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희 선생 인터뷰-②] 노동운동, 10년의 재판, 그리고 개인 이숙희”

  

 이숙희 선생에게 노동조합 활동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힘들지 않고, 재미 있었던’ 긍정적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지난 인터뷰에서 어린 이숙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노동자가 되고 노동 조합을 만났는지 알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활동, 근 10년 동안 이어졌던 청계피복 노동자 법정 싸움, 그리고 선생의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장소를 달라!

 

Q. 72년 당시 청계피복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교육 장소가 없었던 것이 힘들었죠. 그때 노동조합 사무실이 7평 정도밖에 안되어 평화시장 옥상에 의자를 깔고 교육을 했거든요. 한 번은 노동조합에서 중등부 과정을 신설했는데, 200명이 넘게 신청한 거예요. 선착순 50명만 신청을 받았는데 다 수용할 수 없어서, 결국 25명을 다시 돌려보냈어요.

 

Q. 교육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엄청났네요
(이숙희) 그렇죠. 한 달에 한 번 전체 교육을 하려면 장소가 없으니까 청계천 2가의 청소년회관을 빌리거나 영등포 돈보스코 회관까지 가야 했어요. 그러니 당시 노동조합에서 가장 급선무였던 부분이 바로 장소 확보였어요. 그런 와중에 부녀부장이 모범여성근로자로 뽑혔고, 청와대에 가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 부녀부장이 청와대에서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만났는데,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육영수 여사가 비서관들에게 장소를 마련해주라고 한 거죠.

 

<사진-1> 청계피복 노동조합 노동교실 7기 개강식에 참여한 이소선 여사와 노동자들.  

Q. 청와대에서 직접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위해 교육장소를 마련해 줬어요?
(이숙희) 그건 아니고요. 청와대에서 평화시장 사장들한테 노동자들 교육장소를 마련해주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그랬더니 사장들이 미싱 한 대당 150원씩을 다고 해요. 그 돈을 모아 동화상가 5층에 노동교실을 만들게 된 거죠.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저희는 정말 기뻤어요. 근데 이소선 여사는 사장들만 돈을 낼 게 아니라 우리도 벽돌 한 장 값이나마 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당시 일요일 작업을 안 할 때여서 일요일 작업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죠. 근데 우리 노동자들이 수당을 받지 않고 두 번 일요일에 작업을 해주기로 결정한 거예요. 노동자들도 장소 마련을 위해 참여를 한 거죠. 마침내 1973 5월에 동화상가 옥상에서 노동교실 개관식을 했어요. 합창도 하고, 많은 준비를 했죠.

 

Q. 청와대가 직접 장소를 마련한 게 아니라, 사장단과 노동자들이 합의해서 노동교실 장소가 마련되었네요.

 (이숙희) , 그렇죠. 저희도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는데, 개관식 이후 바로 노동교실 문을 닫는 거예요.

 

Q. 개관식을 하자마자 누가 노동교실 문을 닫았어요?
(이숙희) 사장 대표단이죠. 그때 사장 대표단에서 내세운 이유가 정말 웃겼어요. 노조에서 개관식에 재야인사인 함석헌 선생님을 초청했다는 것과 노조가 만든 개관식 초대장에 자주색 글씨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사진-2> 1973년 5월 21일에 가진 동화상가 5층 노동교실 개관식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Q.  초대장 글씨가 자주색이어서?
(이숙희) . 자주색 글씨가 있어서 이 노조의 사상이 불손하다는 거예요. 그때 사진을 보면 개관식 하기 전에는 다들 기쁜 표정이었는데,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표정들이 다 안 좋아요. (웃음) 그게 지금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결국 개관식을 하자마자 노동교실 문이 닫혀버렸어요.

 

1975 2 7

 

Q. 사장대표단은 왜 그렇게 했던 건가요?
(이숙희) 아마 사장단은 노동교실을 만들어 주는 대신 노동조합을 길들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사장단에서 노조 간부 4명을 내보내라고 했었거든요. 함석헌 선생에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을 비롯해서 마음에 안 들었던 간부들이었던 거죠. 저희가 1년인가를 버티면서 싸웠어요. 사장단은 노조에게 그들이 원하는 지부장을 세우라고까지 요구했어요.

