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센터2016.05.26 14:02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숨' 개소 3주년과 함께하는

2016 UN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에 초대합니다.



 

고문·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과 회복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뜻 깊은 자리에 함께하시어 더욱 행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숨' 공동대표 
함세웅, 인재근,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드림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치유센터2014.11.24 16:07

 

[국회토론회] '과거사 재심과 국가배상소송과정에서의 인권침해와 2차 피해'에 초대합니다

 

  최근 진실화해위원회 등 여러 국가조사기구들에 의해 진실규명된 과거 국가폭력 사건들에 대한 재심, 국가배상소송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과거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국가책임을 희석하고  면탈하려는 조직적 흐름이 강화되고 있고, 이로 인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2차적인 피해와 외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함께 최근 과거사 재심과 국가배상 소송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인권침해 사실을  피해자 증언으로 직접 청취하고, 재심과 국가배상소송 과정의 법리적 문제점 외 피해자들이 겪는 2차적 인권침해 내용과 외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석 바랍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치유센터2013.06.04 11:26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이 땅의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2013년 6월 25일(화) 그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들어설 곳은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1번지 '성가소비녀회' '성재덕관'입니다.

 

 

  

(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 관련 언론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5/24/0200000000AKR20130524202200004.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5262217525&code=940100)

 

 지금부터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오시는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도 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차량을 이용하실 경우, 

길음동 성당 또는 성가소비녀회(성북구 정릉동 1번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세요.

 

 

☞ 전철 4호선을 이용하실 경우,

 

① 4호선 길음역 3번 출구에서 버스정류장을 지나 길음동 성당 이정표를 따라 직진

→ 웅지어린이집에서 우회전 후 직진 → 길음동 성당을 지나 성가소비녀회 후문 도착  

(약도의 1번 길)  

 

<길음역 3번출구에서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고가도로 밑에

'천주교 길음동 성당 ↑' 이라는 하얀 이정표가 보입니다.>

 

 <고가도로 밑을 지나 직진하다가 '웅지어린이집'에서 우회전을 합니다.> 

 

< '웅지어린이집'에서 우회전을 하면 편의점 등 상가가 보입니다.

상가 옆 오르막길를 따라 올라가서 길음동 성당을 지나 계속 직진합니다.> 

 

< 길음동 성당을 지나 직진하면 붉은 벽돌 건물이 보입니다. 이 건물이 '성가소비녀회' '성재덕관'입니다.

사진의 차량 뒷쪽에 연두색 이정표를 지나면 '성가소비녀회' 후문이 보입니다.>

 

② 4호선 길음역 7번 출구에서 동해물약국과 안산부인과 사잇길로 직진 → 3거리에서 우회전해서 2번째 신호등을 건너(좌회전) → 길음 래미안 1단지 정상까지 올라오면 성가소비녀회 후문 도착(약도의 4번길)

 

<길음역 7번 출구로 나와 동해물약국과 안산부인과의원 사잇길로 직진합니다.>

 

< 외환은행과 새마을 금고를 지나 3거리에서 우회전합니다.>

 

< 2번째 신호등을 건너 상가 사이 오르막길로 계속 직진합니다.>

 

<정상까지 직진하면 아파트 경비초소가 보입니다. 경비초소를 끼고 우회전합니다.>

 

<성가소비녀회 후문과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자리잡은 성가소비녀회 '성재덕관'입니다.>

 

'성가소비녀회' 누리집의 오시는 길도 참조하세요.

http://www.holyfamily.or.kr/contents.php?item=0&subitem=29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치유센터2013.05.21 11:45

 1년 가까이 준비해 온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장소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 1번지 성가소비녀회 성재덕 관이 결정되었습니다.

