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습니다]

 

지난주 월요일(3일)부터 연구소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이 진행 중입니다. 이화영 소장님의 강의부터 시작해 다양한 기관들을 방문하는 일정들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7일)에는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직접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던 이동석 선생님이 직접 인턴 학생을 데리고 현장 견학을 했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동석 선생님은 자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가 쉽게 넘길 수 있는 역사의 아픔들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귀한 시간 내어주신 이동석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리구요,

동시에 인턴 학생에게 정말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동석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이화영 소장(왼쪽)과 이희진 학생(오른쪽)

 

[너무해도 너무합니다]

 

지난 2월, ‘재일동포 간첩사건’으로 사형을 받고 14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던 故 김병주 선생님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그날 이 재판을 직접 참관하고 저는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습니다. 재판부의 선고를 듣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2021년 재심에서 징역 4년형이 인정되었을까요. 아래 기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5498598&code=61121111&cp=nv&fbclid=IwAR0FbrwwDmAaGJPFc22iESnKYZoli4GcGRD3-dF7livXws4O7gsWh8OmyEo

 

1984년 법정서 한 “예” 한마디에 발목… 재심서 징역 4년

1980년대 ‘재일동포 간첩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재일동포가 재심에서도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불법 구금해 조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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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얻은 부와 명예]

 

양승태 전 대법원장, 김황식 전 국무총리, 서성 전 대법관, 임채진 전 검찰총장.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국 근현대사에서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며, 동시에 이들의 부와 명예는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얻은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2018년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가 1차로 밝힌 115명 명단 가운데 조작간첩을 만들었던 당시의 수사관, 검사, 판사들의 이름 가운데 이 네 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당시 수사관과 공무원들은 조작간첩을 만들면 특진뿐 아니라 대통령 훈포상을 받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가장 약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하게 그들의 인생을 짓밟고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쌓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 간첩조작으로 인해 삶이 뒤틀린 피해자가 그들의 사과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news.kbs.co.kr/news/view.do?ncd=4534275&ref=A&fbclid=IwAR2EYz3_aY56tCsM9m7BFdHtq1hcpYh7GUs6A2zrBqL2zoH3XaGsTQRys7E

[간첩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조작된 분들은 감옥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단순히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래 그림의 시는 제주도에서 간첩으로 조작되어 1967년 구속되어 15년을 복역하고, 그 후 20년 가까이 보호관찰을 받았던 오경대 선생님의 아들이 직접 쓴 자작시입니다.

 

오경대 선생님은 이 시를 집에 걸어놓고 매일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합니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오경대 선생님과 그 아드님의 아픔을 가슴으로 헤아려봅니다.

 

[지방자치 단체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제주에 살고 있는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강광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재심을 받아가지고 무죄는 받았지만 국가로부터나 우리를 수사했던 수사관으로부터는 진실된 사과를 못 받았고요."

 

강광보 선생님은 국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국가보상금으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기억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와 지자체가 먼저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일 텐데요.

이번에 제주시에서는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들을 위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리고 중앙정부가 못하면 지방정부 차원에서라도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www.jibs.co.kr/news/replay/viewNewsReplayDetail/2021032622481886189?feed=na&fbclid=IwAR3_OgQekEK2mrgYh9HC6S8Cktvr8bv54KToYlcLjhf3pYGJZp87iHPQjfY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어느덧 날씨가 제법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를 후원해주시고 항상 응원해주시는 분들 모두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연구소는 앞으로 다양한 후원회원과 연구소의 존재 이유가 되는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몇몇 피해생존자들은 다양한 언론 인터뷰의 경험이 있지만, 대부분의 인터뷰가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저희 연구소에서는 그분들의 오늘 일상과 힘든 과거 속에서도 따뜻한 사람의 손길이 다가왔던 그 기억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런 취지로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는 1980년대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으로 가족 모두가 고생을 하셨고, 지난 2009년 무죄를 받으신 송기복 선생님입니다. 송기복 선생님 가족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설립을 준비할 때 무죄 보상금으로 고액을 후원해주셨습니다. 이 후원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데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소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송기복 선생님의 첫 번째 인터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황인철 변호사와의 기억을 들려주는 송기복 선생님

