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동석 선생, 얼마 전 그날이 온다’ LP판의 표지 모델을 만나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났던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이번 인터뷰 기사에서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모국에서의 유학생활과 수감생활 속에서 얻게 된 것들, 그리고 또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날이 온다’ LP판의 주인공까지.

 

 어느 것 하나 영화 같지 않은 것이 없는 이동석 선생님의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 1)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인터뷰 중인 이동석 선생.

 

Q.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면서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게 힘드셨어요?

(이동석) 제가 재일교포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랐잖아요. 근데 어렸을 때, 내가 한국사람 그리고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스스로 알거나 부모님이 알려줘서 아는 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너는 조선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건 눈이 다른 거예요.

 

Q. 집에서 내가 부모님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나 주변 일본 사람들을 통해서?

(이동석) 재일교포 대다수의 부모님이 여유가 없는 거예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가난해서 일본으로 일하러 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거의 없거든요. 그랬거든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재일교포는) 마이너스 이미지였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는 일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나는 일본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오랜 고민을 거쳐서 모국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었어요.

 

일본에서의 정체성 혼란과 모국에서의 유학생활

 

(사진 2)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두번째 공판을 마치고 일본에서 함께 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과 법원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출처: 한겨레)

Q. 그러한 배경 때문에 선생님께서 모국 유학을 선택하시게 되셨네요. 그럼 그때 당시의 유학생활의 추억, 그리고 모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 그때 우리나라에 유학을 오겠다는 건 불어를 배우기 위해 오는 건 아니었어요. (웃음) 저는 우리나라 말을 배우고 싶었고, 우리나라를 알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 그때 불어를 열심히 공부하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외대 연극회에 들어가서 같이 연극하는 거예요. 연극한다고 해서 제가 발음이 안 좋으니까 무대에 서서 연극하는 건 아니지만, 같이 연습하고 구경도 하고 끝나면 같이 술 마시고 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Q. 선생님이 그때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좋으셨나봐요?

(이동석) , 추억이에요. 근데 그때만 해도 재일교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그 시대에 한국에 유학 오는 재일교포라면 돈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집은 아주 가난했어요. 그때 대부분의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부자가 아닌데 눈에 띄는 몇몇 재일교포들 때문에 한국 학생들도 재일교포에 대해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연극회에서 친구들 만나 친구가 되면 서로 그런 인식이 없어지는 거예요.

 

Q. 인간 대 인간으로?

(이동석)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구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즐거웠고요. 제가 구속이 되고 난 후에도, 그리고 석방하고 일본에 갔다가 10년이 지나고 나서도 제가 연락하면 다들 만나주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일본에 가시고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이동석) 만나주는 거예요. 제가 80 8 15일에 석방이 되어서 시골에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외대에 갔어요. 저 멀리서 연극회 후배가 절 보면서 너무 반가워해주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후배가 내일 다른 사람들한테도 연락해서 종로에서 모임을 가지자고 그러더라고요. 휴대폰도 없는 그 시절에 만나러 갔더니 친한 친구들이 10명 가까이 왔더라고요.

 

Q. 선생님이 출소했다고 하니까 연극회 친구들이 바로 그렇게 모인 거예요?

(이동석) , 제가 어떤 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는지 다 알면서도 그렇게 모인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그 친구들이 저 때문에 다 고생을 해요. 왜냐하면, 제가 출소하고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거기 왔던 친구들이 끌려가서 저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조사당했어요. 이런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저를 만나줄 정도로 서로 친하게 지냈어요.

 

(사진 3) 지난 2018년 10월,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출처: 한국외대 홈페이지)

Q. 선생님에게는 73년도부터 75년도까지 2년 반 정도 한국 친구들과의 유학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 같아요.

(이동석) ! 재미있었고, 한국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죠. 전공인 불어과 친구들보다는 연극회 친구들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이 있죠. 아무래도 매일 만나서 연습하고 술 먹고 하니까. (웃음) 그래서 구속된 후에도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감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 유학 온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고요. 한국에 오면서 제가 얻은 게 더 많다고 생각해요.

 

Q. 어떤 걸 얻으셨다고 생각하세요?

(이동석) 우선 우리나라라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우리나라 말을 배울 수 있었고요. 일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즐거움, 뭔가 해방감 같은 걸 느꼈어요. 물론 한국 내에서도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있지만, ‘, 우리나라구나라는 걸 느꼈죠.

 

Q.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으로 유학을 오실 건가요?

(이동석) , 그럼요. 제가 석방되고 일본에 가서도 얼마나 우리나라에 오고 싶었는데요!

  

'그날이온다' LP판에 숨겨진 뒷 이야기

(사진 4) 인터뷰 도중 '그날이온다'CD를 들고 있는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오늘 모국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느껴지네요. (‘그날이 온다’ CD를 가리키며)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이 이 CD와 관련된 어떤 일화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동석) 이것도 김치식당(첫 번째 인터뷰 내용 참고)을 만난 것처럼 신기한 이야기예요. 제가 보안사에 잡혀 있다가 75년도 12 30일 날 서울구치소에 가게 되거든요. 가니까 겨울이잖아요. 그해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요. 서울 구치소에 가니까 너무 추운 거예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구치소에 있으면서 옷에 이가 생기는데, 속옷도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빨아서 입어요. 빨아도 마르지도 않고, 어쩔 수 없이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속옷을 입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있는데 제가 그때 1 옥사에 있었는데요. 그게 원래는 소년수들이 있는 공간이었었거든요. 근데 그때 워낙 반공법이나 긴급조치 관련 수감자들이 많아지면서 방이 모자라서 소년수 방까지 오게 된 거예요. 그때 제가 1옥사 상, 2층의 가운데 정도에 있었어요. 그때 1옥사에 긴급조치로 들어와 있던 외대 학생 한 명이 있었더요. 그때 제가 외대를 다녔기 때문에 그 친구한테는 제가 선배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친구가 제가 아무것도 없는 걸 알고는 칫솔이나 휴지 같은 걸 나한테 주는 거예요.