 성가소비녀회(聖家小婢女會)는 1943년 12월 25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성재덕 베드로(Pierre SINGER, 1910-1992) 신부님에 의해 설립된 방인수도회입니다. 낮은 이들에게 내려오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항 강생의 삶을 이어가는 성가소비녀회의 사도 정신은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의 설립 정신과 잇닿아 있습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들어설 '성재덕 관'은 서울 성가소비녀회 내에 위치한 독립 3층 건물입니다. 2층은 역사자료실, 3층은 대강당이 있고,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주로 1층을 사용하게 됩니다.  

 

 

 

 아래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들어설 '성재덕 관' 1층 현관 전경입니다.

 아주 넓직합니다. 

 

 

 

아래는 아기자기한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사무실 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들어서 '성재덕 관' 1층에 넓은 강당 겸 회의실이 있어 다양한 치유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주위의 안온한 분위기와 포근한

치유환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이름없는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센터 건립을 위해

정성을 모아주셨습니다.

 

이제 오는 2013년 6월 26일 이곳에서 그 작은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목소리도 없이, 얼굴도 없이

 

이땅의 모든 고문피해자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후원자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서화숙의 만남] 김근태치유센터 설립 준비하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

"고문피해자 심신 후유증 치유 위한 의료지원 절실

사회정의 실현 없이는 완전한 치유란 멀고 먼 길"

 

"사회정의가 완전히 이뤄지고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는 한

고문 피해자들의 완전한 치유는 멀고먼 일이에요.

이 땅에 다시는 폭력이 발 붙이지 못한다는 확신만이

 이들을 치유할 수 있어요." 홍인기기자hongik@hk.co.kr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민간치유센터인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생긴다. 이 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모임이 2012년 12월 10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남영동 1985'라는 영화로 재연되고 있지만 김근태(1947~2011) 전 의원은 전두환 정권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보이는 파킨슨병에 시달리다가 불과 64세의 나에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그는 울컥 성내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고문의 후유증을 앓는다는 생각을 주변에서 하지 못했고 되려 그에게 젊을 때의 활기로 민주화 운동을 해주길 심지어는 고문가해자인 이근안을 용서하기까지 바랐다. 그 이근안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최근 책을 내고 변명 아닌 변명을 일삼고 있다. 이렇게 가치전도된 세상을 참아내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 분노를 사회정의를 바로잡는 일에, 고문피해자를 위한 치유를 돕는 일에 써달라고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준비에 앞장선 이화영(53 내과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은 말한다.

 

- 인권의학이 뭔가요?

 

"과거에는 건강을 위협하는 고통의 원인으로 질병만 생각했습니다. 의료인들은 어떻게 하면 질병을 없앨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을 중심으로 사회적인 고통을 함께 봐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습니다. 건강권은 인간이 누려야 할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차별 가난 폭력 이 세가지가 건강을 위협하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차별과 가난 폭력에 의료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학의 관점입니다."

 

- 원래는 내과전문의로 암전문가였다는데 어떻게 인권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제가 77학번인데 그때는 대학생이 전체의 5%쯤 되었어요. 선배들이 '대학생은 95%에게 빚진 자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를 강조했어요. 2000년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암센터에 암연구를 하러 갔어요. 2001년에 9.11이 일어났지요. 이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이 터지는 과정에서 보니까 미국 보수 방송에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의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를 계속 방영하였어요. 인권문제가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라크 전쟁 시작 후에는 북한인권상황을 계속 내보내는 거예요. 북한을 공격해도 미국인들은 정의로운 전쟁을 한다 믿겠구나 싶어서 조지메이슨대 국제분쟁분석해결학 연구소에 들어갔어요. 2003년이었어요. 면접하는 교수가 너 의사인데 테러리스트 하려고 이거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팔레스타인 투쟁단체) 하마스의 지도자가 소아과 의사에요. (웃음) 분쟁지녁에 가서 한달간 실습을 하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인권을 위한 의사회'를 알게 되었어요.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고문을 폭로하고 치료하는 단체였어요. 의료가 분쟁지역에서 화해의 도구가 될 수 있구나 깨달았지요. 1974년부터 덴마크에서 칠레 난민들의 망명신청을 위한 고문진단서를 써주던 국제 엠네스티의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서 1982년 세계최초로 고문피해재활센터 RCT(rehabilitation center for torture)를 만들어요. 이게 IRCT라는 국제기구로 커졌고요. 70여개국이 가입해서 150여개 단체가 가입했어요. 미국에서도 1985년에 미국 최초의 고문피해자센터 CVT(center for victims of torture)가 생겼고 망명자를 치유하려고 이렇게 힘을 들이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국가폭력이 엄청나게 일어났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데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어요. 의료계에서도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어요. 한국에 가서 의대생들부터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세대 의대에서 '인권의학' 강의를 개설하였고 2007년 가을에 귀국했어요."


