고 같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인 강종헌과 유영수가 면담을 위해 통역했다. 그해 8 31일은 고인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지 만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사진)  통역하는 강종헌 선생(좌)과  김승효 선생(우)  (2019.8.30, 인권의학연구소 손창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 면담 중)

면담 중에 김승효 선생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계속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교우관계도 원만하고 리더십도 좋은 편이라고 증언했다. 1973년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말릴 수 없었다고했다. 고인의 통역을 맞은 강종헌은 아래와 같이 통역한 소회를 밝히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도 그런 가혹수사를 받은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본인의 고통스러워하는 진술, 가족들의 애타게 호소하시는 그런 내용,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가족이나 어느 개인이나, 국가로부터 받은 엄청난 국가범죄인데. 거기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무력하구나. 그 당시에 이제 겨우 재심을 통해서 무죄가 밝혀지고, 이제 민사배상소송 들어가 있는데, (슬픔을 억누르며) ‘받은 상처가 치유가 안 되는구나’, 특히 김승효 선생의 같은 경우 인간을 완전 파괴한 것 아닙니까? 그 책임을 누가 지겠냐는 거예요? 치유될 수 없는 거예요.”

  

고인과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같은 재일동포유학생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로서 고인의 가족과 친구의 통역을 맞은 유영수도 아래와 같이 소회를 밝혔다.

 

김승효같이 본인이 정신적으로 저런 상태이니까 (한국에) 못 가잖아요. 형제간이 없었으면 완전 매장된 거 아닙니까? 그리고 또 저와 같이 석방된 OOO라는 애는 히로시마 대학을 나왔는데 정신이상이 되었어요. 나와 같이 석방되어 나와서 공항까지 같이 갔는데. 근데 나와서 결국은 자살해 버렸잖아요. 정신병원에 다니다가. 그래서 과거에 억울하게 잡히고 고생한 비극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 재심을 안 해도 구해주는 대책을, 앞으로 그런 비극이 안 생기도록 교훈 삼아 그 대책을 세워줬으면 좋겠어요.”

 

인권의학연구소 치유지원팀장 손창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3일 동안의 면담결과를 바탕으로 고문피해에 대한 정신건강의학과적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법원에 제출했고, 2020 1 16일 국가손해배상소송 공판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김승효 선생은 2021 1 13일 국가손해배상소송 선고를 보름 남짓 앞두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사진) 김승효 선생과 면담을 마치고 담소 (왼쪽부터 고인의 형 김승홍, 강종헌, 고 김승효, 이철, 손창호, 신윤경)

김승효 선생의 재심 민사재판을 위해 법원에 제출했던 ‘고문피해에 대한 정신건강의학과적 조사보고서’ 의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고문과 수감생활이 조현병 발병에 미친 영향>

김승효씨의 경우 아래와 같은 근거로 고문과 수감생활중 스트레스가 조현병의 발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부모와 형제 중 다른 조현병 환자는 없다는 점에서 유전적 소인은 크게 없다.

2) 20여 일간의 극심한 고문과 그 이후 이어진 수감생활은 그 고통의 강도 및 기간으로 보아 정신신경계에 상당한 후유증을 남길 정도로 극심하였다.

3) 고문을 겪고 난 이후에 발병하였다는 점에서 시간적 개연성이 분명하다.

4) 고문기간 중 잦은 구타를 받으면서 조현병의 유발요인이라고 알려진 두부외상을 많이 당하였다.

5) 발병시기가 20대 중반 이후로 보여지는 바, 일반적인 조현병 환자들에 비해 다소 늦은 발병연령도 내재된 조현병이 발현되는 경우라기보다는 외부 스트레스에 의해 발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6) 현재에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수 있다는 공포감에 시달리고 이와 관련된 피해망상적 사고가 보이는 등 증상 자체로 보아서도 고문의 영향이 발병에 지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문과 수감생활이 조현병의 악화에 미친 영향>

 

대부분의 신체적 정신적 질환과 마찬가지로 조현병도 조기에 적절한 치료적 개입을 한다면 이후 임상경과도 좋다. 김승효씨의 경우 1977 5월 교도소기록에도 이미 심각한 정신질환의 증상이 분명히 관찰되었으며 교도소에서도 이를 인지한 상태였다. 1980년초에는 완전히 폐인이 된 상태로 의사소통도 전혀 안 될 정도임에도 교도소측에서 의도적으로 방치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 그리고 그 이후의 경과를 살펴볼 때 수감생활중 의도적 방치와 학대가 조현병의 악화에 미친 영향은 명백하다.

