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공'의 이름으로 짓밟은 그놈, 이름이라도 알고 죽고 싶다]

최근 '멸공'이라는 단어가 이슈였습니다.

어떤 CEO는 자신에게 멸공은 정치가 아닌 현실이라고 했죠.
이를 보며 참 많이 씁쓸했습니다.
'멸공'이라는 이유로 아무 죄도 없는 국민을 향해 국가가 저지른 범죄가 너무도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국민을 향해 고문을 가했던 국가와 고문 가해자에게 멸공은 과연 무엇인가?"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605250&plink=ORI&cooper=NAVER&fbclid=IwAR2a9LS5zbXQ9SCRgJRMeugSh5NlapwX-P-nyg946cfdfDqd-xqzFcWBU7E 

 

'멸공'의 이름으로 짓밟은 그놈, 이름이라도 알고 죽고 싶다

안녕하세요. SBS 탐사보도부 원종진 기자입니다.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평화롭게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news.sbs.co.kr

 

2022()인권의학연구소 장학사업 공지

 

 ()인권의학연구소는 2022년부터 장학사업을 시작합니다. 연구소 후원회원이자 열세 살 여공의 삶의 저자인 신순애 선생의 기부로 장학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순애 선생은 1970~80년대 청계 피복 노동자로 당시 노동 조건 개선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노동운동가입니다. 이 과정에서 구속, 합동수사본부에서의 수사, 투옥, 해직 등 가혹한 국가폭력을 경험했습니다.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이 같은 노력과 희생에 대해 국가는 40여 년이 지난 20217, 민사 배상을 했으며, 신순애 선생은 배상금 전액을 인권의학연구소의 장학사업을 위해 기부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기부자의 지향에 따라 국가폭력 피해자와 가족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소중하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또한, 신순애 선생의 기부가 이 장학사업의 귀한 마중물이 된 것처럼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분의 참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국가폭력 피해자의 저항과 희생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2022()인권의학연구소 장학사업을 다음과 같이 공지합니다.

 

취지

첫째, 국가폭력 피해 생존자들과 그 2, 3세대에게 교육기회 제공

둘째, 장학사업을 통해 국가폭력 피해 생존자의 자손들이 부모와 조부모의 희생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함

 

접수기간

2021. 12. 24.() ~ 2022. 1. 14.()

서류완성본 22. 1. 14.() 17시 도착분까지만 유효

 

접수방법

제출서류 원본 우편접수 또는 스캔파일 E-Mail 제출

 

선발일정

공고 및 접수 심 사 장학금 시상식 장학금 지급
우편 또는
E-mail 접수
인권의학연구소
장학 운영위원회
심 사
추후 합격자에 한해
별도 안내
장학금 지급
(휴학 및 복학사유 최종 확인 후)
’21. 12. 24.()
’22. 1.14.()
’22. 1. 26()(예정) ’22. 2(예정) ’22. 3월 초 지급(예정)

상기일정은 장학사업 운영위원회 사정에 따라 변동 가능

 

지급대상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

국가폭력 피해 가족 (2세대 및 3세대 자손)

검정고시를 보는 학생도 포함됨

 

지급규모

5~10명 대상

1인당 총 100만원~200만원 (2회 분할 지급함)

 

제출서류

지원서

추천서 (지원자 또는 지원자 가족의 국가폭력 피해사실 자료 포함)

개인정보수집 동의서

가족관계 증명서

※ ①,,양식은 인권의학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을 수 있음

 

()인권의학연구소 장학사업 계좌 안내

우리은행 1006-701-386745 (예금주: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

 

문의 및 접수처 :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

- 주 소 : (02721) 서울시 성북구 길음로946 (서울성가소비녀회 성재덕관 1)
()인권의학연구소

- 이메일 : imhrc@naver.com

- 전 화 : 02-711-7588

- 팩 스 : 02-711-7589

- 홈페이지 : www.imhr.or.kr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죽음이 따로 있습니다]

 

지난 23전 군부 독재자전두환 씨가 사망했습니다.

모든 언론이 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광주에서 또 다른 부음이 전해졌습니다.

 

24일 오전 광주 북구의 한 장례식장에 이광영씨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이씨가 22일 가족 앞으로 쓴 유서에는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가니 마음이 홀가분하다’며 아버지께 가고 싶다고 적혀 있다. (출처: 한겨레)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돼 후유증에 시달리던 이광영(68)씨의 죽음이었습니다.