 

Q. 방이 달랐을 텐데, 어떻게 전달해준 거예요?

(이동석) 이것도 참 고마워요. 그 학생이 아침에 세수하러 갈 때, 몰래 주는 거예요. 저는 독방에 있었기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수할 수 있는 물을 조금 방으로 갔다 줬어요. 다른 수감자들은 다 같이 세수를 할 수는 없고 수감자가 직접 물을 떠 와서 자기 방에서 세수를 했거든요. 이때 그 친구가 아침에 세숫물을 가지러 갈 때 저한테 몰래 던져줄 때도 있고, 아니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나갈 때 시켜서 저한테 전달해주곤 했어요.

 

Q. 이것도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 정말 고마운 분이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나 고마운데요. 제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고, 어렵고 할 때니까. 그래서 제가 고마워서 한 번은 찾아서 그때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재심을 시작하면 한국을 왔다 갔다 하잖아요.

 

Q.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선생님이 그 후배를 찾고 싶으셨던 거죠?

(이동석) , 일본에 있을 때도 항상 머릿속에 있었죠.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재심할 때는 2 3, 3 4일 왔다가 가니까 찾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근데 외대에 재입학하니까 시간이 생겼잖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대수라는 분을 만났거든요. 그분을 알게 되어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당시에 긴급조치로 구속된 외대생은 아마 그 친구일 거라고 하는 거예요.

 

Q. , 한국에 계시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만나게 된 이대수라는 분이 그 외대생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동석) !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얼마 후에 그 사람이 일하고 있는 사당으로 이대수 씨랑 같이 가서 만났어요. 가서 보니까 40년이 지났는데도 약간 그때의 느낌이 있더라고요. 근데 그 친구도 저를 기억하고 있고요. 그래서 몇십 년 만에 만나서 다 같이 맥주를 한 잔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종종 만나고 있어요.

 

(사진 5) 레코드 ‘그날이온다’는 정치범이 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이  협동하여 전개했던 운동이 만들어 낸 것이다. 왼쪽은 70년대 출판된 LP판이며, 오른쪽은 최근에 다시  출판된 CD입니다. (세 명 중 제일 왼쪽에서 웃고 있는 수감자가 바로 이동석 선생님의 한국외대 후배다) 

 

Q. 신기하네요! 근데 선생님, 그 외대 학생분이랑 이 LP판이랑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예요?

(이동석) 그게 알고 보니까 이 LP판에 찍힌 사진의 주인공이 그 외대생이더라고요.  LP판은 70년 후반인가 그때 나왔거든요. 근데 재심이랑 새롭게 시작하니까 이걸 제작했던 사람이 LP가 아니라 CD로 다시 만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일본에서 한국에 올 때 10장 정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재판에서 만나는 분들이랑 몇 분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리고 딱 1장이 남았어요. 근데 작년에 그 외대 후배를 만나면서 보니까 이 CD에 나온 이 사람이랑 닮은 거예요. 그래서 혹시 이 CD의 젊은 학생이 지금 그 후배가 아닌가 해서 다음에 만날 때 제가 이 CD를 가져갔어요. 만나서 제가 이 CD를 책상에 올려놓자마자 그 친구가 CD의 사진을 보더니 바로 ! 이거 난데!’ 그러는 거예요. 그 친구도 이제 와서야 자기가 이런 CD의 표지에 실려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Q. 그럼 그분도 일본에서 출판된 LP판에 자신의 사진이 있다는 걸 몰랐었던 거예요?

(이동석) , 몰랐죠. 근데 이 사진을 보면 웃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보고 웃어줬다는 거예요. 그 후배가. 지금 긴급조치로 잡혀서 이게 지금 법원 앞인데. (웃음) 근데 이 사진이 어떻게 찍혔냐면, 당시 일본 구원회 사람들은 면회가 안되잖아요. 그래서 법원 앞에서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면 그 순간 몰래 찍는 거예요. 걸리면 사진을 빼앗기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 사진을 찍은 사람도 누가 누군지 모르고 찍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 버스에서 내려서 나오는 사람 보니까 일반 수감자가 아니라 정치범인 것 같아서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동석 선생님의 꿈 

 

Q.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생님은 김치식당도 그렇고 이 CD 이야기도 그렇고 참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네요. 정말 신기하네요. 그럼 이제 선생님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남은 인생 동안 선생님의 꿈이 무엇일까요?

(이동석) 제가 재심을 통해서 무죄를 받았잖아요. 무죄받고 국가에서 보상금을 받고 난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은 제가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국가가 과거에 잘못했지만, 계속해서 그것만 붙잡고 살 수는 없는 거예요. 보상금이 크든 작든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해서 유의미한 인생을 사는가 하는 문제는 제가 결정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찾기 위해서 지금 제가 한국에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의 문제죠. 맨날 친구 만나서 술 먹고, 늦잠 자고, 여행 다니고 할 수만은 없는 거예요. 산다는 것의 목적.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 이번 9월까지는 한국에서 살기로 정했어요. 그동안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찾는 게 제 꿈입니다.

 

 

 이동석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를 만들어도 몇 편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경험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났던 모국 유학.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국에서의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이동석 선생님은 그 속에서 인생의 귀한 의미들을 이미 발견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웃음과 감동을 잃지 않고 계셨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과연 인간에게 모국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곳곳에 녹아있는 따뜻한 이야기들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오는 9월까지 한국에서 인생의 마지막 꿈을 찾을 이동석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인터뷰] 이동석 선생, 어학연수 중 프랑스에서 우연히 김치식당을 만나다.

 

  지난 송기복 선생의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재일동포 이동석 선생의 이야기이다. 이동석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한국에 왔다. 2년 후, 1973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해 연극회 활동 등 모국에서의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1975 11 22일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이 하숙집을 들이닥치면서 행복했던 모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끝이 나게 된다. 1976년 당시 대법원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과 간첩죄를 인정해 이동석 선생에게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그렇게 끝이 날 것 같던 이동석 선생의 모국 유학은 2018년 새롭게 시작되었다.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2017년 민사소송도 끝이 나자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돌려주지 못하는 청춘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했다. 그리고 지난 2월 한국외대 불어과 졸업생이 되었다. 지금부터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의 첫 번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 사진  1>  지난  3 월  30 일 ,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다양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이동석 선생 .   

