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 인터뷰] 가장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닌 오늘공동체

-오늘공동체의 박민수 대표를 만나다-

 

 지난 8 12일 도봉산 자락에 위치한 오늘공동체 박민수 대표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80여 명의 공동체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공동체원들이 함께 사는 집이 너무 멋있는 건물이어서 여러 건축상을 받은 공동체. 이러한 내용과 달리 오늘공동체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가장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녔고, 그들과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오늘공동체는 어떤 곳인지, 오늘공동체와 우리 고문 피해 선생님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진-1> 지난 8월 12일, 오늘공동체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박민수 대표님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Q. 박민수 선생님, 반갑습니다. 굉장히 바빠 보이시는데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박민수) 일단 기본적으로 (오늘)공동체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활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담 활동, 공동체의 정기모임들인데요. 공동체원들이 모두 모이는 전체 모임은 매주 있고요. 그리고 공동체 학교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저희 공동체원이 되고 싶은 분들을 대상으로 1년 코스의 학교예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곳을 꿈꾸는 오늘공동체

 

Q. 대표님과 대화에서 공동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저희 연구소의 후원회원분들은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오늘공동체를 잘 모르실 수도 있어서요. 후원회원 분들께 간략하게 오늘공동체 소개를 부탁드릴께요.
(박민수) 처음에 오늘공동체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선교단체형 개신교회로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이 예수 정신에 입각한 좋은 교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출발이었어요. 핵심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모두가 예수의 제자가 되자는 거였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는 거였죠. (웃음) 그게 발단이 되어서 공동체로 전환이 된 거죠.

 

Q. 그게 언제쯤이셨어요?
(박민수) 교회에서 공동체로 전환한 게 2010년 정도였어요. 공동체가 되기 전에 10년 정도 열심히 공동체를 위한 성경공부를 했고요. 성경공부를 했더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희년정신이더라고요. 모두가 다 함께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거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길이고, 예수 제자의 길이더라고요. 그렇게 공부를 통해서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유토피아 또는 더불어 사는 사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라고 깨달은 거죠. 그래서 우리 공동체의 성격을 막연한 종교모임이 아닌 예수 정신에 입각한 공동체를 일구어 가는 모임으로 정하고 전환한 거죠.

 

Q. 그럼 2010년 이전에는 성경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공동체의 기반을 닦는 시기였다면, 2010년부터 공부한 것을 현실에서 공동체의 이름으로 구현하기 시작하신 거네요?
(박민수) , 그렇죠. 그래서 2010년부터 목표를 단순화했죠. ‘공동체를 일구는 것.’ 이게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하신 명령이라고 정확하게 성격 규정을 지금까지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Q. 그렇게 10년 정도 열심히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계신 거네요. 그럼 오늘공동체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지금 오늘공동체가 어떤 곳인지 물어본다면, 간략하게 어떻게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박민수)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다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 사진 -2> 도봉구에 위치한  오늘공동체는 건물외관도 멋있지만, 다양한 공동체원들이 함께 살아가는 내부는또 다른 세상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만큼 아름답고 효율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 공부하다 발견한 고문피해자들

 

Q. 지금까지 박민수 선생님과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오늘공동체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제가 가장 궁금한 부분은 오늘공동체는 어떤 계기로 고문피해자 선생님들 그리고 인권의학연구소를 알게 되신거예요?
(박민수)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저희 공동체에게 고문피해 선생님들은 뒷걸음치다가 발견한 보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웃음) 첫 계기는 예수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자주 발견한 게 ’(righteousness)였어요. 그래서 의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구체적으로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은 누구들인지에 대한 확장된 공부를 공동체 내에서 했었어요.

 

Q. 오늘공동체는 공부를 많이 하는 곳이네요. (웃음)
(박민수)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네요. (웃음) 공부를 하면서 그런 분들의 공통점이 고난을 당하셨더라고요.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그런 고난을 당하신 분들이 대부분 또 정치범이었고, 정치범으로 몰렸던 분들은 사상범으로 낙인이 찍히더라고요. 간첩, 좌빨이라는 사상범 올가미를 씌워서 사회적으로 제거하는 거죠. 공부를 하다 보니 그런 분들이 너무 많이 계시더라고요. 대표적인 분이 죽산 조봉암 선생님이시죠. 이분도 간첩으로 몰려서 이승만에게 제거를 당하잖아요. 그 이후에 수많은 분들이 이런 식으로 고난을 당하시더라고요.

 

Q. 예수 정신을 따라 살기 위해 공부를 하다가 우리 근현대사에서 고난당한 대표적인 분들인 고문 피해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신 거네요.
(박민수) , 저희 공동체에서 만나는 고문 피해 선생님들은 당시 정치인도 아니었는데, 그냥 평범한 일반 직장인이기도 하고, 어부이기도 하고, 재일동포 학생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사상범으로 몰려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분들이 너무 많이 계시더라고요. 이걸 발견하게 된 거죠!

 

Q. 유레카였네요!
(박민수) 구체적으로 김근태 의원도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셨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감옥에 계신 분들 중에는 어떠한 정치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안기부와 같은 국가기관에 끌려가서 정치범으로 몰려 고초를 당하신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 그 고초가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더라고요.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후에 복권이 되는 경우도 있기도 하고 그 이후에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었지만,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가 잡혀가신 이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드신 거예요. 그래서 더 조사를 해보니까.

 

Q.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공부를 하셨네요!
(박민수) 그렇게 되더라고요. 정말 이분들은 본인의 삶의 터전에서도 간첩으로 낙인이 찍혀 살 수가 없고, 가족관계에서도 버려지시더라고요. 결국엔 사회에 진입조차도 힘드신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공부를 하기 전에는 이런 분들이 우리 사회에 이렇게 많이 계시다는 걸 몰랐어요. 저도 그냥 간첩인 줄 알았죠. 근데 공부를 해보니까 간첩이 아닌 거예요. 어떠한 간첩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간첩으로 낙인이 찍히고, 그분들이 당한 고초는 어떤 정치인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고초를 당하신 거예요. 

<사진-3> 지난 2017년 오늘공동체 가족과 국가폭력 피해자 중 구명우 선생님 가족이 함께스위스 알프스에서 찍은 단체사진이다. (사진제공: 구명우 선생님) 

사회라는 성 밖으로 내몰렸던 고문 피해 선생님들

 

Q. 그렇죠. 고문과 감옥생활도 너무 가혹하지만, 감옥에서 나오셔서 더 큰 고초를 겪으셔야 했죠.
(박민수) 예수 시절로 말하면, ‘성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이분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은 분들이 바로 이분들인 거예요. 그때부터 진지한 고민이 시작된 거죠. 우리 공동체가 예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가 이 땅에 오신다면 과연 누구를 먼저 찾아가실까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거예요. 이 사회에서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이 근처에 가지도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 고문 피해 선생님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소외받는 분들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예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분들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예수 제자가 맞는가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제기된 거죠.

 

Q.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동의가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예수 제자를 자처하는 교회들이 그동안 간첩으로 내몰렸던 우리 고문 피해 선생님들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네요. 그럼 그 공부 이후로 적극적으로 우리 고문 피해 선생님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신 거네요.
(박민수) 그렇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상 우리 공동체가 이분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예수 제자의 삶이라는 게 공염불에 불과하다. 조금 과한 표현으로는 가치전도고, 사기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저희가 그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거죠.

 

Q.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하신 거예요? 찾는 것도 정말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박민수) 맞아요.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그분들을 찾는 게 정말 정말 어려웠어요. 여기저기 수소문했죠. 그렇게 1년 정도 수소문하다가 연결이 되더라고요. 처음에 연결된 분이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강용주 선생님이었고, 강용주 선생님이 고문피해자들이 모여있었던 진실의힘이라는 단체를 알려줘서 고문 피해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 거죠.

 

Q. 주변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간첩 혐의를 받고 고생하신 선생들을 찾아다닌 사람들은 없을 것 같아요. (웃음) 근데 처음에는 우리 선생님들이 많이 경계하셨을 것 같아요.
(박민수) 선생님들이 처음에 저희를 반기진 않으셨어요. 경계심이 많으실 수밖에 없잖아요. 저희는 당연하게 생각했고, 저희는 언젠가는 선생님들이 저희의 진정성을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인사를 드렸죠. 무슨 행사만 있으면 우리 공동체에서 무조건 달려갔어요. 그렇게 선생님들과 신뢰가 형성되는데 몇 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사진-4> 지난 2018년 오늘공동체 가족과 국가폭력 피해자 중 김장호 선생님이 필리핀으로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 김장호 선생님) 

 박민수 대표님은 인터뷰하면서 오늘공동체는 고문으로 간첩 낙인이 찍혔던 우리 선생님들을 정말 열심히 찾으러 다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웃이었고, 예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분들 곁에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하는 동안 큰 울림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박민수 대표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터뷰 기사를 한 번으로 끝내려고 했는데요, 우리 후원회원분들과 나누고 싶은 좋은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두 번째 인터뷰 기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 기사도 기대해주세요.

 

(인터뷰 진행: 박민중 활동가)

 

 [김성만 선생님 인터뷰-①] 36년 만에 대법원 무죄를 받기까지

 

 김성만 선생님은 지난 7 29일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성만 선생님은 36년 만에 간첩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상고를 기각합니다라는 대법원의 짧은 답변을 듣기 위해 감내해야 했을 아픔은 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김성만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그동안의 어려움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습니다.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선생님의 얼굴을 뵙고 저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지난 8 11일 잠실 모처에서 김성만 선생님을 뵙고 직접 소회를 들어보았습니다.

 

<사진-1> 지난 8월 11일 잠실의 한 카페에서 김성만 선생님과 인터뷰를 가졌다. (출처: 한겨레)

축하드립니다!

Q. 선생님, 얼마 전에 대법원에서 좋은 결과가 있었는데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김성만) 고맙습니다.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감사인사를 전하면서 정신이 없네요. 제 사건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제가 힘들 때 도움을 주셨던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축하도 받는 그런 일정이 요즘 매일 있네요.

 

Q. 선생님, 저는 사실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받을 때 솔직히 너무 허무더라고요.
(김성만) 선고가 너무 짧아서요?

 

Q. , 딱 여덟 글자를 듣기 위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가 싶어서요. 그럼 선생님은 그때 오전 10 20분경 대법원의 상고를 기각합니다라는 판결을 들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김성만) , 초긴장 상태에서 들었는데 대법원에서는 원심을 파기한다든지 아니면 상고를 기각한다라든지 그 둘 중에 하나잖아요. 근데 원심을 파기한다는 판결들은 조금 앞부분에 있더라고요.(웃음) 그리고 뒷부분은 대부분 상고를 기각한다는 판결들이고요. 그래서 우리 사건은 뒷부분에 있어서 기각이 되는가 보다 예상을 했죠.(웃음)

 

Q. (웃음) 그렇게 예측은 했지만, 막상 그 판결을 들었을 때는 어떠셨어요?
(김성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짓눌렀던 것들이 다 벗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근데 원래 피고인들은 대법원 판결 참석을 잘 안 하잖아요. 제가 과거에 잡혔을 때도 저의 대법원 판결을 부모님이 가셔서 들으셨어요. 저는 그날 면회 온 부모님한테 들었어요. 대법원에서 제 사건 판결이 1초 만에 사형으로 확정되었다고요.

<사진-2> 지난 7월 29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재판에 참석한 분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김성만 선생(왼쪽에서 두 번째) 혼자 'V'를 하고 있다.

