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에 머물다
최창남 (작가,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숲 사이로 난 길은 아늑했고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은 따스했다. 오랜 세월 동안 울릉읍과 북면을 이어주던 옛길이다. 산길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봄 햇살 가득했다. 숲은 충만한 봄의 생명력으로 인해 싱그러움으로 수런거리고 있었다.
살을 에는 모진 바람을 이겨내던 기다림과 봄을 맞는 설렘이 바다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그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설렘 가득한 숲과 달리 산길은 지나는 이 없어 조용하고 고요했다. 발걸음 소리, 바람 소리, 흔들리는 나뭇잎들과 풀잎들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산길 끼고 있는 산자락마다 여우꼬리사초 가득했다.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풀이다. 가는 풀잎의 끝에 수술 같은 것이 달려 있어 붙은 이름인 것 같았다.
바람에 풀잎 흔들리고 있었다. 숲 출렁이고 길 흐르는 것 같았다. 풀이야말로 진정한 산의 주인이며 생명의 바탕이다. 풀이 없다면 토사 흘러 내려 산은 이내 형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풀은 확실히 민중들을 닮았다. 아니 민중들이 풀을 닮았다. 그래서 민초(民草)라는 말이 생겨났으리라. 참된 주인이면서도 외면당하는 것 또한 꼭 닮았으니 말이다.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섬 가까이 바다 위에 작은 섬이 보였다. 바단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마치 환영 같았다.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에 취해 발걸음을 쉬 뗄 수 없었다. 죽도다. 한 집 두 집 떠나 지금은 단 한 가구가 살고 있다는 섬이다.
<울릉도에 머물다 - 최창남건립추진위원>
‘저렇게 아름다운 섬이 자신의 삶에 그렇게 끼어 들어올지는 자신도 도저히 알 수 없었으리라... 어린 시절에는 그 작은 섬 죽도에서 뛰어 놀고 헤엄치기도 했겠지...’
소위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손두익 선생은 당시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에게 가해진 혐의는 죽도를 거점으로 간첩들을 실어 날랐다는 것이었다. 1964년 강원도 거진항에서 명태잡이 갔다가 불행히 납북되었던 사건이 빌미가 된 것이다. 당시 약 30일 간 납북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법에 따라 처벌을 다 받았지만 다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선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혐의를 부인하였지만 고문에 의해 시인하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지장을 찍었다고 했다.
<울릉도에 머물다 - 최창남건립추진위원>
선생은 사건이 일어났던 74년 이후에도 여전히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산허리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었다. 집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다 계단으로 올라선 곳에 선생의 집은 있었다. 세월을 닮은 낡은 처마의 끝에 오징어를 건조하기 위한 건조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건 일어나기 전 선생은 배를 소유한 선주였지만 출소 후에는 생계를 위해 오징어 말리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 마저도 그만 둔지 오래 되어 오징어 건조대에는 지나는 바람만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마당이라 할 수 없는 좁은 통로에는 고무호스, 양동이와 그릇들이 쌓여 있었다. 통로 한 쪽에 널려 있던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문 곁에 붙어 있던 계량기에 문패 대신 손두익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불 들어오지 않아 전기장판이 깔려 있는 방 안은 울릉도의 세찬 바람을 견뎌 내느라 베니어합판으로 덧대어 있었다.
산자락 사이사이에 붉은 동백꽃 떨어져 있었다. 간간이 초설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 마삭줄도 보였다. 지나는 이 없는 산길에 든 낯선 이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랐는지 박새 울음이 더욱 요란스러웠다. 북면으로 들어서니 내쳐 걸으니 이내 석포였다. 숲 사이로 이어지던 길은 해안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파란 하늘 맑아 눈부셨다. 푸른 바다는 투명하고 깊었다. 바람 세찼다. 걷기 힘들었다. 쟈켓을 꺼내 입었다. 머리까지 쓴 후 단단히 여몄다. 바다는 일렁이고 출렁였다. 홀로 고기잡이 나가던 배 또한 곧 뒤집어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것이 어디 배 뿐이냐... 흔들리는 것이 어디 바다 뿐이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천부였다. 저동포구로 돌아왔다. 모진 세월을 선생과 함께 견뎌낸 따님과의 저녁 약속이 있었다.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 사이로 비릿한 내음이 전해졌다. 저녁 어스름 내린 포구의 비릿함이 꽤나 친근히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민박집에 지친 몸을 뉘인 밤 동안 내내 출소하신지 27년이나 지났음에도 아버지의 수번호 ‘3965’가 잊히지 않는다던 따님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 웅~웅~ 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밤 내내 그렇게 노래하고 그렇게 울었다.
모두들 떠났지만 선생은 울릉도에 남아 있었다.
자신을 내친 땅에 남았다.
어쩌면 감옥에서보다 견디기 힘들었을 그 모진 세월을 그저 묵묵히 몸으로 견뎌냈다.
그렇게 깊은 밤 지났다.
아침이 되었다. 울릉도를 떠나는 날이었다. 선표를 구하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도동포구에서 저동포구로 이어진 해안 따라 난 길을 걸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바다는 여전히 투명하고 깊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기암괴석이었다.
돌아보니 멀리 절벽 위로 등대가 보였다. 갈매기들 날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흘린 눈물이 많은 땅이어서 그런지 그 눈부신 아름다움들이 서글펐다.
<울릉도에 머물다 - 최창남건립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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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최창남 (목사.작곡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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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안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늘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등의 여러 민중
가요를 작곡했다. '개똥이 이야기' '그것이 그것에게'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울릉도 1974"등 몇 권의 책을 냈다.
현재 연세대학교대학원에서 통일학을 공부하고 있다.
(사)'백두대간 하늘길'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20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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