 

<결론>

김승효씨는 현재 타인에게 완전 의존을 해야 하는 중증의 조현병 상태이다. 또한 이러한 조현병의 발병과 악화는 1974년에 겪은 고문 및 그 이후 1981년까지의 수감 중 이루어진 학대와 방치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판단된다.

 

(사진) 김승효 선생과 면담을 마치고 담소 (왼쪽부터 장경욱 변호사, 유영수, 고인의 일본인 친구)

재일양심수동우회 이철 선생은 고인은 국가폭력피해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든 고문 등 국가폭력피해자들은 고문후유증과 트라우마로 크고 작은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고인이 된 김승효 선생이 하늘에서는 평안을 누리도록 그의 명복을 기원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까지도 정보기구의 민간인 사찰과 유우성과 같은 간첩조작 사건이 일어났다. 재발 방지와 수사정보기관에 대한 국회와 국민의 감시와 통제 등을 위한 법제도적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는 고문 등 국가폭력피해자의 삶의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현재 국회에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구제·지원을 위한 법률’(인재근 의원 대표 발의)이 계류 중이다. 하루빨리 통과되어 고문 등 국가폭력피해자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지원이 제공되어 이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경감시키고 이들의 삶에 지지와 존경을 표해야 한다.

 

[관련기사]

한겨레(2020.12.29.) 장경욱, “하늘나라에서는 꼭 아름다운 조국 땅 만끽하시기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6427.html#csidx4871c4fe2d8ca1a8ca5d7d774d1039b

 

 

뉴스타파(2020.12.31.) 최승호, 우리 시대의 어둠의 증언자 김승효, 스러지다 https://newstapa.org/article/EJtyC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어느덧 날씨가 제법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를 후원해주시고 항상 응원해주시는 분들 모두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연구소는 앞으로 다양한 후원회원과 연구소의 존재 이유가 되는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몇몇 피해생존자들은 다양한 언론 인터뷰의 경험이 있지만, 대부분의 인터뷰가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저희 연구소에서는 그분들의 오늘 일상과 힘든 과거 속에서도 따뜻한 사람의 손길이 다가왔던 그 기억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런 취지로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는 1980년대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으로 가족 모두가 고생을 하셨고, 지난 2009년 무죄를 받으신 송기복 선생님입니다. 송기복 선생님 가족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설립을 준비할 때 무죄 보상금으로 고액을 후원해주셨습니다. 이 후원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데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소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송기복 선생님의 첫 번째 인터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황인철 변호사와의 기억을 들려주는 송기복 선생님

Q. 지난해 국민 모두가 코로나로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는데요, 혹시 선생님은 지난해 어떻게 보내셨나요?

(송기복) 많은 분들이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셨을 텐데, 저는 우리 딸이 뜻하지 않게 아파서 함께 동고동락을 했죠. 힘들지만 그래도 혼자서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더라고요. 그리고 딸이 병원에 3개월 정도 입원을 했었는데, 그때는 딸 면회도 못하고 음식을 해서 전달하고 그렇게 지냈었어요.

 

Q. 선생님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송기복) 최근에 별로 하는 건 없고. 이제는 남은 인생을 좀, 시간적으로 따져보니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최근에 한 분을 생각하면서 목도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도 여자분인데요. 그분은 저처럼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남편 때문에 고생을 하셨어요. 그리고 연세도 저보다 더 있으시고요. 근데 감옥 밖에서 혼자서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겠어요? 그걸 생각해보니까 괜히 내가 그분에게 미안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건 제가 여자이고 엄마이기 때문에 느끼는 거예요. 나는 교도소 안에 있었지만, 그분은 밖에서. 교도소 밖에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내가 느끼면서 목도리를 만들었어요.

 

Q. 선생님은 공감능력이 탁월하신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 관련 기사를 찾다가 선생님께서 본인은 축복받은 간첩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더라고요. (웃음) 만약에 선생님께서 선생님께 도움을 주셨던 분들 중에서 귀한 저녁 만찬에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다면, 어떤 분을 초대하고 싶으세요?

