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지만"

이성희 선생님 인터뷰

(조작간첩사건인 울릉도사건으로 17년 복역)

 

 

1974년 3월, 박정희 정권은 아무런 죄가 없는 40여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간첩 누명을 씌웠다. 이성희 선생님도 그 중 하나였다. 선생님은 원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7년을 복역해야 했다. 그 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이니, 당사자들을 어떠하겠는가. 너무나도 끔찍했던 일이었기에 다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어쩌면 시간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이성희 선생님 역시 당시의 시간을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 사건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알렸고, 재심을 청구했다. 이성희 선생님을 비롯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누명을 벗을 기획을 갔게 되었다. 40년 만에

 

"내가 일본 유학 당시 재일교포 이좌영씨는 중학교 3년 후배로 일본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내가 유학 4년 중 3년 동안 이좌영씨로부터 생활비, 학비 등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좌영씨가 간첩으로 의심받아 나를 비롯하여 이좌영씨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좌영씨의 지령 하에 행동한 것으로 간주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전원 간첩으로 조작 입건 재판에 회부한 것입니다."

 

중앙정보부 전주 분실에서 수사관들이 손으로 따귀를 때리고 머리를 때리면서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부터 1m 정도의 몽둥이로 사정없이 구타하더니 권총을 보여주면서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학생들 눈치 채지 못하게 풀어준다, 분명히 뭔가 더 있으니 빨리 진술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하였고 잠을 못 자게 계속 찌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옆방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와 집사람이 와서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중략)

 

남산분실로 이동해서 조사 받을 때 수사관들이 '동생 옷 벗게 해야 하는데 아직 결정이 안 되었으니 협조하라'며 회유를 하다가 얼마 뒤 건장한 청년 3~4명이 들어와 장작을 바닥에 깔더니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한 뒤, 야전 침대에서 각목을 빼서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이 '난수표, 무전기를 내놓아라' 하면서 1시간 정도 때려서 정신이 반쯤 나갔으며 온몸은 피와 내복이 엉겨 붙어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는 조서를 작성하였다. 구타를 당하고 조서를 작성하기를 반복했다.

 

(중략)

 

수사관이 서울구치소로 찾아와 보안과정 입회하에 조사를 하는데 보안과정 소파에 앉히더니 제자 중 진 아무개를 아느냐고 물어봐서 사진이라도 보여주면 기억할 수 있겠다고 하자, 중정 수사관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이런 놈은 죽여버려야 한다.'며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발길질을 해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문 중-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넣기 위해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성희 선생님에겐 간첩으로 의심되는 이좌영씨와 친분이 두텁고, 북한에 다녀온 사실이 있으며, 당시 대구 2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로 재직 중이던 동생 이삼희 준장과 하루 밤을 함께 지내며 국가의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부인했지만 돌아온 건 발길질과 매질이었다. 결국 그 어느 하나 진실이 아니었던 조소를 강제로 받아써야만 했다. 재판에서 이성희 선생님도, 그의 동생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재판 결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 이렇게 해서 만 17년의 징역을 살게 됐다.

 

"그렇게 나의 인생 49에서 66세까지 형무소에서 보냈습니다." 

 

17년의 수감생활이었다. 계절이 열일곱 번 바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끔찍하고 긴 시간 동안 이성희 선생님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었다.

 

"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의무과에서 간병부로 복역했습니다. 간병부로 일하는 동안 출소할 때까지 불쌍한 사람들을 정말로 성심껏 돌보았습니다. 불쌍한 재소자들이 나 때문에 목숨을 유지한 사람도 한두명이 아닙니다. 징역 사는 동안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재미로 모든 고통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수감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사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돌보고 싶은 것은 가족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으로 인해 비참하고, 두렵고,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언젠가는 단 하루라도 위로하고 봉사하고 싶다는 소망을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다. 출소 후에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계속되는 보혼 감찰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이렇게라도 다시 가족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냈다.

 

"출소 후의 시간은 다만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말도 꺼내기 싫은 큰 아주 큰 슬픔과 아픔이 있지만 그냥 덮겠습니다. 우리 부부의 불문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어 감정을 헤집고 싶지 않았던 선생님의 대답이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냥 덮고 싶다'던 짧은 대답으로 짐작한다. 회상만으로도 전신이 아파오는 고통이 아닐까 하고.

 

 

선생님은 자신의 유년 시절, 청년 시절은 '무난'했었다고 기억한다. 어릴 적 신식교육을 받은 아버지와 동네에서 자선가로 명망 높았던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어머니는 걸인들에게 밥과 반찬을 성심껏 차려서 대접하였고, 겨울철에 동네 사람들에게 거절하지 않고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때문에 6.25 전쟁이 나고 동네마다 부자들은 대부분 인민위원회에 불려가서 곤혹을 치루는 중에도, 선생님의 집은 그 소란을 비껴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쌓아둔 인망 덕분이었다.

 

 

청년기에도 큰 사건은 없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청년기에 대해 '박정희 시절 학업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현재 선생님의 박정희에 대한 입장은 무척이나 뚜렷하다.

 

"박정희는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항상 믿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군에서 남로당 조직책으로 있으면서 사건이 불거지자 동료들의 명단(남로당 조직원)을 넘겨주고, 자기 혼자 사형을 면죄 받은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2012년 11월 22일(목) 오전 10시, 이성희 선생님이 38년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판사 김동오)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 이성희 선생님 재심에서 반국가단체 특수잠입하고 군사기밀을 탐지한 혐의(국가보안법상 간첩 및 특수잠입·탈출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밀입 북한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범죄사실을 자백했기 때문에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나머지 증거들 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반국가단체 지령을 받았다거나 재일교포 이좌영이 반국가단체 구성원임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동생으로부터 군사기밀을 탐지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결문에 명시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북한에 잠입·탈출했다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온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다만 북한 실정과 사회적 호기심 때문에 밀입북한 것으로 보이는 점, 잠입 기간이 짧고 국익에 해하는 정도는 아닌 점 등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이성희 선생님은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전북대학교 수의학과 교수이자 교무처장을 지내던 중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이를 억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울릉도에서 북한을 왕래하며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47명을 검거하였다며 고문에 의해 조작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인터뷰]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오연상 원장('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중앙의대 용산병원 내과의사)

 

1987년 6월 10일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하지만 어떤 역사도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이 날이 오기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또한 민주화의 과정에서 일어난 가슴 저린 희생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을 무렵,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높아져갔고 학생 시위는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3월이 되고 대학들이 개강을 하면 다시 불타듯 시작될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고자 전두환 정권은 무섭게도 매질을 해댔다. 대학 학생회 임원들 및 운동권 학생들이 매일 같이 경찰 대공분실로 잡혀갔다. 이 와중에 형사들이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회장 박종운의 거취를 알아내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해 고문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고문 중 사망했으나 경찰은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박종철 사망 직후 그를 처음으로 검안한 의사에 의해 고문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신문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 전국을 정권에 대한 분노로 들끓게 만들었다.

 

이때 물고문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던 의사, 오연상 원장을 인터뷰하였다.

