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희 선생 인터뷰-②] 노동운동, 10년의 재판, 그리고 개인 이숙희”
이숙희 선생에게 노동조합 활동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힘들지 않고, 재미 있었던’ 긍정적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지난 인터뷰에서 어린 이숙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노동자가 되고 노동 조합을 만났는지 알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활동, 근 10년 동안 이어졌던 청계피복 노동자 법정 싸움, 그리고 선생의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장소를 달라!
Q. 72년 당시 청계피복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교육 장소가 없었던 것이 힘들었죠. 그때 노동조합 사무실이 7평 정도밖에 안되어 평화시장 옥상에 의자를 깔고 교육을 했거든요. 한 번은 노동조합에서 중등부 과정을 신설했는데, 200명이 넘게 신청한 거예요. 선착순 50명만 신청을 받았는데 다 수용할 수 없어서, 결국 25명을 다시 돌려보냈어요.
Q. 교육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엄청났네요.
(이숙희) 그렇죠. 한 달에 한 번 전체 교육을 하려면 장소가 없으니까 청계천 2가의 청소년회관을 빌리거나 영등포 돈보스코 회관까지 가야 했어요. 그러니 당시 노동조합에서 가장 급선무였던 부분이 바로 장소 확보였어요. 그런 와중에 부녀부장이 모범여성근로자로 뽑혔고, 청와대에 가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 부녀부장이 청와대에서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만났는데,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육영수 여사가 비서관들에게 장소를 마련해주라고 한 거죠.
Q. 청와대에서 직접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위해 교육장소를 마련해 줬어요?
(이숙희) 그건 아니고요. 청와대에서 평화시장 사장들한테 노동자들 교육장소를 마련해주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그랬더니 사장들이 미싱 한 대당 150원씩을 다고 해요. 그 돈을 모아 동화상가 5층에 노동교실을 만들게 된 거죠.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저희는 정말 기뻤어요. 근데 이소선 여사는 사장들만 돈을 낼 게 아니라 우리도 벽돌 한 장 값이나마 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당시 일요일 작업을 안 할 때여서 일요일 작업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죠. 근데 우리 노동자들이 수당을 받지 않고 두 번 일요일에 작업을 해주기로 결정한 거예요. 노동자들도 장소 마련을 위해 참여를 한 거죠. 마침내 1973년 5월에 동화상가 옥상에서 노동교실 개관식을 했어요. 합창도 하고, 많은 준비를 했죠.
Q. 청와대가 직접 장소를 마련한 게 아니라, 사장단과 노동자들이 합의해서 노동교실 장소가 마련되었네요.
(이숙희) 네, 그렇죠. 저희도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는데, 개관식 이후 바로 노동교실 문을 닫는 거예요.
Q. 개관식을 하자마자 누가 노동교실 문을 닫았어요?
(이숙희) 사장 대표단이죠. 그때 사장 대표단에서 내세운 이유가 정말 웃겼어요. 노조에서 개관식에 재야인사인 함석헌 선생님을 초청했다는 것과 노조가 만든 개관식 초대장에 자주색 글씨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Q. 초대장 글씨가 자주색이어서?
(이숙희) 네. 자주색 글씨가 있어서 이 노조의 사상이 불손하다는 거예요. 그때 사진을 보면 개관식 하기 전에는 다들 기쁜 표정이었는데,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표정들이 다 안 좋아요. (웃음) 그게 지금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결국 개관식을 하자마자 노동교실 문이 닫혀버렸어요.
1975년 2월 7일
Q. 사장대표단은 왜 그렇게 했던 건가요?
(이숙희) 아마 사장단은 노동교실을 만들어 주는 대신 노동조합을 길들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사장단에서 노조 간부 4명을 내보내라고 했었거든요. 함석헌 선생에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을 비롯해서 마음에 안 들었던 간부들이었던 거죠. 저희가 1년인가를 버티면서 싸웠어요. 사장단은 노조에게 그들이 원하는 지부장을 세우라고까지 요구했어요.