(송기복) 많죠. 돌아가신 분 중에서 한 분이 있다면 황인철 변호사님예요.

 

(사진)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1979년 김재규 사건, 89년 임수경방북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압의 시대 수많은 시국사건 때마다 약자 편에 섰던 故 황인철 변호사.

Q. 황인철 변호사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세요?

(송기복) 우리 사건을 변호하셨던 변호사님이세요. 그것도 기적이에요. 그때 황인철 변호사를 만난 건 007 작전이에요. 나는 1980 3 2일 날 (제가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서 수업하다가 잡혀간 거예요. 그리고 일주일 만에 왔는데 그 이튿날 또 잡혀가서 그 이후로부터 간첩이 된 거죠

 저는 황인철 변호사를 교도소 안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온 이대생들한테 처음 들었어요. 그때는 교도소 안에서 5-10분인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곤 했어요. 근데 그때 저는 너무 고문을 많이 받아서 걷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고. 그러면 (운동 시간에) 사람들이 제 앞으로 지나치면서 뛰어요. 그때 저는 죄인처럼 얼굴도 못 들고 그냥 앉아 있는 거죠. 그런데 여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하루는 아줌마가 선생님이에요?”하고, 다음에는 아줌마가 송기복이에요?”, 그리고 또 다음에는 아줌마가 율리아예요?” 이러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시간적으로 한 달 정도를 두고 그렇게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들이에요. 저는 율리아, 송기복, 선생님하니까 대꾸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죠. 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마치 구령처럼 그러는데 내가 황인철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들었어요. 학생들이 아줌마를 만나고 싶은 변호사가 있어요하고 내 앞을 지나가고, 또 조금 있다가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변호사가 있어요하고 지나가고, 그리고 황인철, 황인철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앉아서 황인철이 누구지?’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황인철 변호사를 만난 건 007 작전이에요.

 

Q. 그래서 언제, 어떻게 황인철 변호사를 만나신 거예요?

(송기복) 저는 황인철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갈 때마다 황인철, 황인철 외치면서 지나갔어요. 저는 그때 볼펜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럼 손톱으로, 밥풀로 벽에다가 그 이름을 적어두는 거예요, 혹시 잊어먹을까 봐. 그렇게 기억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저희 남편이 매일 면회를 왔어요. 딱 하루를 빼고 매일 면회를 왔는데요. 그 하루는 저희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어요. 저희 가족이 모두 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그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남자가 저희 남편밖에 없었거든요.

 

Q. 그럼 황인철 변호사는 선생님 남편분을 통해서 만나신 건가요?

(송기복) 전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저희 남편이 면회를 매일 왔어요. 저희 남편은 저를 조금이라도 운동을 시키려고 매일 왔다고 그래요. 여하튼 그렇게 면회를 오면 교도관이 면회 관련 기록을 하잖아요? 근데 그때 저는 이미 고문을 많이 당하고 억울하게 부르는 대로 쓰고 했던 경험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면회를 온 남편에게도 한 번에 다 이야기를 못하고 매일같이 조금씩 조금씩 황인철 변호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교도관이 쓰지 못하게 하려고 면회 끝나고 문을 나올 때 얼굴을 내밀고 하루는 변호사가 당신 만나고 싶대라고 말하고, 그리고 이튿날 오면 제가 또 황인철이야라고 말하고. 그런 식으로 교도관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남편에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듣는 저희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는 부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가 보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제가 매일같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저희 남편이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봤는데 황인철 변호사가 있더래요.

 

Q. 그럼 그때 그렇게 황인철 변호사에 대해 며칠에 걸쳐서 조금씩 면회 온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고,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던 남편은 그걸 듣고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간 거예요?

(송기복) , 그래서 우리는 007 작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황인철 변호사를 생각하면 아주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요. 저희 남편이 어렵게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갔더니 황인철 변호사가 되려 저희 남편과 저를 찾았는데 저희 남편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하면서 저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Q.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그럼 그때 이미 황인철 변호사는 송기복 선생님을 알고 계셨던 거네요?