Q. 지난해 국민 모두가 코로나로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는데요, 혹시 선생님은 지난해 어떻게 보내셨나요?

(송기복) 많은 분들이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셨을 텐데, 저는 우리 딸이 뜻하지 않게 아파서 함께 동고동락을 했죠. 힘들지만 그래도 혼자서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더라고요. 그리고 딸이 병원에 3개월 정도 입원을 했었는데, 그때는 딸 면회도 못하고 음식을 해서 전달하고 그렇게 지냈었어요.

 

Q. 선생님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송기복) 최근에 별로 하는 건 없고. 이제는 남은 인생을 좀, 시간적으로 따져보니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최근에 한 분을 생각하면서 목도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도 여자분인데요. 그분은 저처럼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남편 때문에 고생을 하셨어요. 그리고 연세도 저보다 더 있으시고요. 근데 감옥 밖에서 혼자서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겠어요? 그걸 생각해보니까 괜히 내가 그분에게 미안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건 제가 여자이고 엄마이기 때문에 느끼는 거예요. 나는 교도소 안에 있었지만, 그분은 밖에서. 교도소 밖에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내가 느끼면서 목도리를 만들었어요.

 

Q. 선생님은 공감능력이 탁월하신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 관련 기사를 찾다가 선생님께서 본인은 축복받은 간첩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더라고요. (웃음) 만약에 선생님께서 선생님께 도움을 주셨던 분들 중에서 귀한 저녁 만찬에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다면, 어떤 분을 초대하고 싶으세요?

(송기복) 많죠. 돌아가신 분 중에서 한 분이 있다면 황인철 변호사님예요.

 

(사진)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1979년 김재규 사건, 89년 임수경방북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압의 시대 수많은 시국사건 때마다 약자 편에 섰던 故 황인철 변호사.

Q. 황인철 변호사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세요?

(송기복) 우리 사건을 변호하셨던 변호사님이세요. 그것도 기적이에요. 그때 황인철 변호사를 만난 건 007 작전이에요. 나는 1980 3 2일 날 (제가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서 수업하다가 잡혀간 거예요. 그리고 일주일 만에 왔는데 그 이튿날 또 잡혀가서 그 이후로부터 간첩이 된 거죠

 저는 황인철 변호사를 교도소 안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온 이대생들한테 처음 들었어요. 그때는 교도소 안에서 5-10분인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곤 했어요. 근데 그때 저는 너무 고문을 많이 받아서 걷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고. 그러면 (운동 시간에) 사람들이 제 앞으로 지나치면서 뛰어요. 그때 저는 죄인처럼 얼굴도 못 들고 그냥 앉아 있는 거죠. 그런데 여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하루는 아줌마가 선생님이에요?”하고, 다음에는 아줌마가 송기복이에요?”, 그리고 또 다음에는 아줌마가 율리아예요?” 이러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시간적으로 한 달 정도를 두고 그렇게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들이에요. 저는 율리아, 송기복, 선생님하니까 대꾸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죠. 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마치 구령처럼 그러는데 내가 황인철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들었어요. 학생들이 아줌마를 만나고 싶은 변호사가 있어요하고 내 앞을 지나가고, 또 조금 있다가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변호사가 있어요하고 지나가고, 그리고 황인철, 황인철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앉아서 황인철이 누구지?’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황인철 변호사를 만난 건 007 작전이에요.

 

Q. 그래서 언제, 어떻게 황인철 변호사를 만나신 거예요?

(송기복) 저는 황인철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갈 때마다 황인철, 황인철 외치면서 지나갔어요. 저는 그때 볼펜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럼 손톱으로, 밥풀로 벽에다가 그 이름을 적어두는 거예요, 혹시 잊어먹을까 봐. 그렇게 기억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저희 남편이 매일 면회를 왔어요. 딱 하루를 빼고 매일 면회를 왔는데요. 그 하루는 저희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어요. 저희 가족이 모두 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그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남자가 저희 남편밖에 없었거든요.