 

 

 

"그게 전두환 임기 말이었을 거에요. 그때 대통령이 7년 단임인가 그랬는데, 사실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전두환 대통령 때가 더 좀 안 좋았던 것 같아요.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오면 하여간 불특정 다수 마음에 안 들면 다 잡아가는 그런 시절이었거든.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 때에는 정치에 큰 관심 없는 사람들마저도 불만이 상당히 많았어요. 너무 강압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니까요. 그게 최고조에 달했을 때가 1987년도인 겁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자기가 민을만한 사람을 차기 대통령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좋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무리가 많이 따랐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지만 당시엔 대통령 선거가 '체육관 선거'로 이루어졌다. 장충체육관에서 거수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통령 선거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7년의 사회적 이슈는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하느냐 아니면 예전처럼 체육관 선거를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1월이니까, 아직은 겨울방학이었지만 개강을 하면 학생 시위가 격렬해질 것이라는 게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거든요. 그 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학생 데모나 이런 걸 강력히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을거예요. 당시 박종철 군이 언어학과 과대표였는데, 과대표하고 학생운동 하느라고 학사 경고 받았던가 그랬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혼나고, 과대표도 학생운동도 안하기로 했다고 아버지랑 약속을 했대요. 그 겨울방학만 지나면. 그런데 그때 공교롭게도 박종운이라는 선배가 그 하숙집에 와서 하룻밤을 피신했다 간 거야. 그래서 박종운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려다가 이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이전에도 남영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문 당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왔지만, 외부의 의사가 완진을 다녀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마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마 형사들도 박종철을 살리려고 급한 마음에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겠냐며 오연상 원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사들이 보기에도 이건 너무 잘못됐거든. 학생회장 하던 박종운이 어디 갔냐고 물어보려다가 너무 사람을 심하게 다뤄서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살려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는 외부로 왕진 신청을 할 리가 없어요. 만약 그게 간첩 사건이었거나 했으면 죽든 말든 상관도 안 할 때였다고요, 그때는.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병원으로 뛰어 들어온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이었다. 당시 내과의사였던 오연상 원장은 당직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연락이 왔다. 형사들이 응급실로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왕진 요청이 들어와 바로 뛰어갔다. 1분도 지체하지 않았다.

 

"우리 병원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데 남영동 형사들이 나에게 정보를 준답시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사를 받언 학생이 상태가 안 좋은데 얘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목이 마르다고 해서 물을 줬다'고. 물고문 했다고 말할 수 는 없으니까 그렇게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얘가 물을 마시더니 억 하고 숨을 안 쉰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지금 내가 다시 생각해봐도 형사들이 나름대로 정보도 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물 때문이라고."

 

신호를 무시하고 앰뷸런스가 달려 5분도 걸리지 않아 어느 큰 벽 앞에 도착했다. 한 형사가 무전을 치더니 벽이 열렸다. 신기해서 창문으로 보니까 밑에 기차 철로같이 레일을 만들어 놓고 그 벽이 전체적으로 레일을 따라서 이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벽의 바깥쪽은 회반죽을 발라 놨는데 안쪽은 철판이었다. 그곳이 말로만 듣던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아, 여기 들어가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때부터 의심스럽더라고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도 심상치 않게 생겼다고 하다. 건물에 창문이 없고 빛이 들어오게끔 만든 길쭉한 틈만 있었다. 3~4인이 타면 가슴이 닿을 정도로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를 지나가는데 양쪽으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들어가 보니까 책상도 있고 의자 두어 개 있고, 평상 같은 게 있어서 거기 누울 수 있게 되어 있고, 그리고 저 안에 있는 그 틈새쪽(창가쪽)으로 욕조가 보이더라고요. 바닥에 물 천지였어요."

 

당시 박종철이 속옷만 입은 채로 온 몸이 몰에 젖어 평상 위에 누워있었다. 오연상 원장은 '이거 심상치 않구나. 이렇게 물바다가 될 정도면 말로만 듣던 그 물고문을 했나보다'하고 직감했다고 한다. 동공반사도 보고 호흡 여부도 확인해 보았는데 박종철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희망은 없었지만 30분가량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형사들은 장비 부족 등을 이유로 중앙대 병원으로 박종철을 옮기자 했다. 반대 의사를 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아무 말도 못하고 대신 병원에 전화를 걸어 불필요한 처치를 막앗다. 박종철의 시신은 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날 오후에 내가 진료가 있었는데, 오후 한 4시쯤 돼서 아까 본 형사 중 한 사람이 왔더라고요. 사망진단서 써달라고. 내가 사인을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다 '미상'으로 써야하는데 그래도 좋겠냐고 물었더니 상관없대요. 쓰기만 하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다 '미상'이라고 썼지요. 심증은 있지만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망 진단서를 써줬어요. 그 형사가 그걸 받다니 혹시 신문이 시끄럽고 귀찮게 굴지 모르겠으니까 우리가 보호를 좀 해주겠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 순간부터 감시가 시작된 겁니다. 진료실 앞에 형사가 앉아있더라고요."

 

그날 오연상 원장이 썼던 그 사망진단서를 당시 법원에 출입하던 중앙일보 기자가 발견한다. 사망 장소가 남영동 대공분실이고 사인이 미상으로 나와 있는 점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끼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

 

"아마 진료실 안으로 들어와서 만나려고 했으면 당연히 안 됐을 거예요. 형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화장실에 갔을 때 따라온 거예요. 그게 참 다행이었던 것이, 진료실이 화장실에서 3m 떨어진 곳에 잇었는데 만약 멀었다면 형사들이 쫓아왔겠죠. 그런데 가까우니까 형사가 따라오지를 않는 거야. 그리고 화장실에서 그렇게 1분 동안 기자와 얘기를 했어요. 그냥 사실 확인 정도였죠."

 

 

그리고 그날 석간 중앙일보에 짤막한 기사가 실린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다가 사망하였다." 정말 간략한 사실만 실렸지만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그 다음날 한 10시쯤 병원에 갔는데 밖이 와글와글해요.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소용없었어요. 기자들이 한 30명 온 거예요. 그냥 다 밀고 진료실로 들어온 거예요. 기자 분들이 막 질문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본바대로, 정직하게 말했어요. 형사들이 말하기를 박종철이 물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물고문해서 죽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일단 내가 가능한 데까지는 했어요. 가능한 물과 관련된 얘기들을 많이 하는 거죠. 사실 죽은 사람에게서 들리는 수포음의 경우엔 의학적으로 물고문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래도 주로 물과 관련된 것을 상기시키려고 일부러 말을 했던 거예요. 물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 갔더니 바닥이 물천지이고 박종철 군이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젖어있더라. 그 앞에 보니까 욕조가 보이더라. 심폐소생하려고 삽관 하고 들어보니까 수포음이 들리더라. 뱃속에 물이 많이 들어갔는지 촉진해보니까 꿀렁꿀렁하더라. 그때 동아일보 기자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보더라고요. 바닥에 물이 있었냐. 결정적으로 그걸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물이 많았다고, 내가 그때 가운을 입고 갔었는데 그때 그 가운이 흙탕물에 젖어서 가운을 빨아야 했을 정도로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일주일가량 조선일보를 제외한 모든 신문이 그 기사만 써댔다. 12페이지에 실린 기사 모두, 만평에 칼럼까지 모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뤘다. 보도지침이 있던 시절이었으나, 이 사건만큼은 반드시 써내야 한다는 언론인들의 양심이 두려움을 이겨냈으리라.