 

Q. 그럼 선생님은 대법원 판결을 오늘까지 2번을 받으신 거네요. 그때 면회 온 부모님께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을 들었을 때 기분은 기억나세요?
(김성만) 그때 변호사가 1심과 2심 모두 사형이 나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각을 예상하면서도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죠. 그러나 역시 사형 확정이었죠.

 

Q. 처음 대법원 판결도 그렇고, 이번 경우도 일정 부분 예측을 하고 계셨던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근데 우리 사건은 아무리 군사정권이지만 사건 내용을 보면 사형을 판결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조작한 내용을 보더라도 저희가 무슨 국가기밀에 접근했다라든지, 사회를 위태롭게 했다든지, 그런 게 없잖아요. 그리고 그때 저희 사건의 1심 주심판사가 박만호 판사였고, 제 사건의 변호사는 고영구 변호사예요. 고영구 변호사님은 당시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셨던 분이었어요. 고 변호사님이 판사 출신이었는데, 이분이 부장판사 시절에 박만호 판사가 배석판사였다는 거예요.

 

Q. , 또 그런 인연이 있네요.
(김성만) , 서로 잘 알아요. 그래서 1심 판결 며칠 전에 서로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판결 전에 선고 형량이나 내용은 가르쳐줄 순 없게 되어 있으니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는데, 고영구 변호사님이 식당에서 서로 밥을 먹으면서 제 걱정을 하니까 그 박만호 판사가 중형을 선고하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때 중형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영구 변호사나 저희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1심 판결에서 사형 선고가 나온 거예요.

 

Q. 그때 고영구 변호사도 그렇고 모두들 충격이 상당했겠어요?
(김성만) 아무래도 그렇죠. 아무래도 저는 당시 안기부에서 사형 이외의 다른 판결은 할 수 없도록 했다고 생각해요. 판사는 안기부의 조작된 내용을 가지고도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판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만, 안기부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었던 거죠.

 

Q. 그 당시는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다 쥐고 있었을 시기니까요.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김성만) 그렇죠.

 

<사진-3> 1985년 9월 9일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는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난 양동화, 김성만, 황대권 등이 재미 북한 공작원 서정균에게 포섭돼 간첩이 된 후 국내에 들어와 학생운동권에 공작금을 주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게 당시 안기부 발표 내용이다. 사진은 1985년 9월 9일자 < 경향신문 >( 석간 ) 1 면 . ( 출처 :  한겨레 )

공범들을 위해 시작한 재심

 

Q. 선생님 사건이 1985년 당시 전두환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활용했던 사례였던 거죠. 돌이켜보면 1985년부터 2021년까지 법정싸움이 지속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요. 특히, 선생님이 재심을 2016년도에 신청하시고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까지 약 5년의 재심 시간이 선생님께는 어떤 시간이었어요?
(김성만) 재심하기 전까지 저는 제가 (유럽에서) 북한대사관을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죄가 안 바뀌는 줄 알았어요. 무죄라는 건 상상을 못 해봤어요. 그래서 재심을 신청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우리 사건의 공범 중 한 친구가 찾아와서 간첩 방조죄를 벗게 해달라고 저한테 요청을 했어요. 그래서 재심 신청을 결심했거든요. 처음 재심을 시작한 이유는 저 때문에 간첩 방조죄로 고생한 공범들을 위해서였어요.

 

Q. , 재심을 시작한 이유가 공범들의 누명을 벗게 하기 위해서 시작하신 거예요?
(김성만) , 그렇죠.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원래 활동한 건 민주화운동 밖에 없는데, 우리 사건의 공범들은 간첩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공범들이 하루아침에 간첩 방조죄로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공범들의 누명을 해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재심을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재심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니까 판사가 관심을 가지는 건 내가 북한대사관에 가서 토론을 했다는 부분이 아니라 북한대사관의 직원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나눴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지시가 있었는지가 핵심이더라고요.

 

Q. 선생님은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대사관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그래서 재심 담당 변호사와 이야기를 해봤더니 북한 사람들을 단순히 접촉한 것이 남북교류협력법을 위반했을 수는 있지만 국가보안법상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제 경우는 북한 사람을 만나서 (주체사상의 허구성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전혀 북한에 동조하거나 지시받은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무죄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때서야 법률적으로 확신을 하게 된 거죠. 이전에 사실상의 내용으로는 무죄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법률적으로 무죄라는 건 이번 재심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Q. , 그러면 선생님은 처음 재심을 시작할 때는 공범들의 재심을 위해서 시작한 거고, 스스로도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만났다는 점 때문에 법률적으로도 무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계셨는데 이번 재심 과정에서 무죄라는 걸 알게 되신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간첩죄가 적용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가 (유럽에서)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만나고 토론하고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유죄인 줄 알았죠. 그런데 이번에 공범들을 위해 시작한 재심을 통해서 북한대사관에서 그 직원들과 토론한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Q. 그때서야 이제 이 재심을 하면 나도 무죄를 받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시게 된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그리고 1심 재판에서도 무죄 선고가 나왔죠. 

 

Q. 그럼 선생님 1심에서 무죄를 받으셨을 때, 그때가 정말 좋으셨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때가.
(김성만) 그랬던 것 같아요.

<사진-4> 지난 7월 29일, 대법원 무죄를 선고 받고 연구소에서 작은 케익을 준비했다. 그 케익 위에는 "꽃길만 걷자"라는 초가 올려져 있다.    

재심, 또 다른 고통의 시작

Q. 그러나 1심에서 무죄(2020 2)를 받았지만 그 이후 과정이 쉽지는 않았잖아요. 특히 재심이라는 과정이 과거의 아픈 기억과 트라우마를 다 끄집어내야 하잖아요. 선생님의 경우는 1985년도 사형을 받았던 그 재판정에 다시 가서 내가 무죄라는 걸 스스로 입증해야 했는데, 재심을 하는 4-5년의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김성만) 재심 신청을 하고 개시가 되면서 제가 저의 과거 사건기록을 봐야 하잖아요. 그걸 몇십 년동안 제 머릿속에서 의도적으로 꽁꽁 싸매 두고 혹시 그 기억이 튀어나오면 바로 억누르고 기억을 안 하고 그렇게 힘들게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걸 풀어헤쳐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 제가 재심 준비를 매일 했어요. 그 이유는 하루에 15분 이상 그 기록을 보거나 그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사건기록 한 두 페이지만 보면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서 막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앉아서 한 2-3분 보다가 다시 덮는 거예요. 그러니 하루에 진도가 나갈 수가 없죠. 재심 준비는 해야 하는데 너무 괴로워서 생각을 할 수가 없으니까.

 

Q. 재심의 시작이 어떻게 보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네요.
(김성만) 밤마다 악몽을 꾸기 시작했어요. 옛날 기억들이 떠오르니까요. 그래서 재심을 하면서 어렵게 단절했던 과거를 다시 사는 것 같았어요. 꿈에서는 내가 다시 사형수로 나오고..날이면 날마다..낮에는 15분 정도만 사건기록을 살펴보고. 그리고 또 한 번은 내가 과거 법정에서 했던 진술을 보면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데 3일 동안 울기만 했어요. 왜냐하면 재판을 받을 때 안기부 직원들이 뒤에 앉아 있고, 자기들이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서 안기부에서 조사받았던 내용을 부인하면 그냥 죽는다고 수도 없이 교육을 받은 상태에서 검찰을 거치고 법정으로 왔기 때문에 어떻게 제가 법정에서 부인을 하겠어요. 그래서 저는 전혀 그런 적이 없는데 안 한 걸 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나의 과거 법정진술을 내가 지금 다시 읽으면서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살려고 어떻게든 발버둥 치던 나의 젊은 날의 모습이 계속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Q. 우리 사회와 사법부가 이렇게 재심을 하는 과거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어려움을 알아야 하는데요.
(김성만) 그리고 1심 재심 재판에서 재심을 받아준 판사가 검사한테 과거 법정기록 중에서 피고인들이 부인한 내용들만 법정에서 다시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부인한 내용을 가지고 이 사건을 다시 보겠다는 거였어요. 근데 검사가 여기서 나쁜 짓을 하더라고요. 검사들은 여전히 우리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게 자신들의 직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진짜로 부인한 내용 90%와 엉터리로 시인한 내용 10%를 중간중간에 끼워서 제출한 거예요. 그러니까 재심 과정에서 과거 고문 때문에 진술했던 모든 내용들을 법정에서 사실인 것처럼 호도해버리니까 이때 내가 또다시 군사법정에 앉아서 재판을 받는 기분이더라고요.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김성만 선생님께 축하를 전해드렸지만, 그 무죄를 얻기까지 감내하셔야 했던 아픔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이 야만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아픔을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하는가?” 국가는 재심이라는 과정을 통해 또다시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김성만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을 포함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활동가)

[인터뷰] 김미정 후원회원과의 만남

 

 지난 8 11(), 저희 연구소에 귀한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습니다. 지난해부터 저희 연구소의 후원회원이 되신 김미정 후원회원입니다. 후원회원 인터뷰를 요청하고 저희가 직접 찾아가도 모자란데 김미정 후원회원님께서 직접 연구소까지 찾아와 주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우리 선생님들을 위한 미에로화이바와 비타 500까지 들고 와주셨는데요. 이번 인터뷰를 통해 김미정 후원회원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1) 지난 8월 11일 ,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미정 후원회원.

Q. 안녕하세요, 김미정 후원회원님!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김미정)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쑥스럽네요. 저는 오늘공동체에서 공동체 사람들의 밥을 책임지고 있는 김미정입니다.

 

Q. 반갑습니다! 공동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후원회원 분들에게 오늘공동체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김미정) 오늘공동체는 2000년도에 지금 대표님으로 있는 박민수 목사님께서 개척하면서 시작된 공동체인데요. 처음엔 은혜공동체였어요. 지금은 이름을 오늘공동체로 바꾸고, 종교를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같이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예요. 지금은 도봉구에서 공동체가 모여서 지내고 있습니다.

 

Q. 오늘공동체는 듣고 볼 때마다 신기하고 멋있는데요. 저희 연구소와도 관계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 제가 우리 후원회원분들에게도 조금씩 알려드려야겠어요^^ 그럼 공동체에서 김미정 후원회원님의 일상은 어떤가요?

(김미정) 오전에는 공동체 사업장인 '오늘 도시락'에서 죽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은 노인요양보호시설에 주로 납품되고 저는 그 안의 일부인 죽을 만들어요. 이 죽은 도봉구 지역 취약계층 및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위한 식사로 제공됩니다. 포장 후 직접 배송을 하기도 하는데요, 한 분 한 분 찾아뵙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식구들과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어서 주말에는 공동체 멤버들과 농사를 짓고 있어요. 주중에는 대안학교 학생들과 농사 활동을 같이 합니다.

 

(사진-2) 서울 도봉구에 위치한 오늘공동체. 위 사진은 공동체 사람들이 식사하는 장소이자 김미정 후원회원이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요리교실을 진행하는 곳이다.

인권의학연구소와의 인연

Q. 주말에는 당연히 쉬셔야겠어요. 오늘공동체에서 김미정 후원회원님이 안 계시면 큰일 나겠는데요. 그럼 저희 인권의학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김미정) 인권의학연구소는 고문피해자 선생님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는데요. 저희 공동체에서 2010년 정도에 국가폭력에 대해서 공부를 했었어요. 공부를 하면서 김장호, 구명우, 최양준 선생님과 같이 억울한 사연을 가진 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이 선생님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지면서 인권의학연구소를 알게 되었어요.

