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동석 선생, 얼마 전 그날이 온다’ LP판의 표지 모델을 만나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났던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이번 인터뷰 기사에서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모국에서의 유학생활과 수감생활 속에서 얻게 된 것들, 그리고 또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날이 온다’ LP판의 주인공까지.

 

 어느 것 하나 영화 같지 않은 것이 없는 이동석 선생님의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 1)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인터뷰 중인 이동석 선생.

 

Q.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면서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게 힘드셨어요?

(이동석) 제가 재일교포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랐잖아요. 근데 어렸을 때, 내가 한국사람 그리고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스스로 알거나 부모님이 알려줘서 아는 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너는 조선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건 눈이 다른 거예요.

 

Q. 집에서 내가 부모님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나 주변 일본 사람들을 통해서?

(이동석) 재일교포 대다수의 부모님이 여유가 없는 거예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가난해서 일본으로 일하러 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거의 없거든요. 그랬거든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재일교포는) 마이너스 이미지였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는 일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나는 일본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오랜 고민을 거쳐서 모국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었어요.

 

일본에서의 정체성 혼란과 모국에서의 유학생활

 

(사진 2)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두번째 공판을 마치고 일본에서 함께 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과 법원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출처: 한겨레)

Q. 그러한 배경 때문에 선생님께서 모국 유학을 선택하시게 되셨네요. 그럼 그때 당시의 유학생활의 추억, 그리고 모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 그때 우리나라에 유학을 오겠다는 건 불어를 배우기 위해 오는 건 아니었어요. (웃음) 저는 우리나라 말을 배우고 싶었고, 우리나라를 알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 그때 불어를 열심히 공부하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외대 연극회에 들어가서 같이 연극하는 거예요. 연극한다고 해서 제가 발음이 안 좋으니까 무대에 서서 연극하는 건 아니지만, 같이 연습하고 구경도 하고 끝나면 같이 술 마시고 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Q. 선생님이 그때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좋으셨나봐요?

(이동석) , 추억이에요. 근데 그때만 해도 재일교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그 시대에 한국에 유학 오는 재일교포라면 돈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집은 아주 가난했어요. 그때 대부분의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부자가 아닌데 눈에 띄는 몇몇 재일교포들 때문에 한국 학생들도 재일교포에 대해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연극회에서 친구들 만나 친구가 되면 서로 그런 인식이 없어지는 거예요.

 

Q. 인간 대 인간으로?

(이동석)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구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즐거웠고요. 제가 구속이 되고 난 후에도, 그리고 석방하고 일본에 갔다가 10년이 지나고 나서도 제가 연락하면 다들 만나주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일본에 가시고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이동석) 만나주는 거예요. 제가 80 8 15일에 석방이 되어서 시골에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외대에 갔어요. 저 멀리서 연극회 후배가 절 보면서 너무 반가워해주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후배가 내일 다른 사람들한테도 연락해서 종로에서 모임을 가지자고 그러더라고요. 휴대폰도 없는 그 시절에 만나러 갔더니 친한 친구들이 10명 가까이 왔더라고요.

 

Q. 선생님이 출소했다고 하니까 연극회 친구들이 바로 그렇게 모인 거예요?

(이동석) , 제가 어떤 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는지 다 알면서도 그렇게 모인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그 친구들이 저 때문에 다 고생을 해요. 왜냐하면, 제가 출소하고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거기 왔던 친구들이 끌려가서 저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조사당했어요. 이런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저를 만나줄 정도로 서로 친하게 지냈어요.

 

(사진 3) 지난 2018년 10월,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출처: 한국외대 홈페이지)

Q. 선생님에게는 73년도부터 75년도까지 2년 반 정도 한국 친구들과의 유학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 같아요.

(이동석) ! 재미있었고, 한국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죠. 전공인 불어과 친구들보다는 연극회 친구들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이 있죠. 아무래도 매일 만나서 연습하고 술 먹고 하니까. (웃음) 그래서 구속된 후에도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감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 유학 온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고요. 한국에 오면서 제가 얻은 게 더 많다고 생각해요.

