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2018.01.05 15:52

연이은 물고문 전기고문, 죽음 문턱까지 간 김근태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4] 민청련 탄압 사건의 서막

 

1985년 8월 24일, 김근태 전 의장이 전격적으로 체포됐다.

민통련 사무실이 있는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 부근의 한 커피숍에 들렀을 때였다. 중부경찰서 정보과 소속 형사대가 덮쳤다. 체포를 모면하려고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경계해 왔는데, 그날따라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랬는지 잠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었다. 그때부터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사복 경찰들의 미행이 시작됐던 것이다.

연행된 김근태는 구속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경범죄로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다. 민청련 제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이었다. 민청련 활동 이후 6번째 겪는 구류 처분이었다.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그는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그까짓 구류 10일 정도야 참아낼 수 있었다.

 

 

 

     (기사 원문을 보려면 다음을 클릭하세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0821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근태2013.05.22 16:13

인재근 의원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연설문

 

2012년 6월 26일, 고문 생존자들의 모임인 '진실의 힘'은 '진실의 힘 인권상' 2회 수상자로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선정했다. 이 글은 인재근 의원이 남편 김근태를 대신해 상을 받으며 발표한 수상 연설문이다. 인재근 의원은 수상 연설문에서 치유센터 설립 의사를 밝혔다.

 

 

 

 여러분, 그리고 김근태를 기억해 이 자리에 오신 모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재근입니다.

 

 흥사단에 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30여 년 전 바로 흥사단에서 오늘의 인권상 수상자인 민주주의자 김근태와 결혼을 했습니다. 수배를 받던 시절이라 아들 병준이를 먼저 낳고 4개월쯤 되었을 무렵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 식구가 신혼여생을 버스를 몇 번인가 갈아타고 공주 우금치로 다녀왔습니다. 마치 엄마아빠를 위한 결혼 선물을 주듯 갓 백일을 지난 아들 병준이는 떼도 쓰지 않고 잘 울지도 않고 착하게 굴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고 30여 년 만에 다시 선 흥사단이지만 결혼식 때처럼 설렙니다. 진실의 힘 때문인가요. 오늘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30년 전 그 날보다 김근태가 더 강하게 느껴지고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남편 김근태가 살아있었다면 이 상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김근태는 늘 미안해 했습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고문 받고 다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분들이 너무나 많은 데 그분들에 비해 김근태 자신은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에 대한 보상과 치유, 그리고 그분들을 둘러싼 잘못된 역사바로잡기가 더디기만 한 것을 속상해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진실이 밝혀지고 보상을 받게 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남편 김근태는 인권상 보다도 진실의 힘의 존재 그리고 여러분과의 만남을 더 귀하게 여겼을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김근태는 미안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진심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고문피해자 분들과 그 가족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며 미안해하고 마음 아파했을 겁니다. 그리고 고문의 기억이 되살아나 며칠 몸살을 앓았겠지요. 바로 그것이 고문의 트라우마가 주는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함께 힘을 모아 스스로 치유와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 바로 이것이 진실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진실의 힘의 활동을 보고 직접 체험하였다면 김근태는 너무나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했을 겁니다. 김근태의 흐뭇한 미소와 믿음으로 일렁이는 눈빛이 이곳에 한가득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길고 빼곡한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이유를 보았습니다. 김근태와 인재근의 지난날에 크고 깊은 의미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수상소감을 어찌할지 궁리를 할수록 김근태가 진실의 힘 인권상을 수상하고 그 상을 이곳 흥사단에서 인재근이 해야 할 이유를 더 찾아오라는 시험문제를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늘까지 그 답을 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계속 답을 찾아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진실의 힘, 인권상, 김근태, 이재근을 화두로 삼고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의 첫 번째 화두는 남편 김근태의 갑작스런 소천 이후 인권상과 함께 찾아 온 진실의 힘은 과연 어떤 인연, 어떤 뜻인 것일까 입니다.

