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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월 15일,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을 기억하며

[특집] 3월 15일,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을 기억하며

 


1974년 3월 1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이란 이름으로, 울릉도를 거점, 주요 도시와 전북 농어촌을 일대로 10여 년간 암약한 간첩단 47명을 체포하고 이들 중 30명을 구속했다고 직접 발표하였다. 1974년 4월 6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32명을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했고, 17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형사부는 전영관, 전영봉, 김용득 3명에게 사형, 4명에게 무기징역, 그밖에 피고인들에게는 1~15년 징역형을 선고 도합 119년 형을 선고하였다. 사형은 1977년 12월 5일 집행되었다.

<사진 1. 1974.3.15.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에 관한 경향신문(좌), 동아일보(우) 보도>



피해자들은 1974년 2월부터 울릉도를 비롯한 곳곳에서 불법으로 중앙정보부에 체포·연행되어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여 간 불법 구금과 협박, 구타, 고문으로 끌어낸 허위자백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이들은 왜 간첩이 되었어야 했을까?

1970년대 들어 국제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1971년 미중 간 핑퐁외교,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미소 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 체결, 1973년 미군의 베트남 철수 등, 70년대 초반 냉전은 데탕트, 긴장 완화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한반도에서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개월 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독재 기반을 강화하여 영구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유신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에 학생들의 반유신독재운동과 장준하 선생을 필두로 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등,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유신체제에 저항하였다. 유신체제는 정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국민들의 안보 심리를 자극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를 위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필요했다. 또한 비대해진 공안기구들은 기관의 유지와 과시를 위해, 수사관들은 출세와 영달을 위해 성과와 실적의 대상이 될 더 많은 간첩이 필요했다.

<사진 2. 퇴계로에서 본 과거 남산 중앙정보부 본청 전경(출처 한국기자협회)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 울릉도 거주민들과, 울릉도에는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들이 한통속으로 묶여 간첩이 되었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재판장에서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가장은 간첩으로, 가족은 빨갱이 식구로 몰려 살아가야 했다. 그와 그 가족들은 짓지도 않은 죄에 연좌되어 좌죄하였다. 그들의 삶은 좌초하였고 그들은 지난한 삶 동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는 수감 중에서도 가족을 그리워하였으나, 가족을 위해 가족의 해체를 고민해야만 했고 결국 일부는 해체를 겪기도 하였다. 수형 기간 동안 가족은 평범한 생활을 누릴 수 없었고, 부모와 자식은 가족으로서의 경험을 겪지 못했다. 부모 자식 간에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간첩’이란 사회적 낙인은 평생 그들을 따라다녔다. 출소 이후에도 보호관찰이란 명목 하에 수시로 경찰관이 찾아들었고, 수시로 경찰서에 드나들어야 했다. 함부로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고, 함부로 어딘가로 떠날 수도 없었다. 또한 공·사적 영역에서 직·간접적인 연좌제를 경험하였다.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간첩’이란 낙인은 피해자와 가족, 친지까지 터무니없는 차별과 폭력을 겪는 이유가 되었다. 피해자들은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였으나, 따뜻했던 지난날의 고향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들은 고향의 친지와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였고 냉대와 멸시 속에 언제든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헐뜯기며 수모를 겪었다. 국가에 의해 간첩으로 내몰린 이들은 사회로부터 내쫓겼다. 정답던 고향과 이웃은 그들을 도리어 되쫓아냈다. 이들은 철저히 고립된 채로 무원의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사진 3. 1974.7.24. 울릉도 간첩단 사건 선거공판>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7년간 옥살이를 했던 전 전북대 교수 이성희 선생은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2010년 위원회가 간첩 조작 사실을 인정한 뒤 이를 근거로 이성희 선생은 재심 신청을 하였고, 2012년 12월 22일 서울고법 형사 2부(부장판사 김동오)는 ‘반국가단체에 특수 잠입, 군사기밀을 탐지한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를 시작으로 2014~16년 연이은 재심을 통해 32명의 피해자들의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사진 4. 울릉도 간첩단 조작사건 무죄 선고>


인권의학연구소는 2010년부터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치유지원을 진행해왔다. 2012년 연구소의 이사이신 최창남 목사는 ‘울릉도 1974’ 책을 집필 출간하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2014년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을 소재로 한 서사치유연극 ‘상처꽃-울릉도 1974’를 기획하여 공연했으며, 피해자들의 재심 간 공판을 지원하고 법정에 동행하였다. 현재까지도 인권의학연구소는 피해자들과 함께 해오고 있다.

<사진 5. 사진 5. 울릉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치유프로그램>
<사진 6. '울릉도 1974' 책(좌), 상처꽃 포스터(우)>


‘울릉도 1974’ 말미에 인용된 덴마크 시인 할프단 라스무센의 시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을 나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고문 가해자도/다시 일어설 수 없는 몸도 아니다//죽음을 가져오는 라이플의 총신도/벽에 드리운 그림자도/땅거미 지는 저녁도 아니다//희미하게 빛나는/고통의 별들이 무수히 달려들 때//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의/눈먼 냉담함이다."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관심과 격려, 위로, 응원, 연대. 오늘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은 49주년’을 맞았다. 인권의학연구소는 피해자와 가족, 나아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삶이 보다 더 서로의 관계에 사랑이나 인정이 많고 깊게, 도타이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힘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