한국외대의 유명인사가 된 이동석 선생

Q. 선생님, 반갑습니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동석) 제가 이번 2월에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했습니다. 75년도 당시 제가 구속될 때 한국외대 불어과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거든요. 그래서 2018년도에 4학년으로 재입학하고 지난달에 졸업했습니다. 4학년부터는 등록금 전액을 내지 않아도 신청과목 수에 따라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해서 한국에 오래 있고 싶어서 일부러 학점을 많이 신청 안 하고 1년 더 학교를 다니고 이번에 졸업했습니다.

 

< 사진  2>  지난  2018 년  10 월 ,  한국외대 신문사에 실린 이동석 선생 사진 . ( 출처 :  한국외대 홈페이지 )

Q. 선생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럼 졸업하신 지 얼마 안 되셨네요?


(이동석) 그렇죠. 얼마 안 지났어요. 근데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 졸업장만 받으러 학교에 갔거든요. 그런데 저를 알고 있던 학생지원센터의 여자 직원이 이번에 제가 졸업했다고 연락을 안 했는데 미리 알았나 봐요. 학교에 오시면 말해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졸업장 받으러 가는 날 아침에 연락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학생지원센터에서 일하는 그 직원이 꽃다발 준비해서 제가 졸업하는 걸 축하해준다고 사진 찍고 그랬어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은 없었지만은 그래도 학교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Q. 선생님이 한국외대에서는 이미 유명인사였네요! (웃음) 그럼 선생님, 2018년도에 다시 한국에 오셔서 다시 입학해서 학교 다니실 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이동석) 제가요, 사실은 공부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웃음)

 

Q. 정말요? (웃음) 그럼 선생님 왜 다시 학교에 가셨어요?


(이동석) 제가 왜 재입학을 결심했냐면요, 재심으로 무죄를 받고 민사까지 다 끝나고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잖아요. 근데 그 보상금이라는 게 저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국가가 과거의 잘못된 일에 대해 무죄를 통해 사과는 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국가는 돈으로밖에 계산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국가로서는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책임을 묻지 마. 이 사건은 없었던 걸로 하는 거다.’ 그런 거잖아요? 그러면 그 돈을 제가 받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이제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재심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 내가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있었을 때, 학교에 가서 문의를 해봤어요. 만약 학교에서 안된다고 하면 제가 항의하려고 했어요. 내가 이제 무죄까지 받고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재입학이 안 되는 것인지 항의하려고 했는데, 아주 쉽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제가 안 한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웃음) 그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외대 불어과로 재입학했어요.

  

65세에 떠난 프랑스 어학연수, 그리고 만난 김치식당.

<사진 3> 2018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입학하고 한겨레와의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  이동석 선생은 자신의 대학시절 가운데 가장 즐겁게 보냈던 순간으로 ‘연극회’ 시절을 꼽았다. (출처: 한겨레)

Q. 그런데 선생님 기사를 찾아보니까 외대에 재입학하시기 전에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다녀오셨던데, 어떻게 프랑스까지 가게 되신 거예요?


(이동석) 제가 한국외대에 처음 불어과로 입학을 했는데, 제가 영어를 아주 싫어했어요. 그렇다고 불어를 잘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때 한국 학생들은 불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우리말로 서툰데 불어를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나서 재입학한다고 제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이가 20대라면 몰라도 이제 70 가까이 되는데요. 그때 제 나이가 65세였거든요. 저는 일본에서 일을 65세까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때 재판 후에 보상금이 나오고 퇴직을 하게 되면서 모든 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어를 해야 되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기 전에 프랑스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Q. 그래서 파리와 니스로 6개월 정도 다녀오신 거예요?


(이동석) 그렇죠. 근데 원래 불어를 배우려고 간 거였거든요. 제가 프랑스 갈 때는 옛날에 한국에 와서 우리말을 배웠던 생각을 하고, 프랑스에 6개월 정도 있으면 일상회화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간 건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웃음)

 

Q. (웃음) 프랑스에는 선생님 혼자 가셨던 거예요?


(이동석) , 혼자 갔어요. 언어가 잘 안 되더라고요. 니스에 2달 정도 있다가 파리로 갔거든요. 파리에 있으면서 보니까 불어가 아예 안 되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스스로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목적을 바꾸고 관광을 하자하고 마음을 먹었어요. (웃음)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니까 파리에서 미술관에 많이 다녔어요.

 

Q.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웃음) 65세에 어렵게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생각보다 언어가 늘지 않아 빨리 마음을 바꾸고 즐겁게 프랑스에서 여행을 하시다 온 거네요. (웃음) 근데 선생님은 과거에 국가로부터 엄청난 아픔을 경험하셨음에도 이렇게 활기차게 일상을 살아가시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인데요. 혹시 프랑스에서 재밌었던 일화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동석)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뭐냐면요. 처음 니스에 2달 정도 있을 때는 일본음식이나 한국음식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특히 한국음식이 먹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파리에 갔을 때,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 파리를 돌아다녔거든요. 돌아다니면서 파리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찾았어요. 저녁 6시쯤 되었는데, 골목에 한글 간판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그 간판 이름이 항아리였어요. 그래서 가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7시부터 영업을 한다고 잠겨 있었어요. 근데 안에 일하던 사람이 저를 보고 나와서 저한테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일본말로 대답을 했는데,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파리에서 한국 음식점 주인이 저를 보자마자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하는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에 몇 번 그 식당에 가서 자연스럽게 주인이랑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예요. 특히 왜 파리에서 일본 사람이 한국 식당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나누게 된 거죠.