 

Q. 어떤 걸 얻으셨다고 생각하세요?

(이동석) 우선 우리나라라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우리나라 말을 배울 수 있었고요. 일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즐거움, 뭔가 해방감 같은 걸 느꼈어요. 물론 한국 내에서도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있지만, ‘, 우리나라구나라는 걸 느꼈죠.

 

Q.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으로 유학을 오실 건가요?

(이동석) , 그럼요. 제가 석방되고 일본에 가서도 얼마나 우리나라에 오고 싶었는데요!

  

'그날이온다' LP판에 숨겨진 뒷 이야기

(사진 4) 인터뷰 도중 '그날이온다'CD를 들고 있는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오늘 모국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느껴지네요. (‘그날이 온다’ CD를 가리키며)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이 이 CD와 관련된 어떤 일화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동석) 이것도 김치식당(첫 번째 인터뷰 내용 참고)을 만난 것처럼 신기한 이야기예요. 제가 보안사에 잡혀 있다가 75년도 12 30일 날 서울구치소에 가게 되거든요. 가니까 겨울이잖아요. 그해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요. 서울 구치소에 가니까 너무 추운 거예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구치소에 있으면서 옷에 이가 생기는데, 속옷도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빨아서 입어요. 빨아도 마르지도 않고, 어쩔 수 없이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속옷을 입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있는데 제가 그때 1 옥사에 있었는데요. 그게 원래는 소년수들이 있는 공간이었었거든요. 근데 그때 워낙 반공법이나 긴급조치 관련 수감자들이 많아지면서 방이 모자라서 소년수 방까지 오게 된 거예요. 그때 제가 1옥사 상, 2층의 가운데 정도에 있었어요. 그때 1옥사에 긴급조치로 들어와 있던 외대 학생 한 명이 있었더요. 그때 제가 외대를 다녔기 때문에 그 친구한테는 제가 선배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친구가 제가 아무것도 없는 걸 알고는 칫솔이나 휴지 같은 걸 나한테 주는 거예요.

 

Q. 방이 달랐을 텐데, 어떻게 전달해준 거예요?

(이동석) 이것도 참 고마워요. 그 학생이 아침에 세수하러 갈 때, 몰래 주는 거예요. 저는 독방에 있었기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수할 수 있는 물을 조금 방으로 갔다 줬어요. 다른 수감자들은 다 같이 세수를 할 수는 없고 수감자가 직접 물을 떠 와서 자기 방에서 세수를 했거든요. 이때 그 친구가 아침에 세숫물을 가지러 갈 때 저한테 몰래 던져줄 때도 있고, 아니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나갈 때 시켜서 저한테 전달해주곤 했어요.

 

Q. 이것도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 정말 고마운 분이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나 고마운데요. 제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고, 어렵고 할 때니까. 그래서 제가 고마워서 한 번은 찾아서 그때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재심을 시작하면 한국을 왔다 갔다 하잖아요.

 

Q.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선생님이 그 후배를 찾고 싶으셨던 거죠?

(이동석) , 일본에 있을 때도 항상 머릿속에 있었죠.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재심할 때는 2 3, 3 4일 왔다가 가니까 찾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근데 외대에 재입학하니까 시간이 생겼잖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대수라는 분을 만났거든요. 그분을 알게 되어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당시에 긴급조치로 구속된 외대생은 아마 그 친구일 거라고 하는 거예요.

 

Q. , 한국에 계시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만나게 된 이대수라는 분이 그 외대생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동석) !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얼마 후에 그 사람이 일하고 있는 사당으로 이대수 씨랑 같이 가서 만났어요. 가서 보니까 40년이 지났는데도 약간 그때의 느낌이 있더라고요. 근데 그 친구도 저를 기억하고 있고요. 그래서 몇십 년 만에 만나서 다 같이 맥주를 한 잔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종종 만나고 있어요.