 

Q. 그럼 황인철 변호사는 선생님 남편분을 통해서 만나신 건가요?

(송기복) 전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저희 남편이 면회를 매일 왔어요. 저희 남편은 저를 조금이라도 운동을 시키려고 매일 왔다고 그래요. 여하튼 그렇게 면회를 오면 교도관이 면회 관련 기록을 하잖아요? 근데 그때 저는 이미 고문을 많이 당하고 억울하게 부르는 대로 쓰고 했던 경험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면회를 온 남편에게도 한 번에 다 이야기를 못하고 매일같이 조금씩 조금씩 황인철 변호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교도관이 쓰지 못하게 하려고 면회 끝나고 문을 나올 때 얼굴을 내밀고 하루는 변호사가 당신 만나고 싶대라고 말하고, 그리고 이튿날 오면 제가 또 황인철이야라고 말하고. 그런 식으로 교도관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남편에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듣는 저희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는 부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가 보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제가 매일같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저희 남편이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봤는데 황인철 변호사가 있더래요.

 

Q. 그럼 그때 그렇게 황인철 변호사에 대해 며칠에 걸쳐서 조금씩 면회 온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고,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던 남편은 그걸 듣고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간 거예요?

(송기복) , 그래서 우리는 007 작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황인철 변호사를 생각하면 아주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요. 저희 남편이 어렵게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갔더니 황인철 변호사가 되려 저희 남편과 저를 찾았는데 저희 남편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하면서 저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Q.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그럼 그때 이미 황인철 변호사는 송기복 선생님을 알고 계셨던 거네요?

(송기복) 네 저를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은 함세웅 신부님이 말을 해서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함 신부님이 황인철 변호사를 만나서 제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때 황인철 변호사가 이대 학생들한테 그랬다고 해요. ‘너희들은 민주화운동을 해서 감옥에 갔지만, 너희 선배 가운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간첩으로 몰려서 감옥에 간 선배가 있어 그랬다는 거예요. 제가 그때 이대를 다니다가 나와서 홍대에서 졸업했는데 그것 때문에 황인철 변호사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아요.

 

Q. 그럼 선생님이 황인철 변호사를 처음 만난 건 어디서 만나신 거예요?

(송기복)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광주로 저희 가족 모두가 이송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광주 교도소에 있었는데 황인철 변호사가 서울에서 직접 내려온 거예요. 저도 그때 황인철 변호사를 처음 보는 거죠. 교도소에서 황인철 변호사가 저를 보고 송기복 씨 그러는데 눈이 이렇게 동그란 양반이 (웃음) 인상이 너무 편안한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고 황인철 변호사를 끌어안고 울었어요. 제가 엉엉 우니까 황인철 변호사가 저를 토닥토닥해주면서 저한테 건넨 첫마디가 선생님,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였어요.

 

(사진) 인터뷰를 마치고 송기복 선생님과 함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였던 송기복 선생님과 황인철 변호사와의 만남을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아무도 자기편이 없다고 생각하셨을 그때에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 곁에 황인철 변호사라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송기복 선생님의 이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그때 황인철 변호사의 역할이 지금 저희 연구소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는 송기복 선생님의 가족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는 두 번째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서로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

글-이수빈 

 

지난 4월 8일 대학로 눈빛 극장에서 연극 상처꽃 – 울릉도 1974를 보았다. 공연을 보기 전에 극의 탄생 배경에 대해 들었다. 1974년에 국가에 의해 조작된 울릉도 간첩단 사건 이야기였다. 공연을 보는 동안, 보고 난 뒤에 나는 1970년대와 자신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상처꽃-울릉도 1974] 1974년 박정희 긴급조치(유신)

 

1974년이면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다. 1970년대, 한국사회에 대한 내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성인이 되어서 습득한 지식으로, 책이나 지면 영상 등을 통한 것이다. 이것은 암울하고 폭력적이며 상식이 말살된 야만의 시대였다는 것.

