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변호인’의 군의관처럼, ‘고문 보조’ 양심선언할 의사는 없을까
▲ 피해자 증언만 있고 실체는 안 드러나… 그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과연 어떤 양심으로 고문 보조자로 일할 수 있었을까
1987년 1월15일 오후,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한 남자 대학생이 사망한 사실이 짤막한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중앙일보 1987년 1월15일 석간 사회면)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사망 시간은 14일 오전 11시20분경, 사망 장소는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현재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09호, 사망 원인은 ‘목 부위 압박에 의한 질식’이었다. 즉 박종철은 ‘남영동’으로 끌려간 지 세 시간도 채 안 되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머리를 욕조에 밀어 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해 사망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신은 16일 아침 부랴부랴 벽제화장장에서 화장 처리되었다.
■ ‘박종철 고문 사망’ 왕진의·법의학자 진술로 밝혀져
박종철의 죽음이 AP와 AFP 등 통신사들을 통해 국제적으로, 다시 한국으로 알려지는 등 사안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15일 오후 6시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사건을 해명했다. “박군이 밤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여러 컵 마신 뒤 심문 시작 30분 만에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고 쓰러졌다.”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킨 어처구니없는 변명이었다. ‘박종철 고문 살인사건’이 몇 달 뒤 ‘6월 시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데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망언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명언’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빼라고 한단다. 학생들이 우리 역사에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며. 독재와 거짓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싸워온 우리 역사가 부정적이라는 뜻인지?
다음 날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한 선배 교수가 치안본부장의 해명이 믿긴다고 했다. 자신이 남영동 같은 데에 잡혀가면 수사관이 탁 치기도 전에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질 거라면서. 그 말에 역설적인 진실이 담겨 있을 것이다. ‘남산’이니 ‘동빙고동’이니 ‘옥인동’이니 하는 소리만 들어도 뒷덜미가 댕기고 가위눌리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규명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함께했다. 첫 번째 보도뿐만 아니라 사실을 밝히려는 언론인들의 취재가 ‘보도지침’의 틈새를 뚫고, 또 그것을 넘어서면서 이어졌다. 사망 직후 왕진을 가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내과의사와 부검을 집도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학자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내 19일, 치안본부장은 며칠 전의 발언을 번복하고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그 발표도 축소, 왜곡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아마도 당국이 정치적 또는 공안 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사망을 인정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박종철의 죽음에 앞서 많은 고문 피해자의 폭로와 증언이 있었다. 폭로는 보복을 낳을 수 있기에 가히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당국은 그때마다 사실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투쟁전술로서 고문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라고 피해자들을 매도했다. 바로 그 전해에는 수사를 받던 도중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대생의 폭로도 있었다.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이에 대해 당국은 조사 결과 약간의 폭언과 폭행은 있었지만 성적인 부당행위는 없었다고 발표하면서, 오히려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또 다른 성폭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2년 뒤 법정에서 피해자의 주장이 완전히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1987년을 거치면서 한국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된 덕분이었다.
■ ‘인혁당’ 사건도 고문으로 날조됐다는 사실 드러나
영화 <변호인>이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각색을 한 것이지만 실화 ‘부림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1980년대초 부산 지역의 대표적 공안 사건인 부림 사건에 대해서 법원은 작년 3월 재심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재심 이유로 “피고인들을 영장 없이 20일 이상 구금함으로써 형사소송법을 위반하고 불법체포 및 감금죄를 범한 사실”을 들었다. 또한 비슷한 성격의 용공 조작 사건인 학림 사건, 오송회 사건, 아람회 사건 등이 이미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로 확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부림 사건 역시 무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8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사법 살인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도 고문으로 날조된 것임이 재심을 통해 명명백백히 밝혀지기도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군의관 윤성두 중위가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허구의 인물이다. 비슷한 사람은 없었을까? 고문 피해자를 치료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문 과정에 참여했고 나중에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한 의사는,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없다. 고문에 관여했다고 스스로 밝히거나 알려진 의사도 여태 없다. 우리와 비슷하게 독재정권과 고문 사건들을 숱하게 경험한 칠레, 브라질 등 남아메리카 나라들과 다른 점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을 뿐이다.