 

전두환 독재자 때문에 평생을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던 이광영 선생.

 

우리는 전두환의 죽음이 아니라 이광영 선생의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합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기사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1020608.html?fbclid=IwAR2XLKxcv8Gge4ry5-LGgALGd60820QkrWY92is6Ctf_1xh-CWeKuA99HkY 

 

전두환 사망날 세상 떠난, 5·18 생존자 빈소에 갔습니다

[신문사진편지] #17하반신 마비 후유증 시달리던 이광영님의 명복을 빕니다

www.hani.co.kr

 

“1970~80년대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한 가톨릭 성직자 증언집을 엮어내다.

 

  인권의학연구소는 10월 말에 “1970~80년대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한 수도자·성직자 증언집을 출간하였다. 이 증언집의 기획은 지난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권의학연구소는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성직자와 수도자의 증언 발간을 위한 연대사업을 제안했고, 이를 위해 두 단체가 함께 심층인터뷰를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사진-1> 증언집 표지에 경찰에 연행되는 신현봉 신부 사진(중간)과 석방되는 지학순 주교 사진(아래)을 실었다.

 증언자는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하에서 국가폭력을 직접 겪은 경험이 있다고 알려진 성직자와 수도자들 중 심층인터뷰 참여에 동의한 15명으로 정하였다. 심층인터뷰 진행을 위해 임채도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장과 김상숙 정회원, 이화영 상임이사는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전라남북도, 인천시, 서울시, 강원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수도·성직자들을 방문하였다. 증언 구술에 참여한 수도·성직자의 평균 연령은 80.7세 (69~91)이고, 가장 많은 연령이 91세였다. 이들이 국가폭력을 경험한 시기는 1970년대 5, 1980년대 9명으로 나타났다. 증언자들이 경험한 사건은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시기로부터 근 40년 이전의 사건임에도 비교적 그 사건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 시점에서 이미 선종한 김승훈 신부, 정호경 신부 등 여러 수도·성직자들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구술과 기록이 좀 더 빨리 진행되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진-2>  증언집(1)에 13명의 신부와 1명의 수녀가 증언자로 참여하였다.  

 우리 사회는 과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하고 앞장선 민주주의자들을 잘 기록해 왔으나, 가톨릭 수도·성직자들의 피해와 희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이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피해를 경험한 수도·성직자 개인들은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신들의 핍박받은 개인적 피해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먼저 헤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증언을 통해 살아온 시대적 배경, 개인적 결단, 고통의 의미를 기록하는 일은 다시는 국가폭력이 이 땅에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이 시대의 종교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어서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이 시간에도 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현장의 한복판으로 투신했던 증언자들에게 인터뷰 중 종교의 사회참여 질문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사회참여의 댓가는 교회 안팎에서 예상보다 혹독한 것이어서 증언자들이 후회할 만도 하다. 그래서 현재 증언자들은 과거와 다르게 실천적 현장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증언자들은 현재 현장 참여의 정도와 무관하게 강한 어조로 신부가 그런 일을 안 하려면 뭐하러 사제가 돼?" 하며 그 쟁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90세가 넘은 노사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경험이 자신에게는 영광이었으며 그럴 일이 있으면 또 참여하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저항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가진 한국가톨릭교회가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통해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과 역사적 의미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증언집은 극히 일부의 증언만을 담고 있으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수도·성직자들의 증언 기록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던 증언자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은 한국가톨릭교회가 미래로 가는 이정표를 제시하기 떄문이다. 증언에 참여한 한 노사제의 고백을 소개하며 증언자의 자발적 고난의 의미를 전한다.

 

"나는 교회 테두리 안에서만 좁게 살 뻔했는데, 
그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세상에 대해 눈을 떴어요." 

 (황상근 신부 증언 중에서)

[아버지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들은 간첩조작 사건으로]

 

우리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 가족에게 고스란히 남겨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6·25 발발 직후인 1950715일 여수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집을 나섰다가 다음날 다른 희생자 120여명과 함께 여수 애기섬(현 남해군 소치도) 앞바다에서 총살당한 후 수장됐다.

 

그리고 그 아들은 19862월 간첩 누명을 쓰고 광주 505보안대의 모진 고문수사를 받고 간첩이 되어 7년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우리는 과연 이 이야기를 억울한 한 가족의 서사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며,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와 같다.