 

Q. ! 그 한국식당 주인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었나요?

 
(이동석) 네 일본 사람이었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 주인이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의 이응노 화백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 식당이 원래 이응노 화백의 조카인 이희세 씨가 경영했던 식당이었어요. 그때 이응노 화백이 화가였던 조카 이희세 씨를 프랑스로 불러서 공부를 시켜줬던 거죠. 근데 1967년도에 동베를린간첩단사건(동백림사건)으로 이응노 화백이 윤이상 씨 같은 분들이랑 같이 구속이 됐잖아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파리에서 구명운동을 하신 거예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구명운동도 많이 하고 해서 그분들이 70년대 후반에 다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돌아오신 분들이 한반도의 통일과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유럽에 거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심코 갔던 그 식당이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었던 거죠. 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이었던 거예요.

 

Q. 선생님은 어학연수로 갔다가 우연히 그런 역사가 있는 식당을 알게 되신 거네요. 근데 그 이희세 씨랑 지금 그 식당의 주인인 일본 사람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나요?


(이동석) 그 시대에 이응노 화백, 윤이상 씨, 이희세 씨 모두 일본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말을 잘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희세 씨가 식당을 하는데 그 일본 사람은 프랑스에 와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 그 일본 사람이 여권을 분실했던가 해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희세 씨가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있지만, 한국식당에서 같이 일하겠냐고 이희세 씨가 제안한거죠. 그런 인연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식당은 이희세 씨가 은퇴를 하면서 지금의 주인이 물려받은 거예요.

 

 <사진 4>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두 개의 한국식당.  이동석 선생은 우연히 항아리라는 한글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그 식당은 항아리 식당이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다.  김치식당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Q. 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 그럼 아직까지 그 식당은 한글 이름 항아리 예요?


(이동석) 이것도 재미있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항아리라는 식당은 옆집이예요. (웃음) 한국식당이 두 개가 있는데 가운데 항아리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위에 붙어 있는 간판만 보고 거기가 항아리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몇 번 가보니까 그 식당은 항아리가 아니라 김치식당이었던 거예요. (웃음) 김치식당!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운명인가 싶더라고요. 걷다가 우연히 만난 한국식당의 간판을 잘못 알고 다른 식당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까 그 식당이 1967년 동베를린간첩단사건의 이응노 화백의 조카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유럽의 거점으로 만들었던 식당이었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재일동포 2세로 고등학생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다 1971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스스로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동석 선생. 그리고 모국을 찾은 재일동포에게 한국이라는 모국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그의 청춘을 빼앗아 갔다. 그렇게 흘러가버린 40년의 세월. 그러나 이동석 선생은 국가가 되돌려주지 못하는 자신의 청춘을 스스로 되찾기 위해 한국외대에 재입학하고 지난 2월 졸업했다. 이 이야기도 한 편의 영화 같지만, 어학연수를 떠난 65세의 이동석 선생은 그곳에서 197-80년대 유럽에서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거점 역할을 했던 김치식당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동백림사건의 이응노 화백, 그 조카 이희세 작가, 그리고 그 식당을 이어받은 일본인 주인과의 인연까지... 또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에는 이동석 선생의 두 번째 인터뷰를 전하고자 한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여보 미안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한테 사과할게.

 

지난 시간 송기복 선생님께서 어떻게 기적처럼 황인철 변호사를 만났는지 첫 번째 인터뷰를 전해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송기복 선생님의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Q. 서로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오히려 황인철 변호사가 선생님께 했던 말이?
(송기복) 황인철 변호사가 저한테 했던 말이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선생님 잘못 아니에요.”였어요. 그리고 저보고 선생님은 비록 여기에 계셔도 행복하세요.” 이러는 거에요.

  

Q. 황인철 변호사가 왜 그렇게 이야기 하셨죠?
(송기복) 선생님 남편 같은 남편이 없다고. 그러면서 저를 위로해주셨어요. 선생님 남편 때문에 자기가 많이 배운다고 하면서요.

 

(사진) 인터뷰 중인 송기복 선생

Q. 선생님 남편을 보면서요? 선생님 남편분께서 원래 군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송기복) 공군이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 헬기 조종사였어요. 그런데 제 사건이 터지고 바로 제대를 했죠. 그리고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는 매일 면회를 왔어요. 저를 조금이라도 운동시키기 위해서 매일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광주로 이감하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광주까지 면회를 왔었구요.

 

Q. 정말 로맨티스트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남편분께서 선생님께 사과를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송기복) 우리 남편이 나한테 무릎을 꿇은 적이 있어요. 제가 집행유예로 출소했거든요. 원래 집행유예로 나올 때는 그 날 저녁에 나온대요. 그러니까 12 24일날 저희 남편이 저를 기다렸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때 교도소 안에 제 제자가 있었어요. 제가 이제 나가려고 짐을 싸놓고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오더니 선생님, 오늘 못 나가신데요.’ 하는 거에요. 뭐가 내려와야 하는데 안 내려왔다는 거에요. 저는 그러려니 했는데, 바깥에서 우리 남편은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남편한테 들었는데, 그때 남편이 밖에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요.

 

Q.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니까.
(송기복) 이유도 없이 그렇게 되니까. 그때 저희 남편이 제가 고문을 받고 교도소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제가 나오면 저를 입원시키려고 병원 예약을 했었대요. 그게 12 24일이었어요. 근데 제가 안 나오니까 우리 올케 말에 따르면 우리 남편 얼굴이 창백해지더라는 거에요. 아마 저희 남편인 이게 안되는가보다, 다 쇼였나보다라고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제가 크리스마스 날 오전 11시경인가 출소하게 된 거에요. 그런 전례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나와서 다행이 남편이랑 예약한 그 병원으로 갔어요. 그때 우리 남편이 병원에다 저를 데려다 놓고는 저한테 큰 절을 하면서 여보 미안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한테 사과할께. 우리 남편이 저한테 그러는 거에요. 저는 그걸 보고 놀라면서 남편의 그 말을 받아들이질 못했어요. 근데 나는 왜 그걸 진심으로 못 받아들였는지. 지금 내가 미안해요. 그때 저는 남편의 그 모습조차도 위선자 같은 거에요.