 

그 다음날부터 오연상 원장은 검찰 수사에 형사 심문에 시달려야 했다. 병원 앞 그레이스 호텔이라는 곳에 갇혀 같은 내용을 100번도 더 물어봤다고 한다. 도중에 조금이라도 말이 바뀌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검찰에게서 풀려 집에 가는 길에 집 앞에서 기다리던 신길동 대공분실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다시 조사를 받았다. 두려움도 일었지만 거짓 자백을 할 수도,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자신이 아는 것을 너무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사건은 근본적으로 내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정치적인 사건이다 보니까 정치권에서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중요했거든요. 그리고 나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말 할 말을 이미 다 했기 때문에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입장이야. 그걸 어떻게 번복을 해요. 게다가 신문기자들도 한두 신문이 어영부영 기사를 썼으면 모르겠는데 모든 일간지가 대서특필을 해놨기 때문에 주워 담을 수가 없게 된 거죠. 초장에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남은 건 정치권에서 이걸 어떻게 하느냐 그것만 남은 상태가 된 거에요. 나는 전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정치권에서 고문 사실을 인정하면 난 아무 일 없는 거고, 이 사건을 묻겠다고 결정하면 난 없어지는 거지. 그래서 두렵고 자시고 할 정신도 없었어요. 너무 전광석화처럼 일어났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었죠."

 

만약 기자들에게 질문 받았을 때 잘 모르겠다고 눙첬다면 오히려 잡혀가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오연상 원장은 말한다. 하지만 이미 고문은 전 국민에게 기정사실화 되어버렸고 내무부 장관이 세 번씩 바뀌는 등 온 나라가 뒤집혀있었다. 오연상 원장은 "내 말을 번복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듣지도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까지가 제 역할이었습니다. 거기까지가 제가 아는 바이고요. 그 이후로는 사건 자체가 추진력이 생겨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어요."

 

이후 오연상 원장은 한동안 고등학교 친구가 운영하는 호텔에 숨어서 지냈다. 혹시 도청 당할까 싶어 집에 연락도 못했다고 한다.

 

 

사회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했듯이, 오연상 원장 개인에게도 이 사건이 준 충격은 상당하지 않았을까. 이 사건이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물어보았다.

 

"물론 진짜 정말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잖아요. 그럴 때 일수록 복잡한 생각을 하고 계산을 할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정직하게 가야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시 1987년 인터뷰 때에도, 내가 '어려운 문제일수록 정도대로 대처를 해야지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했었을 거예요. 어렵고 큰 일일 수록 정석대로 정직하게 해결을 봐야 해요. 그걸 배웠어요."

 

하지만 '의료인이기 때문에' 더 큰 역할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단언한다. 당시 자신이 했던 일은 의료인의 윤리로서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의사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어요. 문제는 의료인이고 아님을 떠나서, 권력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겠죠. 그러니까 뭐 우리만 그 문제가 있겠어요. 형사도 죄를 지은 사람들을 잡아서 선량한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신조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일반인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 국민을 때려잡는 그런 양상이 되어서 곤란했던 거죠.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사업을 잘 해서 일자리도 만들고 좋은 물건도 만들고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걸 좀 편하게 해보겠다고 정치자금을 대고 특혜를 받는 거잖아요."

 

따라서 윤리 강령이나 윤리 의식을 사회의 어느 집단이기 때문에 더 갖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각자 경험으로써 깨달은 윤리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간접경험이든 직접경험이든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학습을 하고, 이에 대해 본인이 사고할 능력을 갖추어야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결을 할 수 있다. 때문에 현재 의학 교육이나 의사들의 형식적인 윤리강령, 선언 등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윤리라는 게 삼각함수나 적분이 아니기 때문에 배웠다고 그렇게 한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의사협회나 의사들 모임에 윤리 강령 혹은 선언들이 있어도 무용지물인 것과 비숫한 맥락이에요.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죠. 결국에는 각자가 어떤 식으로 사고를 하고 살아가는지의 문제가 되는 것 같네요."

 

현재 의료인들 내에서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은, 모든 것이 돈의 관계로 환원되어버리는 점이다. 보험공단도 재정만을 걱정하고, 의사들도 수입에 민감해진다. 처음부터 비급여 항복인 미용 성형 만을 전문으로 하고 싶어서 의사가 된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며, 사실은 우리가 의사 될 적의 마음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고 의료가 상업회 된 현실을 비판하였다.

 

학생들 수업이나, 전공의 수련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자체가 그리 좋은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사건이라 하더라도, 분명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엘 갔다.

 

"지금은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결정에 처하고 시험에 들었는데, 크게 잘못한 일 없이 헤쳐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 점은 다행이지만, 피해자가 워낙 많고 의료인으로서 만난 환자가 죽었잖아요. 만약 어떻게든 민주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박종철이 죽지 않고 살아서 민주화가 되었으면 그게 더 좋았을 거라고 아직도 생각하거든요. 난 의료인의 입장에서 그래요."

 

대통령 선거 지원 유세, 국회의원 자리와 같이 정계에서의 러브콜도 받았다. 하지만 단 한번 눈길도 준 적이 없다고 한다. 원래 내가 갈 길은 의료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근 의사의 사회적 참여가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단지 의료 봉사나 보건 정책 뿐만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협상 테이블에까지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커지고 있다. 그에 비해 '난 의료인일 뿐이고, 의료인으로서, 아니,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오연상 원장은 마치 한 마을을 지켜주는 오래된 수호 나무와 같은 느낌어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사회의 영양분이 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시 돌이켜보면 각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결국 6.10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언론인들은 보도지침을 이겨내고 신문에 기사를 냈고, 오연상 원장은 의료인으로서 최소한 사인은 정확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고문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각 분야의 이러한 실천들이 합쳐져 결국엔 사회가 흘러갔고, 바뀌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의 말과 실천처럼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 한층 더 나은 곳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1. 574574 2015.02.03 17:53

    잘 읽었습니다. 좋은 인터뷰 감사합니다.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5공 반국가단체 조작사건 아람회, 오송회, 한울회 수기), 5공정치범명예회복회, 살림터, 1997년 5월>

 

 이 책의 공동저자인 박정석 선생님은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모진 고문과 함께 독방감옥 생활을 오래 경험하셨다.

 2011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수행한 '고문피해자 인권실태조사' 중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당시 박정석 선생님은 설문대상자로, 오송회 사건과 관련하여 인터넷 신문기사 등을 조사하면서 아래의 기사를 발견하였다. 선생님이 걲으신 오송회 사건은 국어교사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실록 전북민주화운동사] 오송회 사건- 전두환정권 대표적 용공조작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이 '오송회(五松會)'라는 용공이적단체를 구성했다고 발표하여 교육계는 물론 지역주민과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들의 주요 혐의는 정부체제를 수시로 비판하면서 북한을 찬양하는 언행을 했고 오송회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는 것이었다.