 

아래는 이 사건의 피해자인 김양기 선생의 인터뷰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15686.html

 

여순사건·간첩조작…‘국가폭력 대물림 희생’ 묻히지 않길

[여순사건 73주기] 김용현·양기씨 부자의 비극

www.hani.co.kr

 

36년 만에 무죄...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인생의 족쇄 풀렸다"

 

- 출처: 한국일보

- 게재일: 21.08.13.

 

 "인생의 대부분을 간첩이라는 굴레 속에 살았는데, 모든 족쇄가 풀려나가는구나

이제는 풀리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7 29일 대법원에서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김성만, 양동화 씨에게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무려 36년 만의 기다림 끝에, 두 사람은 '간첩'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정희 독재정부가 물러나고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당시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적 술수를 만들었던 국가권력. 36년이 흘러서야 그 정치적 술수가 잘못되었음을 사법부가 인정함 셈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81307080005225?did=NA 

[국가기관과 함께 언론도 가해자입니다]

 

국가폭력의 가해자는 단순히 국가만이 아닙니다.

허위 사실을 진실인 것마냥 여론을 호도하는 언론도 공범입니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일부러왜곡하는 언론도 동일한 가해자입니다.

 

예를 들어,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형을 사신 국가폭력 피해자를 향해 재심의 과정을 통해 국가는 일정부분 배상의 책임을 안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공범이었던 언론은 어떤 법적 책임을 안게 될까요?

 

안타깝지만, 언론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아래 기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신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877 

 

국정원·검찰 간첩조작에 영합한 언론보도, 그 대가는? - 미디어오늘

언론피해에 최대 5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이른바 ‘징벌적 손해배상제’(배액배상제) 법안을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으로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의 자유가 위축될

www.mediatoday.co.kr

 

 

 

 [후원회원 인터뷰] 가장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닌 오늘공동체

-오늘공동체의 박민수 대표를 만나다-

 

 지난 8 12일 도봉산 자락에 위치한 오늘공동체 박민수 대표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80여 명의 공동체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공동체원들이 함께 사는 집이 너무 멋있는 건물이어서 여러 건축상을 받은 공동체. 이러한 내용과 달리 오늘공동체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가장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녔고, 그들과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오늘공동체는 어떤 곳인지, 오늘공동체와 우리 고문 피해 선생님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진-1> 지난 8월 12일, 오늘공동체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박민수 대표님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Q. 박민수 선생님, 반갑습니다. 굉장히 바빠 보이시는데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박민수) 일단 기본적으로 (오늘)공동체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활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담 활동, 공동체의 정기모임들인데요. 공동체원들이 모두 모이는 전체 모임은 매주 있고요. 그리고 공동체 학교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저희 공동체원이 되고 싶은 분들을 대상으로 1년 코스의 학교예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곳을 꿈꾸는 오늘공동체

 

Q. 대표님과 대화에서 공동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저희 연구소의 후원회원분들은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오늘공동체를 잘 모르실 수도 있어서요. 후원회원 분들께 간략하게 오늘공동체 소개를 부탁드릴께요.
(박민수) 처음에 오늘공동체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선교단체형 개신교회로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이 예수 정신에 입각한 좋은 교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출발이었어요. 핵심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모두가 예수의 제자가 되자는 거였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는 거였죠. (웃음) 그게 발단이 되어서 공동체로 전환이 된 거죠.

 

Q. 그게 언제쯤이셨어요?
(박민수) 교회에서 공동체로 전환한 게 2010년 정도였어요. 공동체가 되기 전에 10년 정도 열심히 공동체를 위한 성경공부를 했고요. 성경공부를 했더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희년정신이더라고요. 모두가 다 함께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거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길이고, 예수 제자의 길이더라고요. 그렇게 공부를 통해서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유토피아 또는 더불어 사는 사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라고 깨달은 거죠. 그래서 우리 공동체의 성격을 막연한 종교모임이 아닌 예수 정신에 입각한 공동체를 일구어 가는 모임으로 정하고 전환한 거죠.