- 본격적으로 연구소까지 만든 이유가 있어요?

"2009년에 용산참사 피해자를 지원하던 신부님이 그러세요. 아이들이 천막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심리지원이 필요할 것 같다고. 현장에 가보니 아이들뿐 아니라 철거민, 유족들, 올라갔다가 살아온 사람들의 정신심리적 외상이 매우 심했어요. 정신과 의사 네 분이 개인치유 지원을 했어요. 2010년 10월부터 국가폭력 피해자 대상 집단치유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울릉도 조작간첩사건, 서울도시철도 해고근로자, 70~80년대 노동운동 국가폭력 피해자, 학림사건 피해자 집단치유를 했습니다."

 

- 집단치유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마음 속에 담긴 고통을 끌어내서 재조립하고 회복하려면 의료적 개입은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집단치유 첫 시간에 이 치유프로그램은 회복을 위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고문 피해를 당하신 분들이 대부분 개인의 잘못으로 이 문제를 담아두고 계세요. 당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도 내가 부주의했다고 말이죠, 그 후에 고문 후유증으로 생기는 분노나 우울증, 대인기피에 대해서도 내가 성격이 좀 안좋은가보다. 그러면서 사람을 피하고 잘 믿지를 못해요. 집단치유를 하면 다른 피해자들의 어려움을 들으면서 이게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구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서 내게 벌어진 일이구나, 고문과 같은 그런 일을 겪으면 누구나 나와 같이 될 수 있구나를 받아들이게 돼요."


- 치유의 단계가 있습니까?

 

"무력감 상실감 분노, 자기자존감이 낮아지는 것들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걸 알려드려요. 가해자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내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그건 내 인생을 안 망가뜨릴 수 있는 것도 나 자신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지요. 아내나 아이처럼 가장 만만한 상대한테로 분노가 가는 걸 막는 분노조절을 알게 하고요. 무력감은 알코올 중독이나 자살하고도 연관되지요. 고문의 영향에 대한 이해, 증상과 감정에 대한 이해로 시작하여 자신과 가족, 동료들과의 관계 회복으로 연결되게 합니다.

 

- 국가폭력 피해자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한 숫자는 없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가 90년대 중반부터 국가기관에 의해서 조사된 숫자를 정래해 보았어요. 광주민주화 거창 제주 삼청교육대 등등 쭉 조사를 해봤더니 30만명이 넘고요. 국정원이나 경찰조사에서는 건수로만 나오는데 8,560건이예요. 한 건당 사람은 한명부터 추천명까지니까 수십만명이라고 보는 거지요. 30만명도 신고된 사람일 뿐 과거사 위원회에서 신청한 것을 보면 재일교포 사건만 해도 200명 중에 20명 정도만 재심을 신청하고 있어요. 인권의학연구소가 집단치유를 한 간첩조작 사건인 울릉도 사건도 47명이 구속되어 3명은 사형선고까지 받은 사건인데 지금까지 알려지지도 않았거든요."

 

- 울릉도 사건은 기자인 저조차도 처음 들어본 듯하네요.