 

Q. 간첩조작 고문피해자들 찾아다니는 공동체. 참 독특하고 멋있는 곳이네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듣기론 김장호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김미정) 김장호 선생님과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자식과 부모처럼 그런 관계를 깊이 있게 유지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김장호 선생님이 예전에 송탄에 살고 계셨을 때, 마침 제가 남편 직장 때문에 평택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그때 김장호 선생님과 왕래를 많이 하게 되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차를 마시고, 맛있는 점심도 같이 먹으면서 선생님과 아버지와 친딸처럼 지냈었어요. 그리고 한 번 김장호 선생님이 엄청 몸이 안 좋으셨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제가 가까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아산병원에 모시고 가고 했었어요.

 

Q. 선생님께서 직접 김장호 선생님을 모시고 송탄에서 서울 아산병원까지 보호자 역할을 하신 거예요?

(김미정) . 그때 저뿐만 아니라 저희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기금 마련 등을 해서 김장호 선생님이 수술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이후에는 선생님이 건강검진을 해야 하는데 건강검진을 지원해주는 병원이 녹색병원이라고 하셨어요. 찾아보니까 김장호 선생님이 송탄에서 대중교통으로 혼자 가시기에는 너무 먼 거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차가 있으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녹색병원이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김장호 선생님의 의료지원을 해주셨던 인권의학연구소를 더 잘 알게 되었죠. 이전에는 인권의학연구소를 그냥 알고 있었다면, 그 계기를 통해 인권의학연구소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Q. 저희 연구소를 알게 되신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네요. 이런 과정을 통해 연구소를 알게 되신 건 5년 정도 되신 거네요?

(김미정) 2015년 정도에 연구소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김장호 선생님이 재심을 하실 때 이화영 소장님을 그때 처음 봤던 것 같고요. 그래서 그때 이런 분들이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처음부터 인권의학연구소를 알았던 건 아니고요.

(사진-3) 2017년 9월 21일, 서울고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장호(76·첫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선생님이  조영선 변호사, 재심 무죄를 받은 조작 간첩 사건 피해자들과 찍은 사진. 출처: 한겨레)

후원 결정을 하게 된 계기

 

Q. 안타깝지만 사실 많은 시민분들이 아직 저희 연구소를 잘 모르세요. (웃음)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웃음) 그럼 선생님, 연구소를 아는 것과 후원회원이 되는 건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은 왜 인권의학연구소를 후원하세요?

(김미정) 김장호 선생님과 몇몇 선생님들을 알게 되면서 국가폭력은 물론 고문 피해를 당하신 분들이 대부분 힘들게 지내시겠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단순히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요. 그러면서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하게 되면서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Q. 그럼 선생님, 연구소에 후원을 하시면서 혹시 뿌듯하거나 후원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김미정) 김장호 선생님을 비롯해서 오늘공동체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있는 구명우 선생님,  김태룡 선생님, 최양준 선생님들이 연구소를 많이 좋아하시고, 연구소를 통해 여러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들을 듣고 있어요. 연구소를 통해서 우리 선생님들이 행복해하실 때 후원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Q. 앞으로 더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선생님 혹시 후원자의 입장에서 연구소에 바라는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김미정)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서 무언가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함께 여행을 가면 좋은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그걸 원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다들 연세도 있으시고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선생님들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여행을 1년에 한 번 정도 가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Q. 그럼 저희 연구소가 그런 여행을 계회하면 선생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셔야 합니다! (웃음)

(김미정) (웃음) , 도와드리죠.

 

(사진-4) 김장호 선생님과 김미정 선생님이 커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김미정 후원회원님의 

 

Q. 마지막으로 연구소 인터뷰의 공통질문입니다. 김미정 후원회원님의 꿈은 뭘까요?

(김미정) (웃음) 나이 많은데 꿈을 물으시니까.. 어릴 적 이후로 너무 오랜만에 꿈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너무 생소하네요. 그런데 저희 공동체에서 살면서 제가 가지게 된 생각은 내일은 없다!’에요. 그래서 제 꿈은 현재의 기쁨, 현재의 즐거움, 현재의 행복에 충실하자!’입니다.

 

 김미정 후원회원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연구소가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해오신 김미정 후원회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연구소는 김미정 후원회원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피해자 선생님들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열심히 고민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그리고 김미정 후원회원님의 일상이 매일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

 

(인터뷰 진행자: 박민중)

 

[이숙희 선생 인터뷰-②] 노동운동, 10년의 재판, 그리고 개인 이숙희”

  

 이숙희 선생에게 노동조합 활동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힘들지 않고, 재미 있었던’ 긍정적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지난 인터뷰에서 어린 이숙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노동자가 되고 노동 조합을 만났는지 알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활동, 근 10년 동안 이어졌던 청계피복 노동자 법정 싸움, 그리고 선생의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장소를 달라!

 

Q. 72년 당시 청계피복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교육 장소가 없었던 것이 힘들었죠. 그때 노동조합 사무실이 7평 정도밖에 안되어 평화시장 옥상에 의자를 깔고 교육을 했거든요. 한 번은 노동조합에서 중등부 과정을 신설했는데, 200명이 넘게 신청한 거예요. 선착순 50명만 신청을 받았는데 다 수용할 수 없어서, 결국 25명을 다시 돌려보냈어요.

 

Q. 교육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엄청났네요
(이숙희) 그렇죠. 한 달에 한 번 전체 교육을 하려면 장소가 없으니까 청계천 2가의 청소년회관을 빌리거나 영등포 돈보스코 회관까지 가야 했어요. 그러니 당시 노동조합에서 가장 급선무였던 부분이 바로 장소 확보였어요. 그런 와중에 부녀부장이 모범여성근로자로 뽑혔고, 청와대에 가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 부녀부장이 청와대에서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만났는데,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육영수 여사가 비서관들에게 장소를 마련해주라고 한 거죠.

 

<사진-1> 청계피복 노동조합 노동교실 7기 개강식에 참여한 이소선 여사와 노동자들.  

Q. 청와대에서 직접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위해 교육장소를 마련해 줬어요?
(이숙희) 그건 아니고요. 청와대에서 평화시장 사장들한테 노동자들 교육장소를 마련해주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그랬더니 사장들이 미싱 한 대당 150원씩을 다고 해요. 그 돈을 모아 동화상가 5층에 노동교실을 만들게 된 거죠.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저희는 정말 기뻤어요. 근데 이소선 여사는 사장들만 돈을 낼 게 아니라 우리도 벽돌 한 장 값이나마 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당시 일요일 작업을 안 할 때여서 일요일 작업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죠. 근데 우리 노동자들이 수당을 받지 않고 두 번 일요일에 작업을 해주기로 결정한 거예요. 노동자들도 장소 마련을 위해 참여를 한 거죠. 마침내 1973 5월에 동화상가 옥상에서 노동교실 개관식을 했어요. 합창도 하고, 많은 준비를 했죠.

 

Q. 청와대가 직접 장소를 마련한 게 아니라, 사장단과 노동자들이 합의해서 노동교실 장소가 마련되었네요.

 (이숙희) , 그렇죠. 저희도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는데, 개관식 이후 바로 노동교실 문을 닫는 거예요.

 

Q. 개관식을 하자마자 누가 노동교실 문을 닫았어요?
(이숙희) 사장 대표단이죠. 그때 사장 대표단에서 내세운 이유가 정말 웃겼어요. 노조에서 개관식에 재야인사인 함석헌 선생님을 초청했다는 것과 노조가 만든 개관식 초대장에 자주색 글씨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사진-2> 1973년 5월 21일에 가진 동화상가 5층 노동교실 개관식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Q.  초대장 글씨가 자주색이어서?
(이숙희) . 자주색 글씨가 있어서 이 노조의 사상이 불손하다는 거예요. 그때 사진을 보면 개관식 하기 전에는 다들 기쁜 표정이었는데,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표정들이 다 안 좋아요. (웃음) 그게 지금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결국 개관식을 하자마자 노동교실 문이 닫혀버렸어요.

 

1975 2 7

 

Q. 사장대표단은 왜 그렇게 했던 건가요?
(이숙희) 아마 사장단은 노동교실을 만들어 주는 대신 노동조합을 길들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사장단에서 노조 간부 4명을 내보내라고 했었거든요. 함석헌 선생에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을 비롯해서 마음에 안 들었던 간부들이었던 거죠. 저희가 1년인가를 버티면서 싸웠어요. 사장단은 노조에게 그들이 원하는 지부장을 세우라고까지 요구했어요.

 

Q.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노동조합에서는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이숙희) 그게 73년도에 있었던 일예요. 그 이후 75년까지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동화상가 복도를 돌아다니며 노동교실을 돌려달라는 구호를 외치고, 사장 대표에게 협박과 애원의 편지도 쓰고, 노동청에도 편지를 보냈었죠.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는데도, 안 되는 거예요. 저희가 내린 결론이 싸울 수밖에 없다였어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은 없었어요.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사장단은 노조간부들을 자르려고 했기 때문에 간부들이 이걸 사전에 알게 되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75 2 7일 날 동화상가 옥상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다음에 교실이 있는 옥상으로 점심시간에 한 200여 명이 다 뛰쳐 올라가서 문을 잠갔어요.

 

Q. 집단행동을 하신 건가요? 

(이숙희) , 처음으로 농성을 한 거예요. 그전에는 그렇게 싸워본 적이 없었는데, 2년의 시간 동안 저희 의식도 성장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했거든요.

 

<사진-3> 강제해산에 맞선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점거농성. (출처: 성공회대 NGO 자료관)

Q. 옥상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가 농성을 했어요?
(이숙희)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죠. 원래 저는 동원조인데, 구호를 외치기로 한 사람이 못들어 온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나가서 구호를 외쳤어요. 계속 구호만 외칠 수는 없어서 다 같이 애국가를 부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 통일 대신에 배움을 넣어 부르고 그랬죠.

 

Q. 언제까지 농성을 했나요?

 (이숙희) 그날 저녁 7시까지 그렇게 있었는데, 경찰들이 오고 난리가 난 거죠. 그때 사장단과 협상을 해서 노동교실을 저희에게 다 돌려주기로 한 거예요. 다만 동화상가 옥상은 안된다고 해서 그곳의 집기들을 다 옮겨서 다른 곳에 얻기로 했어요.

 

Q. 노동교실을 어디로 옮겼어요?
(이숙희) 동대문운동장, 지금 DDP 맞은편에 유림빌딩이라고 있어요. 그곳 2,3,4층을 얻었어요. 2층은 복지원이라는 병원이 들어갔고, 3, 4층을 노동교실로 쓰게 된 거죠.

 

<사진-4> 당시 동대문에 위치한 유림빌딩의 사진.

Q. 그렇게 모두가 함께 단결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네요.

(이숙희) , 그랬던 거죠. 돌이켜보면 제가 노동조합에 72년에 들어갔는데 75년도에 그런 결과를 얻어냈으니까 그 사이에 의식이 많이 성장했어요. 그리고 그 싸움을 통해 노동자들이 용기를 얻게 된 거죠. 75년도가 굉장히 중요한 한 해가였어요. 2월에 노동교실을 되찾는 싸움부터 시작해서 그해 12월까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어요. 마침내 아침 9시 출근, 저녁 8시 퇴근이라는 작업시간 단축과 시다 임금직불제 도입 등 노동환경 개선을 이루게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75-6년도에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었죠.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야 하는 재판과정

 

Q. 최근 청계피복 노조원들의 국가배상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죠? 재판 과정과 결과를 말씀해 주세요.
(이숙희) 2010 1월, 55명의 청계피복 노조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나긴 재판이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2005년에 설립된 1기 진화위에도 저희 사건을 신청했어요. 진화위에서 저희 사건과 관련해서 국가의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이를 근거로 2010년 민사배상 소송을 시작해서 2012 1, 2013 2심에서 저희가 승소했어요. 근데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해서 꼬이기 시작했죠. 이후 고등법원에서 다시 승소했어요. 이번엔 대한민국 정부가 2019년에 재상고를 한 거예요. 그때는 재판이 너무 편파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이 밝혀지면서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2년이 지난 지난 4월에 다행히 대한민국 정부가 상고를 취하하면서 찝찝한 승소를 하게 된 거죠.