 

 작년에 남편인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킨슨병으로 고생을 해왔는데 뇌정맥혈전증이 갑자기 찾아왔고 고비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저나 지인들 심지어 의사마저도 예상치 못한 급격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파킨슨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지긴 했어도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읽고 쓰기는 물론 말도 잘했고 축구나 산책 같은 운동도 하고 민주대연합 관련 대외활동도 활발히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을에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고 끝내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가을이었습니다. 남편 김근태는 가을만 되면 늘 며칠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고문을 받던 계절이 가을이어서 늘 고문의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못살이 나고 몸을 옴싹달싹 못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직접 겪어보지 봇한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고통의 시간들을 정신력이 워낙 강한데다 타고난 성품이 고운 사람이라서 짜증이나 화풀이 없이 혼자서 다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몸이 다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되는 느낌이었지만 남편 김근태는 미소와 넉넉한 눈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조차도 남편의 고통과 상처를 점점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 김근태가 떠나고 세상이 김근태의 인생과 파킨슨병에 주목하게 되고 민주주의와 고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께서 남편 김근태가 떠나는 길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이름으로 김근태를 기억하겠노라고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많은 분들이 김근태와 고문, 그리고 이근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보며 저 역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파킨슨병을 여러 이유 때문에 쉬쉬했던 점이 특히 후회가 되었습니다. 파킨슨병을 감추게 되자 파킨슨병의 원흉인 고문후유증도 감춰지게 되고 결국 고문을 국가나 사회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부하고 말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문의 개인적 차원조차 김근태의 강한 정신력과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치유가 아닌 불편함의 인내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병상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눈을 껌벅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남편 김근태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은 고문이 김근태를 너무나 힘들게 했엇고 그의 몸과 정신을 거의 다 허물어 뜨려 놓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상은 벼랑 끝에서 웃고 있는 김근태의 용기와 절규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내조차 넉넉함과 부드러움으로 오해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 문든문득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김근태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였습니다. 강한 정신력과 천성이 고왔던 것과 별개로 김근태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이근안을 만났어도 용서도 안 되고 치유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전문적이지 못한 즉흥적인 이벤트로 치유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고문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고 김근태의 인격을 높게 평가했던 주변 사람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고문은 이쯤 되면 용서할 때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깊은 연구와 관심 그리고 꾸준한 치료를 통해 치유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함세웅 신부님이 고문치유센터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저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형식으로 고문치유센터를 만들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진실의 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늦어서 죄송합니다. 남편 김근태와 함께 은페된 고문의 진실을 밝히고 현재와 미래의 고문을 막아내며 고문의 국가적, 사회적 치유에 좀 더 일찍 헌신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늦은 게 아니라 지금 시작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햐겠습니다. 김근태의 이름을 걸고 진실의 힘과 함께 고문이 없는 나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나라를 만드는 길에 매진하겠습니다. 그 출발은 바로 고문치유센터입니다. 진실의 힘과 김근태 인재근이 만나게 된 이유를 저는 고문의 치유와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제가 구한 첫 번체 화두의 대답입니다.

 

(중략)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진실의 힘 여러분, 그리고 동지, 동료 여러분, 감사합니다. 김근태가 영원한 민주주의자이듯, 저 인재근은 영원한 인권지킴이입니다. 인권상을 통해 케네디가문이 20세기 인권운동가 인재근에게 큰 힘이 되었듯이 진실의 힘은 인권정치인 인재근에게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비록 미약할지라도 제 모든 최선을 다해 진살의 힘의 좋은 친구로 남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근태와 저는 진실의 힘 인권상을 통해 고문에 대한 진실과 치유, 그리고 인권의 지킴과 증진이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명의 길은 함께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진실의 길, 인권의 길, 그리고 세상의 힘이 되는 길에 언제나 김근태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때론 왼발이 되고 때론 오른발이 될 때 진실의 힘도 영원하고 김근태도 영원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ijk.or.kr/rb/?m=bbs&bid=society&uid=58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622115012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근태2013.04.30 18:08

 

 

2012년 12월 10일(월)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공동대표 : 함세웅,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인재근)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의 밤 행사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이 땅의 수많은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포괄적 지원을 위해 김근태기념 치유센터가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의 밤> 

 

