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만 선생님 인터뷰-①] 36년 만에 대법원 무죄를 받기까지

 

 김성만 선생님은 지난 7 29일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성만 선생님은 36년 만에 간첩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상고를 기각합니다라는 대법원의 짧은 답변을 듣기 위해 감내해야 했을 아픔은 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김성만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그동안의 어려움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습니다.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선생님의 얼굴을 뵙고 저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지난 8 11일 잠실 모처에서 김성만 선생님을 뵙고 직접 소회를 들어보았습니다.

 

<사진-1> 지난 8월 11일 잠실의 한 카페에서 김성만 선생님과 인터뷰를 가졌다. (출처: 한겨레)

축하드립니다!

Q. 선생님, 얼마 전에 대법원에서 좋은 결과가 있었는데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김성만) 고맙습니다.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감사인사를 전하면서 정신이 없네요. 제 사건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제가 힘들 때 도움을 주셨던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축하도 받는 그런 일정이 요즘 매일 있네요.

 

Q. 선생님, 저는 사실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받을 때 솔직히 너무 허무더라고요.
(김성만) 선고가 너무 짧아서요?

 

Q. , 딱 여덟 글자를 듣기 위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가 싶어서요. 그럼 선생님은 그때 오전 10 20분경 대법원의 상고를 기각합니다라는 판결을 들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김성만) , 초긴장 상태에서 들었는데 대법원에서는 원심을 파기한다든지 아니면 상고를 기각한다라든지 그 둘 중에 하나잖아요. 근데 원심을 파기한다는 판결들은 조금 앞부분에 있더라고요.(웃음) 그리고 뒷부분은 대부분 상고를 기각한다는 판결들이고요. 그래서 우리 사건은 뒷부분에 있어서 기각이 되는가 보다 예상을 했죠.(웃음)

 

Q. (웃음) 그렇게 예측은 했지만, 막상 그 판결을 들었을 때는 어떠셨어요?
(김성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짓눌렀던 것들이 다 벗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근데 원래 피고인들은 대법원 판결 참석을 잘 안 하잖아요. 제가 과거에 잡혔을 때도 저의 대법원 판결을 부모님이 가셔서 들으셨어요. 저는 그날 면회 온 부모님한테 들었어요. 대법원에서 제 사건 판결이 1초 만에 사형으로 확정되었다고요.

<사진-2> 지난 7월 29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재판에 참석한 분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김성만 선생(왼쪽에서 두 번째) 혼자 'V'를 하고 있다.

 

Q. 그럼 선생님은 대법원 판결을 오늘까지 2번을 받으신 거네요. 그때 면회 온 부모님께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을 들었을 때 기분은 기억나세요?
(김성만) 그때 변호사가 1심과 2심 모두 사형이 나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각을 예상하면서도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죠. 그러나 역시 사형 확정이었죠.

 

Q. 처음 대법원 판결도 그렇고, 이번 경우도 일정 부분 예측을 하고 계셨던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근데 우리 사건은 아무리 군사정권이지만 사건 내용을 보면 사형을 판결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조작한 내용을 보더라도 저희가 무슨 국가기밀에 접근했다라든지, 사회를 위태롭게 했다든지, 그런 게 없잖아요. 그리고 그때 저희 사건의 1심 주심판사가 박만호 판사였고, 제 사건의 변호사는 고영구 변호사예요. 고영구 변호사님은 당시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셨던 분이었어요. 고 변호사님이 판사 출신이었는데, 이분이 부장판사 시절에 박만호 판사가 배석판사였다는 거예요.

 

Q. , 또 그런 인연이 있네요.
(김성만) , 서로 잘 알아요. 그래서 1심 판결 며칠 전에 서로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판결 전에 선고 형량이나 내용은 가르쳐줄 순 없게 되어 있으니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는데, 고영구 변호사님이 식당에서 서로 밥을 먹으면서 제 걱정을 하니까 그 박만호 판사가 중형을 선고하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때 중형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영구 변호사나 저희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1심 판결에서 사형 선고가 나온 거예요.

 

Q. 그때 고영구 변호사도 그렇고 모두들 충격이 상당했겠어요?
(김성만) 아무래도 그렇죠. 아무래도 저는 당시 안기부에서 사형 이외의 다른 판결은 할 수 없도록 했다고 생각해요. 판사는 안기부의 조작된 내용을 가지고도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판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만, 안기부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었던 거죠.

 

Q. 그 당시는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다 쥐고 있었을 시기니까요.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김성만) 그렇죠.

 

<사진-3> 1985년 9월 9일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는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난 양동화, 김성만, 황대권 등이 재미 북한 공작원 서정균에게 포섭돼 간첩이 된 후 국내에 들어와 학생운동권에 공작금을 주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게 당시 안기부 발표 내용이다. 사진은 1985년 9월 9일자 < 경향신문 >( 석간 ) 1 면 . ( 출처 :  한겨레 )

공범들을 위해 시작한 재심

 

Q. 선생님 사건이 1985년 당시 전두환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활용했던 사례였던 거죠. 돌이켜보면 1985년부터 2021년까지 법정싸움이 지속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요. 특히, 선생님이 재심을 2016년도에 신청하시고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까지 약 5년의 재심 시간이 선생님께는 어떤 시간이었어요?
(김성만) 재심하기 전까지 저는 제가 (유럽에서) 북한대사관을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죄가 안 바뀌는 줄 알았어요. 무죄라는 건 상상을 못 해봤어요. 그래서 재심을 신청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우리 사건의 공범 중 한 친구가 찾아와서 간첩 방조죄를 벗게 해달라고 저한테 요청을 했어요. 그래서 재심 신청을 결심했거든요. 처음 재심을 시작한 이유는 저 때문에 간첩 방조죄로 고생한 공범들을 위해서였어요.