 

Q. 그럼 2010년 이전에는 성경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공동체의 기반을 닦는 시기였다면, 2010년부터 공부한 것을 현실에서 공동체의 이름으로 구현하기 시작하신 거네요?
(박민수) , 그렇죠. 그래서 2010년부터 목표를 단순화했죠. ‘공동체를 일구는 것.’ 이게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하신 명령이라고 정확하게 성격 규정을 지금까지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Q. 그렇게 10년 정도 열심히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계신 거네요. 그럼 오늘공동체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지금 오늘공동체가 어떤 곳인지 물어본다면, 간략하게 어떻게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박민수)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다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 사진 -2> 도봉구에 위치한  오늘공동체는 건물외관도 멋있지만, 다양한 공동체원들이 함께 살아가는 내부는또 다른 세상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만큼 아름답고 효율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 공부하다 발견한 고문피해자들

 

Q. 지금까지 박민수 선생님과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오늘공동체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제가 가장 궁금한 부분은 오늘공동체는 어떤 계기로 고문피해자 선생님들 그리고 인권의학연구소를 알게 되신거예요?
(박민수)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저희 공동체에게 고문피해 선생님들은 뒷걸음치다가 발견한 보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웃음) 첫 계기는 예수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자주 발견한 게 ’(righteousness)였어요. 그래서 의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구체적으로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은 누구들인지에 대한 확장된 공부를 공동체 내에서 했었어요.

 

Q. 오늘공동체는 공부를 많이 하는 곳이네요. (웃음)
(박민수)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네요. (웃음) 공부를 하면서 그런 분들의 공통점이 고난을 당하셨더라고요.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그런 고난을 당하신 분들이 대부분 또 정치범이었고, 정치범으로 몰렸던 분들은 사상범으로 낙인이 찍히더라고요. 간첩, 좌빨이라는 사상범 올가미를 씌워서 사회적으로 제거하는 거죠. 공부를 하다 보니 그런 분들이 너무 많이 계시더라고요. 대표적인 분이 죽산 조봉암 선생님이시죠. 이분도 간첩으로 몰려서 이승만에게 제거를 당하잖아요. 그 이후에 수많은 분들이 이런 식으로 고난을 당하시더라고요.

 

Q. 예수 정신을 따라 살기 위해 공부를 하다가 우리 근현대사에서 고난당한 대표적인 분들인 고문 피해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신 거네요.
(박민수) , 저희 공동체에서 만나는 고문 피해 선생님들은 당시 정치인도 아니었는데, 그냥 평범한 일반 직장인이기도 하고, 어부이기도 하고, 재일동포 학생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사상범으로 몰려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분들이 너무 많이 계시더라고요. 이걸 발견하게 된 거죠!

 

Q. 유레카였네요!
(박민수) 구체적으로 김근태 의원도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셨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감옥에 계신 분들 중에는 어떠한 정치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안기부와 같은 국가기관에 끌려가서 정치범으로 몰려 고초를 당하신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 그 고초가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더라고요.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후에 복권이 되는 경우도 있기도 하고 그 이후에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었지만,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가 잡혀가신 이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드신 거예요. 그래서 더 조사를 해보니까.

 

Q.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공부를 하셨네요!
(박민수) 그렇게 되더라고요. 정말 이분들은 본인의 삶의 터전에서도 간첩으로 낙인이 찍혀 살 수가 없고, 가족관계에서도 버려지시더라고요. 결국엔 사회에 진입조차도 힘드신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공부를 하기 전에는 이런 분들이 우리 사회에 이렇게 많이 계시다는 걸 몰랐어요. 저도 그냥 간첩인 줄 알았죠. 근데 공부를 해보니까 간첩이 아닌 거예요. 어떠한 간첩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간첩으로 낙인이 찍히고, 그분들이 당한 고초는 어떤 정치인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고초를 당하신 거예요. 

<사진-3> 지난 2017년 오늘공동체 가족과 국가폭력 피해자 중 구명우 선생님 가족이 함께스위스 알프스에서 찍은 단체사진이다. (사진제공: 구명우 선생님) 

사회라는 성 밖으로 내몰렸던 고문 피해 선생님들

 

Q. 그렇죠. 고문과 감옥생활도 너무 가혹하지만, 감옥에서 나오셔서 더 큰 고초를 겪으셔야 했죠.
(박민수) 예수 시절로 말하면, ‘성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이분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은 분들이 바로 이분들인 거예요. 그때부터 진지한 고민이 시작된 거죠. 우리 공동체가 예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가 이 땅에 오신다면 과연 누구를 먼저 찾아가실까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거예요. 이 사회에서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이 근처에 가지도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 고문 피해 선생님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소외받는 분들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예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분들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예수 제자가 맞는가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제기된 거죠.