지난 한국의 현대사에서 고문은 일상적인 사건이었으나 그들의 희생으로 이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홀로 고통을 견디어 왔습니다. 김근태 님 역시 홀로 고통을 견디다 64세의 나이에 파킨슨병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날은 더 이상 또 다른 김근태들이 고통을 홀로 견디다 쓰러져 가지 않도록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사회 정의의 회복과 피해자 고통의 치유를 위해 약속하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1부 행사에서 인사말씀을 하시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 함세웅 신부>

 

 <1부 행사에서 인사말씀을 하시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 인재근 의원>

 

후원행사에는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장이신 함세웅 신부와 고 김근태 님의 부인이신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을 비롯해 과거 독재 정권의 억압에 저항하였거나, 그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국가폭력을 경험했던 희생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독재 정권에 저항한 이들을 지지하거나 희생자들을 지원하려는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 역사의 현장에서 각각 서있는 곳은 달랐지만 국가폭력의 부당함과 피해자의 치유에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남영동 1985' 영화에 출연한 박원상, 이경영 배우들과 정지영 감독도 참석하였습니다. 특히 "울릉도 1974" 책에서 소개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직접 책에 서명하여 후원 행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와 가족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소개한 '울릉도 1974'>

 

최창남 목사님의 사회로 1부 순서는 고문 희생자들을 위한 묵례로써 시작하였습니다. 함세웅 신부와 인재근 의원의 환영 메시지에 이어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김근태기념 치유센터의 필요성과 설립경과보고'를 통해 고문피해자의 고통의 내용과 포괄적인 치유시스템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현재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30만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으나, 국가가 양산한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구제법이나 치유센터도 없는 실정을 지적했습니다.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묵례를 하고 있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이경영·박원상 배우>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 경과 보고'을 하고 있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

 

2부는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다-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이란 제목의 연극 공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연극은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에서 기획, 초연되었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국 고문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세터로부터 한국의 고문피해자 사례를 추가하여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후원행사를 ㅜ이한 공연을 하는데에 합의했다고 합니다. 이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의 젊은 연극인들 9명이 모여 준비하였고 공연 후 재능 기부함으로써 치유센터 설립에 동참하였습니다.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다-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을 공연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젊은 연극인들>

 

김미화 방송인의 사회로 진행된 2부의 기부행사는 자선경매로 시작하였습니다. 함세웅 이사장님이 기부한 김서경 작가의 "촛불소녀", 효림스님의 서예작품인 "김남주 시인의 노래", 아산 조방원의 부채화를 비롯해 최창남 목사의 "노동의 새벽", "모두 여기 모여 있구나" 악보 원본,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책 등이 기증되었고 경매를 통해 모두 낙찰되었습니다. 이어서 진행된 giving pledge에서는 다양한 기부 서약들이 나왔는데 "후원회원 100명 모집"의 서약부터 "작곡한 노래의 저작권 기부", "무료법률상담", "매년 100만원씩 후원"과 함께 진행을 맡은 김미화 방송인은 진행비 일체를 기부하겠으며 더불어 다음 행사의 진행도 기부하겠다는 서약을 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손병희 가수의 선창으로 고 김근태 님이 즐겨 불렀다는 "사랑으로"를 함께 부르며 후원행사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2부 기부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김미화 방송인과 함세웅 신부>

 

<함세웅 신부가 기부하신 김서경 작가의 "촛불소녀"와 김미화 방송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기부하신 저자 유동우 님>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후원 약정서를 작성하시는 참석자>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후원행사를 통해 참석자들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나아진 인권 상황은 과거 억압정권에 저항하였던 이들의 희생의 결과이며 더 이상 국가폭력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 피해자를 치유하고 돌보아야 함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가혹한 신체적 고문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지만 고문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고문은 진행형인 것입니다. 고 김근태 님은 고문피해자이자 생존자였으며 이제는 치유의 길을 열고 있으니, 아직도 이 땅의 수많은 드러나지 않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를 통해 우리 사회에 널리 드러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동참할 것을 후원행사 참석자들은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고 사죄는 커녕 자신의 범죄행위를 애국으로 정당화하는 현실, 과거 독재정권의 권력자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부정의(injustice)는 피해자에게 극심한 분노를 일으키고 심리적 안정감을 해치기 때문에 정의(justice)의 실현은 피해자들의 치유를 위해 매우 중요한 요건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후원의 밤을 통해 인식된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피해자 고통에 대한 분노를, 이제는 치유를 위한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할 때 이 땅의 국가 폭력은 종식될 것입니다.