 

Q.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노동조합에서는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이숙희) 그게 73년도에 있었던 일예요. 그 이후 75년까지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동화상가 복도를 돌아다니며 노동교실을 돌려달라는 구호를 외치고, 사장 대표에게 협박과 애원의 편지도 쓰고, 노동청에도 편지를 보냈었죠.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는데도, 안 되는 거예요. 저희가 내린 결론이 싸울 수밖에 없다였어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은 없었어요.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사장단은 노조간부들을 자르려고 했기 때문에 간부들이 이걸 사전에 알게 되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75 2 7일 날 동화상가 옥상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다음에 교실이 있는 옥상으로 점심시간에 한 200여 명이 다 뛰쳐 올라가서 문을 잠갔어요.

 

Q. 집단행동을 하신 건가요? 

(이숙희) , 처음으로 농성을 한 거예요. 그전에는 그렇게 싸워본 적이 없었는데, 2년의 시간 동안 저희 의식도 성장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했거든요.

 

<사진-3> 강제해산에 맞선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점거농성. (출처: 성공회대 NGO 자료관)

Q. 옥상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가 농성을 했어요?
(이숙희)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죠. 원래 저는 동원조인데, 구호를 외치기로 한 사람이 못들어 온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나가서 구호를 외쳤어요. 계속 구호만 외칠 수는 없어서 다 같이 애국가를 부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 통일 대신에 배움을 넣어 부르고 그랬죠.

 

Q. 언제까지 농성을 했나요?

 (이숙희) 그날 저녁 7시까지 그렇게 있었는데, 경찰들이 오고 난리가 난 거죠. 그때 사장단과 협상을 해서 노동교실을 저희에게 다 돌려주기로 한 거예요. 다만 동화상가 옥상은 안된다고 해서 그곳의 집기들을 다 옮겨서 다른 곳에 얻기로 했어요.

 

Q. 노동교실을 어디로 옮겼어요?
(이숙희) 동대문운동장, 지금 DDP 맞은편에 유림빌딩이라고 있어요. 그곳 2,3,4층을 얻었어요. 2층은 복지원이라는 병원이 들어갔고, 3, 4층을 노동교실로 쓰게 된 거죠.

 

<사진-4> 당시 동대문에 위치한 유림빌딩의 사진.

Q. 그렇게 모두가 함께 단결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네요.

(이숙희) , 그랬던 거죠. 돌이켜보면 제가 노동조합에 72년에 들어갔는데 75년도에 그런 결과를 얻어냈으니까 그 사이에 의식이 많이 성장했어요. 그리고 그 싸움을 통해 노동자들이 용기를 얻게 된 거죠. 75년도가 굉장히 중요한 한 해가였어요. 2월에 노동교실을 되찾는 싸움부터 시작해서 그해 12월까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어요. 마침내 아침 9시 출근, 저녁 8시 퇴근이라는 작업시간 단축과 시다 임금직불제 도입 등 노동환경 개선을 이루게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75-6년도에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었죠.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야 하는 재판과정

 

Q. 최근 청계피복 노조원들의 국가배상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죠? 재판 과정과 결과를 말씀해 주세요.
(이숙희) 2010 1월, 55명의 청계피복 노조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나긴 재판이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2005년에 설립된 1기 진화위에도 저희 사건을 신청했어요. 진화위에서 저희 사건과 관련해서 국가의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이를 근거로 2010년 민사배상 소송을 시작해서 2012 1, 2013 2심에서 저희가 승소했어요. 근데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해서 꼬이기 시작했죠. 이후 고등법원에서 다시 승소했어요. 이번엔 대한민국 정부가 2019년에 재상고를 한 거예요. 그때는 재판이 너무 편파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이 밝혀지면서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2년이 지난 지난 4월에 다행히 대한민국 정부가 상고를 취하하면서 찝찝한 승소를 하게 된 거죠.

<사진-5> 2019년 청계피복 노조 재판 관련 KBS 뉴스 사진.