 

두 번째는 부모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와 가족 앨범, 그리고 내 유년의 기억에 의한 것이다. 부모님은 맨몸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단하고 빈곤했지만, 기회가... 많았다고 했다. 산기슭에 허술하게 판자로 만든 집이었지만, 우리 집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젊은 부모님의 나이만큼이나 생동감이 넘치는 시대였다.

 

[상처꽃-울릉도 1974] 금지곡_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_양희은

 

그러나 이 두 번째 기억도 잘 들여다보면 중간 중간 걸리는 부분이 나온다.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표어 짓기, 이승복 어린이의 절규, 똘이 장군 같은 반공 만화영화, 간첩 신고를 독려하는 광고,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 수상하면 무조건 신고하고, 자수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며 111을 눌러야 했던 시대. 당시 나는 하루에도 한 트럭씩 간첩들이 내려오는 줄 알았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에나 간첩이 있을 수 있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상처꽃 장면4의 막간극인 간첩특강에서,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던 삼촌이 찾아오면 간첩인가를 먼저 의심하라고 했을 때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간첩신고 외에도 혼·분식 장려 운동, 쥐잡기 운동, 가족계획 운동, 새마을 운동 등 국가에 의해 온 국민이 동원되던 시대였다. 당시 내가 초등학생 때 제일 많이 한 것이 각종 표어 짓기,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상처꽃-울릉도 1974] '울릉도 사건' 고문생존자


 

국가가 국민의 일상생활은 물론 정신 상태까지 관리하던 시대가 1970년대였다.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단 상황이라는 것이 가장 클 것이다. 표면상 사상의 차이로 분단된 이 땅에서 반공은 모든 국가폭력과 독재를 정당화시키는 황금 카드가 되었다.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 사건은 1970년대가 평범한 어부를, 아이들과 자고 있던 엄마를, 부인과 함께 있던 대학교수를 다짜고짜 끌고 가 모진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둔갑시키던 시대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명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고도 멀쩡한 시대라고 말한다.

 

 

[상처꽃-울릉도 1974] '울릉도 사건' 고문생존자와 가족

 

공연 관람 내내, 나는 이 사실에 깊게 공감하면서 가슴 한쪽을 쓸어내렸다. 나와 가족에 대한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이란 것도 실은 타인과 함께 라는 사실을 자꾸 잊었다. ‘내 인생’이라고 할 때, ‘내’가 너무 강하게 인생 앞에 버티고 있어서 ‘나’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타인의 비극적 삶이나 상황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렇게 안심하며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국가나 사회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당한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피해자가 나와 가족이 아니란 사실에 감사했다.

 

 

[상처꽃-울릉도 1974] 마틴 니묄러 ‘그들이 왔다’


상처꽃에서는 장면2와 장면9에 ‘그들이 왔다.’라는 군무가 등장한다. 배우들이 나치시대 독일의 목회자인 마틴 니묄러의 ‘다음은 우리다’에서 따온 대사를 읊을 때, 나도 모르게 주변을 흘끔거렸다. 누군가 내게 너 이야기 아니냐며 손가락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처꽃-울릉도 1974] 관객들의 감상

 

 

 

그동안 나는 타인의 상처를 보고 동정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뿐이었다. 그 단계에서 나의 안일함과 이기주의를 살피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그들과 사회의 문제일 뿐, 정작 그 사회에 사는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여겼다.

 

<상처꽃 – 울릉도 1974>를 보며 타인의 아픔을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단계를 지나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 계기를 삼기로 한다. 이 극의 양정순 작가의 말처럼 세상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서로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

 

 

 

 

눈빛극장에 모인 수많은 눈빛들에 반짝반짝 물빛이 어립니다.