 

<고 김근태 님이 즐겨 불렀다는 "사랑으로"를 선창하는 손병희 가수>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올해 2013년 6월 26일(UN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에 개소할 예정입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을 위해 먼저 나선 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대표: 함세웅, 김상근, 이창복, 이석태, 인재근

설립추진위원: 강창일, 김동규, 김민기, 김봉준, 김부겸, 김수정, 김영준, 김용익, 김형태,

                     문병호, 민병두, 박경욱, 박민규, 박순희, 박영선, 박재영, 석정각, 손창호,

                     송기복, 송기홍, 신인령, 신좌섭, 심재환, 양길승, 오영식, 유동우, 유시춘,

                     유영표, 유은혜, 유인태, 유종일, 유충희, 윤영전, 이낙연, 이명춘, 이부영,

                     이영문, 이왕준, 이재명, 이 철, 이 철(일), 임수경, 정강자, 정동영, 정성헌,

                     정인재, 정청래, 주영수, 차인현, 최규성, 천정배, 최인순, 최창남, 한명숙,

                     홍구, 함주명, 현승민, 황주영

집행위원: 남평오, 문국주, 염형국, 이상희, 임채도, 현창하, 이화영

 

정리: 이화영(인권의학연구소장)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국내 첫 고문피해자 전문 민간 치유센터로서

고문피해자들의 치유와 재활을 통해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001-808614

(예금주: 인권의학연구소)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근태2013.03.26 12:07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 - 함세웅신부님의 인터뷰기사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하)

‘大통합’이라… 기초작업 없이 큰 집만 짓겠다는 것은 거짓 아닌가

▲ 함세웅 신부는 지난해 사제직에서 공식 은퇴했지만 우리 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향후 활동 계획에 대해 말할 때에는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이호정 기자 hojeong@seoul.co.kr
우리 나이로 일흔둘. 오랜 삶의 길을 걸어온 함세웅 신부지만 지난 일보다 지금의 일에 대해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숨 고를 틈조차 없이 활동하는 이유다. 함 신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핍박받는 이들이 널려 있다는 증거다. 그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사망 사건(1987년)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정치 민주화를 이끈 지 올해로 26년이 됐지만, 경제민주화, 남북 화해·통일,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그가 나서야 할 일들은 수북이 쌓여 있다. 이 때문에 노(老) 신부의 마음은 바빠 보였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함 신부를 다시 만나 민주화 이후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이어 갔다.

민주화 이후 함 신부와 사제단에 전국민적 시선이 다시 쏠린 건 2007년 10월 김용철(55)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 민주화의 물꼬가 터진 지 꼬박 20년째 되던 해다. 삼성그룹 구조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 변호사가 “내 이름의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원이 관리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며 시작된 사건은 17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한국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10월 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경제정의민주화 운동을 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사제단의 고문인 함 신부도 회견 자리를 지켰다. 그는 김 변호사를 처음 만난 그해 10월 18일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김 변호사가 가까운 친구 등과 저를 찾아왔어요. 그는 자신이 삼성 탓에 당했던 고통을 쏟아냈어요. 예컨대 삼성에서 나온 뒤 검사 출신 선배와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는데 삼성이 압력을 가한 까닭에 사건을 못 맡고 있다는 등의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비자금 조성 등 삼성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털어놨어요. 얘기를 다 듣고는 저와 동료 사제들이 김 변호사를 나무랐어요. ‘삼성에서 간부를 지낸 당신도 결국 공범자인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왜 왔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요. 삼성을 위해 일하면서 잘못한 일은 인정하지만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 책임자가 저지른 범죄가 워낙 크니까 자기고백을 통해 삼성의 범죄도 고발하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모두 알아채고 정화시켰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어요. 김 변호사는 당시 삼성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가 물었죠. ‘김 변호사, 당신 감옥 갈 각오 돼 있소?’라고요. 그랬더니 ‘돼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럼 같이 하자’고 했죠.”