Q. 오랜 재판 과정이었네요.
(이숙희) 10년이 넘는 너무 긴 재판 과정이었어요.

 

Q. 재판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재판은 증거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니 증거를 저희가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어느 공장에서 언제 노조원이 되었고,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를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데, 당시 평화시장은 취업규칙이나 이런 게 없잖아요. 또, 공장이 망하기도 했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기가 어려웠어요. 특히, 전두환 군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게 광주5.18항쟁 탄압이, 두 번째가 바로 민주노조 말살이었거든요청계피복노조 같은 경우, 간부들이 다 퇴근하고 난 뒤에 (정부에서) 노동조합 문을 뜯고 들어와서 기물이나 자료들을 모두 가져갔어요.

  

Q. 법정에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 자료가 그때 없어진 것예요?
(이숙희) , 그래서 재판 증거로 제출할 자료들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 부분이 정말 어려웠는데, 2-3년 전에 청계피복의 9.9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어요. 특히, 다큐멘터리 감독님들이 도움을 많이 주었어요. 함께 삼송에 있는 수장고에 가서 일일이 찾아서 찍었어요. 그런데도 증명이 안 되는 노조원들이 남아 있었어요. 왜냐하면 호적상 이름과 우리가 아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이었죠. 고민을 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그게 결혼식 사진이예요. 결혼식 사진에는 호적상 이름이 나오고 저희 조합원들이 다 참석해서 찍혀있으니까 증거로 효력이 있을 것 같았어요. 결혼식 사진을 찾아서 거기에 나온 조합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직접 적어서 법원에 제출했어요. 이것은 변호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잖아요. 이 작업을 해서 변호사한테 가져다주었죠. 이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내야 하는 과정이.’

 

Q. 국가 피해자인데, 국가를 상대로 내가 피해자임을 또 증명해야 하는게..
(이숙희) 그렇죠.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도 힘들었고, 재판이 너무 길어져서 힘들고 그랬죠.

 

Q. 그렇게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게 한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숙희) 일단 이 재판은 우라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사실 청계피복은 자료의 측면에서 너무 취약했기 때문에 억울한 부분이 더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항상 같이 했으니까 할 수 있었고, 제가 지속적으로 전태일 재단과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증거를 찾아내는 게 너무 힘든 과정이었지만 다큐를 찍는 감독님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죠. 마지막으로 전태일기념관도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감사하죠. 그 도움이 없었다면 자료를 찾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을 거예요.

<사진-6>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사진. (출처: 한겨레)

개인 이숙희, 그리고 꿈

 

Q.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10, 20대 이숙희라는 노동자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이숙희) 전태일을 만나기 전에는 좀 우울한 노동자였죠. 제가 원해서 평화시장에 취직을 했지만 너무 싫었거든요. 말을 함부로 하는 (작업장) 환경도 싫었고요. 늦게까지 일하고 정말 힘든 환경이었어요. 그래서 별로 희망이 없는 삶이었는데, 노동조합을 만나고 전태일을 만나면서 변한 거잖아요? 그래서 20대 저는 정말 열심히 역할을 했다고 봐요. 만약 제가 20대에 그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욕심많은 사람이 되어 공장 차려서 노동자를 학대하면서 돈 벌어야 돼!’ 이랬을지도 모르잖아요?(웃음) 제가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도와준 게 바로 노동조합이고, 전태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 노동조합과 전태일은 20대 이숙희에게 신세계를 보여주었죠. 그것 때문에 20대 이숙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앞으로 꿈이 있다면?
(이숙희)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아요.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마 (현실적) 여건이 안 되니까 아예 꿈을 안 꾸고 살았던 것 같네요.

 

Q. 당시 10, 20대 이숙희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요?
(이숙희) 만약에 여건이 되었다면, ‘공부를 계속했겠죠. 제가 어렸을 때, 아나운서가 되거나 선생이 되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것을 향해서 갔겠죠.

 

Q. 그럼 지금 여건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이숙희) 무엇인지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싶어요. 다른 생각 하나도 안 하고. 그런 환경이 된다면....

