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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인터뷰

[김성만 선생님 인터뷰-②]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싶어요!’

[김성만 선생님 인터뷰-]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싶어요!’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성만 선생님의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무죄에 대한 소회와 재심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물리학도 시절의 김성만 이야기, 유학시절의 김성만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 사진은 지난해 7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확정을 받고 나오는 길이다.왼쪽에서 두 번째 검은 정장을 입은 분이 바로 김성만 선생님이다.

물리학도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이유

Q. 선생님은 원래 전공이 물리학이었더라고요. 대학을 처음 가셨을 때는 민주화 또는 사회참여에 관심이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계기로 민주화 운동과 사회참여에 뛰어들게 되신 거예요?
(김성만) 계기는 제가 기독교 집안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세대에 입학해서 기독학생회 서클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 박정희 정권 하의 민주화운동은 종교인들이 주도를 했고, 특히 기독교에서도 많은 참여를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위해 기독학생회 서클에 가입을 했는데, 그 서클의 분위기 자체가 민주화 의식으로 학생들이 준비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게 되고, 배우게 되었죠. 그러면서 저도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된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아무래도 전공 공부는 소홀하게 되고 겨우 졸업한 이후에는 아예 정치학을 공부해서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 전공을 바꾸게 된 거죠.

 

  <사진-1> 이 사진은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하다 1998년 8월 15일 출소한 후 찍은 젊은 시절의 김성만 선생님 사진이다. (출처 : 한겨레)

Q. 그럼 대학을 입학하고 처음에는 사회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겠네요?
(김성만) 아무래도 그렇죠. 저는 물리학 교수가 꿈이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물리학 교수가 꿈이었고, 그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어요. 물리학을 공부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Q. 그 정도로 물리학이라는 학문에 애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에 전념하게 되신 걸 보면, 처음에 기독학생회에서 접하게 된 사회문제의 충격이 크셨던 것 같아요.
(김성만)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나서는 외면할 수가 없게 된 거죠.

 

Q. 그 부분은 신앙의 양심, 내가 이 현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양심?
(김성만) 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이 역사적으로 가치 있게 살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어서 역사에 기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독학생회에서 민주화운동과 사회 현실을 접하면서 사회적으로 가치 있게 살겠다라는 다짐으로 변하게 된 거죠.

 

미국에서 깨닫게 된 한국의 현실

Q. 사회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활동을 하겠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네요! (웃음) 그럼 선생님이 이제 물리학이 아닌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가셨는데,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떠셨어요?
(김성만) 우여곡절이 많았죠. 유학을 가면서 저는 단순히 학자가 아니라 사회참여형 지식인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정치학으로 전공까지 바꿨는데요.  6개월 동안 웨스턴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하는데 정말 힘들더라고요. 영어를 잘하긴 했지만, 현지 친구들처럼 내용을 이해하고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배 이상의 시간을 공부해야 했어요. 그렇게 6개월을 하고 났는데 한국 정치상황이나 민주화에 대한 공부는 전혀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단을 내렸죠.

 

<사진-2>  이곳은 김성만 선생님이 뉴욕에 거주하면서 동아시아 관련 서적을 접하게 된 컬럼비아 대학교 켄트홀 도서관의 사진이다.

Q.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신 거예요?
(김성만) , 그만뒀어요. 그리고 웨스턴 일리노이에서 뉴욕으로 갔죠. 뉴욕에서 오히려 정말 공부를 많이 했어요. 거기에 컬럼비아 대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 도서관에 동아시아 관련 서적은 물론 조선일보, 노동신문 등 자료가 엄청 많이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도저히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게 된 거죠.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참상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Q. 한국에서 알던 5.18과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알게 된 5.18이 많이 달랐었나요?
(김성만) 완전 달랐죠. 당시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보면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절대 비판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여러 자료들을 통해 5.18 당시 미국 정부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전두화 정부의 군사력 사용을 승인하고, 실질적으로 전두환 독재정부를 지원한다는 점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죠. 그리고 다양한 학자들이 쓴 논문들을 보면서 미국은 한국과의 동맹을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거기서 정말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그렇게 6개월 정도 공부하고 나서, 당시 읽었던 자료들을 가지고 국내에 이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84 페이지 단행본: 예속과 함성

Q. 그래서 국내에 들어오신 거예요? 선생님은 결단을 하시면 바로 행동에 옮기셨네요!
(김성만) , 모든 자료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죠. 그렇게 가지고 들어왔던 모든 자료들을 제가 유학 가기 전에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과 같이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특별하게 관심을 가졌던 이슈가 바로 5.18 민주화운동과 미국의 관계,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핵문제였어요. 당시에는 이 두 가지 이슈가 모두 생소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공부했죠. 그리고 그렇게 같이 공부하면서 세 명이서 함께 예속과 함성이라는 팜플렛을 제작해서 전국에 배포하게 된 거죠.

 

Q. ‘예속과 함성이라는 결과물이 결국 미국 유학을 다녀오셨기 때문이네요!
(김성만) 그렇죠! 그래서 제가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조사관 한 명이 저한테 너는 어떻게 미국에 가서 반미주의가 됐냐?”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Q. 그럼 당시 예속과 함성은 학생들 사이에서 반응이 어땠었나요?
(김성만) 예속과 함성을 만들어서 전국에 배포를 했는데, 전국에서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읽었어요. 제가 감옥에 있는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유인물을 1장이라도 잘못 복사하면 잡혀가는데 예속과 함성은 학생들 사이에서 200-300부씩 복사해서 나누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당시 예속과 함성이 민주화운동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데요, 국가기록원에 가면 구미유학생 사건에 대한 설명이 있어요. 그 설명에 보면 예속과 함성은 순미사상이 지배적이었던 한국에 미국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서적이며, 그것이 그 이후의 학생운동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Q. 정말요? 제가 잘 모르고 있었네요. 저도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김성만) 근데 재밌는 거는 어떤 서적을 봐도 당시 예속과 함성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요. 그 이유는 예속과 함성을 만들었던 제가 간첩으로 조작되어 세상에 알려졌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속과 함성을 읽고 영향을 받았어도 그렇다고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예속과 함성을 읽고 동조하는 순간 북괴의 대남적화전략에 놀아난 것이 되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예속과 함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개인적으로 남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내가 우리 나라 민주화 역사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고 자부해요. 어떻게 보면 이 마음으로 지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진 -3> 지난해  7월 29일 , 대법원 무죄확정 판결 이후 '꽃길만 걷자'라는 초를 얹은 케익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 양동화 선생님, 김성만 선생님이다.

앞으로의 꿈

Q. 그동안 정말 힘든 시간을 견뎌내셨고, 이제 무죄를 받으셨는데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꿈을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김성만) 저는 여전히 꿈은 똑같아요. 무죄를 받기 전에는 예속과 함성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미친 영향력을 그냥 혼자만 알고 죽으려고 했고, 출소하고 난 후에 오랫동안 북미관계·북핵관계에 대해 공부했지만 이것도 그냥 혼자 알고 죽으려고 했어요. 근데 이제 무죄를 받고 나서 그동안 공부하고 고민했던 것을 통해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을 지금 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조금은 가볍게 제가 사형수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여러 에피소드를 담은 책도 한 번 쓰고 싶네요.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김성만 선생님으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의 열정, 사형수로 생활하면서 겪어야 했던 무기력감, 출소 후 사회의 벽 등등.. 이야기 속에서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민족문제, 북핵문제, 민족의 진로 등을 이야기하는 김성만 선생님의 눈빛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청년 김성만을 본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바빠지실 김성만 선생님,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인터뷰 진행자: 박민중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