▲ 함세웅(왼쪽 세 번째) 신부가 지난해 8월 26일 서울 중구 신당6동 청구성당에서 사제 은퇴를 앞둔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뒤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 함세웅 신부가 지난해 10월 22일 서울광장에서 ‘유신 40주년에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한다’를 주제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국시국기도회에서 강론을 하고 있다.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함세웅(왼쪽 두 번째) 신부가 북한 조선종교인연합회 장재언(가운데) 위원장 등 남북 대표단 일행과 2010년 3월 중국 다롄 뤼순 옛 일본군 감옥 ‘안중근 의사 추모실’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이후 사제단은 김 변호사를 보호하며 삼성의 비자금 조성과 사회 전방위로 진행된 불법 로비의 수법, 검찰·언론계·관계와의 유착 의혹 등 파괴력 있는 폭로를 이어 갔다. 함 신부와 사제단은 이 사건이 단순히 거대 재벌의 비리를 폭로하는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경제민주화의 신호탄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우군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검찰과 언론은 물론 믿었던 노무현 정부까지도 사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삼성 돈의 힘이 컸어요. 부끄럽게도 노무현 정부는 삼성에 이미 예속돼 있었어요. 노 대통령은 물론 그 아래 참모진도 몇 명 빼고는 모두 삼성 편에 서 있었습니다. 어렵게 특검까지 끌고 갔지만 특별검사가 삼성에 종속된 사람이었어요. 특검은 의혹 대부분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일부 조세포탈 및 배임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기소했어요. 결국 우리가 폭로한 삼성의 불법 행위는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나고 삼성 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에 대해서 이건희 회장의 배임 혐의를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리는 등 법의 심판이 일부 있었지만 이마저도 넉달 만에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 줬습니다. 삼성이 우리 사회 전반을 다 돈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체감했어요. 그때가 기업민주화와 경제민주화를 할 절호의 시기였는데…. 몇몇 기자들이 비아냥대며 ‘신부님이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오히려 찾아준 셈이에요. 이건희씨에게 감사받아야 해요’라고도 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계나 법조계, 언론계와 달리 자본권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천주교단은 사제단에 큰 힘이 돼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함 신부의 설명은 달랐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자 가운데 삼성에 다니는 간부들이 많고 대기업으로부터 사회복지 후원금을 많이 받으니까 기업의 불법성을 고발하지 못해요. 어찌 보면 교회는 기업이 흘리는 떡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사는 거죠.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이었을 당시 김 변호사를 도왔던 전종훈(57) 신부에게 안식년을 명분으로 3년이나 성당을 맡기지 않았어요. 권한을 남용한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죠. 신부들이 삼성비리 폭로에 앞장서니까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함 신부와 사제단은 정계 등의 인사들로부터 ‘왜 삼성 같은 기업을 몰아세우느냐’는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함 신부는 “우리도 국제적 기업인 삼성이 잘되길 바랐다. 다만 건강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한 것이다. 불의한 오너 일가가 적은 자본으로 기업을 사유화하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 결과는 사제단의 애초 계획과는 엇나갔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열병같은 진실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나는 말한다. ‘사제단이 있다’고…”라고 적을 만큼 함 신부와 동료 사제들에 게 깊은 경의와 신뢰를 표했다.