 

  2시간에 이르는 인터뷰 동안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같았다.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어린 노동자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었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준 큰 학교였다. 인터뷰 중에 한국 노동운동, 특히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를 볼 수 있었고, 어린 노동자를 지금의 인권활동가로 우뚝 성장하게 만든 그 힘을 확인하기도 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이목희 전 의원, 40년 만에 무죄]

 

어제(1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목희 전 의원이 40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노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목희씨가 15일 선고 뒤 기자들과 만나 소감을 말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지만 노동조합원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이목희 의원은 어떻게든 노동운동의 불씨를 끄기 위한 독재정권의 악랄한 꼼수의 첫 번째 피해자였습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당시 노동운동을 하면서 국가로부터 피해를 보셨던 분들의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고통이 보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아래 링크는 관련 기사입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715_0001514395&cID=10201&pID=10200 

 

'3자개입 옥살이' 이목희, 재심서 무죄…"희대의 악법"(종합)

[서울=뉴시스] 옥성구 기자 =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외부에서 노동조합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 이른바 '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이목희 전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이 40년 만에 열

www.newsis.com

 

“[이숙희 선생님 인터뷰-] 힘들지 않았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송기복, 이동석 선생님에 이어 세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이숙희 선생님입니다. 이숙희 선생님은 지난 50년 동안 노동 전태일이라는 두 단어와 동거 동락했습니다. 1969년 평화시장의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로, 그리고 지금은 전태일재단의 교육위원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숙희 선생님은 최근까지 전태일재단이 서울시교육청과 MOU를 체결해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진행하고, 각 노동조합이나 특정단체들이 요청을 하면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이숙희 선생님의 일상은 물론 노동운동을 위해 바친 인생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직접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 사진-1 >  지난  4 월 이숙희 선생은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박민중 활동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Q.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숙희) 저는 지금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을 하고 있는데요. 코로나가 있기 전에는 바빴어요. 특히 재작년에는 엄청 바빴어요. 근데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는 조금 여유로워졌어요. 그래도 불규칙적이지만 교육이나 회의라든지 다양한 일들이 있으니까 항상 바쁜 듯 바쁘지 않은 듯 지내는 것 같아요.

 

팬텀싱어의 애청자

 

Q. 선생님은 노동 그리고 전태일과는 분리될 수 없는데요. 그래도 잠시 이 주제를 내려놓고, 선생님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좋아하는 드라마라든지, 시간이 있을 땐 어떻게 지내세요?

(이숙희) 제가 드라마는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요즘 드라마들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가슴을 졸이면서 봐야 하는데 저는 그걸 잘 못하겠어요. 그래서 오히려 음악프로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음악프로도 요즘 한창 인기가 많은 트로트 관련 프로는 안 보는데요. 제가 71년부터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었는데, 그때 저희가 했던 운동 중에 하나가 유행가 안 부르기 운동이었어요.

 

Q. 그런 운동을 한 이유는 뭐예요?

(이숙희) 예전의 유행가는 가사에서 여자라서 참아야 한다 등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가 많았는데요. 이런 유행가들이 은연중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듣지 말자고 했던 거죠. 그래서 최근에 우리 사회가 트로트 열풍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프로는 한 번도 안 봤고요. 그래서 제가 주로 보는 건, 가사를 못 알아들어도 팬텀싱어를 1회부터 계속 보고 있어요.

 

Q. 아 정말요? 그럼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또는 노래는 뭐예요?

(이숙희) 그런 것도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유행가를 안 부르니까 한동안은 보리밭을 많이 불렀고요. 그다음에 운동가요들을 많이 불렀죠.

 

Q. 신기해요 선생님! 그럼 같이 노동운동하셨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분들도 여전히 유행가를 잘 안 부르나요?

(이숙희) 다른 모임들은 모르겠는데요, 제가 속해 있던 팀은 그랬어요. 청계피복 내에서도 여러 팀들이 있었는데 우리 팀은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 팀은 술도 안 먹고, 유행가도 안 부르고 그랬어요. (당시 청계피복의 전체 모임은 아카시아였으며, 그 가운데 이숙희 선생님의 팀의 이름은 네잎클로버였다.)

 

<사진-2> 1970년대 당시 평화시장 옥상에 만들어진 청계 노조의 사무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숙희 선생님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이곳 청계 노조 사무실엔  여공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청계피복의 소녀 노동자가 되다

Q. 어떤 이야기를 해도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노동과 청계피복 노조는 빠질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되셨어요?