 

"1974년 인혁당 사건과 같은 해에 일어났어요.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사망하면서 그 책임을 지고 중앙정보부 차철권이라는 사람이 좌천이 돼요. 그가 군대 후배를 통해 처남이 일본서 성공한 사업가라는 사실을 알고는 조총령과의 연관 관계를 떠올려 무차별적으로 엮어서 전주와 울릉도 지역의 47명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에요. 이 사건으로 차철권은 영전을 하고 그 이후 승승장구 했어요.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 중에 3명이 사형을 당했고요. 대부분 십여년의 형기를 마치고 나오셨지요. 울릉도 사건 피해자 중 한명인 이성희 선생님은 전북대 교무처장으로 총장 물망에 올랐는데 1960년대 도쿄대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는 북한에 가서 1주일을 보낸 것이 문제가 된 것이지요. 당시 김일 부주석을 만나 간첩 보내지 말라고 설득했다니 낭만적인 통일론자였던 거지요. 그러나 고문에 의해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17년 형을 살고 나와서 전주를 떠나 강원도에 살다가 2006년에야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신청을 하면서 이 사건이 알려졌어요. 다른 분들도 모두 숨어살고 서로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참고인으로 나오셨다 사건이 밝혀지게 됐고요. 이성희 선생님은 2012년 11월 22일 38년만에 고등법원에서 간첩죄 누명을 벗어났습니다. 나머지 20여 피해자들도 현재 재심 신청하고 진행 중입니다.

 

- 국가에서 나서야 할 일 같은데요.

 

"2012년 12월 10일에 인재근 의원이 '고문방지와 고문피해자 보상 구제법안'을 발의했어요. 고문 뿐 아니라 공권력 남용에 의한 피해자가 다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 사회적으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오늘 누리는 인권은 과거의 누군가의 희생 덕분에 누리는 것이지요. 이 분들의 치유에 모든 이들이 나섰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사회정의가 이뤄져야 해요. 심리적인 안정감을 취했다가도 사회정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증상들이 재발하거든요. 2007년 하반기에도 이병박이 대통령이 되면 다시 잡아가지 않느냐고 굉장히 불안해하셨어요. 하물며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 분들의 공포심은 말로 못하지요. 전두환이 저렇게 떵떵거리며 사는 걸 보는 마음은 어떻겠어요."

 


(이 인터뷰 내용은 2012년 12월 17일 한국일보에 게재되었던 기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기사 원문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212/h2012121621204021950.htm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김근태2013.04.30 18:08

 

 

2012년 12월 10일(월)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공동대표 : 함세웅,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인재근)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의 밤 행사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이 땅의 수많은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포괄적 지원을 위해 김근태기념 치유센터가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의 밤> 

 

지난 한국의 현대사에서 고문은 일상적인 사건이었으나 그들의 희생으로 이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홀로 고통을 견디어 왔습니다. 김근태 님 역시 홀로 고통을 견디다 64세의 나이에 파킨슨병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날은 더 이상 또 다른 김근태들이 고통을 홀로 견디다 쓰러져 가지 않도록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사회 정의의 회복과 피해자 고통의 치유를 위해 약속하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1부 행사에서 인사말씀을 하시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 함세웅 신부>

 

 <1부 행사에서 인사말씀을 하시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 인재근 의원>

 

후원행사에는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장이신 함세웅 신부와 고 김근태 님의 부인이신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을 비롯해 과거 독재 정권의 억압에 저항하였거나, 그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국가폭력을 경험했던 희생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독재 정권에 저항한 이들을 지지하거나 희생자들을 지원하려는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 역사의 현장에서 각각 서있는 곳은 달랐지만 국가폭력의 부당함과 피해자의 치유에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남영동 1985' 영화에 출연한 박원상, 이경영 배우들과 정지영 감독도 참석하였습니다. 특히 "울릉도 1974" 책에서 소개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직접 책에 서명하여 후원 행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와 가족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소개한 '울릉도 1974'>

 