Q.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노동조합에서는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이숙희) 그게 73년도에 있었던 일예요. 그 이후 75년까지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동화상가 복도를 돌아다니며 노동교실을 돌려달라는 구호를 외치고, 사장 대표에게 협박과 애원의 편지도 쓰고, 노동청에도 편지를 보냈었죠.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는데도, 안 되는 거예요. 저희가 내린 결론이 ‘싸울 수밖에 없다’였어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은 없었어요.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사장단은 노조간부들을 자르려고 했기 때문에 간부들이 이걸 사전에 알게 되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75년 2월 7일 날 동화상가 옥상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다음에 교실이 있는 옥상으로 점심시간에 한 200여 명이 다 뛰쳐 올라가서 문을 잠갔어요.
Q. 집단행동을 하신 건가요?
(이숙희) 네, 처음으로 농성을 한 거예요. 그전에는 그렇게 싸워본 적이 없었는데, 2년의 시간 동안 저희 의식도 성장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했거든요.
Q. 옥상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가 농성을 했어요?
(이숙희)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죠. 원래 저는 동원조인데, 구호를 외치기로 한 사람이 못들어 온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나가서 구호를 외쳤어요. 계속 구호만 외칠 수는 없어서 다 같이 애국가를 부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 ‘통일’ 대신에 ‘배움’을 넣어 부르고 그랬죠.
Q. 언제까지 농성을 했나요?
(이숙희) 그날 저녁 7시까지 그렇게 있었는데, 경찰들이 오고 난리가 난 거죠. 그때 사장단과 협상을 해서 노동교실을 저희에게 다 돌려주기로 한 거예요. 다만 동화상가 옥상은 안된다고 해서 그곳의 집기들을 다 옮겨서 다른 곳에 얻기로 했어요.
Q. 노동교실을 어디로 옮겼어요?
(이숙희) 동대문운동장, 지금 DDP 맞은편에 유림빌딩이라고 있어요. 그곳 2,3,4층을 얻었어요. 2층은 복지원이라는 병원이 들어갔고, 3, 4층을 노동교실로 쓰게 된 거죠.
Q. 그렇게 모두가 함께 단결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네요.
(이숙희) 네, 그랬던 거죠. 돌이켜보면 제가 노동조합에 72년에 들어갔는데 75년도에 그런 결과를 얻어냈으니까 그 사이에 의식이 많이 성장했어요. 그리고 그 싸움을 통해 노동자들이 용기를 얻게 된 거죠. 75년도가 굉장히 중요한 한 해가였어요. 2월에 노동교실을 되찾는 싸움부터 시작해서 그해 12월까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어요. 마침내 아침 9시 출근, 저녁 8시 퇴근이라는 작업시간 단축과 시다 임금직불제 도입 등 노동환경 개선을 이루게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75-6년도에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었죠.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야 하는 재판과정
Q. 최근 청계피복 노조원들의 국가배상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죠? 재판 과정과 결과를 말씀해 주세요.
(이숙희) 2010년 1월, 55명의 청계피복 노조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나긴 재판이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2005년에 설립된 1기 진화위에도 저희 사건을 신청했어요. 진화위에서 저희 사건과 관련해서 국가의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이를 근거로 2010년 민사배상 소송을 시작해서 2012년 1심, 2013년 2심에서 저희가 승소했어요. 근데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해서 꼬이기 시작했죠. 이후 고등법원에서 다시 승소했어요. 이번엔 대한민국 정부가 2019년에 재상고를 한 거예요. 그때는 재판이 너무 편파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이 밝혀지면서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2년이 지난 지난 4월에 다행히 대한민국 정부가 상고를 취하하면서 ‘찝찝한 승소’를 하게 된 거죠.
Q. 오랜 재판 과정이었네요.
(이숙희) 10년이 넘는 너무 긴 재판 과정이었어요.