(이숙희)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저희 집이 정말 가난했어요. 교과서도 못 살 정도로. 그때 당시에 저희 어머님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저는 그걸 못 견디겠더라고요. 동생들도 저와 나이 터울이 10살 정도 났거든요. 근데 그때 양장점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제가 처음에 양장점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양장점을 갔는데, 보니까 만만한 곳이 아니더라고요. 양장점은 미싱 하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하고 그 외에는 다 제자라고 하면서, 3년 이상 일을 해야 겨우 일을 배울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데, 어떤 언니가 평화시장은 1년만 고생하면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평화시장으로 가게 된 거죠. 그때는 1년 고생해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나중에 중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엄청 반대를 하셨어요. 근데 저는 어머니가 길에서 장사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공장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그게 저의 첫 번째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웃음)

 

Q. 처음엔 양장점을 가셨다가 평화시장으로 재취업을 하셨네요. 그때 평화시장은 어땠어요?

(이숙희) 그래서 갔는데 평화시장을 딱 들어갔는데 대낮인데 굉장히 침침하더라고요. 그리고 공장에 갔더니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미싱에 붙여있는 번호로 부르고, 그리고 그때는 제단사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시다들한테 욕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이런 것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웃기는 게 재단보조들은 꼭 오빠라고 부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재단보조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오빠는 무슨 오빠야! (웃음)

 

< 사진-3 > 1960 년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채 공장에 들어온 여공들은 ,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돈을 벌었다 .  공장 사장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다른 공장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소녀들에게먹고 잘 곳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 ( 출처 :  한국일보  /  제공 :  국사편찬위원회 )

Q. 지금과는 많이 다른 노동환경이었네요. 그럼 어떻게 전태일의 죽음을 경험하신 거예요?

(이숙희) 그렇게 있다가 전태일 사건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는 그때 직접 현장은 못 봤고 그때 사장들이 뭐 깡패가 일하기 싫어서 죽었다, 폐병 걸려서 취업이 안 되니까 죽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죠. 근데 어느 날 회사에서 갑자기 저희한테 나가서 놀다가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유를 물었더니 사장이 제가 키가 작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아마 그때 근로감독관이 조사를 나왔었던 것 같아요. 전태일의 분신 이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그때 회사에서 나이 어린 사람을 쓰면 안 되는데 썼으니까.

 

Q. 그때 선생님의 나이가 어떻게 되셨어요?

(이숙희) 69년도니까 16살이었어요. 그때 법에 따르면 만 18세 미만은 취업을 시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그때 16살이었으니까 사장이 잠깐 놀다 들어오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가 그랬어요.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가 되다

<사진-4> 1970년대 중반 '마을 노동 교실'의 풍경. 교실 가득 빼곡하게 채워 앉은 여공들이 중등교육과정 수료를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Q. 그럼 선생님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전태일의 죽음이었나요?

(이숙희) 크게 세 가지 정도 이유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첫 번째 이유는 전태일의 죽음이었죠. 그런 일이 있고 나중에 사장들이 그 깡패 엄마랑 친구들이 평화시장 옥상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맨날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때 제가 딱 꽂혔어요. 왜냐하면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사회시간에 선생님이 조합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면서 노동조합이 있다고 말씀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평화시장에 들어오면서 여기도 노동조합이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무역회사나 은행 같은 좋은 회사에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저는 그곳이 나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이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그리고 두 번째는 71 11 13일이었는데요. 아침에 출근을 했더니 시장에 불을 다 내리고 출근하자마자 퇴근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Q. 출근을 했는데요? 그런 전례가 없던 일인가요?

(이숙희) . 없죠. 평화시장은 70년대 전기가 약해서 불이 잘 나갔는데요. 그럼 한전에 전화를 해서 몇 시간 후에 불이 다시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노동자들은 그냥 기다렸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오늘 그 죽은 사람 1주기라서 일을 못하니까 그냥 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잖아요. 그래서 너무 깜짝 놀랐죠. 근데 놀란 건 잠시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해가 환할 때 집에 가는 게 처음인데 집에 가기 실잖아요. 그런 데다가 또 나오니까 앞에 젊은 남자들이 전태일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모란공원 추도식을 가는데, 관광버스로 왕복하고, 가면 빵 하고 우유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옆에 있던 친구 2명한테 같이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셋이서 모란공원을 갔죠. 그때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왜 전태일이 죽었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거예요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 72년도 봄에 노동조합에서 야간 중등과정을 한다는 거예요. 너무 가고 싶었어요. 제가 그때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였는데 평화시장 옥상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그때 10m만 더 가면 노조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거리를 용기가 없어서 못 가서 결국은 중등 교실을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참여하게 된 거죠.