<사진-5> 2019년 청계피복 노조 재판 관련 KBS 뉴스 사진.

Q. 오랜 재판 과정이었네요.
(이숙희) 10년이 넘는 너무 긴 재판 과정이었어요.

 

Q. 재판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재판은 증거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니 증거를 저희가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어느 공장에서 언제 노조원이 되었고,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를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데, 당시 평화시장은 취업규칙이나 이런 게 없잖아요. 또, 공장이 망하기도 했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기가 어려웠어요. 특히, 전두환 군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게 광주5.18항쟁 탄압이, 두 번째가 바로 민주노조 말살이었거든요청계피복노조 같은 경우, 간부들이 다 퇴근하고 난 뒤에 (정부에서) 노동조합 문을 뜯고 들어와서 기물이나 자료들을 모두 가져갔어요.

  

Q. 법정에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 자료가 그때 없어진 것예요?
(이숙희) , 그래서 재판 증거로 제출할 자료들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 부분이 정말 어려웠는데, 2-3년 전에 청계피복의 9.9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어요. 특히, 다큐멘터리 감독님들이 도움을 많이 주었어요. 함께 삼송에 있는 수장고에 가서 일일이 찾아서 찍었어요. 그런데도 증명이 안 되는 노조원들이 남아 있었어요. 왜냐하면 호적상 이름과 우리가 아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이었죠. 고민을 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그게 결혼식 사진이예요. 결혼식 사진에는 호적상 이름이 나오고 저희 조합원들이 다 참석해서 찍혀있으니까 증거로 효력이 있을 것 같았어요. 결혼식 사진을 찾아서 거기에 나온 조합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직접 적어서 법원에 제출했어요. 이것은 변호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잖아요. 이 작업을 해서 변호사한테 가져다주었죠. 이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내야 하는 과정이.’

 

Q. 국가 피해자인데, 국가를 상대로 내가 피해자임을 또 증명해야 하는게..
(이숙희) 그렇죠.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도 힘들었고, 재판이 너무 길어져서 힘들고 그랬죠.

 

Q. 그렇게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게 한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숙희) 일단 이 재판은 우라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사실 청계피복은 자료의 측면에서 너무 취약했기 때문에 억울한 부분이 더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항상 같이 했으니까 할 수 있었고, 제가 지속적으로 전태일 재단과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증거를 찾아내는 게 너무 힘든 과정이었지만 다큐를 찍는 감독님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죠. 마지막으로 전태일기념관도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감사하죠. 그 도움이 없었다면 자료를 찾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을 거예요.

<사진-6>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사진. (출처: 한겨레)

개인 이숙희, 그리고 꿈

 

Q.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10, 20대 이숙희라는 노동자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이숙희) 전태일을 만나기 전에는 좀 우울한 노동자였죠. 제가 원해서 평화시장에 취직을 했지만 너무 싫었거든요. 말을 함부로 하는 (작업장) 환경도 싫었고요. 늦게까지 일하고 정말 힘든 환경이었어요. 그래서 별로 희망이 없는 삶이었는데, 노동조합을 만나고 전태일을 만나면서 변한 거잖아요? 그래서 20대 저는 정말 열심히 역할을 했다고 봐요. 만약 제가 20대에 그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욕심많은 사람이 되어 공장 차려서 노동자를 학대하면서 돈 벌어야 돼!’ 이랬을지도 모르잖아요?(웃음) 제가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도와준 게 바로 노동조합이고, 전태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 노동조합과 전태일은 20대 이숙희에게 신세계를 보여주었죠. 그것 때문에 20대 이숙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앞으로 꿈이 있다면?
(이숙희)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아요.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마 (현실적) 여건이 안 되니까 아예 꿈을 안 꾸고 살았던 것 같네요.

 

Q. 당시 10, 20대 이숙희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요?
(이숙희) 만약에 여건이 되었다면, ‘공부를 계속했겠죠. 제가 어렸을 때, 아나운서가 되거나 선생이 되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것을 향해서 갔겠죠.

 

Q. 그럼 지금 여건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이숙희) 무엇인지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싶어요. 다른 생각 하나도 안 하고. 그런 환경이 된다면....

 

  2시간에 이르는 인터뷰 동안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같았다.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어린 노동자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었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준 큰 학교였다. 인터뷰 중에 한국 노동운동, 특히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를 볼 수 있었고, 어린 노동자를 지금의 인권활동가로 우뚝 성장하게 만든 그 힘을 확인하기도 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이숙희 선생님 인터뷰-] 힘들지 않았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송기복, 이동석 선생님에 이어 세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이숙희 선생님입니다. 이숙희 선생님은 지난 50년 동안 노동 전태일이라는 두 단어와 동거 동락했습니다. 1969년 평화시장의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로, 그리고 지금은 전태일재단의 교육위원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숙희 선생님은 최근까지 전태일재단이 서울시교육청과 MOU를 체결해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진행하고, 각 노동조합이나 특정단체들이 요청을 하면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이숙희 선생님의 일상은 물론 노동운동을 위해 바친 인생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직접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 사진-1 >  지난  4 월 이숙희 선생은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박민중 활동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Q.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숙희) 저는 지금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을 하고 있는데요. 코로나가 있기 전에는 바빴어요. 특히 재작년에는 엄청 바빴어요. 근데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는 조금 여유로워졌어요. 그래도 불규칙적이지만 교육이나 회의라든지 다양한 일들이 있으니까 항상 바쁜 듯 바쁘지 않은 듯 지내는 것 같아요.

 

팬텀싱어의 애청자

 

Q. 선생님은 노동 그리고 전태일과는 분리될 수 없는데요. 그래도 잠시 이 주제를 내려놓고, 선생님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좋아하는 드라마라든지, 시간이 있을 땐 어떻게 지내세요?

(이숙희) 제가 드라마는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요즘 드라마들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가슴을 졸이면서 봐야 하는데 저는 그걸 잘 못하겠어요. 그래서 오히려 음악프로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음악프로도 요즘 한창 인기가 많은 트로트 관련 프로는 안 보는데요. 제가 71년부터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었는데, 그때 저희가 했던 운동 중에 하나가 유행가 안 부르기 운동이었어요.

 

Q. 그런 운동을 한 이유는 뭐예요?

(이숙희) 예전의 유행가는 가사에서 여자라서 참아야 한다 등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가 많았는데요. 이런 유행가들이 은연중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듣지 말자고 했던 거죠. 그래서 최근에 우리 사회가 트로트 열풍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프로는 한 번도 안 봤고요. 그래서 제가 주로 보는 건, 가사를 못 알아들어도 팬텀싱어를 1회부터 계속 보고 있어요.

 

Q. 아 정말요? 그럼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또는 노래는 뭐예요?

(이숙희) 그런 것도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유행가를 안 부르니까 한동안은 보리밭을 많이 불렀고요. 그다음에 운동가요들을 많이 불렀죠.

 

Q. 신기해요 선생님! 그럼 같이 노동운동하셨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분들도 여전히 유행가를 잘 안 부르나요?

(이숙희) 다른 모임들은 모르겠는데요, 제가 속해 있던 팀은 그랬어요. 청계피복 내에서도 여러 팀들이 있었는데 우리 팀은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 팀은 술도 안 먹고, 유행가도 안 부르고 그랬어요. (당시 청계피복의 전체 모임은 아카시아였으며, 그 가운데 이숙희 선생님의 팀의 이름은 네잎클로버였다.)

 

<사진-2> 1970년대 당시 평화시장 옥상에 만들어진 청계 노조의 사무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숙희 선생님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이곳 청계 노조 사무실엔  여공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청계피복의 소녀 노동자가 되다

Q. 어떤 이야기를 해도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노동과 청계피복 노조는 빠질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되셨어요?

(이숙희)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저희 집이 정말 가난했어요. 교과서도 못 살 정도로. 그때 당시에 저희 어머님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저는 그걸 못 견디겠더라고요. 동생들도 저와 나이 터울이 10살 정도 났거든요. 근데 그때 양장점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제가 처음에 양장점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양장점을 갔는데, 보니까 만만한 곳이 아니더라고요. 양장점은 미싱 하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하고 그 외에는 다 제자라고 하면서, 3년 이상 일을 해야 겨우 일을 배울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데, 어떤 언니가 평화시장은 1년만 고생하면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평화시장으로 가게 된 거죠. 그때는 1년 고생해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나중에 중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엄청 반대를 하셨어요. 근데 저는 어머니가 길에서 장사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공장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그게 저의 첫 번째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웃음)

 

Q. 처음엔 양장점을 가셨다가 평화시장으로 재취업을 하셨네요. 그때 평화시장은 어땠어요?

(이숙희) 그래서 갔는데 평화시장을 딱 들어갔는데 대낮인데 굉장히 침침하더라고요. 그리고 공장에 갔더니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미싱에 붙여있는 번호로 부르고, 그리고 그때는 제단사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시다들한테 욕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이런 것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웃기는 게 재단보조들은 꼭 오빠라고 부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재단보조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오빠는 무슨 오빠야! (웃음)

 

< 사진-3 > 1960 년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채 공장에 들어온 여공들은 ,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돈을 벌었다 .  공장 사장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다른 공장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소녀들에게먹고 잘 곳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 ( 출처 :  한국일보  /  제공 :  국사편찬위원회 )

Q. 지금과는 많이 다른 노동환경이었네요. 그럼 어떻게 전태일의 죽음을 경험하신 거예요?

(이숙희) 그렇게 있다가 전태일 사건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는 그때 직접 현장은 못 봤고 그때 사장들이 뭐 깡패가 일하기 싫어서 죽었다, 폐병 걸려서 취업이 안 되니까 죽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죠. 근데 어느 날 회사에서 갑자기 저희한테 나가서 놀다가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유를 물었더니 사장이 제가 키가 작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아마 그때 근로감독관이 조사를 나왔었던 것 같아요. 전태일의 분신 이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그때 회사에서 나이 어린 사람을 쓰면 안 되는데 썼으니까.

 

Q. 그때 선생님의 나이가 어떻게 되셨어요?

(이숙희) 69년도니까 16살이었어요. 그때 법에 따르면 만 18세 미만은 취업을 시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그때 16살이었으니까 사장이 잠깐 놀다 들어오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가 그랬어요.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가 되다

<사진-4> 1970년대 중반 '마을 노동 교실'의 풍경. 교실 가득 빼곡하게 채워 앉은 여공들이 중등교육과정 수료를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Q. 그럼 선생님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전태일의 죽음이었나요?