함 신부가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공식 은퇴한 뒤 가장 공을 들이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근태 기념 치유 센터’ 건립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인권의학연구소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사업인데 고문 등 잘못된 공권력 탓에 정신적 상흔을 껴안고 사는 이들을 위한 치유 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이다. 함 신부와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의 노력 속에 건립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고문 피해자이자 ‘민주화의 대부’인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이름을 내걸었다. 함 신부가 고문 피해자 문제에 다시 관심을 가진 것도 김 전 의원 때문이다. “1970~1980년대에는 정부기관으로부터 고문당한 분들 이야기를 듣고 마음 아파 밤잠을 설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수십년을 들으니까 저도 고문 피해의 무서움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김 전 의원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김 전 의원과는 1980년대 만나 30년을 가깝게 지냈거든요. 우리들은 그에게 ‘민주화 선봉가로 앞장서라, 더 뛰어라’, ‘왜 그렇게 행동에 신중하냐’라고 채근하고 등을 떠밀었어요. 그런데 2011년 12월 30일 김 전 의원이 돌아가신 뒤 그가 서울 남영동의 경찰 대공분실에서 전기 고문 등을 받아 평생 후유증을 앓은 사실이 재조명됐잖아요. 그제서야 ‘아, 우리가 김 전 의원이 고문당한 사실을 잊고 지냈구나. 사선을 넘나든 분께 위로와 치유를 주기보다는 너무 가혹하고 모진 주문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문을 견뎌 냈던 김 전 의원같은 분들 덕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열매를 맛보고 있잖아요.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이 김 전 의원 같은 분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공권력 피해자와 그 자녀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센터 건립을 위해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또 지난 1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함 신부는 진보정치 진영의 원로다. 지난해 18대 대선 때도 재야원로회의에 참석해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 측에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그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대통합을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대(大)자가 들어가면 항상 거짓이 있어요. 통합은 진실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해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구원론을 통합원리와 해체원리로 설명하거든요. 통합원리는 사랑, 용서, 자비, 은혜, 상생 같은 것이고 해체원리는 회개, 갈등, 뉘우침, 고발 같은 것이에요. 둘 다 예수님의 가르침이지요. 큰 집을 지으려면 잘못 지어진 집을 허물고 땅을 파야 해요. 이것이 해체 기능이에요. 그런데 아무런 기초작업 없이 큰 집만 짓겠다는 것은 거짓이죠. 다시 말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된 과거를 뉘우치고 청산해야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구호는 구호일 뿐 정치가 될 수는 없어요.”

함 신부는 야권에도 애정 어린, 그러나 따끔한 질책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열린우리당 의원의 절반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과 똑갚습니다’라고요. 성향과 관계없이 정치꾼인 거예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야권 내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정신 못 차리는 것이 가슴 아프죠. 정치인 본연의 소명대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야당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정권교체는 저절로 이뤄지겠죠. 한 시민으로서 저도 야당 의원들을 달래고 채찍질하며 끌어가야겠죠.”

함 신부에게 “세간의 평가처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진보, 보수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모순된 답변인 듯 들려 재차 물었다. “보수와 진보를 지금처럼 나누는 언론의 인식이 잘못됐어요. 원래 보수라는 단어는 뜻이 좋아요. 한자로 ‘보전하고 지킨다’는 것이니까요. 즉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 가치를 지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돼 있어요. 결국 참된 진리를 지키고 보전하면 진보주의자가 되는 거죠. 언론이 말하는 보수는 수구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반민족 행위를 칭송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수겠어요.”

사회 약자의 편에 서서 한평생을 산 함 신부에게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행복해질 수 있는 비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선 ‘어려움아, 놀자’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요즘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근엄하고 초월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고 인간과 함께 뛰어 노시는 하느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신으로 인식하거든요. 두 번째로는 우리보다 어렵고 억울한 사람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이 사회에 주신 메시지는 아마 ‘그래, 나 억울한 사형수다. 네가 힘들고 억울해도 나보다 억울하냐. 난 죽었잖아. 넌 그래도 살아 있잖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청년들 가운데 피자를 10분 빨리 배달하려다 사고로 숨진 이도 있고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용광로에 빠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잖아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젊은 기자는 “종교·사회의 원로에게 살아가면서 힘이 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함 신부의 답이 돌아왔다. “원로? 나 원로 아녜요. 아직 청춘이지(웃음).”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이글은 서울신문 3월18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근태2013.03.26 12:02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 - 함세웅신부님의 인터뷰기사 (상)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상)

 

아버지, 불의에 맞설 용기를 주소서…

오늘도, 도시의 신부는 거리로 나선다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세웅(왼쪽) 신부가 지난달 25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생명평화미사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함 신부는 매주 월요일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 1979년 구속 100일만에 풀려나 기뻐하는 모습.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 1974년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였던 고함석헌(오른쪽)선생과 함께.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 1965년 우르바노대 신학원 유학시절.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원문을 보시려면 다음을 클릭하세요

이글은 서울신문 3월 11일자 기획기사로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근태2013.03.15 11:33

- 무관심을 분노로, 분노를 행동으로-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고문가해자도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몸도 아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의

눈먼 냉담함이다.

