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고문 피해자와 고문 가해자 사이의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간첩조작 피해자 유족, 국가와 이근안을 상대로 손배소 청구 관련-
지난 6일, 간첩조작 피해자 유족이 고문 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간첩조작 피해자는 1965년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나포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간첩 혐의로 불법 체포되었고, 당시 그에게 고문을 주도했던 자가 바로 이근안이다.
피해자는 이근안에 의해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하루아침에 간첩이 되었고, 7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43년이 지난 2021년 6월 그 피해자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당시 이근안과 국가기관은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죄 없는 시민을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만들어 버렸음이 밝혀진 셈이다.
그럼에도 이근안은 지난 2013년 자서전을 통해 이 피해자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문가해자인 그는 반성과 사과는 온데간데없고 여전히 자신의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합리화하는데 급급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피해자 유족(이 피해자는 지난 2006년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은 이근안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번 소송은 근본적인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하나는 수많은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고문가해자는 언제나 이근안 한 사람이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현행법상 고문가해자에 대한 법적 책임은 형사소송의 테두리가 아닌 민사소송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고문 피해자는 알면서도 고문 가해자는 알 수 없는 걸까. 그리고 우리 현행법은 왜 고문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있는 걸까. 이같이 잘못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가 해결돼야 한다.
고문 가해자를 알아야 한다
첫째, 고문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2021년 10월 기준, 국가기관에 의해 간첩조작으로 사형, 무기징역,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만 449명에 이른다. 이는 재심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 수치이며,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간첩조작 고문피해자들의 수는 사실상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이렇게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여전히 가해자는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문 가해자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 밖에는 없다. 이근안도 수많은 고문 가해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1970-80년대, 고문을 통해 간첩조작을 만들었던 대표적인 수사기관인 중정·안기부(현 국정원), 보안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치안본부(현 경찰청) 등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한 이유다.
다행히 지난해 11월, (사)인권의학연구소가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제기한 ‘부적절한 서훈 취소’ 관련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소송에서 행정법원은 1970-80년대 고문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 이에 고문가해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이 판결을 통해 공개될 고문가해자는 50여 명에 그친다. 당시 수많은 고문피해자의 숫자를 생각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공소시효를 없애야 한다
둘째, 고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간첩조작 피해자 유족이 이번에 이근안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현재 한국 현행법으로는 공소시효 때문에 가해자에 대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현재로서는 고문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공소시효로 인해 법적 근거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고문피해자가 구제를 받으려면 국가에 내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통한 금전적 배상이 전부인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대 국회를 시작으로 20대, 21대 국회에서 고문피해자 지원과 고문가해자 처벌을 위한 '고문방지 4법안'을 제1호 법안으로 발의했다. 이 고문방지 4법안은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구제·지원에 관한 법률안(제정) ▲고문피해의 회복을 위한 청구권의 소멸시효에 관한 특례법안(제정) ▲형법 일부개정법률안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으로 구성됐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고문피해자에 대한 의료지원과 함께 고문가해자에 대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10년 동안 이 법안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20대 국회에서는 당시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이 법사위에서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131명의 국회의원이 관련 법안을 공동 발의하면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나, 여전히 계류 중이다.
며칠 전,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국가를 상대로 간첩조작 피해자 유족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청구소송에 내재된 구조적 결함을 인지하고 이제는 이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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