(이숙희) 크게 세 가지 정도 이유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첫 번째 이유는 전태일의 죽음이었죠. 그런 일이 있고 나중에 사장들이 그 깡패 엄마랑 친구들이 평화시장 옥상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맨날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때 제가 딱 꽂혔어요. 왜냐하면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사회시간에 선생님이 조합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면서 노동조합이 있다고 말씀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평화시장에 들어오면서 여기도 노동조합이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무역회사나 은행 같은 좋은 회사에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저는 그곳이 나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이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그리고 두 번째는 71 11 13일이었는데요. 아침에 출근을 했더니 시장에 불을 다 내리고 출근하자마자 퇴근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Q. 출근을 했는데요? 그런 전례가 없던 일인가요?

(이숙희) . 없죠. 평화시장은 70년대 전기가 약해서 불이 잘 나갔는데요. 그럼 한전에 전화를 해서 몇 시간 후에 불이 다시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노동자들은 그냥 기다렸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오늘 그 죽은 사람 1주기라서 일을 못하니까 그냥 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잖아요. 그래서 너무 깜짝 놀랐죠. 근데 놀란 건 잠시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해가 환할 때 집에 가는 게 처음인데 집에 가기 실잖아요. 그런 데다가 또 나오니까 앞에 젊은 남자들이 전태일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모란공원 추도식을 가는데, 관광버스로 왕복하고, 가면 빵 하고 우유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옆에 있던 친구 2명한테 같이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셋이서 모란공원을 갔죠. 그때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왜 전태일이 죽었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거예요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 72년도 봄에 노동조합에서 야간 중등과정을 한다는 거예요. 너무 가고 싶었어요. 제가 그때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였는데 평화시장 옥상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그때 10m만 더 가면 노조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거리를 용기가 없어서 못 가서 결국은 중등 교실을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참여하게 된 거죠.

 

Q. 선생님이 69년도에 처음 평화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셨고, 1970년도 전태일의 죽음이 있고, 71년도 1주기에 모란공원에 참석하면서 전태일의 죽음을 깨닫게 되셨네요. 그리고 이제 평화시장의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가 되셨네요. 그럼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떤 일들을 하셨어요?

(이숙희) 가장 먼저 시다들을 부를 때 번호가 아니라 이름 불러주기를 했어요. 그리고 서로 반말하지 않기. 그리고 이제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노동조합은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는 곳이구나라는 걸 깨닫고 소심했던 제가 옆자리에 있는 미싱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죠. (웃음)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노동조합의 핵심 멤버가 된 것 같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사진-5> 1975년 '새마을 노동교실'에 입학한 어린 여공들의 모습. '평화 새마을 교실'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중등 기초과정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Q. 선생님이 그때부터 노조의 핵심 멤버가 되셨네요.(웃음) 그럼 선생님, 그때 노동환경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도 해야 하고, 노조 활동도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선생님은 선생님만의 돌파구는 없었나요?
(이숙희) 힘들지 않았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왜냐하면 노조를 통해 신세계를 경험한 거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8시에 공장에 들어가서 밤 10-11시까지 일하고. , 추석이나 구정은 대목이라고 해서 약 2주 정도씩 공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철야하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가 노동조합에 갔더니, 이름도 불러주죠,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도 하게 되잖아요. 그때 노조에서 중등반만 한 게 아니라 교양교육 같은 것도 많이 했으니까. 예를 들면, 꽃꽂이도 하고, 등산도 하고, 회의 진행법, 이런 것들을 다 배우니까 하나의 학교였던 거죠. 그래서 그게 저에게는 신세계였던 거죠. 늘 공장에서 별로 말도 없던 제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거죠. 그래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Q. 그럼 일을 할 때도 노조활동들이 기다려지고?

(이숙희) . 그래서 매일 1시간의 점심시간마다 제가 일하던 5층 동아 상가에서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고, 노조 사무실이 있던 평화시장 4층 옥상까지 헐레벌떡 가는 거예요.

 

Q. 아무래도 그때는 실질적으로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부족했잖아요. 그때는 8시간 근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말에 쉬는 것도 아니고요. 주로 노조활동은 언제 하는 거예요?

(이숙희) 점심시간에 잠깐 가서 보고 오고, 저녁에 이제 모여서. 10시에 끝나도 이제 모여서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리고 그때 되면서 일요일은 쉬기 시작했어요. 노조에서 계속 단속을 하면서. 그러니까 일요일 날 교육 프로그램 같은 걸 하고.

 

Q. 그렇게 점심시간에 시간을 쪼개서 조금씩 만나고,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에도?”일을 할 때도 노조활동들이 기다려지고?

(이숙희) . 온전히 노조에 다 쓰는 거죠. 그래서 바빴죠. 근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이숙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감사했습니다. 그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탄압 속에서도 노조활동을 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하루에 8시간을 일할 수 있고, 주말에는 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노조활동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그 활동 자체가 당시 노동 운동가들에게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도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인터뷰] 이동석 선생, 얼마 전 그날이 온다’ LP판의 표지 모델을 만나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났던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이번 인터뷰 기사에서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모국에서의 유학생활과 수감생활 속에서 얻게 된 것들, 그리고 또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날이 온다’ LP판의 주인공까지.

 

 어느 것 하나 영화 같지 않은 것이 없는 이동석 선생님의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 1)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인터뷰 중인 이동석 선생.

 

Q.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면서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게 힘드셨어요?

(이동석) 제가 재일교포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랐잖아요. 근데 어렸을 때, 내가 한국사람 그리고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스스로 알거나 부모님이 알려줘서 아는 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너는 조선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건 눈이 다른 거예요.

 

Q. 집에서 내가 부모님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나 주변 일본 사람들을 통해서?

(이동석) 재일교포 대다수의 부모님이 여유가 없는 거예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가난해서 일본으로 일하러 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거의 없거든요. 그랬거든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재일교포는) 마이너스 이미지였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는 일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나는 일본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오랜 고민을 거쳐서 모국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었어요.

 

일본에서의 정체성 혼란과 모국에서의 유학생활

 

(사진 2)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두번째 공판을 마치고 일본에서 함께 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과 법원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출처: 한겨레)

Q. 그러한 배경 때문에 선생님께서 모국 유학을 선택하시게 되셨네요. 그럼 그때 당시의 유학생활의 추억, 그리고 모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 그때 우리나라에 유학을 오겠다는 건 불어를 배우기 위해 오는 건 아니었어요. (웃음) 저는 우리나라 말을 배우고 싶었고, 우리나라를 알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 그때 불어를 열심히 공부하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외대 연극회에 들어가서 같이 연극하는 거예요. 연극한다고 해서 제가 발음이 안 좋으니까 무대에 서서 연극하는 건 아니지만, 같이 연습하고 구경도 하고 끝나면 같이 술 마시고 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Q. 선생님이 그때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좋으셨나봐요?

(이동석) , 추억이에요. 근데 그때만 해도 재일교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그 시대에 한국에 유학 오는 재일교포라면 돈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집은 아주 가난했어요. 그때 대부분의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부자가 아닌데 눈에 띄는 몇몇 재일교포들 때문에 한국 학생들도 재일교포에 대해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연극회에서 친구들 만나 친구가 되면 서로 그런 인식이 없어지는 거예요.

 

Q. 인간 대 인간으로?

(이동석)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구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즐거웠고요. 제가 구속이 되고 난 후에도, 그리고 석방하고 일본에 갔다가 10년이 지나고 나서도 제가 연락하면 다들 만나주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일본에 가시고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이동석) 만나주는 거예요. 제가 80 8 15일에 석방이 되어서 시골에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외대에 갔어요. 저 멀리서 연극회 후배가 절 보면서 너무 반가워해주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후배가 내일 다른 사람들한테도 연락해서 종로에서 모임을 가지자고 그러더라고요. 휴대폰도 없는 그 시절에 만나러 갔더니 친한 친구들이 10명 가까이 왔더라고요.

 

Q. 선생님이 출소했다고 하니까 연극회 친구들이 바로 그렇게 모인 거예요?

(이동석) , 제가 어떤 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는지 다 알면서도 그렇게 모인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그 친구들이 저 때문에 다 고생을 해요. 왜냐하면, 제가 출소하고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거기 왔던 친구들이 끌려가서 저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조사당했어요. 이런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저를 만나줄 정도로 서로 친하게 지냈어요.

 

(사진 3) 지난 2018년 10월,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출처: 한국외대 홈페이지)

Q. 선생님에게는 73년도부터 75년도까지 2년 반 정도 한국 친구들과의 유학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 같아요.

(이동석) ! 재미있었고, 한국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죠. 전공인 불어과 친구들보다는 연극회 친구들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이 있죠. 아무래도 매일 만나서 연습하고 술 먹고 하니까. (웃음) 그래서 구속된 후에도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감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 유학 온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고요. 한국에 오면서 제가 얻은 게 더 많다고 생각해요.

 

Q. 어떤 걸 얻으셨다고 생각하세요?

(이동석) 우선 우리나라라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우리나라 말을 배울 수 있었고요. 일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즐거움, 뭔가 해방감 같은 걸 느꼈어요. 물론 한국 내에서도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있지만, ‘, 우리나라구나라는 걸 느꼈죠.

 

Q.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으로 유학을 오실 건가요?

(이동석) , 그럼요. 제가 석방되고 일본에 가서도 얼마나 우리나라에 오고 싶었는데요!

  

'그날이온다' LP판에 숨겨진 뒷 이야기

(사진 4) 인터뷰 도중 '그날이온다'CD를 들고 있는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오늘 모국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느껴지네요. (‘그날이 온다’ CD를 가리키며)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이 이 CD와 관련된 어떤 일화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동석) 이것도 김치식당(첫 번째 인터뷰 내용 참고)을 만난 것처럼 신기한 이야기예요. 제가 보안사에 잡혀 있다가 75년도 12 30일 날 서울구치소에 가게 되거든요. 가니까 겨울이잖아요. 그해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요. 서울 구치소에 가니까 너무 추운 거예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구치소에 있으면서 옷에 이가 생기는데, 속옷도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빨아서 입어요. 빨아도 마르지도 않고, 어쩔 수 없이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속옷을 입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있는데 제가 그때 1 옥사에 있었는데요. 그게 원래는 소년수들이 있는 공간이었었거든요. 근데 그때 워낙 반공법이나 긴급조치 관련 수감자들이 많아지면서 방이 모자라서 소년수 방까지 오게 된 거예요. 그때 제가 1옥사 상, 2층의 가운데 정도에 있었어요. 그때 1옥사에 긴급조치로 들어와 있던 외대 학생 한 명이 있었더요. 그때 제가 외대를 다녔기 때문에 그 친구한테는 제가 선배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친구가 제가 아무것도 없는 걸 알고는 칫솔이나 휴지 같은 걸 나한테 주는 거예요.

 

Q. 방이 달랐을 텐데, 어떻게 전달해준 거예요?

(이동석) 이것도 참 고마워요. 그 학생이 아침에 세수하러 갈 때, 몰래 주는 거예요. 저는 독방에 있었기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수할 수 있는 물을 조금 방으로 갔다 줬어요. 다른 수감자들은 다 같이 세수를 할 수는 없고 수감자가 직접 물을 떠 와서 자기 방에서 세수를 했거든요. 이때 그 친구가 아침에 세숫물을 가지러 갈 때 저한테 몰래 던져줄 때도 있고, 아니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나갈 때 시켜서 저한테 전달해주곤 했어요.

 

Q. 이것도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 정말 고마운 분이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나 고마운데요. 제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고, 어렵고 할 때니까. 그래서 제가 고마워서 한 번은 찾아서 그때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재심을 시작하면 한국을 왔다 갔다 하잖아요.

 

Q.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선생님이 그 후배를 찾고 싶으셨던 거죠?

