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울릉도사건 48주년에 생각하는 국가폭력피해 가족의 삶
지난 3월 15일은 울릉도간첩단사건이 발생한 지 48년이 되는 날이다.
1974년 3월 당시, 거센 유신 헌법 반대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저항을 희석하고자 울릉도간첩단사건을 조작하여 발표하였다. 울릉도간첩단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남산으로 불법연행하여 고문 수사한 47명 중 검찰이 32명을 기소하였고 재판을 거쳐 3명을 사형에 처한 대규모 조작간첩단 사건이다. 불행했던 한국의 현대사에서 대표적 사법살인으로 알려진 인혁당사건은 그나마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졌으나, 울릉도간첩단사건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제1기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1기진화위)는 울릉도간첩단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하였다. 이 진실규명 결정문을 토대로 피해자들은 형사 재심을 신청하였고 드디어 2014년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40년 만에 조작사건임이 밝혀진 것이다. 지금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간첩의 누명을 벗어났지만, 피해생존자들과 남아있는 가족들의 삶은 과연 원상으로 회복되었을까?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사형선고, 어머니는 10년형을 선고받아 하루아침에 소녀가장이 된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전동희)의 이야기를 ”울릉도 1974 (최창남 지음)“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문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기사가 크게 나왔다. 중앙정보부가 울릉도를 거점으로 암약한 대규모 간첩단을
검거했다는 발표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우두머리이고 그 아래로 붙들려 간 친척들의 얼굴이 빠짐없이 나와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라도 사람들의 얼굴도 여럿 있었다. 이른바 울릉도간첩단사건이었다. (중략) 신문에 기사가 나온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살가운 이웃으로 가깝게 지내던 동네 사람들도 변하였다. 나와 동생들이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였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도 외톨이가 되었다. 위로하고 도와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간첩의 딸’이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런 놀림을 받으면서도 나는 세 살짜리 동생을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학교에 데려가 책상 밑에 있게 하였다.”
(울릉도 1974, 144쪽)
그동안, 국가폭력이 피해자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지 않았다. 실제 조작간첩사건으로 인한 가족에 대한 극단적인 피해는 가족관계의 파괴였다. 가족의 형태를 유지했던 경우에도 부모의 PTSD는 자녀 양육에 있어서 영향을 미쳤고, 2세의 심리적 문제나 자녀와 대화 단절의 형태로 나타나곤 하였다.
“지난해 7월, 하원차랑 선생이 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권의학연구소 활동가들은 밀양의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조문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장례식에서 영정으로 남아 있는 하원차랑 선생과
그 옆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하원차랑 선생의 자녀들은
고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가족 역시 피해자임이 분명하나,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각자의 상처로 인해 가족끼리도 소원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아픔을 볼 수 있었다.”
(인권의학연구소 홈페이지 기사 2021.07.22 )
생존해 있는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고통의 무게를 나누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피해자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관계가 원상으로 회복되지 못한 그들의 남은 삶에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고통을 기계적으로 계산한 배·보상금으로 해결해온 국가의 사과 방식과 이를 당연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에 큰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했던 한국의 현대사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고문과 조작의 시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가폭력이 난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의 가족들은 친척과 이웃의 외면과 냉대에 직면하였고, 특히 피해자의 배우자는 피해당사자의 옥바라지는 물론 남아있는 자녀들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져야만 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은 일용직이나 그나마 자본이 있는 경우 분식집 등 소규모 자영업이 대부분이었다.
피해자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출감을 기다렸으나, 석방되어 돌아온 피해자는 국가폭력 사건 이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사건 이전의 직업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잦은 이직을 되풀이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하였다. 자주 알코올에 의존하여 가족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여 피해자 석방의 감격을 퇴색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피해당사자의 국가폭력으로 인한 정신심리적 어려움과 사회적 어려움이 지속되면서 가족들의 어려움도 함께 깊어졌지만, 사회지원 체계는 없었고 오롯이 개인에게 그 책임이 지워졌다. 2000년도 이후, 과거사위원회 등을 통해 피해자들의 고통은 알려져 왔으나, 상대적으로 가족들의 고통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가족해체를 겪지 않았던 경우에도 가족이 피해당사자 못지않은 고통 중에 있었음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22년도 인권의학연구소는 국가폭력 피해자 가족에 대한 모니터링 사업을 통해 국가폭력 피해자 못지않게 고통 중에 있었던 가족의 기억을 기록화하고자 한다. 가족의 정신심리적, 사회경제적 고통의 내용을 파악하고 피해자 및 가족 삶의 원상회복에 요구되는 사회와 국가의 역할을 확인하여 사회적 지원 체계에 이를 반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가폭력 피해자의 구제는 개인과 가족의 삶을 파괴하였다는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구제지원책은 파괴된 개인과 가족의 관계, 삶을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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