 

- Halfdan Rasmussen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12.10)에서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경과보고를 하고 있는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소장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동영상을 클릭하세요.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근태2013.03.15 11:16


국가폭력은 직접적인 고문 외에도 사회·경제적 배제와 박탈,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고립과 압박 등 다양한 형태로 개인을 파괴한다. 그 피해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일견 사소한 국가폭력의 경험이 개인에 따라 극심한 정신심리적 후유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폭력 피해의 치유는 의료적 접근 외에도 사회, 정치, 법률, 문화예술 등 통합적 영역에서 피해자 삶의 복원과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목표설정이 매우 중요하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피해자의 고통을 병리화하거나 피해자를 치료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고자 한다. 또한 고문생존자가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면서 피해자의 이미지를 벗어나 자신이 치유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고문...생존자들의 경험과 삶을 이해하는 것은 치유의 첫 걸음이다.

한국의 경우, 2000년 이후 4·3항쟁, 5·18항쟁 피해자 등 다수의 과거사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적 사과와 경제적 배·보상, 지원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피해자들의 삶의 질 차원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제적 보상이 이미 이루어진 5·18 피해자들의 경우 전체 5·18 유공자 가운데 절반정도가 여전히 최저생계비 이하의 빈곤상태에 처해 있다. 5·18 피해자들의 자살 통계를 보면, 1980년대 25명, 1990년대 3명, 2000~20011년까지 12명으로 경제적 보상과 관계없이 오히려 자살율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가 가야할 길

국가폭력은 직접적인 고문 외에도 사회·경제적 배제와 박탈,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고립과 압박 등 다양한 형태로 개인을 파괴한다. 그 피해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일견 사소한 국가폭력의 경험이 개인에 따라 극심한 정신심리적 후유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폭력 피해의 치유는 의료적 접근 외에도 사회, 정치, 법률, 문화예술 등 통합적 영역에서 피해자 삶의 복원과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목표설정이 매우 중요하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피해자의 고통을 병리화하거나 피해자를 치료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고자 한다. 또한 고문생존자가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면서 피해자의 이미지를 벗어나 자신이 치유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고문생존자들의 경험과 삶을 이해하는 것은 치유의 첫 걸음이다.

한국의 경우, 2000년 이후 4·3항쟁, 5·18항쟁 피해자 등 다수의 과거사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적 사과와 경제적 배·보상, 지원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피해자들의 삶의 질 차원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제적 보상이 이미 이루어진 5·18 피해자들의 경우 전체 5·18 유공자 가운데 절반정도가 여전히 최저생계비 이하의 빈곤상태에 처해 있다. 5·18 피해자들의 자살 통계를 보면, 1980년대 25명, 1990년대 3명, 2000~20011년까지 12명으로 경제적 보상과 관계없이 오히려 자살율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는 국내 첫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 전문 민간치유센터로 다음과 같은 지향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o Vision
“고문없는 세상”

o Value
- 3대 기본 가치 : 평화 / 인권 / 민주주의

o Mission
- 모든 부당한 국가폭력에 대한 반대
- 고문피해자들에 대한 치유와 재활 프로그램의 제공
- 고문피해자들에 대한 공동체적 연대와 책임의 공유
- 고문방지를 위한 국제규범의 준수와 협력

o Objectives
- 치유센터의 전문 역량 강화
- 피해자들을 위한 치유 & 재활 프로그램의 개발과 시행
- 고문방지와 피해보상 법제화 추진
-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사회연대 기금 조성
- UN 및 국제 민간기구들과의 고문방지 협력사업

김근태 치유센터 설립 추진 계획

o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건립추진위원회> 구성
- 김근태 치유센터의 가치와 비전에 공감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설립추진 기구
- 고 김근태님 유족 대표와 고문 피해자, 시민사회단체, 전문가, 학계 등을 망라하는 집행위원회에서 설립 업무 추진
- 집행위원회에서 여론 수렴과 공청회 등을 거쳐 김근태 치유센터를 이끌어 갈 이사진 구성을 위한 ‘추천위원회’ 구성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