 

(사진 5) 레코드 ‘그날이온다’는 정치범이 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이  협동하여 전개했던 운동이 만들어 낸 것이다. 왼쪽은 70년대 출판된 LP판이며, 오른쪽은 최근에 다시  출판된 CD입니다. (세 명 중 제일 왼쪽에서 웃고 있는 수감자가 바로 이동석 선생님의 한국외대 후배다) 

 

Q. 신기하네요! 근데 선생님, 그 외대 학생분이랑 이 LP판이랑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예요?

(이동석) 그게 알고 보니까 이 LP판에 찍힌 사진의 주인공이 그 외대생이더라고요.  LP판은 70년 후반인가 그때 나왔거든요. 근데 재심이랑 새롭게 시작하니까 이걸 제작했던 사람이 LP가 아니라 CD로 다시 만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일본에서 한국에 올 때 10장 정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재판에서 만나는 분들이랑 몇 분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리고 딱 1장이 남았어요. 근데 작년에 그 외대 후배를 만나면서 보니까 이 CD에 나온 이 사람이랑 닮은 거예요. 그래서 혹시 이 CD의 젊은 학생이 지금 그 후배가 아닌가 해서 다음에 만날 때 제가 이 CD를 가져갔어요. 만나서 제가 이 CD를 책상에 올려놓자마자 그 친구가 CD의 사진을 보더니 바로 ! 이거 난데!’ 그러는 거예요. 그 친구도 이제 와서야 자기가 이런 CD의 표지에 실려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Q. 그럼 그분도 일본에서 출판된 LP판에 자신의 사진이 있다는 걸 몰랐었던 거예요?

(이동석) , 몰랐죠. 근데 이 사진을 보면 웃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보고 웃어줬다는 거예요. 그 후배가. 지금 긴급조치로 잡혀서 이게 지금 법원 앞인데. (웃음) 근데 이 사진이 어떻게 찍혔냐면, 당시 일본 구원회 사람들은 면회가 안되잖아요. 그래서 법원 앞에서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면 그 순간 몰래 찍는 거예요. 걸리면 사진을 빼앗기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 사진을 찍은 사람도 누가 누군지 모르고 찍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 버스에서 내려서 나오는 사람 보니까 일반 수감자가 아니라 정치범인 것 같아서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동석 선생님의 꿈 

 

Q.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생님은 김치식당도 그렇고 이 CD 이야기도 그렇고 참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네요. 정말 신기하네요. 그럼 이제 선생님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남은 인생 동안 선생님의 꿈이 무엇일까요?

(이동석) 제가 재심을 통해서 무죄를 받았잖아요. 무죄받고 국가에서 보상금을 받고 난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은 제가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국가가 과거에 잘못했지만, 계속해서 그것만 붙잡고 살 수는 없는 거예요. 보상금이 크든 작든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해서 유의미한 인생을 사는가 하는 문제는 제가 결정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찾기 위해서 지금 제가 한국에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의 문제죠. 맨날 친구 만나서 술 먹고, 늦잠 자고, 여행 다니고 할 수만은 없는 거예요. 산다는 것의 목적.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 이번 9월까지는 한국에서 살기로 정했어요. 그동안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찾는 게 제 꿈입니다.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를 만들어도 몇 편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났던 모국 유학.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국에서의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이동석 선생님은 그 속에서 인생의 귀한 의미들을 이미 발견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웃음과 감동을 잃지 않고 계셨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과연 인간에게 모국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곳곳에 녹아있는 따뜻한 이야기들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오는 9월까지 한국에서 인생의 마지막 꿈을 찾을 이동석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습니다]

 

지난주 월요일(3일)부터 연구소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이 진행 중입니다. 이화영 소장님의 강의부터 시작해 다양한 기관들을 방문하는 일정들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7일)에는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직접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던 이동석 선생님이 직접 인턴 학생을 데리고 현장 견학을 했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동석 선생님은 자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가 쉽게 넘길 수 있는 역사의 아픔들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귀한 시간 내어주신 이동석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리구요,

동시에 인턴 학생에게 정말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동석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이화영 소장(왼쪽)과 이희진 학생(오른쪽)

 

[행복해 보이시죠?]