 

때로는 끝내 참지 못해 흐느끼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그 얼얼해진 눈빛들에 자글자글 웃음기가 모이면서 폭소들이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웃고 울고, 그렇게 두 시간여 동안 극장 안에는 공감과 감동이 차오릅니다.

 

 

 

<상처꽃- 울릉도 1974> 43일 공연이 시작된 후로 연일 좌석이 꽉 차고 있습니다.

그중엔 까메오 출연하시는 분들의 지인들도 계시고 김근태기념치유센터의 회원들도 계시고 소문을 듣고 인터넷으로 표를 구매한 분들도 계시지만 아무튼 빈 좌석이 없는 지경입니다.

 

극장문이 막 닫힐 지경이 되어 헐레벌떡 달려오신 분이 공연 끝나고 나올 땐 눈이 벌개져 서 울먹울먹하시며 안내 석에 서 있던 제 손을 잡고 고맙다너무 감동받았다고 한 일없이 졸지에 제가 인사까지 받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상처꽃-울릉도 1974-첫공연(4월 3일) 특별출연_함세웅 신부, 이철 전 의원, 이사영 님(울릉도사건 당사자)] 

 

 

첫날 까메오로 출연하신 함세웅신부님은 사제복과는 어쩐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판사복을 입고 많은 생각이 담긴 표정으로 담담하게 법관배역을 잘 수행하셨고요, 울릉도사건 당사자이신 이사영선생님도 배석판사역활을 하셨는데 그 자리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뵙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더라고요.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전력을 지닌 이철 전의원은 또 어떠셨을지....

 

 

[상처꽃-울릉도 1974-4월 4일 특별출연_인재근 의원, 유은혜 의원, 최상명 김근태 민주주의 연구소 소장] 

 

 

 

둘째 날 주심판사역을 하신 인재근의원은 역할 잘 하셨는데 객석에 앉아 관람하시는 동안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는지... 배석판사 유은혜 의원, 최상명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지만요.

인재근의원은 고문장면을 보는 게 힘드셨다고, 죄수복 입은 배우들이 힘겹게 고비를 넘던 장면, 아이들을 떼놓고 하루아침에 간첩이 되어 10년 이상을 복역한 여성배우의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다, 하시더군요.

 

[상처꽃-울릉도 1974-4월 5일 오후 3시 특별출연_장영달 전 의원, 조형국 님, 유형준 님] 

 

 

 

셋째 날, 박문숙선생의 영결식을 치른 후 장지로 가던 길에 시간에 쫓겨 차를 돌려 오신 장영달의원은 눈빛이 형형하여 카리스마 넘치는 법관 같으셨고요.

이부영 의원님, 홍세화선생님, 한회에 세 분씩 벌써 10여분 이상이 까메오 출연으로 무대를 빛내 주시고요.

 

 

[상처꽃-울릉도 1974-4월 5일 오후 7시 특별출연_이부영 전 의원, 소설가 윤정모 님, 서울시극단 예술감독 김혜련 님]

 

 

 

[상처꽃-울릉도 1974-4월 6일 특별출연_홍세화 님,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협동조합 조합원 김경미 님, 장성환 님]

 

마치 울릉도 사건의 당사자였던 듯, 잘 표현되어 배경화면을 채우는 김봉준화백의 그림과, ‘아름다운 사람’ ‘타박네야’ ‘세노야등 음악들도 무대를 채웁니다.

 

그렇게 뛰어난 연출, 열정이 넘치는 배우들과, 사연 있는 까메오들, 깊게 공감하는 관객들이 어우러지면서 <상처꽃>4월의 대학로에서 영롱한 빛깔로 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연극 못 보시면 후회합니다.

좋은 님들 만나 마로니에 공원 산책도 하시고, 손 잡고 눈빛극장으로 오세요.

좋은 기억 한 장면, 지니게 되실 겁니다.