 

증거물로 제시된 <병든 서울>의 작가 오장환은 일제 시대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일원으로 활동하다 48년 2월 월북한 시인이었다. ‘월북’과 ‘병든 서울’이 버무려지면서 이들의 ‘친북’ 성향과 반정부의식을 이미지화하는 데 극적 효과를 내는 소품으로서는 꽤 적절한 자료였던 셈이다.

 

문학작품에는 문외한이었던 당시 공안 관계자들은 시외버스 안내양의 신고로 입수한 이 시집의 불온성 여부에 대해 당시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교수는 시집의 몇몇 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1981년 ‘학림사건’, 부산의 ‘부림사건’, 대전의 ‘아람회 사건’, 공주의 ‘금강회사건’ 등 당시 전국적으로 대형 공안사건이 경쟁적으로 터지면서 관내에서도 뭔가 크게 터뜨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은밀한 내사가 시작되었다.

 

시집의 원 소유자이자 중심인물로 군산제일고 현직 국어교사이던 이광웅 선생이 포착되었다. 경찰은 이광웅 선생을 비롯한 현직 교사들이 1982년 4월 19일 군산제일고 뒷산에서 4.19 위령제를 지낸 사실에 주목했다. ‘건’을 터뜨리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경찰의 행동개시에 의해 덫에 걸린 희생자들이 속속 연행되었다.

 

이광웅, 박정석, 황윤태, 이옥렬, 전성원, 채규구, 강상기, 엄택수 교사 등 나중에 경찰의 명명에 의해 ‘오송회’의 멤버가 된 현직 교사들이 먼저 잡혀 들어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11월 2일에 불법 연행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된 11월 25일까지 24일 동안과 이후 경찰에 송치된 12월 13일까지 43일 동안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평소 사회주의를 동경해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좌경 의식화교육을 해온 ‘빨갱이’ 로 조작되었다.

 

몽둥이로 전신을 때리고 수십 차례 뺨을 때리는 것은 점잖은 조사에 속했다.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비행기고문에 이어 발가락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는 전기 고문 끝에 용공단체 오송회는 5공 공안정권의 명을 받아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군산제일고 뒷산에 있던 소나무 다섯그루 아래서 모임을 가졌다는 데 착안해 ‘오송회’라는 작명을 해준 경찰에서는 이들 교사 모임을 고정간첩단 정도로 크게 키우려고 했다.

 

<2006. 7. 3.자 새전북신문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박정석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엿다. 또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과 관련해 사건에 연루된 이들과, 아람회, 한울회 관련자들과 함께 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 시작된 박정석 선생님의 '시 읽기와 쓰기'

 

 박정석 선생님은 산책을 나와 혼자있는 시간에 새와 꽃이 아닌 현실의 주제와 사회적 시선에 대해 시를 쓴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 하루 생각을 정리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랍속에 두고 발표를 망설인다.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와 같은 발언으로 같은 동료 교사에 의해 신고 당했으며, 우리사회의 끝니자 않은 '빨갱이', '용공세력'의 낙인이 이 "시"들을 통해 발표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하셨다.

 

 1972년 모교인 익산 남성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절친인 이광웅 선생님과 함께 시읽기와 독서모임을 하였으나, 점차 사회에 대해 관심을 두고 『전환시대의 논리』, 『들어라 양키들아』와 같은 서적을 통해 유신에 대한 관점과 식민사관의 극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국어교사는 단지 역사인식에 궤를 같이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선생님들의 독서모임을 반국가단체결성 사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도 받았으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법조 영욕의 60년] 오심의 역사-1. 오송회 사건

 

법원의 오심은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범죄행위다. 행정부나 입법부의 오판은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통해 바로잡을 기회라도 있지만, 사법부의 오심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다.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오욕과 억울함만 역사로 남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남북 대치를 빌미로 정권에 적대적인 진영의 인사들을 숙청하기 위해 조작된 용공 사건들의 실체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등을 악용한 것은 경찰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검찰 등 수사기관만이 아니었다.

 

당사자들과 국민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 것은 권력 앞에 무릎꿇고 법복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과 폭압에 눈감은 사법부와 판사들이었다.

 

사법부 스스로도 이런 역사의 과오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사법 조작사건에 '공범'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 법정에서 공개 사과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대표적인 '번복판결'이자 '사과 판결'이 ‘오송회 사건’ 재심이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전북 군산시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로 구성된 독서 모임 회원 9명이 4·19 기념행사와 5·18 추모제를 지냈다며 공안당국이 이들을 ‘용공분자’로 내몰면서 터졌다.

 

공안당국은 교사들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시를 낭송해 정치 현실을 비판했다며 이들의 모임인 오송회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했다. 5명의 교사가 소나무 아래에 모였다는 의미에서 ‘오송회’라고 칭했다.


 

이 사건으로 이광웅씨 등 교사 8명과 조성용 당시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이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경찰의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관련자들에게 1983년 12월 27일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피해자들 중 최고형인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이광웅 교사는 1987년 7월 사면조치로 4년 8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후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규명 운동’을 펼쳤다.

2007년 6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전형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규정, 법원에 소원을 청구해 2008년 11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무죄판결을 냈던 광주고법 형사1부(이한주 부장판사)는 “수사기록과 법정진술 등을 종합할 때 조씨 등에 대한 당시 검찰과 경찰의 조서는 고문·협박·회유에 의한 것으로 증거 능력이 없다. 조씨 등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과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읽고 암울한 정치적 현실을 비판했지만 북한의 정책과 사상을 동조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느꼈을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 고통에 대해 옛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이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 하겠다”고 법원의 이례적 반성을 보여줬다.

 

<2011. 7. 4.자 아시아투데이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97785>

 

지난해 겨울

 

 박정석 선생님은 2012년 12월 10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 참석하였다. 선생님은 겨울철에는 절대 외출금지의 척추혈관종을 앓고 있어서 절대 넘어지면 안되는 상황에서 지팡이를 짚고 목숨을 걸고 참석하였다고 한다. 척추혈관종으로 밝혀지기 전에 선생님은 척추암으로 진단을 받아 두번째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들었는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박정석 선생님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 후원의 밤에서 지난 시간을 마주하였다. 광주교도소에서 정신적으로 힘들 때 바륨 처방을 해준 이성희 선생님과 관련된 '울릉도 사건' 선생님들과도 인사할 수 있어서 좋았고, 송기복 선생님 등을 만날 수 있어서 더더욱 좋았다고 한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발표한 트라우마 치유 방안에 깊은 공감을 하고 선생님도 그런 치유의 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고 하셨다.