 

Q. , 재심을 시작한 이유가 공범들의 누명을 벗게 하기 위해서 시작하신 거예요?
(김성만) , 그렇죠.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원래 활동한 건 민주화운동 밖에 없는데, 우리 사건의 공범들은 간첩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공범들이 하루아침에 간첩 방조죄로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공범들의 누명을 해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재심을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재심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니까 판사가 관심을 가지는 건 내가 북한대사관에 가서 토론을 했다는 부분이 아니라 북한대사관의 직원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나눴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지시가 있었는지가 핵심이더라고요.

 

Q. 선생님은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대사관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그래서 재심 담당 변호사와 이야기를 해봤더니 북한 사람들을 단순히 접촉한 것이 남북교류협력법을 위반했을 수는 있지만 국가보안법상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제 경우는 북한 사람을 만나서 (주체사상의 허구성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전혀 북한에 동조하거나 지시받은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무죄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때서야 법률적으로 확신을 하게 된 거죠. 이전에 사실상의 내용으로는 무죄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법률적으로 무죄라는 건 이번 재심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Q. , 그러면 선생님은 처음 재심을 시작할 때는 공범들의 재심을 위해서 시작한 거고, 스스로도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만났다는 점 때문에 법률적으로도 무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계셨는데 이번 재심 과정에서 무죄라는 걸 알게 되신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간첩죄가 적용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가 (유럽에서)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만나고 토론하고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유죄인 줄 알았죠. 그런데 이번에 공범들을 위해 시작한 재심을 통해서 북한대사관에서 그 직원들과 토론한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Q. 그때서야 이제 이 재심을 하면 나도 무죄를 받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시게 된 거네요?
(김성만) 그렇죠. 그리고 1심 재판에서도 무죄 선고가 나왔죠. 

 

Q. 그럼 선생님 1심에서 무죄를 받으셨을 때, 그때가 정말 좋으셨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때가.
(김성만) 그랬던 것 같아요.

<사진-4> 지난 7월 29일, 대법원 무죄를 선고 받고 연구소에서 작은 케익을 준비했다. 그 케익 위에는 "꽃길만 걷자"라는 초가 올려져 있다.    

재심, 또 다른 고통의 시작

Q. 그러나 1심에서 무죄(2020 2)를 받았지만 그 이후 과정이 쉽지는 않았잖아요. 특히 재심이라는 과정이 과거의 아픈 기억과 트라우마를 다 끄집어내야 하잖아요. 선생님의 경우는 1985년도 사형을 받았던 그 재판정에 다시 가서 내가 무죄라는 걸 스스로 입증해야 했는데, 재심을 하는 4-5년의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김성만) 재심 신청을 하고 개시가 되면서 제가 저의 과거 사건기록을 봐야 하잖아요. 그걸 몇십 년동안 제 머릿속에서 의도적으로 꽁꽁 싸매 두고 혹시 그 기억이 튀어나오면 바로 억누르고 기억을 안 하고 그렇게 힘들게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걸 풀어헤쳐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 제가 재심 준비를 매일 했어요. 그 이유는 하루에 15분 이상 그 기록을 보거나 그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사건기록 한 두 페이지만 보면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서 막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앉아서 한 2-3분 보다가 다시 덮는 거예요. 그러니 하루에 진도가 나갈 수가 없죠. 재심 준비는 해야 하는데 너무 괴로워서 생각을 할 수가 없으니까.

 

Q. 재심의 시작이 어떻게 보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네요.
(김성만) 밤마다 악몽을 꾸기 시작했어요. 옛날 기억들이 떠오르니까요. 그래서 재심을 하면서 어렵게 단절했던 과거를 다시 사는 것 같았어요. 꿈에서는 내가 다시 사형수로 나오고..날이면 날마다..낮에는 15분 정도만 사건기록을 살펴보고. 그리고 또 한 번은 내가 과거 법정에서 했던 진술을 보면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데 3일 동안 울기만 했어요. 왜냐하면 재판을 받을 때 안기부 직원들이 뒤에 앉아 있고, 자기들이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서 안기부에서 조사받았던 내용을 부인하면 그냥 죽는다고 수도 없이 교육을 받은 상태에서 검찰을 거치고 법정으로 왔기 때문에 어떻게 제가 법정에서 부인을 하겠어요. 그래서 저는 전혀 그런 적이 없는데 안 한 걸 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나의 과거 법정진술을 내가 지금 다시 읽으면서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살려고 어떻게든 발버둥 치던 나의 젊은 날의 모습이 계속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Q. 우리 사회와 사법부가 이렇게 재심을 하는 과거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어려움을 알아야 하는데요.
(김성만) 그리고 1심 재심 재판에서 재심을 받아준 판사가 검사한테 과거 법정기록 중에서 피고인들이 부인한 내용들만 법정에서 다시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부인한 내용을 가지고 이 사건을 다시 보겠다는 거였어요. 근데 검사가 여기서 나쁜 짓을 하더라고요. 검사들은 여전히 우리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게 자신들의 직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진짜로 부인한 내용 90%와 엉터리로 시인한 내용 10%를 중간중간에 끼워서 제출한 거예요. 그러니까 재심 과정에서 과거 고문 때문에 진술했던 모든 내용들을 법정에서 사실인 것처럼 호도해버리니까 이때 내가 또다시 군사법정에 앉아서 재판을 받는 기분이더라고요.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김성만 선생님께 축하를 전해드렸지만, 그 무죄를 얻기까지 감내하셔야 했던 아픔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이 야만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아픔을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하는가?” 국가는 재심이라는 과정을 통해 또다시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김성만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을 포함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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