 

수요일마다 연구소 소강당에서 경쾌한 타악기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지난 3월 24일부터 집단 음악치유를 조심스럽게 시작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판소리 모임은 할 수 없어 마스크를 쓰고 손으로 참여할 수 있는 '타악기 집단 음악치유'를 시작했습니다.

북, 잼배, 봉고, 카혼 등 이름도 다 외우기 어려운 타악기들로 구성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하시기 괜찮을까 걱정도 조금 했지만, 옆에서 선생님들의 연주를 보면 코로나가 사라지고 홍대로 나가서 버스킹을 하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도 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선생님들이 서로 상대의 연주 소리에 맞춰 음을 맞추는 모습, 연주를 하면서 타악기와 하나가 되어 즐겁게 그 순강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분들의 아픈 과거가 조금이라도 그 순간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들의 아름다운 공연을 보여드리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인터뷰] 이동석 선생, 어학연수 중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나다.

 

  지난 송기복 선생의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재일동포 이동석 선생의 이야기이다. 이동석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한국에 왔다. 2년 후, 1973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해 연극회 활동 등 모국에서의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1975 11 22일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이 하숙집을 들이닥치면서 행복했던 모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끝이 나게 된다. 1976년 당시 대법원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과 간첩죄를 인정해 이동석 선생에게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그렇게 끝이 날 것 같던 이동석 선생의 모국 유학은 2018년 새롭게 시작되었다.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2017년 민사소송도 끝이 나자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돌려주지 못하는 청춘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했다. 그리고 지난 2월 한국외대 불어과 졸업생이 되었다. 지금부터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의 첫 번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 사진  1>  지난  3 월  30 일 ,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다양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이동석 선생 .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반갑습니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동석) 제가 이번 2월에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했습니다. 75년도 당시 제가 구속될 때 한국외대 불어과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거든요. 그래서 2018년도에 4학년으로 재입학하고 지난달에 졸업했습니다. 4학년부터는 등록금 전액을 내지 않아도 신청과목 수에 따라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해서 한국에 오래 있고 싶어서 일부러 학점을 많이 신청 안 하고 1년 더 학교를 다니고 이번에 졸업했습니다.

 

< 사진  2>  지난  2018 년  10 월 ,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 ( 출처 :  한국외대 홈페이지 )

Q. 선생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럼 졸업하신 지 얼마 안 되셨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 안 지났어요. 근데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 졸업장만 받으러 학교에 갔거든요. 그런데 저를 알고 있던 학생지원센터의 여자 직원이 이번에 제가 졸업했다고 연락을 안 했는데 미리 알았나 봐요. 학교에 오시면 말해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졸업장 받으러 가는 날 아침에 연락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학생지원센터에서 일하는 그 직원이 꽃다발 준비해서 제가 졸업하는 걸 축하해준다고 사진 찍고 그랬어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은 없었지만은 그래도 학교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Q. 선생님이 한국외대에서는 이미 유명인사였네요! (웃음) 그럼 선생님, 2018년도에 다시 한국에 오셔서 다시 입학해서 학교 다니실 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요, 사실은 공부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웃음)

 

