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의사

[언론보도: 경향] ‘고문 보조’ 양심선언할 의사는 없을까 [경향] ‘변호인’의 군의관처럼, ‘고문 보조’ 양심선언할 의사는 없을까 ▲ 피해자 증언만 있고 실체는 안 드러나… 그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과연 어떤 양심으로 고문 보조자로 일할 수 있었을까 1987년 1월15일 오후,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한 남자 대학생이 사망한 사실이 짤막한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중앙일보 1987년 1월15일 석간 사회면) 나중에 밝혀진.. 더보기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 오연상 원장('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중앙의대 용산병원 내과의사) [인터뷰]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오연상 원장('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중앙의대 용산병원 내과의사) 1987년 6월 10일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하지만 어떤 역사도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이 날이 오기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또한 민주화의 과정에서 일어난 가슴 저린 희생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을 무렵,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높아져갔고 학생 시위는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3월이 되고 대학들이 개강을 하면 다시 불타듯 시작될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고자 전두환 정권은 무섭게도 매질을 해댔다. 대학 학생회 임원들 및 운동권 학생들이 매일 같이 경..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