 

Q.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동의가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예수 제자를 자처하는 교회들이 그동안 간첩으로 내몰렸던 우리 고문 피해 선생님들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네요. 그럼 그 공부 이후로 적극적으로 우리 고문 피해 선생님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신 거네요.
(박민수) 그렇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상 우리 공동체가 이분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예수 제자의 삶이라는 게 공염불에 불과하다. 조금 과한 표현으로는 가치전도고, 사기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저희가 그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거죠.

 

Q.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하신 거예요? 찾는 것도 정말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박민수) 맞아요.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그분들을 찾는 게 정말 정말 어려웠어요. 여기저기 수소문했죠. 그렇게 1년 정도 수소문하다가 연결이 되더라고요. 처음에 연결된 분이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강용주 선생님이었고, 강용주 선생님이 고문피해자들이 모여있었던 진실의힘이라는 단체를 알려줘서 고문 피해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 거죠.

 

Q. 주변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간첩 혐의를 받고 고생하신 선생들을 찾아다닌 사람들은 없을 것 같아요. (웃음) 근데 처음에는 우리 선생님들이 많이 경계하셨을 것 같아요.
(박민수) 선생님들이 처음에 저희를 반기진 않으셨어요. 경계심이 많으실 수밖에 없잖아요. 저희는 당연하게 생각했고, 저희는 언젠가는 선생님들이 저희의 진정성을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인사를 드렸죠. 무슨 행사만 있으면 우리 공동체에서 무조건 달려갔어요. 그렇게 선생님들과 신뢰가 형성되는데 몇 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사진-4> 지난 2018년 오늘공동체 가족과 국가폭력 피해자 중 김장호 선생님이 필리핀으로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 김장호 선생님) 

 박민수 대표님은 인터뷰하면서 오늘공동체는 고문으로 간첩 낙인이 찍혔던 우리 선생님들을 정말 열심히 찾으러 다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웃이었고, 예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분들 곁에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하는 동안 큰 울림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박민수 대표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터뷰 기사를 한 번으로 끝내려고 했는데요, 우리 후원회원분들과 나누고 싶은 좋은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두 번째 인터뷰 기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 기사도 기대해주세요.

 

(인터뷰 진행: 박민중 활동가)

 

이 유투브 영상은 지난 8월 19일 KBS에서 방영된 영상입니다.

 

해방 후 60만 명의 동포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차별과 설움 속에서 성장했다.

성장한 아이들은 모국 유학을 선택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1ww7ytaxco

 

조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파이의 올가미였다.

 

1970-80년대, 북에서 내려오는 간첩이 줄어들자

한국의 정보기관은 일본을 경유한 ‘우회 침투’에 주목했다.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어항 속의 물고기였다.

불법 연행과 고문, 그리고 한국사회의 외면 속에서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스파이가 되었다.

 

스파이라는 낙인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2010년부터 재일동포 간첩 조작사건의 재심이 시작되었고

피해자 130여 명 중에서 재심을 신청한 36명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아직도 많은 피해자가 스파이의 낙인을 안고 숨어 살고 있다.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가 스파이를 찾아 사죄와 위안의 여정에 나선다.

 

“프리젠터인 김효순 기자 역시 민청학련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이었다.

같은 시기, 같은 감옥에서 같은 고통을 겪었고,

기자로서 재일동포 스파이들의 삶을 일찍부터 오랫동안 기록했다.

김효순 기자이기에 털어놓을 수 있었던 재일동포 정치범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영상화했다”

_이호경PD

[4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무죄를 받기까지 42년이 걸렸지만,

당시 유죄를 받은 이유를 보면 기가 막힌다.

 

지난 8월 12일 연합뉴스 기사.

이번에 무죄를 받은 이씨는 "1979년 10월 27일 정훈장교(소령)로 복무하던 중 이발소에서 동료들과 박 전 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보도 내용에 관해 얘기했다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계엄법 위반)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얼마나 옹졸한 국가였는가.

 

아래 링크를 통해 관련 기사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812121800064?input=1195m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언급' 징역형, 42년만 재심서 무죄 | 연합뉴스

(청주=연합뉴스) 천경환 기자 = 군에 근무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사건'과 관련한 신문 기사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고 전역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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