 

[상처꽃-울릉도 1974-미술감독 김봉준 님, 「난장」(1982)]

 

글: 장남수[ 노동저술가,  前 원풍모방 노동자, 『빼앗긴 일터』(창작과비평사, 1984) 저자, 

                인권의학연구소 운영위원]

 

 

 

 

 

 

 

 

 

 

울릉도 사건 Timeline

 

1972년 유신헌법 공포,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 선포..

 

1974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울릉도 사건'의 배경, 시작, 진행과정, 그리고 사건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당사자들에 대한 고문을 통해 사건을 조작했음을 규명했습니다. 이후 2012년 11월과 2014년 1월에 법원은 재심판결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은 2010년부터 '울릉도 사건'에 연루되어 피해를 당하신 분들의 치유모임을 시작으로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영상제작: 박은성(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기획팀장), 허철녕(창작공간 환)

출처: 인권의학연구소 홈페이지(www.imhr.or.kr)

 아는 사람을 아는,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그러나 안다고 하는 사람도 잘 모르는, 그리고 모른다고 하는 사람도 사실 다 알고 있는 그런 일이 있다. 고문 문제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발생한 고문 문제에 관한 매우 의미 있는 도서가 재출간되었다. 재일동포 김병진 씨가 최근 다시 펴낸 『보안사(2013. 이매진)라는 책이다.

 

 

『보안사』김병진 씨가 1984년부터 1986년 사이 약 2년동안 보안사에서 근무하면서 경험한 고문의 실상을 충격적으로 증언한 기록물이다. 저자 김병진 씨는 1986년 보안사 근무를 마치자마자 탈출하듯 일본으로 돌아가 원고를 썼다고 한다. 그 원고는 1987년 일본 아사히 신문 논픽션 부문 공모작에 당선되어 일본어로 출판되기도 했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내에서 출판(소나무 출판사)되었을 때는 당국에 의해 대부분 압수되었고, 곧 절판되어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이 책에 나온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의 진실이 하나둘씩 사실로 밝혀져 피해자들이 수십 년 만에 무죄판결을 연이어 받으면서 이 책의 내용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재일동포 3세인 김병진 씨는 1980년 일본에서 대학을 중퇴한 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유학와 1983년경 같은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삼성연수원 일본어 강사로 일하던 중,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에 불법 연행되어 구금된 후 고문을 당하고 '공소 보류' 처분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제20조)과 「공소보류자 관찰규칙」에 의하면 '공보 보류' 처분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에 대해 2년 동안 협조를 요구하고 보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보류자가 수사기관의 지시·요구에 불응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보류 처분 취소와 재구속하여 불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처분에 따라 김병진 씨는 그 후 2년 동안 보안사에서 재일동포 간첩사건 수사의 통역과 번역 업무를 강제로 담당하게 되었다.

 

 

<김병진 사건 보도기사(동아일보, 1983. 10. 19.자)>

 

 김병진 씨가 보안사에서 근무한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보안사에서 일본 관련 간첩사건을 여러 차례 발표한 시기이다. 당시 보안사는 매년 80~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연행해 조사했다고 한다. 근년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이종수, 허철중, 윤정헌, 조일지 씨 등이 모두 이즈음에 보안사에서 수사한 사건들이다. 이 책은 같은 시기 보안사에서 일어났던 재일동포 간첩조작의 전말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1984년 로마 교황 방한을 앞두고 보안사에서 가톨릭 사제를 대상으로 진행한 '평화공작', 기독교계를 대상으로 한 '거미줄 공작' 등 일반인의 시각에서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되었으리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국내 유일한 고문관련 내부자 고발서 

 

지금까지 고문 문제에 대한 저술들은 피해자의 피해 증언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워낙 고문이 지하 밀실에서 목격자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입을 다무는 한 피해증언만 있고 통상 목격 진술이나 가해 진술은 없게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병진 씨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보안사 수사관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직접 목격한 당시 고문 장면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보안사』는 국내 고문 관련 문헌자료 가운데 유일한 내부자 고발서이며,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발생한 고문 폭력에 관한 사실 여부 논란에 동지부를 찍는 증거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아가 이 책은 고문 폭력의 매커니즘과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상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1차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승진과 (수사)공작금 수령을 위해 혈안이 된 수사관들의 무차별적인 고문조작의 형태와 함께 이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으로 몰래 눈물을 흘리는 가해자의 모습도 나타나 있다.

