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밥풀이가만난사람

[고문생존자 인터뷰]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 - 박정석 선생님-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5공 반국가단체 조작사건 아람회, 오송회, 한울회 수기), 5공정치범명예회복회, 살림터, 1997년 5월>

 

 이 책의 공동저자인 박정석 선생님은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모진 고문과 함께 독방감옥 생활을 오래 경험하셨다.

 2011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수행한 '고문피해자 인권실태조사' 중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당시 박정석 선생님은 설문대상자로,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인터넷 신문기사 등을 조사하면서 아래의 기사를 발견하였다. 선생님이 걲으신 오송회 사건은 국어교사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실록 전북민주화운동사] 오송회 사건- 전두환정권 대표적 용공조작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이 '오송회(五松會)'라는 용공이적단체를 구성했다고 발표하여 교육계는 물론 지역주민과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들의 주요 혐의는 정부체제를 수시로 비판하면서 북한을 찬양하는 언행을 했고 오송회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는 것이었다.

 

증거물로 제시된 <병든 서울>의 작가 오장환은 일제 시대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일원으로 활동하다 48년 2월 월북한 시인이었다. ‘월북’과 ‘병든 서울’이 버무려지면서 이들의 ‘친북’ 성향과 반정부의식을 이미지화하는 데 극적 효과를 내는 소품으로서는 꽤 적절한 자료였던 셈이다.

 

문학작품에는 문외한이었던 당시 공안 관계자들은 시외버스 안내양의 신고로 입수한 이 시집의 불온성 여부에 대해 당시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교수는 시집의 몇몇 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1981년 ‘학림사건’, 부산의 ‘부림사건’, 대전의 ‘아람회 사건’, 공주의 ‘금강회사건’ 등 당시 전국적으로 대형 공안사건이 경쟁적으로 터지면서 관내에서도 뭔가 크게 터뜨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은밀한 내사가 시작되었다.

 

시집의 원 소유자이자 중심인물로 군산제일고 현직 국어교사이던 이광웅 선생이 포착되었다. 경찰은 이광웅 선생을 비롯한 현직 교사들이 1982년 4월 19일 군산제일고 뒷산에서 4.19 위령제를 지낸 사실에 주목했다. ‘건’을 터뜨리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경찰의 행동개시에 의해 덫에 걸린 희생자들이 속속 연행되었다.

 

이광웅, 박정석, 황윤태, 이옥렬, 전성원, 채규구, 강상기, 엄택수 교사 등 나중에 경찰의 명명에 의해 ‘오송회’의 멤버가 된 현직 교사들이 먼저 잡혀 들어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11월 2일에 불법 연행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된 11월 25일까지 24일 동안과 이후 경찰에 송치된 12월 13일까지 43일 동안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평소 사회주의를 동경해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좌경 의식화교육을 해온 ‘빨갱이’ 로 조작되었다.

 

몽둥이로 전신을 때리고 수십 차례 뺨을 때리는 것은 점잖은 조사에 속했다.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비행기고문에 이어 발가락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는 전기 고문 끝에 용공단체 오송회는 5공 공안정권의 명을 받아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군산제일고 뒷산에 있던 소나무 다섯그루 아래서 모임을 가졌다는 데 착안해 ‘오송회’라는 작명을 해준 경찰에서는 이들 교사 모임을 고정간첩단 정도로 크게 키우려고 했다.

 

<2006. 7. 3.자 새전북신문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박정석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엿다. 또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과 관련해 사건에 연루된 이들과, 아람회, 한울회 관련자들과 함께 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 시작된 박정석 선생님의 '시 읽기와 쓰기'

 

 박정석 선생님은 산책을 나와 혼자있는 시간에 새와 꽃이 아닌 현실의 주제와 사회적 시선에 대해 시를 쓴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 하루 생각을 정리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랍속에 두고 발표를 망설인다.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와 같은 발언으로 같은 동료 교사에 의해 신고 당했으며, 우리사회의 끝니자 않은 '빨갱이', '용공세력'의 낙인이 이 "시"들을 통해 발표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하셨다.

 

 1972년 모교인 익산 남성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절친인 이광웅 선생님과 함께 시읽기와 독서모임을 하였으나, 점차 사회에 대해 관심을 두고 『전환시대의 논리』, 『들어라 양키들아』와 같은 서적을 통해 유신에 대한 관점과 식민사관의 극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국어교사는 단지 역사인식에 궤를 같이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선생님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결성 사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도 받았으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법조 영욕의 60년] 오심의 역사-1. 오송회 사건

 

법원의 오심은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범죄행위다. 행정부나 입법부의 오판은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통해 바로잡을 기회라도 있지만, 사법부의 오심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다.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오욕과 억울함만 역사로 남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남북 대치를 빌미로 정권에 적대적인 진영의 인사들을 숙청하기 위해 조작된 용공 사건들의 실체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등을 악용한 것은 경찰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검찰 등 수사기관만이 아니었다.

 

당사자들과 국민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 것은 권력 앞에 무릎꿇고 법복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과 폭압에 눈감은 사법부와 판사들이었다.

 

사법부 스스로도 이런 역사의 과오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사법 조작사건에 '공범'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 법정에서 공개 사과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대표적인 '번복판결'이자 '사과 판결'이 ‘오송회 사건’ 재심이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전북 군산시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로 구성된 독서 모임 회원 9명이 4·19 기념행사와 5·18 추모제를 지냈다며 공안당국이 이들을 ‘용공분자’로 내몰면서 터졌다.