 

 

 

 

대공경찰은 사건 하나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사건의 제2인자 격인 박정석(朴正石)의 증언에 의하면,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들인 이들은 1982112, 전주 대공분실 지하실로 끌려가, 얼굴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흉터를 가진 신갑생이라는 고문기술자 등으로부터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체험을 겪는다.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을 무려 40일간이나 반복하여 받았다. 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때마다 고문의 강도는 높아갔다. 영향 받은 사람, 관계있는 사람을 대라는 고문에 문규현, 조성용의 이름이 신음처럼 튀어나왔고, 조성용은 그때부터 영문도 모르는 채 황소처럼 목이 매여 끌려나와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 합류하게 된다. 고문은 이들로 하여금 우선은 살고 봐야 하겠다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저들이 불러주는 각본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교사들은 난세를 사는 지식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놓고 고민했고
, 민주적인 교사, 깨어있는 교사이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또 산책을 좋아하여 햇빛 찬란한 날, 들과 산을 풋내를 띠고 돌아다녔다. 그 산책길에서 그들은 문학과 시와 세상을 이야기했다. 읽은 책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이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정열적인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길이라고 믿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슬그머니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되는 것이 그들이 눈에 비쳤다. 이는 국민의 저항의식을 두려워 한 반민주적, 반민중적 독재권력의 성격 때문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4.19날에 위령제라도 지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막걸리 10병과 오징어안주를 들고 학교뒷산에 올라갔다. 소나무 아래서 4.195.18 광주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식을 마치고 술 몇 잔씩 돌려 마시며 자연스럽게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를 토로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정의로웠는가를 놓고 토론하고 반성했다. 이때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일상적 삶과 가족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419 정신을 본받아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이광웅)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박정석)
약하고 용기 없이 살아 왔다.”(전성원)
한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온 비겁한 삶이었다.”(황윤태)
살아남을 권리도 없는 비겁한 놈이었다.”(이옥렬 

 

<2006. 7. 3.자 새전북신문 참조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30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

 

박정석 선생님은 지식인이라면, 교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이 말 때문에 사건에 엮인다는 것 용공조작이 가능한 것 자체가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분단상황의 비극이라고 하였다. 이어 박정석 선생님의 고통보다 아내의 고충의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피해자들인 나도 억울함이 컸지만 가족들도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내가 출소를 한 후 이사를 갔지만 내 자식들이 동네사람들에게 '빨갱이 자식' 소리를 들으며 상처를 받았고, 여동생들은 국가보안법에 걸려 일자리, 결혼상대를 못만나면서, 늦게까지 고생한 여동생들에 미안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힘들어 했다"고 하였다.

 

2011년 8월 서울고법 제32민사부(김명수 부장판사)는 "영장 없이 강제연행 돼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변호인이나 가족의 접견·면회를 금지당했고, 고문과 회유·협박으로 겁에 질린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고 하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이뤄졌고 피해자가 석방 후에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주변 인물이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예를 쓰고 살아야 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지금까지 선생님이 떨쳐보내지 못한 부채감이다. 박정석 선생님 자신도 피해망상, 공황장애로 정신건강의학과 처방약을 복용하고 있고, 지금은 불면증 약까지 더해졌다고 한다. 

 

 

 

박정석 선생님에게 시 한편을 인터뷰 말미에 부탁했고 선생님은 한참을 망설이셨다. 그러나 다음날 박정석 선생님은 연구소로 시를 보내주셨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요순시대

요순시절이란

백성이 불안과 분노를 느끼지 않고

과로하지 않으며 일주일에 이틀은 쉬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웃으며 술 한잔 나누는것

강물은 절로절로 흐르고

늙은 나무에 산새들이 고이 잠드는 것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30호에 실린 글입니다.

  1. 2021.08.31 03:40

    비밀댓글입니다

[고문생존자 인터뷰]  “진실이 나를 살게 했어요”
 

(조작간첩사건인 울릉도사건으로 17년 복역, 현재 재심을 기다리며 위암투병 중인 최규식 선생님)

 
 
  1974년 박정희 유신정권은 독재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1월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하여 민주인사들을 영장 없이 체포한 데에 이어 4월 긴급조치 4호 때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250여명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한다. 긴급조치 4호 발령 무렵 재일 한국인이 연루된 간첩사건이 발표된다. 이 사건이 바로 ‘울릉도 사건’이다. 재일 한국인 이좌영씨(전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구원하는 가족․교포회 회장)의 인맥을 중심으로 작은 연결고리라도 있던 모든 사람이 체포되어 간첩으로 몰렸다. 총 47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북에서 지령과 공작금을 받아 공작활동을 행하고 정부전복을 획책했다고 발표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일본 유학 경력이 있었던 최규식 선생님은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 후 17년을 복역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조총련과의 접촉으로 북한에 왕래하였으며 재일공작조직원에게 간첩 교육을 받은 혐의였다.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협박과 폭언과 고문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고문 피해 당사자인 선생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두웠던 시절 장막 뒤에 감쳐져있던 진실을 꼭 듣고 싶었다. 그래야만 역사가 진정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보건의료인이 인간의 권리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옆 동네의 우익 성향 청년단이 와서 우리집을 테러했어요. 새벽에 와서 전부 부숴버렸어요. 그게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숟가락 하나가 성한 것이 없었어요. 무지막지한 테러를 한 거예요. 그렇게 당하고 보니까 집이 험해지고, 낮에 들어가도 동굴처럼 캄캄하고. 이런 것들이 내 의식을 굉장히 압박을 했달까, 현실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달까, 아니면 이런 것들 때문에 현실을 알려고 노력했달까.”
 
  최규식 선생님은 아버지가 민족 운동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때문에 아버지가 도망 다니면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아침마다 형제들을 불러놓고 일본어로 된 동양역사책을 강의해주셨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데, 특히 5·4 운동 무렵의 중국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생계가 막막하니까 온 가족이 논에 나가서 일을 했는데, 그 와중에도 아버지가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항상 무산자 해방을 말씀하셨고 약소민족의 해방을 참 많이 말씀하셨지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는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공 사상에 대해 자연스레 의문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는 이북 사람들이 다 머리에 뿔났고, 못 산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이북 사람을 봤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거지. 이상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진실을 알고 싶어지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나 궁금해지는 거고.”
 
  일본에서 수의학을 공부할 때도, 북한에서는 관련 분야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최규식 선생님은 북한을 ‘적군’이 아닌 ‘동포’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북한의 현실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도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68년에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여름 방학 때 청진에 다녀오게 된 거예요.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캐피탈리즘(자본주의)와 소셜리즘(사회주의)의 차이었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알고 싶었던 겁니다. 1주일 정도 있다가 돌아간댔더니 (북한측에서) 더 쉬었다 가시지 그러냐고 그래요. 그런데 나는 그게 쉬는 게 아니라 고역이었지. 그 사람들과 나는 의도가 애초에 달랐어요. 나는 현실을 보고 싶었던 것이고, 그 사람들은 나를 교육시켜서 자기네들 목적을 위해 써먹고 싶었던 거예요.”
 
  선생님은 연구실에서 키우던 실험동물에게 사료를 줘야하는 것이 떠올라 급히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북한을 방문해서 그 곳의 사람들 머리에 정말 뿔이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인데 당시 사회는 그를 간첩으로 몰아갔다.
 