최창남 목사님의 사회로 1부 순서는 고문 희생자들을 위한 묵례로써 시작하였습니다. 함세웅 신부와 인재근 의원의 환영 메시지에 이어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김근태기념 치유센터의 필요성과 설립경과보고'를 통해 고문피해자의 고통의 내용과 포괄적인 치유시스템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현재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30만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으나, 국가가 양산한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구제법이나 치유센터도 없는 실정을 지적했습니다.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묵례를 하고 있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이경영·박원상 배우>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 경과 보고'을 하고 있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

 

2부는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다-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이란 제목의 연극 공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연극은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에서 기획, 초연되었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국 고문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세터로부터 한국의 고문피해자 사례를 추가하여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후원행사를 ㅜ이한 공연을 하는데에 합의했다고 합니다. 이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의 젊은 연극인들 9명이 모여 준비하였고 공연 후 재능 기부함으로써 치유센터 설립에 동참하였습니다.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다-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을 공연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젊은 연극인들>

 

김미화 방송인의 사회로 진행된 2부의 기부행사는 자선경매로 시작하였습니다. 함세웅 이사장님이 기부한 김서경 작가의 "촛불소녀", 효림스님의 서예작품인 "김남주 시인의 노래", 아산 조방원의 부채화를 비롯해 최창남 목사의 "노동의 새벽", "모두 여기 모여 있구나" 악보 원본,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책 등이 기증되었고 경매를 통해 모두 낙찰되었습니다. 이어서 진행된 giving pledge에서는 다양한 기부 서약들이 나왔는데 "후원회원 100명 모집"의 서약부터 "작곡한 노래의 저작권 기부", "무료법률상담", "매년 100만원씩 후원"과 함께 진행을 맡은 김미화 방송인은 진행비 일체를 기부하겠으며 더불어 다음 행사의 진행도 기부하겠다는 서약을 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손병희 가수의 선창으로 고 김근태 님이 즐겨 불렀다는 "사랑으로"를 함께 부르며 후원행사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2부 기부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김미화 방송인과 함세웅 신부>

 

<함세웅 신부가 기부하신 김서경 작가의 "촛불소녀"와 김미화 방송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기부하신 저자 유동우 님>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후원 약정서를 작성하시는 참석자>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후원행사를 통해 참석자들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나아진 인권 상황은 과거 억압정권에 저항하였던 이들의 희생의 결과이며 더 이상 국가폭력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 피해자를 치유하고 돌보아야 함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가혹한 신체적 고문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지만 고문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고문은 진행형인 것입니다. 고 김근태 님은 고문피해자이자 생존자였으며 이제는 치유의 길을 열고 있으니, 아직도 이 땅의 수많은 드러나지 않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를 통해 우리 사회에 널리 드러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동참할 것을 후원행사 참석자들은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고 사죄는 커녕 자신의 범죄행위를 애국으로 정당화하는 현실, 과거 독재정권의 권력자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부정의(injustice)는 피해자에게 극심한 분노를 일으키고 심리적 안정감을 해치기 때문에 정의(justice)의 실현은 피해자들의 치유를 위해 매우 중요한 요건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후원의 밤을 통해 인식된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피해자 고통에 대한 분노를, 이제는 치유를 위한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할 때 이 땅의 국가 폭력은 종식될 것입니다.

 

<고 김근태 님이 즐겨 불렀다는 "사랑으로"를 선창하는 손병희 가수>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올해 2013년 6월 26일(UN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에 개소할 예정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해 먼저 나선 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대표: 함세웅,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인재근