(이동석) , 일본에 있을 때도 항상 머릿속에 있었죠.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재심할 때는 2 3, 3 4일 왔다가 가니까 찾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근데 외대에 재입학하니까 시간이 생겼잖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대수라는 분을 만났거든요. 그분을 알게 되어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당시에 긴급조치로 구속된 외대생은 아마 그 친구일 거라고 하는 거예요.

 

Q. , 한국에 계시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만나게 된 이대수라는 분이 그 외대생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동석) !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얼마 후에 그 사람이 일하고 있는 사당으로 이대수 씨랑 같이 가서 만났어요. 가서 보니까 40년이 지났는데도 약간 그때의 느낌이 있더라고요. 근데 그 친구도 저를 기억하고 있고요. 그래서 몇십 년 만에 만나서 다 같이 맥주를 한 잔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종종 만나고 있어요.

 

(사진 5) 레코드 ‘그날이온다’는 정치범이 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이  협동하여 전개했던 운동이 만들어 낸 것이다. 왼쪽은 70년대 출판된 LP판이며, 오른쪽은 최근에 다시  출판된 CD입니다. (세 명 중 제일 왼쪽에서 웃고 있는 수감자가 바로 이동석 선생님의 한국외대 후배다) 

 

Q. 신기하네요! 근데 선생님, 그 외대 학생분이랑 이 LP판이랑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예요?

(이동석) 그게 알고 보니까 이 LP판에 찍힌 사진의 주인공이 그 외대생이더라고요.  LP판은 70년 후반인가 그때 나왔거든요. 근데 재심이랑 새롭게 시작하니까 이걸 제작했던 사람이 LP가 아니라 CD로 다시 만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일본에서 한국에 올 때 10장 정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재판에서 만나는 분들이랑 몇 분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리고 딱 1장이 남았어요. 근데 작년에 그 외대 후배를 만나면서 보니까 이 CD에 나온 이 사람이랑 닮은 거예요. 그래서 혹시 이 CD의 젊은 학생이 지금 그 후배가 아닌가 해서 다음에 만날 때 제가 이 CD를 가져갔어요. 만나서 제가 이 CD를 책상에 올려놓자마자 그 친구가 CD의 사진을 보더니 바로 ! 이거 난데!’ 그러는 거예요. 그 친구도 이제 와서야 자기가 이런 CD의 표지에 실려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Q. 그럼 그분도 일본에서 출판된 LP판에 자신의 사진이 있다는 걸 몰랐었던 거예요?

(이동석) , 몰랐죠. 근데 이 사진을 보면 웃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보고 웃어줬다는 거예요. 그 후배가. 지금 긴급조치로 잡혀서 이게 지금 법원 앞인데. (웃음) 근데 이 사진이 어떻게 찍혔냐면, 당시 일본 구원회 사람들은 면회가 안되잖아요. 그래서 법원 앞에서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면 그 순간 몰래 찍는 거예요. 걸리면 사진을 빼앗기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 사진을 찍은 사람도 누가 누군지 모르고 찍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 버스에서 내려서 나오는 사람 보니까 일반 수감자가 아니라 정치범인 것 같아서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동석 선생님의 꿈 

 

Q.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생님은 김치식당도 그렇고 이 CD 이야기도 그렇고 참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네요. 정말 신기하네요. 그럼 이제 선생님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남은 인생 동안 선생님의 꿈이 무엇일까요?

(이동석) 제가 재심을 통해서 무죄를 받았잖아요. 무죄받고 국가에서 보상금을 받고 난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은 제가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국가가 과거에 잘못했지만, 계속해서 그것만 붙잡고 살 수는 없는 거예요. 보상금이 크든 작든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해서 유의미한 인생을 사는가 하는 문제는 제가 결정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찾기 위해서 지금 제가 한국에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의 문제죠. 맨날 친구 만나서 술 먹고, 늦잠 자고, 여행 다니고 할 수만은 없는 거예요. 산다는 것의 목적.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 이번 9월까지는 한국에서 살기로 정했어요. 그동안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찾는 게 제 꿈입니다.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를 만들어도 몇 편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났던 모국 유학.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국에서의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이동석 선생님은 그 속에서 인생의 귀한 의미들을 이미 발견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웃음과 감동을 잃지 않고 계셨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과연 인간에게 모국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곳곳에 녹아있는 따뜻한 이야기들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오는 9월까지 한국에서 인생의 마지막 꿈을 찾을 이동석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인터뷰] 이동석 선생, 어학연수 중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나다.

 

  지난 송기복 선생의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재일동포 이동석 선생의 이야기이다. 이동석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한국에 왔다. 2년 후, 1973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해 연극회 활동 등 모국에서의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1975 11 22일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이 하숙집을 들이닥치면서 행복했던 모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끝이 나게 된다. 1976년 당시 대법원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과 간첩죄를 인정해 이동석 선생에게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그렇게 끝이 날 것 같던 이동석 선생의 모국 유학은 2018년 새롭게 시작되었다.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2017년 민사소송도 끝이 나자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돌려주지 못하는 청춘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했다. 그리고 지난 2월 한국외대 불어과 졸업생이 되었다. 지금부터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의 첫 번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 사진  1>  지난  3 월  30 일 ,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다양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이동석 선생 .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반갑습니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동석) 제가 이번 2월에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했습니다. 75년도 당시 제가 구속될 때 한국외대 불어과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거든요. 그래서 2018년도에 4학년으로 재입학하고 지난달에 졸업했습니다. 4학년부터는 등록금 전액을 내지 않아도 신청과목 수에 따라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해서 한국에 오래 있고 싶어서 일부러 학점을 많이 신청 안 하고 1년 더 학교를 다니고 이번에 졸업했습니다.

 

< 사진  2>  지난  2018 년  10 월 ,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 ( 출처 :  한국외대 홈페이지 )

Q. 선생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럼 졸업하신 지 얼마 안 되셨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 안 지났어요. 근데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 졸업장만 받으러 학교에 갔거든요. 그런데 저를 알고 있던 학생지원센터의 여자 직원이 이번에 제가 졸업했다고 연락을 안 했는데 미리 알았나 봐요. 학교에 오시면 말해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졸업장 받으러 가는 날 아침에 연락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학생지원센터에서 일하는 그 직원이 꽃다발 준비해서 제가 졸업하는 걸 축하해준다고 사진 찍고 그랬어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은 없었지만은 그래도 학교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Q. 선생님이 한국외대에서는 이미 유명인사였네요! (웃음) 그럼 선생님, 2018년도에 다시 한국에 오셔서 다시 입학해서 학교 다니실 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요, 사실은 공부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웃음)

 

Q. 정말요? (웃음) 그럼 선생님 왜 다시 학교에 가셨어요?


(이동석) 제가 왜 재입학을 결심했냐면요, 재심으로 무죄를 받고 민사까지 다 끝나고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잖아요. 근데 그 보상금이라는 게 저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국가가 과거의 잘못된 일에 대해 무죄를 통해 사과는 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국가는 돈으로밖에 계산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국가로서는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책임을 묻지 마. 이 사건은 없었던 걸로 하는 거다.’ 그런 거잖아요? 그러면 그 돈을 제가 받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이제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재심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 내가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있었을 때, 학교에 가서 문의를 해봤어요. 만약 학교에서 안된다고 하면 제가 항의하려고 했어요. 내가 이제 무죄까지 받고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재입학이 안 되는 것인지 항의하려고 했는데, 아주 쉽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제가 안 한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웃음) 그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외대 불어과로 재입학했어요.

  

65세에 떠난 프랑스 어학연수, 그리고 만난 김치식당.

<사진 3> 2018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하고 한겨레와의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  이동석 선생은 자신의 대학시절 가운데 가장 즐겁게 보냈던 순간으로 ‘연극회’ 시절을 꼽았다. (출처: 한겨레)

Q. 그런데 선생님 기사를 찾아보니까 외대에 재입학하시기 전에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다녀오셨던데, 어떻게 프랑스까지 가게 되신 거예요?


(이동석) 제가 한국외대에 처음 불어과로 입학을 했는데, 제가 영어를 아주 싫어했어요. 그렇다고 불어를 잘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때 한국 학생들은 불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우리말로 서툰데 불어를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나서 재입학한다고 제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이가 20대라면 몰라도 이제 70 가까이 되는데요. 그때 제 나이가 65세였거든요. 저는 일본에서 일을 65세까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때 재판 후에 보상금이 나오고 퇴직을 하게 되면서 모든 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어를 해야 되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기 전에 프랑스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Q. 그래서 파리와 니스로 6개월 정도 다녀오신 거예요?


(이동석) 그렇죠. 근데 원래 불어를 배우려고 간 거였거든요. 제가 프랑스 갈 때는 옛날에 한국에 와서 우리말을 배웠던 생각을 하고, 프랑스에 6개월 정도 있으면 일상회화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간 건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웃음)

 

Q. (웃음) 프랑스에는 선생님 혼자 가셨던 거예요?


(이동석) , 혼자 갔어요. 언어가 잘 안 되더라고요. 니스에 2달 정도 있다가 파리로 갔거든요. 파리에 있으면서 보니까 불어가 아예 안 되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스스로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목적을 바꾸고 관광을 하자하고 마음을 먹었어요. (웃음)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니까 파리에서 미술관에 많이 다녔어요.

 

Q.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웃음) 65세에 어렵게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생각보다 언어가 늘지 않아 빨리 마음을 바꾸고 즐겁게 프랑스에서 여행을 하시다 온 거네요. (웃음) 근데 선생님은 과거에 국가로부터 엄청난 아픔을 경험하셨음에도 이렇게 활기차게 일상을 살아가시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인데요. 혹시 프랑스에서 재밌었던 일화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동석)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뭐냐면요. 처음 니스에 2달 정도 있을 때는 일본음식이나 한국음식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특히 한국음식이 먹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파리에 갔을 때,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 파리를 돌아다녔거든요. 돌아다니면서 파리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찾았어요. 저녁 6시쯤 되었는데, 골목에 한글 간판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그 간판 이름이 항아리였어요. 그래서 가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7시부터 영업을 한다고 잠겨 있었어요. 근데 안에 일하던 사람이 저를 보고 나와서 저한테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일본말로 대답을 했는데,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파리에서 한국 음식점 주인이 저를 보자마자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하는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에 몇 번 그 식당에 가서 자연스럽게 주인이랑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예요. 특히 왜 파리에서 일본 사람이 한국 식당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나누게 된 거죠.

 

Q. ! 그 한국식당 주인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었나요?

 
(이동석) 네 일본 사람이었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 주인이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의 이응노 화백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 식당이 원래 이응노 화백의 조카인 이희세 씨가 경영했던 식당이었어요. 그때 이응노 화백이 화가였던 조카 이희세 씨를 프랑스로 불러서 공부를 시켜줬던 거죠. 근데 1967년도에 동베를린간첩단사건(동백림사건)으로 이응노 화백이 윤이상 씨 같은 분들이랑 같이 구속이 됐잖아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파리에서 구명운동을 하신 거예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구명운동도 많이 하고 해서 그분들이 70년대 후반에 다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돌아오신 분들이 한반도의 통일과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유럽에 거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심코 갔던 그 식당이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었던 거죠. 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이었던 거예요.

 

Q. 선생님은 어학연수로 갔다가 우연히 그런 역사가 있는 식당을 알게 되신 거네요. 근데 그 이희세 씨랑 지금 그 식당의 주인인 일본 사람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나요?