  “한마디로 말해서 울릉도 사건은 조작 간첩 사건 중에 가장 큰 사건이에요. 사람이 셋이나 죽었어요. 40명 넘는 사람을 연루시키고. 74년도에 검거해서 일망타진을 시키려고 하는데 만약 내가 일본에 유학을 안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시작은 이문동이었다. 74년 2월, 일본에서 돌아와 캐나다 유학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조건 패는 것’으로 심문이 시작되었다고 선생님은 기억한다. 중앙정보부에 도착하자 수사관들은 ‘네가 전라북도 부안고창 7지구당 부위원장이다. 북한 권력 없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느냐’며 없는 이야기를 하며 구타를 시작했다.

 

 

 

  “인간이 아니야, 저 놈들이. 인간이 아니야. 서울법대 최교수 얘기를 고문하면서 해요. ‘최교수 왜 죽어나갔는지 알지?’ 하면서. ‘너 여기서 죽으면 넌 끝이야. 너 이북 세 번 갔다왔다고 만들 수도 있어.’라고 협박했어요. 개처럼 부리더라고. 매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홀라당 벗기고 막 후려치는데, 아니 대가리를 그냥 개대가리 패듯이 패니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맞는 것도 고역이지만 때리는 것도 정신 멀쩡해서는 그렇게 못 때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때려요. 때리다가 자기들 닭튀김 안주에다가 소주 마시고. 또 ‘시작하자’ 하면서 몽둥이 들고 오고. 그렇게 맞는 거예요. 나의 정신 상태를 황망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야. 이건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요.”
 
  고문을 당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최규식 선생님은 눈물을 보였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연민이 혼란스럽게 겹쳐 황망함 이외의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진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으로만 남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확신을 가진 거야. 사회 발전에 대한 확신. 내 자신에 대한 확신. 어떤 데서도 굴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내 속는 진실이 있었거든. 그 진실에 대한 확신이 나를 바로 잡아주는 거예요. 어떠한 사리사욕도 없이 역사를 바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실에 따른 나의 실천들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 했지요.”
 
  1991년 2월 25일은 최규식 선생님의 출소날이었다. 17년만에 돌아온 사회는 적응하기에 쉽지 않았다. 그간 돈을 쓰지 않아 지폐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건널목을 건너는 것이 불편했다. 차가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 멈칫거리기를 반복했다. 선생님은 그 무렵 곁에서 친지들과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고 회상한다. 함께 술자리에 어울려준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이 있었고, 늘 정신적 지지가 되어준 아내가 있었다. 자식들과 조카들은 선생님을 이해해줬고 믿어줬다.
 
  “인권 클리닉(인권의학연구소 트라우마치유 프로그램) 할 때 우리집 애들 조카애들 다 와서 다 들었어요. 유일하게 우리 가족만 온 거예요. 내가 그 동안 가족들에게 받은 신뢰가 그렇게 나타난 게 아닌가 싶어요. 내 가족들이 나를 사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봤으면 그렇게 안 했을 겁니다. 감옥살이 하고 났는데, 내가 돈을 벌었어, 명예를 얻었어, 아무것도 없잖아요? 가족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자살하고 말았을 거예요. 나는 내 자식들 내 형제들 내 가족들만이라도 분단의 고통을 같이 함께 하는 그것이 나에게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가족들은 분단으로 인해 선생님이 겪은 고통을 함께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큰 위안이 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아버지의 소식이었다. 선생님의 출소를 불과 서너개월 남겨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재회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는데 너무 억울했다. 평생 제대로 된 효도 한번 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뉘인 곳 아래에 움막을 짓고 1주기까지 시묘를 하였다.
 
  “내가 뭘 했어도 사회 운동을 했을 거야.”
 
  고된 시간이었지만 이 사회의 정의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한 확신이 생겼다. 선생님은 단 한번도 고문 사실과 감옥 생활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오히려 사회의 정의를 원하는 선생님에게는 귀하고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출소 이후엔 아내와 작은 봉고차를 마련하여 전국으로 집회를 찾아다녔다. 박정희 정권 이후 이 땅에 팽배해진 군사 문화와 권위주의의 비민주성으로부터 전통 문화와 휴머니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 운동의 한 가운데에 선 것이다.  그런 선생님에게 사회는 여전히 ‘간첩 누명’을 씌워댔다. 한번은 지역 신문에서 선생님과 선생님의 아내를 간첩으로 몰았다.
 
  “2003~2004년의 일입니다. 부안에 방폐장을 짓겠다며 김종규 군수가 MBC 100분 토론에서 ‘민주주의 질서에 의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군수의 신념과 결단만이 필요하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민주주의 질서를 위한 모임을 인터넷에서 만들어서 싸웠어요. 그랬더니 지역신문에서 민주주의 질서를 위한 모임의 수장은 간첩이고, 그 뒤에서 새끼간첩이 날뛴다며 기사를 냈던 거죠.”
 
  신문에서는 ‘노란 손수건’을 운운해가며 두 사람이 견디며 지내온 17년의 시간을 조롱했다. 결국 신문을 상대로 해서 재판을 했고 승소를 했지만, 당시 사건과 그때의 억울함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치가 떨린다.
 
  “나는 간첩이 아닌데 간첩이 되어버렸잖아요. 어떻게해서든지 재심을 받아서 나는 간첩이 아니라는 것만 밝히고 죽고 싶어요.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재판 시작만이라도 보고 죽고 싶은 것입니다. 생명 연장만을 바라면서 악착같이 투병생활 하고 있어요.”

 

 

  
위암으로 투병을 시작한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병의 예후가 좋지 못해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오래 사는 것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누명만은 벗고 싶다고 재심이 시작되는 것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 현재 선생님의 소망이다.  이 사건이 있기 이전, 선생님은 역사를 피해가는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피해 당사자가 아님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살아왔지만, 17년의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는 피해갈 것도 없고 피해갈 수도 없고 맞받아치자. 그렇게 바뀌었어요.”
 
  누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침해당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사회와 사회의 충돌, 세계 평화, 자유와 평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국민들이 너무 잘 몰라요. 그렇지만 모르는 게 그분들 잘못이 아니야. 역사를 곡필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파들이 잘 사는 것, 독재정권의 후손들이 잘 사는 것, 그 족속들이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거예요. 사람들이야 나름대로 그들이 성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할 거야. 사회적으로 금전적으로 누구에게 꿀리지 않고 산다고 사니까. 그런 식으로 역사가 크게 빗나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예요.”
 
  이 땅의 역사가 정말로 바로 서려면 박정희 정권의 과거사를 완전히 청산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독재자의 딸이 버젓이 웃는 얼굴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총선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 2012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독재의 또 다른 귀신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선생님은 이렇게 잘못된 부분들을 정의의 품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아직까지는 역부족이었다고 평가한다.
 