설립추진위원: 강창일, 김동규, 김민기, 김봉준, 김부겸, 김수정, 김영준, 김용익, 김형태,

                     문병호, 민병두, 박경욱, 박민규, 박순희, 박영선, 박재영, 석정각, 손창호,

                     송기복, 송기홍, 신인령, 신좌섭, 심재환, 양길승, 오영식, 유동우, 유시춘,

                     유영표, 유은혜, 유인태, 유종일, 유충희, 윤영전, 이낙연, 이명춘, 이부영,

                     이영문, 이왕준, 이재명, 이 철, 이 철(일), 임수경, 정강자, 정동영, 정성헌,

                     정인재, 정청래, 주영수, 차인현, 최규성, 천정배, 최인순, 최창남, 한명숙,

                     홍구, 함주명, 현승민, 황주영

집행위원: 남평오, 문국주, 염형국, 이상희, 임채도, 현창하, 이화영

 

정리: 이화영(인권의학연구소장)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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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5공 반국가단체 조작사건 아람회, 오송회, 한울회 수기), 5공정치범명예회복회, 살림터, 1997년 5월>

 

 이 책의 공동저자인 박정석 선생님은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모진 고문과 함께 독방감옥 생활을 오래 경험하셨다.

 2011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수행한 '고문피해자 인권실태조사' 중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당시 박정석 선생님은 설문대상자로,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인터넷 신문기사 등을 조사하면서 아래의 기사를 발견하였다. 선생님이 걲으신 오송회 사건은 국어교사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실록 전북민주화운동사] 오송회 사건- 전두환정권 대표적 용공조작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이 '오송회(五松會)'라는 용공이적단체를 구성했다고 발표하여 교육계는 물론 지역주민과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들의 주요 혐의는 정부체제를 수시로 비판하면서 북한을 찬양하는 언행을 했고 오송회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는 것이었다.

 

증거물로 제시된 <병든 서울>의 작가 오장환은 일제 시대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일원으로 활동하다 48년 2월 월북한 시인이었다. ‘월북’과 ‘병든 서울’이 버무려지면서 이들의 ‘친북’ 성향과 반정부의식을 이미지화하는 데 극적 효과를 내는 소품으로서는 꽤 적절한 자료였던 셈이다.

 

문학작품에는 문외한이었던 당시 공안 관계자들은 시외버스 안내양의 신고로 입수한 이 시집의 불온성 여부에 대해 당시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교수는 시집의 몇몇 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1981년 ‘학림사건’, 부산의 ‘부림사건’, 대전의 ‘아람회 사건’, 공주의 ‘금강회사건’ 등 당시 전국적으로 대형 공안사건이 경쟁적으로 터지면서 관내에서도 뭔가 크게 터뜨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은밀한 내사가 시작되었다.

 

시집의 원 소유자이자 중심인물로 군산제일고 현직 국어교사이던 이광웅 선생이 포착되었다. 경찰은 이광웅 선생을 비롯한 현직 교사들이 1982년 4월 19일 군산제일고 뒷산에서 4.19 위령제를 지낸 사실에 주목했다. ‘건’을 터뜨리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경찰의 행동개시에 의해 덫에 걸린 희생자들이 속속 연행되었다.

 

이광웅, 박정석, 황윤태, 이옥렬, 전성원, 채규구, 강상기, 엄택수 교사 등 나중에 경찰의 명명에 의해 ‘오송회’의 멤버가 된 현직 교사들이 먼저 잡혀 들어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11월 2일에 불법 연행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된 11월 25일까지 24일 동안과 이후 경찰에 송치된 12월 13일까지 43일 동안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평소 사회주의를 동경해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좌경 의식화교육을 해온 ‘빨갱이’ 로 조작되었다.

 

몽둥이로 전신을 때리고 수십 차례 뺨을 때리는 것은 점잖은 조사에 속했다.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비행기고문에 이어 발가락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는 전기 고문 끝에 용공단체 오송회는 5공 공안정권의 명을 받아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군산제일고 뒷산에 있던 소나무 다섯그루 아래서 모임을 가졌다는 데 착안해 ‘오송회’라는 작명을 해준 경찰에서는 이들 교사 모임을 고정간첩단 정도로 크게 키우려고 했다.