 

Q. 선생님이 69년도에 처음 평화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셨고, 1970년도 전태일의 죽음이 있고, 71년도 1주기에 모란공원에 참석하면서 전태일의 죽음을 깨닫게 되셨네요. 그리고 이제 평화시장의 소녀 노동자에서 노동 운동가가 되셨네요. 그럼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떤 일들을 하셨어요?

(이숙희) 가장 먼저 시다들을 부를 때 번호가 아니라 이름 불러주기를 했어요. 그리고 서로 반말하지 않기. 그리고 이제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노동조합은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는 곳이구나라는 걸 깨닫고 소심했던 제가 옆자리에 있는 미싱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죠. (웃음)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노동조합의 핵심 멤버가 된 것 같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사진-5> 1975년 '새마을 노동교실'에 입학한 어린 여공들의 모습. '평화 새마을 교실'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중등 기초과정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출처: 한국일보 / 제공: 전태일기념관)   

Q. 선생님이 그때부터 노조의 핵심 멤버가 되셨네요.(웃음) 그럼 선생님, 그때 노동환경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도 해야 하고, 노조 활동도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선생님은 선생님만의 돌파구는 없었나요?
(이숙희) 힘들지 않았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왜냐하면 노조를 통해 신세계를 경험한 거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8시에 공장에 들어가서 밤 10-11시까지 일하고. , 추석이나 구정은 대목이라고 해서 약 2주 정도씩 공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철야하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가 노동조합에 갔더니, 이름도 불러주죠,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도 하게 되잖아요. 그때 노조에서 중등반만 한 게 아니라 교양교육 같은 것도 많이 했으니까. 예를 들면, 꽃꽂이도 하고, 등산도 하고, 회의 진행법, 이런 것들을 다 배우니까 하나의 학교였던 거죠. 그래서 그게 저에게는 신세계였던 거죠. 늘 공장에서 별로 말도 없던 제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거죠. 그래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Q. 그럼 일을 할 때도 노조활동들이 기다려지고?

(이숙희) . 그래서 매일 1시간의 점심시간마다 제가 일하던 5층 동아 상가에서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고, 노조 사무실이 있던 평화시장 4층 옥상까지 헐레벌떡 가는 거예요.

 

Q. 아무래도 그때는 실질적으로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부족했잖아요. 그때는 8시간 근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말에 쉬는 것도 아니고요. 주로 노조활동은 언제 하는 거예요?

(이숙희) 점심시간에 잠깐 가서 보고 오고, 저녁에 이제 모여서. 10시에 끝나도 이제 모여서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리고 그때 되면서 일요일은 쉬기 시작했어요. 노조에서 계속 단속을 하면서. 그러니까 일요일 날 교육 프로그램 같은 걸 하고.

 

Q. 그렇게 점심시간에 시간을 쪼개서 조금씩 만나고,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에도?”일을 할 때도 노조활동들이 기다려지고?

(이숙희) . 온전히 노조에 다 쓰는 거죠. 그래서 바빴죠. 근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이숙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감사했습니다. 그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탄압 속에서도 노조활동을 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하루에 8시간을 일할 수 있고, 주말에는 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노조활동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그 활동 자체가 당시 노동 운동가들에게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도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인권의학연구소에 작은 꽃밭이 생겼다. 연구소의 한 귀퉁이에 황량하던 작은 공간이 형형색색의 꽃으로 채워지고 있다.  3주 전부터 연구소의 후원회원인 박순애 선생은 할미꽃부터 시작해 한련화, 꽃뱀무, 그리고 나런클러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꽃모종을 조금씩 사서 손수 작은 꽃밭을 만들어가고 있다. 연구소는 이 꽃밭으로 인해 날씨만큼이나 화사한 봄을 선물 받았다. 처음엔 꽃모종만 가지고 오셨다면, 지난주엔 연구소의 밥상을 책임질 상추까지 심었다.

 

(사진) 할미꽃, 제라늄, 나런클러스, 한련화 등 총 1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꽃들이 자라고 있는 연구소 작은 꽃밭.  