“고문은 끝난 게 아니었다. 1986년 5월7일 날이 새자 이들은 피의자(김문수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현재 경기도지사)를 앰뷸런스에 태워 천호동 소재 피의자의 친구 집을 찾아가면서 약도가 틀린 것 같다고 5, 6명이 몹시 때리고 전기방망이로 손과 발을 50회 이상 지져댔다. 못 견뎌 기절하자 다시 송파보안사로 데려와서 의사가 진찰을 했다. 상태가 심각했는지 피의자를 어디인지는 모르나 큰 군병원에 데리고 가서 X-레이를 찍고 약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보안사로 데려와 매일 목욕과 마사지를 시키고 상처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었다고 한다. 피의자는 고문이 이어지는 4일간 소변과 대변을 보지 못하는 등 고통을 당했으며 변호사를 만난 5월23일에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보고서 제2집’. 1987년 2월10일 발간)
■ 나치·일본 731부대처럼 가혹행위 직접 한 의사도
“여러 수사기관, 특히 안기부에서 조사받았던 사람들은 고문 도중에 의사가 건강 이상 징후를 체크하거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희식씨의 경우 ‘안기부 자체 의료진으로 보이는 의사 2명’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이런 진술과 증언들을 모아보면 분명히 안기부 내에는 전속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사 자격을 얻은 후 어떤 양심으로 고문의 보조자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1>. 291쪽)
고문 과정에 의사가 관여한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일이다. 우선 고문 피해자를 치료하는 경우다. 이것은 대부분 인도주의적 목적보다는 고문을 은폐하거나 또 다른 고문을 시행하기 위해서다. 또 인체에 대해 잘 아는 의사가 고문을 비롯한 가혹행위를 직접 행하기도 한다. 독일 나치와 일본 731부대의 의사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 만큼 의사들이 고문에 관여하는 것을 경고, 금지하고 나아가 의사들이 고문을 근절시키는 데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1975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제29차 총회에서 ‘도쿄 선언’을 채택한 일이다. ‘억류와 투옥에 관련된 고문과 그 밖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비열한 조치와 처벌에 관한 의사 지침’이다. 이 선언이 1975년 가을에 발표된 것은 그 무렵 한국의 사법 살인 사건 등 국가폭력이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의사회는 그 뒤에도 상황 변화에 맞게 ‘도쿄 선언’의 내용을 보완하고 구체화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 의사가 고문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도쿄선언’
도쿄 선언의 핵심은 의사가 고문에 참여하거나 조장·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의사가 고문을 위한 시설·도구·지식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고문이나 그 밖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관여하거나 묵인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위협과 보복을 받는 의사들을 지원하는 것도 선언의 주요 내용이다. 요컨대 고문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묵인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선언의 정신이자 핵심 내용이다. 윤 중위의 증언은 이 ‘도쿄 선언’을 따르는 것이자 그 선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법정 의사단체인 대한의사협회는 2001년 처음으로 ‘의사윤리지침’을 제정했다. 총 6장 78조로 구성된 이 지침의 제4장은 ‘의사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이며 그 아래 다음과 같이 고문과 관련된 조항이 있다.
제45조(인권 보호 의무) ① 의사는 고문 등 인권을 유린하거나 침해하는 행위를 자행·교사·방조하거나 그러한 행위를 묵인 또는 은폐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제1항에서 규정한 고문에는 신체적 폭행뿐만 아니라 불법적 감금, 정신적 압박, 언어적 폭력, 성적 폭력, 강제 급식, 잠 안 재우기 등도 포함된다.
③ 수사에 관여하는 의사는 수사와 관련하여 고문의 의심이 있는 경우 그 사실을 상급수사기관, 인권 관련 기구 또는 의사회 등에 고발, 보고하여야 한다.
지침을 만드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침조차 없는 것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터이다. 대한의사협회는 2006년 ‘의사윤리지침’을 전문 개정하면서 인권 보호에 관한 조항을 완전히 삭제했다. 한국은 고문이나 인권 유린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고문에 대한 항거의 기억조차 국가기관이 나서서 지우려는 판에 과연 그럴까?
(위 내용은 2014년 1월 10일 『경향신문』'황상익의 의학파노라마(5)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에 게재되었던 기사입니다. 기사 원문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02057165&code=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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