 

Q. 오히려 의심이 들고?
(송기복) , 제가 남자들은 이중인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안기부에서 저를 그렇게 때리고 한 그 사람이 자기 자식이 아프다고 하니까 전화로 자기 와이프한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안기부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하는 저 손으로 어떻게 자기 자식들은 저렇게 사랑해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자들은 다 저런가?’하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그런 남자를 안기부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Q. 안기부에서 선생님을 때리고 고문하던 남자들이 자기 자식들한테 하는 걸 보면서요?
(송기복) 그럼요. 자기 자식들한테는 아니 세상에 없는 천사처럼 하는거에요. 자상한 아버지. 너무 훌륭한 남편인 거에요. 누가 자기 남편이 안기부 같은 곳에 가서 사람을 두드려패고 강제로 그런다는 걸 그 사람들은 믿을까? 그래서 제가 남편이 병원에서 저한테 큰 절을 하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제가 의심을 하고 믿지를 못했던 거에요. 그래서 그게 지금도 너무 미안해요.

 

Q. 그런 일이 있으셨구나. 근데 남편분이 정말 멋지신 분이네요.
(송기복) 그리고 저희 남편이 저에게 종종 비록 우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런 사건을 당하게 되었지만, 얼마나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느냐면서 그랬거든요. 그럼 그때 저는 나는 싫어, 나는 좋은 분들 안 만나도 되니까 그냥 그런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하면, 저희 남편이 나를 끌어안아주면서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서 위로해주고 그랬어요.

 

(사진)  화창한 봄날 연구소에 피어오른 예쁜 할미꽃을 찍고 있는 송기복 선생 

Q. 맞네요. 황인철 변호사님도 뵙고. 그리고 선생님께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함세웅 신부님이시죠? 함세웅 신부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송기복) 제가 함 신부님을 한강성당에 계실 때 처음 만났거든요. 그때 함 신부님이 오라고 하셔서 제가 갔거든요. 그때 제가 신부님을 처음 본거에요. 인사를 하러 갔는데 내가, 아이고 정말 내가 미안해. 신부님한테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래야 하는데, 제가 첫 만남에 신부님 왜 이렇게 조그만하세요?’ 그런 거에요. (웃음) 그래서 제가 그 말 하고 나서 저희 남편한테 혼났었어요. (웃음)

 

Q. 함 신부님을 처음 보자마자 선생님이 하신 말이 에게 이렇게 작으세요?’였어요? (웃음)
(송기복) , 나는 신부는 엄청 크게 봤거든.

 

Q. 이렇게 솔직하신 게 선생님의 매력시인 것 같아요. 그럼 저희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에요?
(송기복) 함 신부님 때문에 알았지 또. 함 신부님이 오라 그러면 오고, 가라 그러면 가야 되고 그런거지. (웃음)

 

Q. 연구소에 큰 금액을 후원하셨던데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후원하셨던 거에요? 쉽지 않은 결정이잖아요.
(송기복) 아니, 내가 한 게 아니야. 우리 송기홍 남동생이 했어. 멋쟁이야.

 

Q. 그때 동생이 후원을 결정했을 때,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동참하신 거에요?
(송기복) 동생이 멋지다고 생각했지. 제가 나중에 함 신부님한테 (동생) 5천만원만 해도 되는데 쟤 왜 저러는지 몰라 그랬죠. (웃음) 신부님은 그때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나는 미안해, 더 잘하고 싶고 한데. 아마 다 똑 같은 마음일꺼야. 이렇게 우리처럼 당하고 무죄를 받으면, 해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으리라고 생각해. 정말로.

 

Q. 그럼 선생님 혹시 연구소에 바라는 점은 없으세요? 예를 들어 이런 일을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든지.
(송기복) 크게 내가 바라지 않아도 잘할 거라고 나는 생각을 해. 우리처럼 이렇게 당한 사람들은 바라는 것도 생각을 못 할 거에요. 그냥 다 잘되기만을 바라지.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고 나는 고마운 게 나는 아마 함 신부님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꺼야. 우리 이화영 소장 너무 고마운게 누가 우리같은 사람 돌아보고 하려고 하겠어요. 밥그릇 차려줘도 안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진) 연구소에 봄을 알려주는 라일락 앞에서 송기복 선생과 박민중 활동가

Q. 연구소가 더 잘 되도록 앞으로 더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꿈이 뭘까요? 저는 선생님이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꿈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송기복) , 로또를 살까말까 고민중이야! (한바탕 웃음)

 

Q. 선생님 만약에 로또를 사서 10억이 생겼어요. 뭐하고 싶으세요?
(송기복) 나는 가끔가다 로또에 당첨되면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에게 커피 한 잔이고, 밥 한 그릇이고 다 사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우리 남편 형제분들. 그리고 우리 형제들. 그리고 우리 사건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분들. 그 분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 밥 한끼라도 사드리고 싶어.

 

Q. 그럼 송기복 선생님의 꿈은 선생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혹시라도 선생님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려웠던 분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게 선생님의 꿈이세요?
(송기복) 아이고 그럼요!

 

송기복 선생님과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기적같이 황인철 변호사를 만났던 이야기, 항상 그 자리에서 선생님 곁을 지켜주셨던 남편 이야기, 그리고 선생님의 꿈까지. 인터뷰하는 동안 오히려 제가 행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꼭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송기복 선생님, 꼭 로또 당첨되세요^^ 매일매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연구소는 선생님의 일상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2021년을 맞이한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인권의학연구소 후원회원님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이번에는 2021년을 여는 시점에서 인권의학연구소의 이화영 소장님과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2021년도 연구소의 계획과 방향은 물론 이화영 소장님의 근황과 개인적인 바람도 물어보았습니다. 특히 최근 서울에 눈이 많이 오면서 ‘넓은 수녀원 마당의 눈 치우기가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시는데요. 연구소가 2009 7 4일 마포에서 개인단체로 시작한 이후 줄곧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곁을 지킨 이화영 소장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진) 이화영 소장