Q. 재판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재판은 증거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니 증거를 저희가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어느 공장에서 언제 노조원이 되었고,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를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데, 당시 평화시장은 취업규칙이나 이런 게 없잖아요. 또, 공장이 망하기도 했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기가 어려웠어요. 특히, 전두환 군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게 광주5.18항쟁 탄압이고, 두 번째가 바로 민주노조 말살이었거든요. 청계피복노조 같은 경우, 간부들이 다 퇴근하고 난 뒤에 (정부에서) 노동조합 문을 뜯고 들어와서 기물이나 자료들을 모두 가져갔어요.
Q. 법정에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 자료가 그때 없어진 것예요?
(이숙희) 네, 그래서 재판 증거로 제출할 자료들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 부분이 정말 어려웠는데, 2-3년 전에 청계피복의 9.9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어요. 특히, 다큐멘터리 감독님들이 도움을 많이 주었어요. 함께 삼송에 있는 수장고에 가서 일일이 찾아서 찍었어요. 그런데도 증명이 안 되는 노조원들이 남아 있었어요. 왜냐하면 호적상 이름과 우리가 아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이었죠. 고민을 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그게 결혼식 사진이예요. 결혼식 사진에는 호적상 이름이 나오고 저희 조합원들이 다 참석해서 찍혀있으니까 증거로 효력이 있을 것 같았어요. 결혼식 사진을 찾아서 거기에 나온 조합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직접 적어서 법원에 제출했어요. 이것은 변호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잖아요. 이 작업을 해서 변호사한테 가져다주었죠. 이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내야 하는 과정이.’
Q. 국가 피해자인데, 국가를 상대로 내가 피해자임을 또 증명해야 하는게..
(이숙희) 그렇죠.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도 힘들었고, 재판이 너무 길어져서 힘들고 그랬죠.
Q. 그렇게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게 한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숙희) 일단 이 재판은 우라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사실 청계피복은 자료의 측면에서 너무 취약했기 때문에 억울한 부분이 더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항상 같이 했으니까 할 수 있었고, 제가 지속적으로 전태일 재단과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증거를 찾아내는 게 너무 힘든 과정이었지만 다큐를 찍는 감독님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죠. 마지막으로 전태일기념관도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감사하죠. 그 도움이 없었다면 자료를 찾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을 거예요.
개인 이숙희, 그리고 꿈
Q.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10대, 20대 이숙희라는 노동자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이숙희) 전태일을 만나기 전에는 좀 우울한 노동자였죠. 제가 원해서 평화시장에 취직을 했지만 너무 싫었거든요. 말을 함부로 하는 (작업장) 환경도 싫었고요. 늦게까지 일하고 정말 힘든 환경이었어요. 그래서 별로 희망이 없는 삶이었는데, 노동조합을 만나고 전태일을 만나면서 변한 거잖아요? 그래서 20대 저는 정말 열심히 역할을 했다고 봐요. 만약 제가 20대에 그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욕심많은 사람이 되어 공장 차려서 노동자를 학대하면서 ‘돈 벌어야 돼!’ 이랬을지도 모르잖아요?(웃음) 제가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도와준 게 바로 노동조합이고, 전태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 노동조합과 전태일은 20대 이숙희에게 신세계를 보여주었죠. 그것 때문에 20대 이숙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앞으로 꿈이 있다면?
(이숙희)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아요.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마 (현실적) 여건이 안 되니까 아예 꿈을 안 꾸고 살았던 것 같네요.
Q. 당시 10대, 20대 이숙희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요?
(이숙희) 만약에 여건이 되었다면, ‘공부’를 계속했겠죠. 제가 어렸을 때, 아나운서가 되거나 선생이 되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것을 향해서 갔겠죠.
Q. 그럼 지금 여건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이숙희) 무엇인지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싶어요. 다른 생각 하나도 안 하고. 그런 환경이 된다면....
약 2시간에 이르는 인터뷰 동안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같았다.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어린 노동자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었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준 큰 학교였다. 인터뷰 중에 한국 노동운동, 특히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를 볼 수 있었고, 어린 노동자를 지금의 인권활동가로 우뚝 성장하게 만든 그 힘을 확인하기도 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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