Q. 정말요? (웃음) 그럼 선생님 왜 다시 학교에 가셨어요?


(이동석) 제가 왜 재입학을 결심했냐면요, 재심으로 무죄를 받고 민사까지 다 끝나고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잖아요. 근데 그 보상금이라는 게 저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국가가 과거의 잘못된 일에 대해 무죄를 통해 사과는 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국가는 돈으로밖에 계산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국가로서는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책임을 묻지 마. 이 사건은 없었던 걸로 하는 거다.’ 그런 거잖아요? 그러면 그 돈을 제가 받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이제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재심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 내가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있었을 때, 학교에 가서 문의를 해봤어요. 만약 학교에서 안된다고 하면 제가 항의하려고 했어요. 내가 이제 무죄까지 받고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재입학이 안 되는 것인지 항의하려고 했는데, 아주 쉽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제가 안 한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웃음) 그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외대 불어과로 재입학했어요.

  

65세에 떠난 프랑스 어학연수, 그리고 만난 김치식당.

<사진 3> 2018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하고 한겨레와의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  이동석 선생은 자신의 대학시절 가운데 가장 즐겁게 보냈던 순간으로 ‘연극회’ 시절을 꼽았다. (출처: 한겨레)

Q. 그런데 선생님 기사를 찾아보니까 외대에 재입학하시기 전에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다녀오셨던데, 어떻게 프랑스까지 가게 되신 거예요?


(이동석) 제가 한국외대에 처음 불어과로 입학을 했는데, 제가 영어를 아주 싫어했어요. 그렇다고 불어를 잘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때 한국 학생들은 불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우리말로 서툰데 불어를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나서 재입학한다고 제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이가 20대라면 몰라도 이제 70 가까이 되는데요. 그때 제 나이가 65세였거든요. 저는 일본에서 일을 65세까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때 재판 후에 보상금이 나오고 퇴직을 하게 되면서 모든 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어를 해야 되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기 전에 프랑스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Q. 그래서 파리와 니스로 6개월 정도 다녀오신 거예요?


(이동석) 그렇죠. 근데 원래 불어를 배우려고 간 거였거든요. 제가 프랑스 갈 때는 옛날에 한국에 와서 우리말을 배웠던 생각을 하고, 프랑스에 6개월 정도 있으면 일상회화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간 건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웃음)

 

Q. (웃음) 프랑스에는 선생님 혼자 가셨던 거예요?


(이동석) , 혼자 갔어요. 언어가 잘 안 되더라고요. 니스에 2달 정도 있다가 파리로 갔거든요. 파리에 있으면서 보니까 불어가 아예 안 되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스스로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목적을 바꾸고 관광을 하자하고 마음을 먹었어요. (웃음)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니까 파리에서 미술관에 많이 다녔어요.

 

Q.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웃음) 65세에 어렵게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생각보다 언어가 늘지 않아 빨리 마음을 바꾸고 즐겁게 프랑스에서 여행을 하시다 온 거네요. (웃음) 근데 선생님은 과거에 국가로부터 엄청난 아픔을 경험하셨음에도 이렇게 활기차게 일상을 살아가시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인데요. 혹시 프랑스에서 재밌었던 일화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동석)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뭐냐면요. 처음 니스에 2달 정도 있을 때는 일본음식이나 한국음식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특히 한국음식이 먹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파리에 갔을 때,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 파리를 돌아다녔거든요. 돌아다니면서 파리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찾았어요. 저녁 6시쯤 되었는데, 골목에 한글 간판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그 간판 이름이 항아리였어요. 그래서 가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7시부터 영업을 한다고 잠겨 있었어요. 근데 안에 일하던 사람이 저를 보고 나와서 저한테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일본말로 대답을 했는데,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파리에서 한국 음식점 주인이 저를 보자마자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하는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에 몇 번 그 식당에 가서 자연스럽게 주인이랑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예요. 특히 왜 파리에서 일본 사람이 한국 식당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나누게 된 거죠.