 Q. 안녕하세요이화영 소장님. 먼저 회원님들에게 소장님의 근황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화영안녕하세요인권의학연구소 회원님들의 건강과 평안을 바라는 마음 모아 새해 인사드립니다회원님들도 그러시겠지만 요즘 저는 인권의학연구소 활동 이외에 대면해야 하는 사적공적 활동을 거의 삼가고 있습니다대신 전화통화나 영상회의 횟수가 늘었네요^^ 매년 1월은 연구소 정기총회 준비로 가장 분주한 달입니다코로나-19 상황에서 대면 총회가 가능할지 불투명하지만최근 저는 지난 한 해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2021년 연구소 활동 계획과 총회 준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새해 들어 서울엔 매주 눈이 왔어요넓은 수녀원 마당의 눈 치우기는 우리 연구소 식구들의 겨울 활동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사진) 지난 2월 21,28 일 수녀원 마당에 소복 히 쌓인 눈을 치우는  이화영 소장과 박민중 활동가

 

Q. 소장님께서는 지난 2009년 인권의학연구소 개소 이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계신데요소장님에게  2020년은  어떤 한 해였나요?

 

(이화영)  마포에서 인권의학연구소 개소식을 한 게 2009 7 4일이에요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네요처음엔 인권의학연구소를 개인단체로 등록하고 시작했지만, 2011년 1월에 사단법인으로 전환했어요당시 인권의학연구소 자문위원들께서 연구소가 지속가능한 공익민간단체가 되려면 법인으로 가야한다는 조언을 주셨고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사단법인 등록을 신청했었죠그러고 보니 2020년은 인권의학연구소가 사단법인으로 출발한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네요. 10년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제대로 활동해 온 것인가초심을 제대로 지켜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더욱 듭니다.

 

우리 모두 처음 경험하는 2020년 코로나-19 상황에서 저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저는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진료 현장을 떠났었지만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의료인 참여 요청에 틈틈이 현장에서 의료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하기도 했었습니다코로나-19 상황에서 제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인권의학연구소 활동을 통해 자주 만나왔던 고문피해자 분들이 고연령층이어서 대부분 직접 뵙지 못한 한 해였다는 점입니다또한대면 개인상담집단치유도 거의 중단했죠. 매년  6월에 열렸던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행사도 개최하지 못했습니다다만, 2020년에 피해생존자들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국가폭력생존자 자조모임의 설립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습니다 (사진 참조). 지난 8년 동안 입법하지 못했던 고문피해자 지원법안 등이 7월에 다시 발의되도록 지원했고훈포상취소 가해자 명단 공개를 위한 행정소송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정의를 구하는 국가폭력 생존자 자조모임" 설립하는 날(2020.7.16)

Q.  새로운 한 해, 2021년을  맞이했는데요. 2021년의 개인적인 계획이나 바람은 무엇일까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제공하는 피해자 지원의 목표는 트라우마 사건 이전과 같은 원래의 삶으로 회복하는 것인데요트라우마 사건으로 인해 빼앗기고 포기했던 “일상의 삶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2020년에 코로나-19 상황을 직면하면서 이 일상이란 단어의 의미가 모두에게 크게 다가오고 있는데요일상의 삶에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죠모두들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낀 것 같아요. 2021년은 트라우마 피해생존자를 포함해 우리가 모두 일상의 삶을 되찾고 소소한 즐거움이 함께하는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Q. 그렇다면, 2021년 인권의학연구소의 계획과 방향은 무엇일까요?

    

(이화영)  2021년도 인권의학연구소 활동 방향은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시스템 마련과 가해자 책임을 촉구하는 일입니다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고문피해자 지원법안” 등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서 입법화되는 것입니다고문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사회적 지원없이 잘 생존해 왔지만이들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인데요이들이 현재 고령인 점을 생각하면더는 미룰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지난해에 제2기 과거사법이 통과되어  2021년에는 과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그러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받는 과정에서 재외상회나  2차 피해를 겪어서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연구소 교육사업팀은 진실규명과정에서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사관 대상 교육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기념치유센터를 내원하는 트라우마 피해생존자들에게 보다 전문적이고 배려깊은 치유지원을 제공하기 위해서 심리상담 전문가 네트워크를 조직했는데요. 2021년에는 심리상담사뿐 아니라 인권피해자를 지원하는 의료인예비의료인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 교육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코로나-19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는 비대면 교육 방법으로 지속할 예정입니다.

 

더불어코로나-19  상황이 지속한다 하더라도 회원님들과의 소통 활동을 계속하고자 합니다페이스북과 뉴스레터 뿐 아니라 편지전화 등을 통한 소통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드리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연구소  후원회원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릴께요.

 

(이화영인권의학연구소가 트라우마 피해자 지원을 할 수 있는 동력은 오직 후원회원님들의 힘에서 나오고 있습니다연구소는 비영리 ·민간단체여서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 없이 회원님들의 자발적 후원에 의해서만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한분 한분 직접 뵙고 후원의 의미와 감사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글로나마 먼저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연구소에서는 올해 “회원 배가 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주변에 저희 인권의학연구소를 널리 알려주시고회원님께서 각자 한 명의 신규 회원님을 추천해 주신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를 지원하는 연구소 활동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제 회원님께 좋은 기억으로 남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드리며 마치고자 합니다 또 뵐 때까지 얼굴허리 그리고 마음까지 쭉 펴면서 건강 또한 잘 지키세요.