 

<2006. 7. 3.자 새전북신문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박정석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엿다. 또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과 관련해 사건에 연루된 이들과, 아람회, 한울회 관련자들과 함께 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 시작된 박정석 선생님의 '시 읽기와 쓰기'

 

 박정석 선생님은 산책을 나와 혼자있는 시간에 새와 꽃이 아닌 현실의 주제와 사회적 시선에 대해 시를 쓴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 하루 생각을 정리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랍속에 두고 발표를 망설인다.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와 같은 발언으로 같은 동료 교사에 의해 신고 당했으며, 우리사회의 끝니자 않은 '빨갱이', '용공세력'의 낙인이 이 "시"들을 통해 발표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하셨다.

 

 1972년 모교인 익산 남성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절친인 이광웅 선생님과 함께 시읽기와 독서모임을 하였으나, 점차 사회에 대해 관심을 두고 『전환시대의 논리』, 『들어라 양키들아』와 같은 서적을 통해 유신에 대한 관점과 식민사관의 극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국어교사는 단지 역사인식에 궤를 같이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선생님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결성 사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도 받았으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법조 영욕의 60년] 오심의 역사-1. 오송회 사건

 

법원의 오심은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범죄행위다. 행정부나 입법부의 오판은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통해 바로잡을 기회라도 있지만, 사법부의 오심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다.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오욕과 억울함만 역사로 남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남북 대치를 빌미로 정권에 적대적인 진영의 인사들을 숙청하기 위해 조작된 용공 사건들의 실체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등을 악용한 것은 경찰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검찰 등 수사기관만이 아니었다.

 

당사자들과 국민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 것은 권력 앞에 무릎꿇고 법복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과 폭압에 눈감은 사법부와 판사들이었다.

 

사법부 스스로도 이런 역사의 과오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사법 조작사건에 '공범'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 법정에서 공개 사과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대표적인 '번복판결'이자 '사과 판결'이 ‘오송회 사건’ 재심이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전북 군산시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로 구성된 독서 모임 회원 9명이 4·19 기념행사와 5·18 추모제를 지냈다며 공안당국이 이들을 ‘용공분자’로 내몰면서 터졌다.

 

공안당국은 교사들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시를 낭송해 정치 현실을 비판했다며 이들의 모임인 오송회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했다. 5명의 교사가 소나무 아래에 모였다는 의미에서 ‘오송회’라고 칭했다.


 

이 사건으로 이광웅씨 등 교사 8명과 조성용 당시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이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경찰의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관련자들에게 1983년 12월 27일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피해자들 중 최고형인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이광웅 교사는 1987년 7월 사면조치로 4년 8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후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규명 운동’을 펼쳤다.

2007년 6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전형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규정, 법원에 소원을 청구해 2008년 11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무죄판결을 냈던 광주고법 형사1부(이한주 부장판사)는 “수사기록과 법정진술 등을 종합할 때 조씨 등에 대한 당시 검찰과 경찰의 조서는 고문·협박·회유에 의한 것으로 증거 능력이 없다. 조씨 등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과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읽고 암울한 정치적 현실을 비판했지만 북한의 정책과 사상을 동조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느꼈을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 고통에 대해 옛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이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 하겠다”고 법원의 이례적 반성을 보여줬다.

 

<2011. 7. 4.자 아시아투데이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97785>

 

지난해 겨울

 

 박정석 선생님은 2012년 12월 10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 참석하였다. 선생님은 겨울철에는 절대 외출금지의 척추혈관종을 앓고 있어서 절대 넘어지면 안되는 상황에서 지팡이를 짚고 목숨을 걸고 참석하였다고 한다. 척추혈관종으로 밝혀지기 전에 선생님은 척추암으로 진단을 받아 두번째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들었는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박정석 선생님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서 지난 시간을 마주하였다. 광주교도소에서 정신적으로 힘들 때 바륨 처방을 해준 이성희 선생님과 관련된 '울릉도 사건' 선생님들과도 인사할 수 있어서 좋았고, 송기복 선생님 등을 만날 수 있어서 더더욱 좋았다고 한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발표한 트라우마 치유 방안에 깊은 공감을 하고 선생님도 그런 치유의 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고 하셨다.