 

Q. ! 그 한국식당 주인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었나요?

 
(이동석) 네 일본 사람이었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 주인이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의 이응노 화백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 식당이 원래 이응노 화백의 조카인 이희세 씨가 경영했던 식당이었어요. 그때 이응노 화백이 화가였던 조카 이희세 씨를 프랑스로 불러서 공부를 시켜줬던 거죠. 근데 1967년도에 동베를린간첩단사건(동백림사건)으로 이응노 화백이 윤이상 씨 같은 분들이랑 같이 구속이 됐잖아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파리에서 구명운동을 하신 거예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구명운동도 많이 하고 해서 그분들이 70년대 후반에 다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돌아오신 분들이 한반도의 통일과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유럽에 거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심코 갔던 그 식당이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었던 거죠. 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이었던 거예요.

 

Q. 선생님은 어학연수로 갔다가 우연히 그런 역사가 있는 식당을 알게 되신 거네요. 근데 그 이희세 씨랑 지금 그 식당의 주인인 일본 사람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나요?


(이동석) 그 시대에 이응노 화백, 윤이상 씨, 이희세 씨 모두 일본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말을 잘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식당을 하는데 그 일본 사람은 프랑스에 와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 그 일본 사람이 여권을 분실했던가 해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희세 씨가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있지만, 한국식당에서 같이 일하겠냐고 이희세 씨가 제안한거죠. 그런 인연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식당은 이희세 씨가 은퇴를 하면서 지금의 주인이 물려받은 거예요.

 

 <사진 4>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두 개의 한국식당.  이동석 선생은 우연히 항아리라는 한글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그 식당은 항아리 식당이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다.  김치식당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Q. 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 그럼 아직까지 그 식당은 한글 이름 항아리 예요?


(이동석) 이것도 재미있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항아리라는 식당은 옆집이예요. (웃음) 한국식당이 두 개가 있는데 가운데 항아리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위에 붙어 있는 간판만 보고 거기가 항아리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몇 번 가보니까 그 식당은 항아리가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던 거예요. (웃음) 김치식당!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운명인가 싶더라고요. 걷다가 우연히 만난 한국식당의 간판을 잘못 알고 다른 식당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까 그 식당이 1967년 동베를린간첩단사건의 이응노 화백의 조카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유럽의 거점으로 만들었던 식당이었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재일동포 2세로 고등학생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다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스스로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동석 선생. 그리고 모국을 찾은 재일동포에게 한국이라는 모국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그의 청춘을 빼앗아 갔다. 그렇게 흘러가버린 40년의 세월. 그러나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되돌려주지 못하는 자신의 청춘을 스스로 되찾기 위해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고 지난 2월 졸업했다. 이 이야기도 한 편의 영화 같지만, 어학연수를 떠난 65세의 이동석 선생은 그곳에서 19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거점 역할을 했던 김치식당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동백림사건의 이응노 화백, 그 조카 이희세 작가, 그리고 그 식당을 이어받은 일본인 주인과의 인연까지... 또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에는 이동석 선생의 두 번째 인터뷰를 전하고자 한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지난 2 1() 오후 4, 인권의학연구소는 1 29() 오전 10 30분 서울 중앙지방법원 서관 519호에서 열린  김병주 선생 판결에 대한 간담회를 진행했다. 간담회는 코로나와 일본에 계신 재일동포의 상황을 고려하여 온라인 줌(ZOOM) 회의로 열렸다. 참석자는 연구소에서 3(함세웅 이사장, 이화영 소장, 김장호 회원)과 일본에서 3(김원중 선생, 이철 선생, 이동석 선생) 그리고 이번 사건의 담당 변호사인 서중희 변호사가 참석하여 총 7명이었다.