 

(사진) 언론사 인터뷰 중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배경을 설명하는  이화영 소장

이화영 소장님은 2021년의 개인적인 바람으로 ‘트라우마 피해생존자를 포함해 모두가 일상의 삶을 되찾고 소소한 즐거움이 함께하는 것을 말해주셨습니다항상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이화영 소장님께 이번 2021년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이화영 소장님은 회원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연구소는 올해 회원 배가 운동을 진행한다고 하셨는데요이 글을 읽고 계신 후원회원님들꼭 기억해주시고 동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지금까지 박민중 활동가가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202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연구소 후원회원 한 명과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비대면(언택트)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회원인터뷰의 주인공은 이제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소희성 회원입니다소희성 회원은 의과대학 재학 시절,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의 “인권의학” 과목 강의를 수강하였고, 졸업 후 2019년 저희 연구소에서 함께 파트타임으로 6개월간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당시 고문피해자 인권상황 후속실태조사 사업에 참여하여 무죄선고 후에도 지속되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어려움을 듣고 보고서에 올리기도 했고, 고문피해 생존자와 법정 및 진료에 동행했던 소희성 회원을 이제 함께 만나 보겠습니다.

 

(사진)  소희성 후원회원

Q. 소희성 후원회원님 안녕하세요회원님은 어떤 계기로 인권의학연구소를 알게 되셨나요?

(소희성) 인권의학연구소는 제가 다니던 의과대학으로 강연을 오신 이화영 소장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의학과 인권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계속 공부하고 실천해가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인권의학연구소의 설립 취지와 활동을 지지하기에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Q. 후원회원님은 대학 시절부터 단순히 의학뿐만 아니라 인권에도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요소희성 회원님이 생각하시는 인권의학이란 무엇일까요?

(소희성) 인권의학은 사람들에게 마땅히  보장받아야  권리를 찾아주고 지켜주는 의학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런데 저도 이렇게 아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인권이 무엇인지인권의학은 무엇인지는 계속 공부하고 갱신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후원회원님은 인권의학연구소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그리고 특별히 기억 남는 경험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소희성) 의과대학 졸업 후 파트 타임으로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일했습니다국가폭력 피해자분들의 활동  실태조사를 보조하는 일을 맡았습니다오가며 함께 밥도 먹고일하시는 곳에 찾아가고옛날에 하시던 일 이야기도 듣고때로는 함께  놀러 다니면서 제가 더 신났던 것 같습니다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하다고 느꼈습니다인권의학연구소 활동 중에서는 김오자 선생님* 함께 길상사에 놀러 갔던 게 기억이 많이 납니다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소소한 담소도 나눴던 게 오랫동안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김오자 선생은 재일동포로서 부산대학교에 모국유학 중이었던 1975년 11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가혹한 수사를 받았다이후 비인권적인 가혹한 수사로 인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수년간 억울한 투옥 생활을 하였으나, 2019년 8월 재심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현재 일본 교토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 재일동포 김오자 선생님과 길상사에서 함께 한 시간

Q. 저희 연구소와 이러한 인연을 가진 소희성 회원님께서 얼마 전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회원님께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하신 이유와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되고 싶으세요?

(소희성)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란 게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그래서  의사 중에서도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의사가 되기까지 사회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받은 만큼만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연구든 임상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Q. 특히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마음을 치료받아야 하는 한 해였던 것 같은데요회원님은 2020년이 어떤 해였으며며칠 앞으로 다가온 2021년에 대한 바람은 무엇일까요?

(소희성) 코로나-19 힘드신 분들은 병원 밖 분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코로나-19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시는 분들사회적 단절로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신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자살률도 특히 젊은 여성에서 많이 증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세계적 전염병을 겪으면서 취약 계층이 더 많은 타격을 받고 있는 만큼 사회적 안전망이 중요하며방역에 있어서 사회적 신뢰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신뢰는 어떻게 쌓아가고또 무너진 신뢰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가는 2021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Q. 2021년은 올해보다 더욱 사회적 신뢰가 쌓이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그럼 마지막으로 인권의학연구소에 바라는 점과 우리 후원회원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릴게요.

(소희성)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선생님들과 앞으로도 뜻깊은 시간추억들을 많이 쌓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더불어 (연구소가)   할 고통을 겪는 분들을  많이 찾아서 뵙고힘이 되어주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그리고 함께 건강해요

 

(사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출발하는  소희성 후원회원

지금까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소희성 후원회원님의 비대면(언택트인터뷰였습니다인권의학연구소는 앞으로 소희성 회원님이 환자와 잘 공감하는 진정한 마음지킴 의사가 되기를 응원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어느덧 날씨가 제법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를 후원해주시고 항상 응원해주시는 분들 모두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연구소는 앞으로 다양한 후원회원과 연구소의 존재 이유가 되는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몇몇 피해생존자들은 다양한 언론 인터뷰의 경험이 있지만, 대부분의 인터뷰가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저희 연구소에서는 그분들의 오늘 일상과 힘든 과거 속에서도 따뜻한 사람의 손길이 다가왔던 그 기억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런 취지로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는 1980년대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으로 가족 모두가 고생을 하셨고, 지난 2009년 무죄를 받으신 송기복 선생님입니다. 송기복 선생님 가족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설립을 준비할 때 무죄 보상금으로 고액을 후원해주셨습니다. 이 후원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데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소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송기복 선생님의 첫 번째 인터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황인철 변호사와의 기억을 들려주는 송기복 선생님

Q. 지난해 국민 모두가 코로나로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는데요, 혹시 선생님은 지난해 어떻게 보내셨나요?

(송기복) 많은 분들이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셨을 텐데, 저는 우리 딸이 뜻하지 않게 아파서 함께 동고동락을 했죠. 힘들지만 그래도 혼자서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더라고요. 그리고 딸이 병원에 3개월 정도 입원을 했었는데, 그때는 딸 면회도 못하고 음식을 해서 전달하고 그렇게 지냈었어요.

 

Q. 선생님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송기복) 최근에 별로 하는 건 없고. 이제는 남은 인생을 좀, 시간적으로 따져보니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최근에 한 분을 생각하면서 목도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분도 여자분인데요. 그분은 저처럼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남편 때문에 고생을 하셨어요. 그리고 연세도 저보다 더 있으시고요. 근데 감옥 밖에서 혼자서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겠어요? 그걸 생각해보니까 괜히 내가 그분에게 미안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건 제가 여자이고 엄마이기 때문에 느끼는 거예요. 나는 교도소 안에 있었지만, 그분은 밖에서. 교도소 밖에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내가 느끼면서 목도리를 만들었어요.