 

 

 

 

대공경찰은 사건 하나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사건의 제2인자 격인 박정석(朴正石)의 증언에 의하면,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들인 이들은 1982112, 전주 대공분실 지하실로 끌려가, 얼굴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흉터를 가진 신갑생이라는 고문기술자 등으로부터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체험을 겪는다.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을 무려 40일간이나 반복하여 받았다. 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때마다 고문의 강도는 높아갔다. 영향 받은 사람, 관계있는 사람을 대라는 고문에 문규현, 조성용의 이름이 신음처럼 튀어나왔고, 조성용은 그때부터 영문도 모르는 채 황소처럼 목이 매여 끌려나와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 합류하게 된다. 고문은 이들로 하여금 우선은 살고 봐야 하겠다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저들이 불러주는 각본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교사들은 난세를 사는 지식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놓고 고민했고
, 민주적인 교사, 깨어있는 교사이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또 산책을 좋아하여 햇빛 찬란한 날, 들과 산을 풋내를 띠고 돌아다녔다. 그 산책길에서 그들은 문학과 시와 세상을 이야기했다. 읽은 책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이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정열적인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길이라고 믿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슬그머니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되는 것이 그들이 눈에 비쳤다. 이는 국민의 저항의식을 두려워 한 반민주적, 반민중적 독재권력의 성격 때문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4.19날에 위령제라도 지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막걸리 10병과 오징어안주를 들고 학교뒷산에 올라갔다. 소나무 아래서 4.195.18 광주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식을 마치고 술 몇 잔씩 돌려 마시며 자연스럽게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를 토로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정의로웠는가를 놓고 토론하고 반성했다. 이때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일상적 삶과 가족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419 정신을 본받아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이광웅)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박정석)
약하고 용기 없이 살아 왔다.”(전성원)
한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온 비겁한 삶이었다.”(황윤태)
살아남을 권리도 없는 비겁한 놈이었다.”(이옥렬 

 

<2006. 7. 3.자 새전북신문 참조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

 

박정석 선생님은 지식인이라면, 교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이 말 때문에 사건에 엮인다는 것 용공조작이 가능한 것 자체가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분단상황의 비극이라고 하였다. 이어 박정석 선생님의 고통보다 아내의 고충의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피해자들인 나도 억울함이 컸지만 가족들도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내가 출소를 한 후 이사를 갔지만 내 자식들이 동네사람들에게 '빨갱이 자식' 소리를 들으며 상처를 받았고, 여동생들은 국가보안법에 걸려 일자리, 결혼상대를 못만나면서, 늦게까지 고생한 여동생들에 미안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힘들어 했다"고 하였다.

 

2011년 8월 서울고법 제32민사부(김명수 부장판사)는 "영장 없이 강제연행 돼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변호인이나 가족의 접견·면회를 금지당했고, 고문과 회유·협박으로 겁에 질린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고 하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이뤄졌고 피해자가 석방 후에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주변 인물이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예를 쓰고 살아야 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지금까지 선생님이 떨쳐보내지 못한 부채감이다. 박정석 선생님 자신도 피해망상, 공황장애로 정신건강의학과 처방약을 복용하고 있고, 지금은 불면증 약까지 더해졌다고 한다. 

 

 

 

박정석 선생님에게 시 한편을 인터뷰 말미에 부탁했고 선생님은 한참을 망설이셨다. 그러나 다음날 박정석 선생님은 연구소로 시를 보내주셨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요순시대

요순시절이란

백성이 불안과 분노를 느끼지 않고

과로하지 않으며 일주일에 이틀은 쉬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웃으며 술 한잔 나누는것

강물은 절로절로 흐르고

늙은 나무에 산새들이 고이 잠드는 것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30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