 

(사진)  서울-일본 (도쿄, 오사카)간 줌 (ZOOM) 온라인 간담회 (2월 1일)

 김병주 선생의 재심 재판부는 1984년 당시 검찰이 기소한 42건 가운데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40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였지만, 1980년 비엔나 방문과 1981년 북한 방문은 특수탈출에 해당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특히, 재판부는 지난 1984년 재판에서  김병주 선생이 자신의 변호사와의 나눈 법정 심문 내용을 유죄의 근거로 삼았다. 과거 잘못된 재판의 법정 증언을 근거로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이 소명할 기회조차 없는 상황에서 징역 4년형을 내린 것은 국가보안법 관련 재심 사건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사진) 간담회에 참석한 일본의 이동석 선생(좌)과 김원중 선생(우)

이 같은 판결에 대해 간담회의 참석자들은 다양한 평가와 함께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먼저, 재일동포 김원중 선생은 이번에 완벽한 판결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간첩죄라든지 국가보안법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얻어냈으니까 큰 성과라고 하면서도 문제는 유죄로 판결한 2건의 특수탈출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일동포 이동석 선생은 이미 이전 재심들에서 북한에 다녀왔지만 무죄를 받은 사례들이 있음에도 이번 재판은 피고가 북한에 가서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단순히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만 가지고 유죄를 선고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담당 변호사인 서중희 변호사를 비롯해 모든 참가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부분은 이번 재판이 재심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 피고의 원심 재판에서 변호사와 주고받았던 심문 내용을 증거로 삼았다는 점이다.

 

재일동포 이철 선생은 제가 크게 걱정하는 것은 이번 판결이 이걸로 인해서 앞으로 있을 여러 재일동포나 아니면 국내 동포들의 재심 재판에 나쁜 사례로 하나의 법례로 인정될까 봐 그것이 상당히 걱정이라며 우려했습니다. 이화영 소장은 이에 동의하면서  김병주 선생의 재심이 다른 재심과 달리 피고인의 사망으로 인한 자기변호의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재판은 지난번 구미유학생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은데, 당시 구미유학생 사건의 연루자들은 원심 재판에서 왜 그렇게 진술했는지를 본인들이 다 해명을 할 수 있었다. 재판 당시 뒤에 수사관이 와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든가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자기변호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김병주 선생의 경우는 본인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본인에 대한 해명을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이 소장은 재판부가 이러한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피고가 어떤 변호도 할 수 없는 것을 증거로 삼아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허점이 상당히 많은 재판이라고 보았다.

 

(사진) 간담회에 참석한서울의  김장호 선생(좌)과 일본의 이철 선생(우)

이에 참석자들은 이번 재판으로 인해 재판부에 대한 불신이 생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철 선생은 지금까지 재일동포 사건은 계속 무죄가 나왔는데 거기에 대한 하나의 그 흐름을 한 번 끊으려고 하는 무슨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느낌도 좀 들었다라고 말했다. 김장호 선생은 이번 사건이 법리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아 이 재판부가 앞으로 우리(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 재판에 대해서 브레이크를 걸자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원중 선생은 이러한 아쉬운 판결이 촛불 혁명으로 출범된 문재인 정권 하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과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소의 이화영 소장과 함세웅 이사장은 향후 재판을 위해서 구체적인 노력들이 요구된다고 피력했다. 이화영 소장은 이번 간담회와 같이 항소심에서도 지속적으로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담당 변호사와의 직접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함세웅 이사장은 구체적은 방안으로 이번 간담회에서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들의 생각을 요약 및 종합해서 재판부에 직접 전달하는 방안과 그동안 재일동포 중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경우, 재심 신청 현황 그리고 무죄받은 경우에 대한 종합 사례집을 만들어 재판부에 전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함 이사장은 재일동포라는 특별한 상황,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떠나 계셨고 또 일본이라는 특수한 영역 속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지닌 그 부분을 간과하고 국내 사람들을 1차적 대상으로 만든 국가보안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비록  김병주 선생의 재판 결과는 아쉬움과 우려를 낳았지만, 이번 간담회를 통해 담당 변호사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계기가 되는 긍정적인 부분도 발견했다. 이에 인권의학연구소는 앞으로 항소심은 물론 다른 국가폭력 피해 관련 재판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응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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