 

Q. 선생님은 공감능력이 탁월하신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 관련 기사를 찾다가 선생님께서 본인은 축복받은 간첩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더라고요. (웃음) 만약에 선생님께서 선생님께 도움을 주셨던 분들 중에서 귀한 저녁 만찬에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다면, 어떤 분을 초대하고 싶으세요?

(송기복) 많죠. 돌아가신 분 중에서 한 분이 있다면 황인철 변호사님예요.

 

(사진)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1979년 김재규 사건, 89년 임수경방북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압의 시대 수많은 시국사건 때마다 약자 편에 섰던 故 황인철 변호사.

Q. 황인철 변호사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세요?

(송기복) 우리 사건을 변호하셨던 변호사님이세요. 그것도 기적이에요. 그때 황인철 변호사를 만난 건 007 작전이에요. 나는 1980 3 2일 날 (제가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서 수업하다가 잡혀간 거예요. 그리고 일주일 만에 왔는데 그 이튿날 또 잡혀가서 그 이후로부터 간첩이 된 거죠

 저는 황인철 변호사를 교도소 안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온 이대생들한테 처음 들었어요. 그때는 교도소 안에서 5-10분인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곤 했어요. 근데 그때 저는 너무 고문을 많이 받아서 걷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고. 그러면 (운동 시간에) 사람들이 제 앞으로 지나치면서 뛰어요. 그때 저는 죄인처럼 얼굴도 못 들고 그냥 앉아 있는 거죠. 그런데 여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하루는 아줌마가 선생님이에요?”하고, 다음에는 아줌마가 송기복이에요?”, 그리고 또 다음에는 아줌마가 율리아예요?” 이러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시간적으로 한 달 정도를 두고 그렇게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들이에요. 저는 율리아, 송기복, 선생님하니까 대꾸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죠. 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마치 구령처럼 그러는데 내가 황인철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들었어요. 학생들이 아줌마를 만나고 싶은 변호사가 있어요하고 내 앞을 지나가고, 또 조금 있다가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변호사가 있어요하고 지나가고, 그리고 황인철, 황인철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앉아서 황인철이 누구지?’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황인철 변호사를 만난 건 007 작전이에요.

 

Q. 그래서 언제, 어떻게 황인철 변호사를 만나신 거예요?

(송기복) 저는 황인철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갈 때마다 황인철, 황인철 외치면서 지나갔어요. 저는 그때 볼펜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럼 손톱으로, 밥풀로 벽에다가 그 이름을 적어두는 거예요, 혹시 잊어먹을까 봐. 그렇게 기억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저희 남편이 매일 면회를 왔어요. 딱 하루를 빼고 매일 면회를 왔는데요. 그 하루는 저희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어요. 저희 가족이 모두 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그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남자가 저희 남편밖에 없었거든요.

 

Q. 그럼 황인철 변호사는 선생님 남편분을 통해서 만나신 건가요?

(송기복) 전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저희 남편이 면회를 매일 왔어요. 저희 남편은 저를 조금이라도 운동을 시키려고 매일 왔다고 그래요. 여하튼 그렇게 면회를 오면 교도관이 면회 관련 기록을 하잖아요? 근데 그때 저는 이미 고문을 많이 당하고 억울하게 부르는 대로 쓰고 했던 경험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면회를 온 남편에게도 한 번에 다 이야기를 못하고 매일같이 조금씩 조금씩 황인철 변호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교도관이 쓰지 못하게 하려고 면회 끝나고 문을 나올 때 얼굴을 내밀고 하루는 변호사가 당신 만나고 싶대라고 말하고, 그리고 이튿날 오면 제가 또 황인철이야라고 말하고. 그런 식으로 교도관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남편에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듣는 저희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는 부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가 보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제가 매일같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저희 남편이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봤는데 황인철 변호사가 있더래요.

 

Q. 그럼 그때 그렇게 황인철 변호사에 대해 며칠에 걸쳐서 조금씩 면회 온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고,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던 남편은 그걸 듣고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간 거예요?

(송기복) , 그래서 우리는 007 작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황인철 변호사를 생각하면 아주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요. 저희 남편이 어렵게 황인철 변호사를 찾아갔더니 황인철 변호사가 되려 저희 남편과 저를 찾았는데 저희 남편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하면서 저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Q.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그럼 그때 이미 황인철 변호사는 송기복 선생님을 알고 계셨던 거네요?

(송기복) 네 저를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은 함세웅 신부님이 말을 해서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함 신부님이 황인철 변호사를 만나서 제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때 황인철 변호사가 이대 학생들한테 그랬다고 해요. ‘너희들은 민주화운동을 해서 감옥에 갔지만, 너희 선배 가운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간첩으로 몰려서 감옥에 간 선배가 있어 그랬다는 거예요. 제가 그때 이대를 다니다가 나와서 홍대에서 졸업했는데 그것 때문에 황인철 변호사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아요.

 

Q. 그럼 선생님이 황인철 변호사를 처음 만난 건 어디서 만나신 거예요?

(송기복)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광주로 저희 가족 모두가 이송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광주 교도소에 있었는데 황인철 변호사가 서울에서 직접 내려온 거예요. 저도 그때 황인철 변호사를 처음 보는 거죠. 교도소에서 황인철 변호사가 저를 보고 송기복 씨 그러는데 눈이 이렇게 동그란 양반이 (웃음) 인상이 너무 편안한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고 황인철 변호사를 끌어안고 울었어요. 제가 엉엉 우니까 황인철 변호사가 저를 토닥토닥해주면서 저한테 건넨 첫마디가 선생님, 미안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였어요.

 

(사진) 인터뷰를 마치고 송기복 선생님과 함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였던 송기복 선생님과 황인철 변호사와의 만남을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아무도 자기편이 없다고 생각하셨을 그때에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 곁에 황인철 변호사라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송기복 선생님의 이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그때 황인철 변호사의 역할이 지금 저희 연구소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는 송기복 선생님의 가족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는 두 번째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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