 

공안당국은 교사들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시를 낭송해 정치 현실을 비판했다며 이들의 모임인 오송회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했다. 5명의 교사가 소나무 아래에 모였다는 의미에서 ‘오송회’라고 칭했다.


 

이 사건으로 이광웅씨 등 교사 8명과 조성용 당시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이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경찰의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관련자들에게 1983년 12월 27일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피해자들 중 최고형인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이광웅 교사는 1987년 7월 사면조치로 4년 8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후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규명 운동’을 펼쳤다.

2007년 6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전형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규정, 법원에 소원을 청구해 2008년 11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무죄판결을 냈던 광주고법 형사1부(이한주 부장판사)는 “수사기록과 법정진술 등을 종합할 때 조씨 등에 대한 당시 검찰과 경찰의 조서는 고문·협박·회유에 의한 것으로 증거 능력이 없다. 조씨 등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과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읽고 암울한 정치적 현실을 비판했지만 북한의 정책과 사상을 동조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느꼈을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 고통에 대해 옛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이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 하겠다”고 법원의 이례적 반성을 보여줬다.

 

<2011. 7. 4.자 아시아투데이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97785>

 

지난해 겨울

 

 박정석 선생님은 2012년 12월 10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 참석하였다. 선생님은 겨울철에는 절대 외출금지의 척추혈관종을 앓고 있어서 절대 넘어지면 안되는 상황에서 지팡이를 짚고 목숨을 걸고 참석하였다고 한다. 척추혈관종으로 밝혀지기 전에 선생님은 척추암으로 진단을 받아 두번째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들었는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박정석 선생님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서 지난 시간을 마주하였다. 광주교도소에서 정신적으로 힘들 때 바륨 처방을 해준 이성희 선생님과 관련된 '울릉도 사건' 선생님들과도 인사할 수 있어서 좋았고, 송기복 선생님 등을 만날 수 있어서 더더욱 좋았다고 한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발표한 트라우마 치유 방안에 깊은 공감을 하고 선생님도 그런 치유의 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고 하셨다.

 

 

 

 

대공경찰은 사건 하나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사건의 제2인자 격인 박정석(朴正石)의 증언에 의하면,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들인 이들은 1982112, 전주 대공분실 지하실로 끌려가, 얼굴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흉터를 가진 신갑생이라는 고문기술자 등으로부터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체험을 겪는다.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을 무려 40일간이나 반복하여 받았다. 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때마다 고문의 강도는 높아갔다. 영향 받은 사람, 관계있는 사람을 대라는 고문에 문규현, 조성용의 이름이 신음처럼 튀어나왔고, 조성용은 그때부터 영문도 모르는 채 황소처럼 목이 매여 끌려나와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 합류하게 된다. 고문은 이들로 하여금 우선은 살고 봐야 하겠다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저들이 불러주는 각본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교사들은 난세를 사는 지식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놓고 고민했고
, 민주적인 교사, 깨어있는 교사이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또 산책을 좋아하여 햇빛 찬란한 날, 들과 산을 풋내를 띠고 돌아다녔다. 그 산책길에서 그들은 문학과 시와 세상을 이야기했다. 읽은 책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이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정열적인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길이라고 믿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슬그머니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되는 것이 그들이 눈에 비쳤다. 이는 국민의 저항의식을 두려워 한 반민주적, 반민중적 독재권력의 성격 때문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4.19날에 위령제라도 지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막걸리 10병과 오징어안주를 들고 학교뒷산에 올라갔다. 소나무 아래서 4.195.18 광주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식을 마치고 술 몇 잔씩 돌려 마시며 자연스럽게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를 토로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정의로웠는가를 놓고 토론하고 반성했다. 이때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일상적 삶과 가족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419 정신을 본받아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이광웅)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박정석)
약하고 용기 없이 살아 왔다.”(전성원)
한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온 비겁한 삶이었다.”(황윤태)
살아남을 권리도 없는 비겁한 놈이었다.”(이옥렬 

 

<2006. 7. 3.자 새전북신문 참조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

 

박정석 선생님은 지식인이라면, 교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이 말 때문에 사건에 엮인다는 것 용공조작이 가능한 것 자체가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분단상황의 비극이라고 하였다. 이어 박정석 선생님의 고통보다 아내의 고충의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피해자들인 나도 억울함이 컸지만 가족들도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내가 출소를 한 후 이사를 갔지만 내 자식들이 동네사람들에게 '빨갱이 자식' 소리를 들으며 상처를 받았고, 여동생들은 국가보안법에 걸려 일자리, 결혼상대를 못만나면서, 늦게까지 고생한 여동생들에 미안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힘들어 했다"고 하였다.

 

2011년 8월 서울고법 제32민사부(김명수 부장판사)는 "영장 없이 강제연행 돼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변호인이나 가족의 접견·면회를 금지당했고, 고문과 회유·협박으로 겁에 질린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고 하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이뤄졌고 피해자가 석방 후에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주변 인물이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예를 쓰고 살아야 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지금까지 선생님이 떨쳐보내지 못한 부채감이다. 박정석 선생님 자신도 피해망상, 공황장애로 정신건강의학과 처방약을 복용하고 있고, 지금은 불면증 약까지 더해졌다고 한다. 

 

 

 

박정석 선생님에게 시 한편을 인터뷰 말미에 부탁했고 선생님은 한참을 망설이셨다. 그러나 다음날 박정석 선생님은 연구소로 시를 보내주셨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요순시대

요순시절이란

백성이 불안과 분노를 느끼지 않고

과로하지 않으며 일주일에 이틀은 쉬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웃으며 술 한잔 나누는것

강물은 절로절로 흐르고

늙은 나무에 산새들이 고이 잠드는 것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30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