(이동석) 그 시대에 이응노 화백, 윤이상 씨, 이희세 씨 모두 일본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말을 잘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식당을 하는데 그 일본 사람은 프랑스에 와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 그 일본 사람이 여권을 분실했던가 해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희세 씨가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있지만, 한국식당에서 같이 일하겠냐고 이희세 씨가 제안한거죠. 그런 인연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식당은 이희세 씨가 은퇴를 하면서 지금의 주인이 물려받은 거예요.

 

 <사진 4>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두 개의 한국식당.  이동석 선생은 우연히 항아리라는 한글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그 식당은 항아리 식당이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다.  김치식당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Q. 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 그럼 아직까지 그 식당은 한글 이름 항아리 예요?


(이동석) 이것도 재미있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항아리라는 식당은 옆집이예요. (웃음) 한국식당이 두 개가 있는데 가운데 항아리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위에 붙어 있는 간판만 보고 거기가 항아리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몇 번 가보니까 그 식당은 항아리가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던 거예요. (웃음) 김치식당!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운명인가 싶더라고요. 걷다가 우연히 만난 한국식당의 간판을 잘못 알고 다른 식당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까 그 식당이 1967년 동베를린간첩단사건의 이응노 화백의 조카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유럽의 거점으로 만들었던 식당이었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재일동포 2세로 고등학생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다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스스로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동석 선생. 그리고 모국을 찾은 재일동포에게 한국이라는 모국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그의 청춘을 빼앗아 갔다. 그렇게 흘러가버린 40년의 세월. 그러나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되돌려주지 못하는 자신의 청춘을 스스로 되찾기 위해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고 지난 2월 졸업했다. 이 이야기도 한 편의 영화 같지만, 어학연수를 떠난 65세의 이동석 선생은 그곳에서 19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거점 역할을 했던 김치식당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동백림사건의 이응노 화백, 그 조카 이희세 작가, 그리고 그 식당을 이어받은 일본인 주인과의 인연까지... 또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에는 이동석 선생의 두 번째 인터뷰를 전하고자 한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여보 미안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한테 사과할게.

 

지난 시간 송기복 선생님께서 어떻게 기적처럼 황인철 변호사를 만났는지 첫 번째 인터뷰를 전해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송기복 선생님의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Q. 서로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오히려 황인철 변호사가 선생님께 했던 말이?
(송기복) 황인철 변호사가 저한테 했던 말이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선생님 잘못 아니에요.”였어요. 그리고 저보고 선생님은 비록 여기에 계셔도 행복하세요.” 이러는 거에요.

  

Q. 황인철 변호사가 왜 그렇게 이야기 하셨죠?
(송기복) 선생님 남편 같은 남편이 없다고. 그러면서 저를 위로해주셨어요. 선생님 남편 때문에 자기가 많이 배운다고 하면서요.

 

(사진) 인터뷰 중인 송기복 선생

Q. 선생님 남편을 보면서요? 선생님 남편분께서 원래 군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송기복) 공군이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 헬기 조종사였어요. 그런데 제 사건이 터지고 바로 제대를 했죠. 그리고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는 매일 면회를 왔어요. 저를 조금이라도 운동시키기 위해서 매일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광주로 이감하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광주까지 면회를 왔었구요.

 

Q. 정말 로맨티스트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남편분께서 선생님께 사과를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송기복) 우리 남편이 나한테 무릎을 꿇은 적이 있어요. 제가 집행유예로 출소했거든요. 원래 집행유예로 나올 때는 그 날 저녁에 나온대요. 그러니까 12 24일날 저희 남편이 저를 기다렸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때 교도소 안에 제 제자가 있었어요. 제가 이제 나가려고 짐을 싸놓고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오더니 선생님, 오늘 못 나가신데요.’ 하는 거에요. 뭐가 내려와야 하는데 안 내려왔다는 거에요. 저는 그러려니 했는데, 바깥에서 우리 남편은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남편한테 들었는데, 그때 남편이 밖에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요.

 

Q.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니까.
(송기복) 이유도 없이 그렇게 되니까. 그때 저희 남편이 제가 고문을 받고 교도소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제가 나오면 저를 입원시키려고 병원 예약을 했었대요. 그게 12 24일이었어요. 근데 제가 안 나오니까 우리 올케 말에 따르면 우리 남편 얼굴이 창백해지더라는 거에요. 아마 저희 남편인 이게 안되는가보다, 다 쇼였나보다라고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제가 크리스마스 날 오전 11시경인가 출소하게 된 거에요. 그런 전례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나와서 다행이 남편이랑 예약한 그 병원으로 갔어요. 그때 우리 남편이 병원에다 저를 데려다 놓고는 저한테 큰 절을 하면서 여보 미안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한테 사과할께. 우리 남편이 저한테 그러는 거에요. 저는 그걸 보고 놀라면서 남편의 그 말을 받아들이질 못했어요. 근데 나는 왜 그걸 진심으로 못 받아들였는지. 지금 내가 미안해요. 그때 저는 남편의 그 모습조차도 위선자 같은 거에요.

 

Q. 오히려 의심이 들고?
(송기복) , 제가 남자들은 이중인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안기부에서 저를 그렇게 때리고 한 그 사람이 자기 자식이 아프다고 하니까 전화로 자기 와이프한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안기부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하는 저 손으로 어떻게 자기 자식들은 저렇게 사랑해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자들은 다 저런가?’하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그런 남자를 안기부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Q. 안기부에서 선생님을 때리고 고문하던 남자들이 자기 자식들한테 하는 걸 보면서요?
(송기복) 그럼요. 자기 자식들한테는 아니 세상에 없는 천사처럼 하는거에요. 자상한 아버지. 너무 훌륭한 남편인 거에요. 누가 자기 남편이 안기부 같은 곳에 가서 사람을 두드려패고 강제로 그런다는 걸 그 사람들은 믿을까? 그래서 제가 남편이 병원에서 저한테 큰 절을 하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제가 의심을 하고 믿지를 못했던 거에요. 그래서 그게 지금도 너무 미안해요.

 

Q. 그런 일이 있으셨구나. 근데 남편분이 정말 멋지신 분이네요.
(송기복) 그리고 저희 남편이 저에게 종종 비록 우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런 사건을 당하게 되었지만, 얼마나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느냐면서 그랬거든요. 그럼 그때 저는 나는 싫어, 나는 좋은 분들 안 만나도 되니까 그냥 그런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하면, 저희 남편이 나를 끌어안아주면서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서 위로해주고 그랬어요.

 

(사진)  화창한 봄날 연구소에 피어오른 예쁜 할미꽃을 찍고 있는 송기복 선생 

Q. 맞네요. 황인철 변호사님도 뵙고. 그리고 선생님께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함세웅 신부님이시죠? 함세웅 신부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송기복) 제가 함 신부님을 한강성당에 계실 때 처음 만났거든요. 그때 함 신부님이 오라고 하셔서 제가 갔거든요. 그때 제가 신부님을 처음 본거에요. 인사를 하러 갔는데 내가, 아이고 정말 내가 미안해. 신부님한테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래야 하는데, 제가 첫 만남에 신부님 왜 이렇게 조그만하세요?’ 그런 거에요. (웃음) 그래서 제가 그 말 하고 나서 저희 남편한테 혼났었어요. (웃음)

 

Q. 함 신부님을 처음 보자마자 선생님이 하신 말이 에게 이렇게 작으세요?’였어요? (웃음)
(송기복) , 나는 신부는 엄청 크게 봤거든.

 

Q. 이렇게 솔직하신 게 선생님의 매력시인 것 같아요. 그럼 저희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에요?
(송기복) 함 신부님 때문에 알았지 또. 함 신부님이 오라 그러면 오고, 가라 그러면 가야 되고 그런거지. (웃음)

 

Q. 연구소에 큰 금액을 후원하셨던데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후원하셨던 거에요? 쉽지 않은 결정이잖아요.
(송기복) 아니, 내가 한 게 아니야. 우리 송기홍 남동생이 했어. 멋쟁이야.

 

Q. 그때 동생이 후원을 결정했을 때,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동참하신 거에요?
(송기복) 동생이 멋지다고 생각했지. 제가 나중에 함 신부님한테 (동생) 5천만원만 해도 되는데 쟤 왜 저러는지 몰라 그랬죠. (웃음) 신부님은 그때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나는 미안해, 더 잘하고 싶고 한데. 아마 다 똑 같은 마음일꺼야. 이렇게 우리처럼 당하고 무죄를 받으면, 해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으리라고 생각해. 정말로.

 

Q. 그럼 선생님 혹시 연구소에 바라는 점은 없으세요? 예를 들어 이런 일을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든지.
(송기복) 크게 내가 바라지 않아도 잘할 거라고 나는 생각을 해. 우리처럼 이렇게 당한 사람들은 바라는 것도 생각을 못 할 거에요. 그냥 다 잘되기만을 바라지.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고 나는 고마운 게 나는 아마 함 신부님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꺼야. 우리 이화영 소장 너무 고마운게 누가 우리같은 사람 돌아보고 하려고 하겠어요. 밥그릇 차려줘도 안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진) 연구소에 봄을 알려주는 라일락 앞에서 송기복 선생과 박민중 활동가

Q. 연구소가 더 잘 되도록 앞으로 더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꿈이 뭘까요? 저는 선생님이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꿈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송기복) , 로또를 살까말까 고민중이야! (한바탕 웃음)

 

Q. 선생님 만약에 로또를 사서 10억이 생겼어요. 뭐하고 싶으세요?
(송기복) 나는 가끔가다 로또에 당첨되면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에게 커피 한 잔이고, 밥 한 그릇이고 다 사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우리 남편 형제분들. 그리고 우리 형제들. 그리고 우리 사건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분들. 그 분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 밥 한끼라도 사드리고 싶어.

 

Q. 그럼 송기복 선생님의 꿈은 선생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혹시라도 선생님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려웠던 분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게 선생님의 꿈이세요?
(송기복) 아이고 그럼요!

 

송기복 선생님과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기적같이 황인철 변호사를 만났던 이야기, 항상 그 자리에서 선생님 곁을 지켜주셨던 남편 이야기, 그리고 선생님의 꿈까지. 인터뷰하는 동안 오히려 제가 행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꼭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송기복 선생님, 꼭 로또 당첨되세요^^ 매일매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연구소는 선생님의 일상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故 김승효 선생의 국가배상판결에 대한 장경욱 변호사와의 인터뷰"

 

지난 1 28,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김승효 선생에 대한 국가배상 사건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재판부는 고문과 건강에 미친 피해의 연관성을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재판이 열리기 한달 전 지난해 12 26일 김승효 선생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에 인권의학연구소는  김승효 선생 재판의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와 이번 재판 과정과 의미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사진) 간첩 조작 사건 전문 변호사로 불리는 장경욱 변호사

Q. 지난 목요일의  김승효 선생님 국가배상재판 결과를 요약해서 말씀해 주세요.

 

(장경욱 변호사) 2021 1 28일 오후 1 50분 서울중앙지방법원 358호 법정에서 고 김승효 선생님에 대한 국가배상 사건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2020 10 22일 변론종결 후 1심 선고를 앞둔 지난해 12 26, 고 김승효 선생님께서 끝내 고문후유증으로 갑작스럽게 별세하셨습니다. 이번 1심 선고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심 선고결과가 고인을 떠나보낸 유족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습니다. 고문후유증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돌아가신 고인과 유족들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봐 그 어느 때 보다도 걱정도 커졌습니다.