   “사람들이 책도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고, 책에 대해 그룹별로 토론을 해서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의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는만큼 함부로 인권을 유린하거나, 돈이 없다고 소외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앞으로도 인권, 정의, 인류애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의사가 많이 양성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1970년대는 분단 현실의 고통과 고사해버린 민주주의만이 전 사회를 뒤덮은 시대였다. ‘울릉도 사건’ 뿐만 아니라 ‘유럽간첩사건’, ‘남매간첩사건’ 등 전부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작 간첩 사건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죽임까지 당했다. 40년이 지난 이제야 재심을 거쳐 피해자들이 복권되고 있다. 느리게나마 역사가 바로 잡혀나가고 있다는 점에 낙관하되, 아직까지도 가려지고 왜곡되어있는 진실들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1. 2016.07.14 01:20

    읽는 내내 눈물이 납니다.
    잊지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인권클리닉 인터뷰]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1972년,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어떠한 단체행동도 허락되지 않던 살벌한 상황에서 원풍모방 노조는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1970년대 민주노조 중에서도 ‘전설’로 불릴 만큼 활동적인 사회 참여와 노동자 투쟁을 전개했던 자타공인 최강의 노조였다.

 

 

“내가 18살 때, 그러니까 72년에 한국모방에 들어가서 회사가 원풍모방으로 이름이 바뀌고 원풍 노조가 해체되던 82년까지 10년 있었으니까, 그 역사를 모두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어요.”

 

 

박순애 선생님은 원풍모방 노조가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던 당시 부지부장을 지냈다. 최강의 노조였지만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이름하에 단행된 정권의 칼날은 너무 거셌다. 회사에 조합원들을 가두고 5일간 수도와 전기를 끊어버린 뒤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냈다. 어두컴컴한 지하방에 데려가 윽박지르며 협박하는데 도저히 사표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원풍모방 노조는 해체되었다. 
하지만 원풍에서의 10년은 박순애 선생님에게 있어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위해 무엇이든 함께 주장하고 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장이 불러요. 조장은 (회사 간부 쪽이 아닌) 노동자 쪽 사람이었는데, 본인 이 움직이기엔 너무 눈에 띄니까 입사한지 한 달 밖에 안 된 나를 불러서,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내일 새벽에 기계 스위치 몇 시에 끄는지 물어보고 오래요. 아마 그게 특근 거부 투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입사 1개월 차였던 박순애 선생님이 겪었던 것은 한국 모방 노동자들이 일당 320원의 저임금, 상여금 미지급, 10분 지각에 특근 1시간 공제, 3년 미만 근무시 퇴직금에서 중식대 공제 등 회사 측의 온갖 횡포에 맞서기 위해 벌인 투쟁이었다. 당시 지동진 지부장을 선두로 투쟁을 끌어나갔지만 회사는 노조를 전면적으로 탄압했다.

 

 

“새벽 6시가 되니까 서로들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 기계 스위치를 내렸어요. 그랬더니 전부 내려요. 그리고 정사과로 모이라고 해서 그리로 달려갔더니 이미 현장 간부들이 나와 있더라고요. 우리보고 기숙사에 가서 대기하래요.”

 

 

하루를 꼬박 기숙사에서 대기 하고 있는데 열린 창문으로 종이가 돌에 묶여 날아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정문까지 빠져나오라는 지도부의 쪽지였다. 당시 기숙사에 많은 노동자들이 합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숙사의 노동자들만 동원해도 충분히 큰 움직임을 만들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은 정문을 빠져나가 명동성당에 갔다. 그렇게 하루를 또 기다렸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하라는 말에 이틀 밤을 꼬박 새고 출근을 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노조 지도부가 노량진 경찰서로 잡혀갔다는 말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한국 모방이 부도가 났지요.”

 

 

부실 경영으로 한국 모방은 1973년 부도를 낸다. 이에 노조는 회사 측과 노사연합 공동체를 구성하여 경영에 참여하는 등 회사 정상화에 앞장섰다. 1974년 회사는 원풍산업이 인수하였다. 그러나 신임 경영진은 취임 시 노조와 약속했던 사항들을 이행하지 않았고 이에 불만스러워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노조를 사사건건 탄압해댔다.

 

 

“하여간 시도 때도 없이 잡아가는 거예요, 지도부랑 지부장을. 한번은 기숙사 사감으로 공수부대 출신이 왔어요. 대통령이 보냈대요, 참, 우습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대통령이 뭐 이런 회사에까지 신경을 쓰시느냐고 그랬죠. 그랬더니 대통령 모독죄라고 또 구속시키고요.”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무고한 방용석 지부장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함’ 진정서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하지만 조합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로 대책회의를 열고 남부경찰서에 찾아갔다. 경찰서에 찾아가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항의했다. 일이 끝나면 회사 식당에 모여 앉아 민중가요를 큰 소리로 계속 불렀다. 노동 3권 중 단체 교섭권과 단결권은 있었으나 행동권이 없던 시기였다. 파업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일부러 기계에 잔 고장을 냈다. 회사가 물증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만 생산력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매번 회사를 이겼다. 노동자의 힘이, 그 힘의 연대가 만들어낸 승리였다.

 

 

“우리 노조가 정말 강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 참 좋았지요. 2교대 근무에서 3교대 근무로 바꿨어요. 그 당시에 3교대 근무하는 건 우리 회사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근로 조건을 개선시켜나갔어요. 기숙사 시설도 우리만큼 좋은 곳이 없었어요. 임금도 아주 높았고요.”

 

 

무엇보다 2교대 근무와 3교대 근무는 실로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2교대 근무 때는 하지 못했던 활동들을 아름아름 꾸려나갔다. 영등포 산업 선교회와 대학생들과도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며 노조 내 소모임을 기반으로 많은 활동들을 전개해 나갔다.

 

 

“우리가 2교대였으면 그렇게까지는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3교대이니까 시간이 충분하잖아요. 그래서 정말 많은 활동을 했어요. 유인물도 나누어주고요. 다른 노조들 지원도 굉장히 많이 다녔어요. YH 신민당사 농성 때 가서 설렁탕도 사들고 가고, 그 분들 나중에 감옥 갔을 때 우리가 조 짜서 매일 매일 면회를 갔어요. 동지들이 투쟁하다가 감옥에 갔는데 외로우면 안 된다고요.”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사회 참여를 하기도 했다.

 

 

“80년에 광주 민주화 항쟁이 나고 나서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주기 위해서 모금을 한 거예요. 450만원을 모았어요. 그 돈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해줬죠.”

 

 

비상계엄 전국 확대실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안기부와 합동수사본부를 동원하여 회사의 협조 하에 본격적인 노조 해체 작업에 착수했다. 조합원들에게 아버지 역할이 되어주던 방용석 지부장은 수배 조치가 내려져 회사를 떠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1980년 12월, 합동수사본부는 노조 지도부 50여명을 연행하여 강제 사표를 쓰게 했다.

 

 

“일단 가면 옷을 전부 벗기고 군복 같은 걸 입혀요. 거기서 수사관들이 그래요. 광주를 돕는다는 건 간첩을 돕는다는 거라고요. 그러면서 산업 선교회 다니냐, 친구는 누가 있냐 꼬치꼬치 캐묻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항의를 하죠. 내가 사표를 써도 회사에서 써야지 왜 여기서 쓰냐. 그러면 윽박지르고 협박을 해요. 우리를 자기네들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고 막 그래요. 거기서 남자들은 순화 교육 보내기도 하고 그랬지요.”