 

 

<추재엽 고문피해자 김병진, 나종인 씨 고법에 탄원서 제출 ⓒ안민 기자>

 

  『보안사』초판본(소나무)과 다른 점으로 2013년 재출판된 『보안사』에는 저자 김병진 씨와 당시 보안사 수사관 추재엽 씨(양천구청장)와의 질긴 악연이 일지형식으로 추가되어 있다. 김병진 씨는 추재엽 씨의 당시 고문가담 사실 여부를 두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 1988년 초판에서 "보안사를 조국의 땅에서 매장해버리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 했던 저자는 2013년 개정판 서문에서 "가해의 진실까지 밝히지 않으면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 아니다"라며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지 않던 자가 훈장을 받고, 포상금을 나누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진급하고, 지금은 정년퇴직해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피해자와 그 가족은 인생이 파괴되고, 고문후유증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주위의 눈총까지 받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결과 과거사 청산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쓰러진 『보안사』 저자 김병진 씨>

 

쓰러진 저자

 

 지난 1월 9일 김병진 씨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졌다. 『보안사』의 복간을 불과 1주일 남겨둔, 추재엽 씨와의 소송에서 이긴 바로 그날이었다. 저자의 부인에 따르면(현재 저자는 뇌출혈로 인해 심각한 언어 후유장애를 겪고 있다), 1986년 일본에 돌아간 후 김병진 씨의 가족은 보안사 사건의 피해자들로부터도 '보안사 수사관'으로 고문조작에 참여했다는 비난과 협박을 받아왔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서 내쳐진 상황에서 심리적 충격이 컷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당시 다수의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고문조작 사실을 밝히고 무죄판결을 받는 대해 저자 김병진 씨는 이 책에서 "고마운 소식은 내가 책을 통해 밝히려 한 간첩조작 피해자 대부분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피해자들이 법원에 내 책을 증거물로 제출한 사실이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늦었지만 그나마 내 고발이 나름대로 제 몫을 해내서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 김병진 씨는 영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두개의 문'의 김일난 감독 등과 함께 '환경재단'에 의해 2012년에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33인에 선정되었다>

 

 25년만에 재출판된 이 책은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에게 묻고 있다. 우선, 고문을 통해 간첩을 조작해낸 일은 '애국'으로 포장될 수 없다. 공무원으로서 국가공권력을 남용하여 사욕을 추구함으로써 정당한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조장하고 혈세로 조성된 국가자원을 낭비했으며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준 행위를 '애국'이라 말한다면 가해자들은 국가를 두 번 배신하는 것이 된다. 가해자들에게 허용된 진정한 애국의 길은 다시는 고문조작이 없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는 것에 있지 않겠는가.

 

 이 책은 동시대 피해자들에게도 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국가권력의 압도적 힘에 의해 지배당해 온 피해자들에게는 자신과 주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심리적 상황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고 주체적인 삶을 구축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 피해자 범주에 머물고 있는 의식과 행동을 극복하고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대자적 태도도 필요하다. 때로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방향을 일헝 사랑하는 가족 혹은 같은 피해자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아픔을 주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현재 저자 김병진 씨는 다행히 큰 고비를 넘기고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일본 땅에서 외롭게 싸우며 어려운 치료과정을 앞두고 있는 이 가족분들에게 따뜻한 도움과 격려말씀이 큰 힘이 된다. 아울러 일본 현지에 있는 가까운 피해자들의 격려도 구한다.

 

일본에 있는 김병진 씨의 이메일 주소는 kilsori@gmail.com 이다.

 


 

 

글쓴이: 임채도(인권의학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임채도 연구기획실장은

인권 이슈 가운데 고문 범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많은 고문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만난 경험이 있답니다.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고문방지법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2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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