(송기복) 네 저를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은 함세웅 신부님이 말을 해서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함 신부님이 황인철 변호사를 만나서 제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때 황인철 변호사가 이대 학생들한테 그랬다고 해요. ‘너희들은 민주화운동을 해서 감옥에 갔지만, 너희 선배 가운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간첩으로 몰려서 감옥에 간 선배가 있어 그랬다는 거예요. 제가 그때 이대를 다니다가 나와서 홍대에서 졸업했는데 그것 때문에 황인철 변호사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아요.

 

Q. 그럼 선생님이 황인철 변호사를 처음 만난 건 어디서 만나신 거예요?

(송기복)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광주로 저희 가족 모두가 이송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광주 교도소에 있었는데 황인철 변호사가 서울에서 직접 내려온 거예요. 저도 그때 황인철 변호사를 처음 보는 거죠. 교도소에서 황인철 변호사가 저를 보고 송기복 씨 그러는데 눈이 이렇게 동그란 양반이 (웃음) 인상이 너무 편안한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고 황인철 변호사를 끌어안고 울었어요. 제가 엉엉 우니까 황인철 변호사가 저를 토닥토닥해주면서 저한테 건넨 첫마디가 선생님,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였어요.

 

(사진) 인터뷰를 마치고 송기복 선생님과 함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였던 송기복 선생님과 황인철 변호사와의 만남을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아무도 자기편이 없다고 생각하셨을 그때에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 곁에 황인철 변호사라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송기복 선생님의 이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그때 황인철 변호사의 역할이 지금 저희 연구소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는 송기복 선생님의 가족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는 두 번째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2020년 5 26 () 오후 2, 5.18 진상규명위원회 7층 대회의실에서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이  5.18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을 대상으로 직무교육을 진행하였다. 올 초에 출범한 5.18민주화항쟁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조사관들을 위한 직무교육을 인권의학연구소에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가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를 조사해야하는 위원회 조사관들이 그 직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피해자를 배려하는(victim-sensitive) 조사를 통해 2차피해를 방지하는 것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교육은 2개의 강의로 진행하였는데 1강은 국가폭력 피해자 트라우마 이해하기, 2강은 피해자 조사과정에서 2차피해 방지를 위한 원칙이었다.    교육의 목표를 국가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 이해를 통해 조사 중 조사관의 피해자 감수성을 높이는데 두고, 인권 보호를 위한 피해자 중심 조사 면담 방법과 조사관 스트레스 자기관리법을 알리고자 하였다.

 

 

1강에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억압적 정권에 저항하거나 희생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트라우마와 피해자들의  삶에 거쳐 영향을 미치는 PTSD에 대한 이해를 통해 조사관들의 피해자 감수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2강에서는 피해자 조사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조사관들에 의한 2차피해를 예방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조사과정에서의 2차피해로써 과거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진화위) 조사를 겪은 피해자들의 경험을 사례로 전달하였다. 

 

  조사관과 조그만 사무실에서 사건 이야기를 하는데 꼭 보안대에서 취조받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진화위 조사실이) 창문도 없고 문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 조사를 받다보니까 보안사 조사 느낌이 들더라고요... 조사가 끝나고 마음이 어찌나 괴로운지 매일 소주를 마셨어요.”(70대 조작간첩사건 피해자)

 

 내 사건을 배정받은 조사관이 수사기관(국가기관)에서 파견나온 사람이었어, 조사 받으면서 내가 북한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하니까 그 조사관이 나보고 뭐라고 하냐면  북한에 갔다왔으면 간첩 맞네요.’ 하는 거야내 참 기가 막혀서..... (90대 조작간첩사건 피해자)

 

 위 사례에서처럼 인권보호를 위한 피해자 중심 조사에서는 조사환경과 조사과정 단계 모두 중요하다고 하겠다

 

또한, 조사관들이 트라우마 사건을 다루면서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스트레스의 관리에 대한 중요성과 방법을 살펴보았다. 조사관들이 경험하는 정서적 트라우마는 피해자 면담과정에서의 스트레스 또는 과거 자신의 트라우마 사건이 건드려지면서 오는 부정적 정서로서, 조사관의 성격과 태도 변화가 생길 수 있으나 개인적 노력과 팀원들의 지지로써 잘 관리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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