박순애 선생은 1970년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전설로 불리는 원풍모방 노조의 부지부장으로 활동하며 핵심 간부였다. 원풍모방 노조는 1972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어떠한 단체행동도 허락되지 않던 살벌한 상황에서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이에 원풍모방은 청계피복, 동일방직, YH무역 등과 함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펼친 한국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민주노조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원풍모방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던 박순애 선생은 지난 2013년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본인이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진) 이 사진은 지난 2010년 원풍모방 여공이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민주노조의 전설-원풍모방 노동조합 운동사" 와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 를 펴내고함께 당시 지부장이던 방용석 전 노동부 장관과 찍은 사진이다.박순애 선생은 가장 중앙에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다. (출처: 한겨레)

지난 3주 전부터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현장에 있었던 박순애 선생은 연구소에서 호미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꽃모종 몇 개와 호미, 그리고 퇴비를 조용히 사서 오셨다. 그리고 황량하던 연구소의 귀퉁이에 가서 잡초를 뽑고, 공간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박순애 선생의 작은 텃밭은 다양한 꽃들로 채워지고 있다. 급기야 지난 월요일에는 연구소 직원들이 싱싱한 상추를 먹을 수 있도록 상추도 심었다.

 

(사진) 호미를 들고 꽃과 상추를 직접 심고 있는 박순애 선생

형형색색의 꽃들도 채워지고 있는 이 공간은 이제 연구소에 오시는 분들이 한 번씩 가봐야 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김장호, 송기복, 최양준 선생 등 연구소에 오셨던 피해생존자 분들은 이곳에서 같이 사진도 찍고 담소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박순애 선생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가꿔지고 있는 이 작은 꽃밭으로 인해 연구소는 요즘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싱그러운 봄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 연구소에 오는 분들이 새롭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소가 되고 있는 꽃밭.  

며칠 전부터는 수녀원의 수녀들도 관심을 보이며 이 공간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황량했던 이 공간에 심긴 꽃들과 상추들로 인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약속된 시간보다 항상 일찍 와서 조용히 호미를 들고 연구소의 꽃밭을 가꾸고 있는 박순애 선생의 시간과 노력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연구소의 작은 꽃밭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연구소의 페이스북을 통해 후원회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2017년 인권의학연구소 공개강연 시리즈 “내 삶이 인권을 만나다”
 
8월 30일에 열리는 세 번째 강연은 목사이자 작가 겸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창남 이사의 "노래가 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강연은 노래이야기로 직접 기타를 들고 공연하면서 이야기하고, 참여자들과 함께 노래하는 시간도 가질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해주세요.

세 번째 강연 : 노래가 된 사람들
연자: 최창남
장소: 서울 시민청 지하2층 워크숍룸
일시: 2017년 8월 30일 오후 7시
비용: 무료
등록 : 페이스북 댓글 / 전화 / 이메일 신청 (등록 시, 
성함, 연락처 기재)
문의 : 인권의학연구소 02-711-7588, imhrc@naver.com   (선착순 40명)

<강연소개>
- 최창남의 노래 이야기 '노래가 된 사람들'
   
  삶을 새롭게 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내 삶을 변화시켰고 노래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도 만났다.

- 공연 내용
  민중가요 : '살아온 이야기' '고마운 사랑아' '누이의 서신' '노동의 새벽'
  동요 : '사랑하는 엄마' '집'
  시노래 : 가을의 노래, 긴 편지, 그렇게 아침이 오네요  (노래는 바뀔 수 있음)


<연자 소개>
- 빈민운동, 노동운동, 문화예술운동에 참여
- 작가, 작곡가, 목사
- 지금은 제주 산 중에 몸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 쓴 책 : '개똥이 이야기', '울릉도 1974' '그것이 그것에게'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숲에서 만나다' 등
- 만든 노래 :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살아온 이야기' '고마운 사랑' '석양' '노동해방가2'
                 '노동의 새벽' '떠다니냐' '누이의 서신' '모두들 여기 모여있구나' '화살'
                 '밥자유평등평화' 등의 민중가요들과 '우리 동네 아이들'(동요음반)
                 '예수를 만난 사람들'(노래극), '가을의 노래' '긴 편지' 등의 시 노래들이 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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