 

다행히 1심 선고 국가배상판결에 의하면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불법체포, 구금 및 고문 가혹 행위에 의한 허위자백을 받아낸 불법행위 및 이를 간과한 채 허위자백에 기초하여 구속 기소한 검사의 불법행위를 인정하였습니다. 나아가 한국에 유학 와서 한국어도 서툰 고인이 일본어 통역인 없이는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재판을 받고 더욱이 불법증거들을 그대로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아 중형을 선고하고 확정한 1심부터 상고심에 이르는 재판부의 모든 재판관들의 위법한 재판행위로 인한 불법행위를 인정하였습니다.

 

1심 판결은 또한 수감 기간 중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인 고인의 가족들이 정신과 치료를 요청하였음에도 이를 방치한 교도소 당국의 불법행위도 인정하였습니다.

 

1심 판결은 결론적으로 고인의 정신분열증과 위와 같은 공무원들의 일련의 불법행위 사이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하여 국가가 고인과 그 유족들에게 일실손해, 기왕 치료비, 기왕 개호비 및 향후 개호비(생존 조건), 위자료의 손해배상을 지급할 것을 선고하였습니다.

 

Q. 지난 국가배상 재판에서의 핵심 쟁점은 무엇이었나요?

 

(장경욱 변호사) 고인에 대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불법 체포, 감금, 가혹행위, 이로 인한 허위자백에 기초한 위법한 기소와 위법한 재판, 그리고 교도소 공무원들의 치료 방치에 이르는 일련의 공무원들의 불법행위와 고인의 정신분열증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1심 국가배상 재판에서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사진) 영화 '자백'에 등장했던 故 김승효 선생

Q. 재판부가 김승효 선생님의 조현병 발생과 악화를 고문과 투옥에 따른 결과임을 인정하였나요?
또한, 이 부분이 재판 결과에 정당하게 반영이 되었나요?

 

(장경욱 변호사) 1심 판결문에 의하면 원고 김승효는 대학생으로서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불법으로 체포, 감금되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극도의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도 극한의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으며, 이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조현병이 발병하였음에도 구금되어 있던 2,662일 동안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됨에 따라 그 증세가 악화되어 영구적인 장해를 입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출소 후에도 20여 년간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으며, 불법 구금일로부터 46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도 심적 고통과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피해망상, 정서적 불안정성, 충돌조절능력의 저하, 현실 판단력의 저하 등의 증상을 보이고 있는 점 원고 김승효가 이 사건 불법행위로 인하여 간첩의 누명을 쓰고 징역 12년 및 자격정지 12년이라는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조현병까지 앓게 되면서 그 부모와 가족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겪었을 것이고, 조현병을 앓고 있는 원고 김승효를 수십 년간 돌보면서 겪었을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고통도 상당할 것임이 경험칙상 분명한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고문후유증으로 청춘과 인생 전체가 망가진 채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인과 유족 분들게 손해배상액은 턱없이 미흡할지라도 고인과 유족 분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린 점에서 고인을 여읜 슬픔에 빠져 있는 유족 분들께 작은 위로가 되는 긍정적 의미가 있는 판결로 평가합니다.

 

Q.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으로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세요.

 

(장경욱 변호사) 재판의 핵심 쟁점인 고인의 정신분열증과 불법행위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고인께서 나쁜 나라로 각인된 한국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한국 방문을 꺼려하시는 상황에서 한국에서 그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한 감정신청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사진) 2019년 손창호 전문의가 직접 일본에서 故 김승효 선생을 만나 면담 진행

다행히 인권의학연구소의 도움으로 정신과 전문의 손창호 선생님께서 바쁘신 중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셔서 1 2(2019 8 30, 31) 일정으로 일본 교토를 방문하여 고인과 주변 지인들, 가족들을 면담하고 고인에 대한 과거 여러 자료들(앨범, 입원치료 기록 등)과 뉴스타파 영상 자료들을 검토한 후 소견서(정신의학과적 평가보고서)를 작성해 주셨습니다. 또한, 재판의 증인으로 법정에 나오셔서 고인의 정신분열증 증상과 고문 가혹행위 등 사이의 인과관계 및 고인의 정신분열증 증세가 최고 중증 등급으로 아주 간단한 단순 작업도 수행할 수가 없는 상태여서 노동능력상실률이 100%’임을 증언해 주셨고 1심 판결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인권의학연구소 관계자 분들과 손창호 선생님의 고인과 유족 분들을 위한 정성 어린 지원과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삼가 고인의 영생을 기원하며 하늘나라에서나마 꼭 고국을 굽어 살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사진)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일본 교토를 직접 방문하여 지인과 고인의 형 김승홍씨와 함께 찍은 사진

지금까지인권의학연구소 장경욱 변호사와 함께  김승효 선생 국가배상소송 1심 판결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장경욱 변호사는 지난 2018 10월 김승효 선생의 교토 자택을 직접 방문하여 형사재심 무죄 판결문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이번 재판에서 김승효 선생과 그 가족의 억울함을 해소해드리기 위해 노력하신 장경욱, 신윤경 변호사에게 감사드립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앞으로도 고문과 같은 가혹행위가 개인의 건강에 미치는 피해 관련성을 입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아래 본 재판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81901001&code=940100 

  2021년을 맞이한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인권의학연구소 후원회원님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이번에는 2021년을 여는 시점에서 인권의학연구소의 이화영 소장님과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2021년도 연구소의 계획과 방향은 물론 이화영 소장님의 근황과 개인적인 바람도 물어보았습니다. 특히 최근 서울에 눈이 많이 오면서 ‘넓은 수녀원 마당의 눈 치우기가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시는데요. 연구소가 2009 7 4일 마포에서 개인단체로 시작한 이후 줄곧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곁을 지킨 이화영 소장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진) 이화영 소장

 Q. 안녕하세요이화영 소장님. 먼저 회원님들에게 소장님의 근황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화영안녕하세요인권의학연구소 회원님들의 건강과 평안을 바라는 마음 모아 새해 인사드립니다회원님들도 그러시겠지만 요즘 저는 인권의학연구소 활동 이외에 대면해야 하는 사적공적 활동을 거의 삼가고 있습니다대신 전화통화나 영상회의 횟수가 늘었네요^^ 매년 1월은 연구소 정기총회 준비로 가장 분주한 달입니다코로나-19 상황에서 대면 총회가 가능할지 불투명하지만최근 저는 지난 한 해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2021년 연구소 활동 계획과 총회 준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새해 들어 서울엔 매주 눈이 왔어요넓은 수녀원 마당의 눈 치우기는 우리 연구소 식구들의 겨울 활동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사진) 지난 2월 21,28 일 수녀원 마당에 소복 히 쌓인 눈을 치우는  이화영 소장과 박민중 활동가

 

Q. 소장님께서는 지난 2009년 인권의학연구소 개소 이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계신데요소장님에게  2020년은  어떤 한 해였나요?

 

(이화영)  마포에서 인권의학연구소 개소식을 한 게 2009 7 4일이에요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네요처음엔 인권의학연구소를 개인단체로 등록하고 시작했지만, 2011년 1월에 사단법인으로 전환했어요당시 인권의학연구소 자문위원들께서 연구소가 지속가능한 공익민간단체가 되려면 법인으로 가야한다는 조언을 주셨고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사단법인 등록을 신청했었죠그러고 보니 2020년은 인권의학연구소가 사단법인으로 출발한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네요. 10년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제대로 활동해 온 것인가초심을 제대로 지켜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더욱 듭니다.

 

우리 모두 처음 경험하는 2020년 코로나-19 상황에서 저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저는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진료 현장을 떠났었지만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의료인 참여 요청에 틈틈이 현장에서 의료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하기도 했었습니다코로나-19 상황에서 제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인권의학연구소 활동을 통해 자주 만나왔던 고문피해자 분들이 고연령층이어서 대부분 직접 뵙지 못한 한 해였다는 점입니다또한대면 개인상담집단치유도 거의 중단했죠. 매년  6월에 열렸던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행사도 개최하지 못했습니다다만, 2020년에 피해생존자들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국가폭력생존자 자조모임의 설립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습니다 (사진 참조). 지난 8년 동안 입법하지 못했던 고문피해자 지원법안 등이 7월에 다시 발의되도록 지원했고훈포상취소 가해자 명단 공개를 위한 행정소송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정의를 구하는 국가폭력 생존자 자조모임" 설립하는 날(2020.7.16)

Q.  새로운 한 해, 2021년을  맞이했는데요. 2021년의 개인적인 계획이나 바람은 무엇일까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제공하는 피해자 지원의 목표는 트라우마 사건 이전과 같은 원래의 삶으로 회복하는 것인데요트라우마 사건으로 인해 빼앗기고 포기했던 “일상의 삶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2020년에 코로나-19 상황을 직면하면서 이 일상이란 단어의 의미가 모두에게 크게 다가오고 있는데요일상의 삶에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죠모두들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낀 것 같아요. 2021년은 트라우마 피해생존자를 포함해 우리가 모두 일상의 삶을 되찾고 소소한 즐거움이 함께하는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Q. 그렇다면, 2021년 인권의학연구소의 계획과 방향은 무엇일까요?

    

(이화영)  2021년도 인권의학연구소 활동 방향은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시스템 마련과 가해자 책임을 촉구하는 일입니다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고문피해자 지원법안” 등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서 입법화되는 것입니다고문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사회적 지원없이 잘 생존해 왔지만이들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인데요이들이 현재 고령인 점을 생각하면더는 미룰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지난해에 제2기 과거사법이 통과되어  2021년에는 과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그러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받는 과정에서 재외상회나  2차 피해를 겪어서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연구소 교육사업팀은 진실규명과정에서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사관 대상 교육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기념치유센터를 내원하는 트라우마 피해생존자들에게 보다 전문적이고 배려깊은 치유지원을 제공하기 위해서 심리상담 전문가 네트워크를 조직했는데요. 2021년에는 심리상담사뿐 아니라 인권피해자를 지원하는 의료인예비의료인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 교육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코로나-19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는 비대면 교육 방법으로 지속할 예정입니다.

 

더불어코로나-19  상황이 지속한다 하더라도 회원님들과의 소통 활동을 계속하고자 합니다페이스북과 뉴스레터 뿐 아니라 편지전화 등을 통한 소통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드리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연구소  후원회원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릴께요.

 

(이화영인권의학연구소가 트라우마 피해자 지원을 할 수 있는 동력은 오직 후원회원님들의 힘에서 나오고 있습니다연구소는 비영리 ·민간단체여서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 없이 회원님들의 자발적 후원에 의해서만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한분 한분 직접 뵙고 후원의 의미와 감사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글로나마 먼저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연구소에서는 올해 “회원 배가 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주변에 저희 인권의학연구소를 널리 알려주시고회원님께서 각자 한 명의 신규 회원님을 추천해 주신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를 지원하는 연구소 활동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제 회원님께 좋은 기억으로 남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드리며 마치고자 합니다 또 뵐 때까지 얼굴허리 그리고 마음까지 쭉 펴면서 건강 또한 잘 지키세요.

 

(사진) 언론사 인터뷰 중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배경을 설명하는  이화영 소장

이화영 소장님은 2021년의 개인적인 바람으로 ‘트라우마 피해생존자를 포함해 모두가 일상의 삶을 되찾고 소소한 즐거움이 함께하는 것을 말해주셨습니다항상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이화영 소장님께 이번 2021년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이화영 소장님은 회원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연구소는 올해 회원 배가 운동을 진행한다고 하셨는데요이 글을 읽고 계신 후원회원님들꼭 기억해주시고 동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지금까지 박민중 활동가가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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