 

 

12월 8일에 시작되어 정확히 크리스마스 이브날까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노조 간부들이 서대문에 있는 범진사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노조 구성을 보면, 지부장이 있고 그 밑에 부지부장이 있고 그 밑으로 각 부의 부장들과 차장들이 있어요. 그 상황에서 부장급 위로는 다 연행해가서 사표 쓰게 만든 거예요. 나는 당시에 교육선전부 차장이어서 현장 복귀가 가능했어요. 그렇게 복귀해서 부지부장을 맡게 된 거지요.

 

 

탄압은 있었지만 조합원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지도부가 뭉텅 잘려버린 상황에서 노조 활동을 빠르게 정상화 시켜나갔다. 회사는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부산의 원풍타이어노조와 통합시키려고도 했다.

 

 

“두 곳 모두 이름이 원풍인데 노조가 두 개이면 안 된대요. 단일 노조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원풍모방노조랑 원풍타이어노조랑 합쳐야 한대요. 거기는 어용노조였으니까 그쪽에 우리가 합쳐지기를 원했나봐. 그래서 표결로 부치자고 했더니 우리 쪽 위원들을 회사가 자꾸 포섭해가요.”

 

 

하지만 역시나 노동자들의 통쾌한 승리로 끝났다. 원풍모방은 원풍타이어와 공동위원장을 세움으로서 회사의 탄압을 좌절시켰다.

 

 

1982년 9월 전면적인 노조 와해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른바 9.27 사태이다. 이날 회사 남성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노조 사무실에 무단 진입하여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지부장 정선순을 감금하여 폭행과 협박을 가해 사표를 쓰도록 강요했다. 이 소식에 6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곧바로 농성 투쟁에 돌입하였는데, 회사는 건물을 봉쇄하고 수돗물을 끊었다. 박순애 선생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손이 찢어졌어요. 농성 시작하던 날. 손에서 피가 철철 나니까 일단 병원으로 실려 갔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농성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함께 투쟁했어요.”

 

 

사흘 후, 전경들과 회사가 고용한 용역이 농성 현장에 들이 닥쳐 폭행을 가해 조합원들을 해산시켰다. 이 비인권적이고 폭력적인 진압으로 200명 이상이 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한다. 500명 넘는 조합원들은 강제 해고를 당했다. 박순애 선생님을 포함한 55명이 구류 선고를 받았다. 1983년 1월, 마지막 민주 노조라고 불리던 원풍모방 노조는 공식적으로 해산하였다.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9.27 사태 당시의 사진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1년 선고 받고 10개월 지내다 광복절 특사로 나왔어요. 참 어이가 없는 게, 우리 다 석방시켜주는데 시간 차이를 두고 따로 따로 내보내는 거예요. 우리끼리 못 만나게 하려고. 아예 나오자마자 탈 수 있게 차를 대기시켜 놨다가 고향 집까지 데려다 주더라고요. 딴에는 보호 차원에서 그런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딱 봐도 감시하는 건지 알겠잖아요. 고향집에 갔더니 관할 경찰소에서 또 슬슬 감시하러 오고. 다시 일하려고 일자리 알아보고 다니는데 취직도 안 되고.”

 

 

3교대 근무라 하더라도 8시간을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내리 꼬박 일해야 하는 힘든 환경이었고, ‘민주’라는 말이 반역죄 마냥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노동조합의 민주화 투쟁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게다가 감옥에서의 시간과 그 이후 겪었을 경제난까지. 이 시절을 견뎌내게 해준 원동력이 궁금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이 있었어요. 참, 너무 좋은 사람들이 거기 있었어요. 하나같이 너무 좋은.”

 

 

선생님은 이 모든 활동이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작은 것 하나 나누는 동지들이 있었고 추운 날 손 마주 잡을 동지들이 있었기에 힘든 줄도 모르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겐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이만큼 살게 해줬다는 말에 아직도 코웃음만 나온다. 박순애 선생님은 그 시절의 ‘나’와 ‘내 동지들’이 산업 역군이었음이 아직까지도 자랑스럽다고 한다.
다만, 앞으로의 노동운동은 당사자들이 ‘다치지 않게’ 되도록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해 나아갔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내 삶의 권리를 찾아서 하는 투쟁이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이 다치면 회복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런 이유에서 쌍용차 투쟁을 보며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지요. 아직도 투쟁장들이 많잖아요?”

 

 

선생님은 노동권이 지켜져야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아직도 우리 사회가 정말 건강하지는 못한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 변해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들이 쌓여서 많은 사람들이 제 권리를 찾을 수 있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선생님은 다시 강조한다. 그것은 분명 함께 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정리 : 김규연 (인권의학연구소 인턴)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20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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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클리닉 인터뷰]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인권의학연구소 최창남 이사는 작년 12월 1일 울릉도 간첩단 조작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울릉도 1974" 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연구소의 집단상담 치유과정에 참여하시면서 목격하신 은폐된 역사의 아픈 상처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쓰셨다고 합니다. 아래는 최창남 이사가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하여 나눈 인터뷰 내용입니다.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관용(이하 정). - "울릉도 1974"란 책으로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진면목을 파헤 친 최창남 목사를 스튜디오에 모십니다. 지금 목사님이지만 목회는 안 하시죠. 그런데 다양한 일들을 해오셨어요. 옛날에 민중가요의 고전인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이런 노래를 만드셨지요. 만드실 때가 언제였지요?

 

최창남(이하 최). - 1985~6년입니다. 제가 작곡을 좋아했었어요.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는 제가 전도사로 산동네에서 목회할 때 만들었고, <노동의 새벽>은 제가 전도사 생활을 그만두고 현장으로 이전해 노동운동할 때 만들었습니다.

 

정 - 빈민운동 겸 목회하시다가, 현장에 가서 노동운동 하시다가, 또 그사이에 노래도 만드시고. 그 후 다시 교회로 돌아오셨지요?

 

최 - 예. 1992년에 돌아왔습니다. 다시 그만둔 것은 2006년이구요.

 

정 - 왜 그만두셨어요.

 

최 - 교회를 계속 하다 보니 내가 하고자 하는 것과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부딪힐 때가 많아요. 그래서 좀 자유롭게 목회를 해야 되겠다, 저는 이것도 목회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을 살리고 지키고 하는 말씀의 정신들을 지켜가는 활동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정 - 지금은 백두대간 하늘길 이사장이신데요.

 

최 - 제가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했었는데요. 전에는 산에 대해 잘 몰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랄까, 하나님의 생명살림이랄까, 상생과 공동체의 원리들이 자연 속에, 숲속에, 산속에 다 있더라구요. 그냥 산에 오르내리는 등산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보존하고 숲을 살리고, 산행을 할 때도 가치지향적인 산행을 하고 조화를 이루는 산행을 하자는 가치운동의 의미에서 뜻있는 분들과 단체를 만든 것입니다.

 

정 - 워낙 다채로운 활동해오셨는데요. 울릉도 간첩단사건과는 또 어떻게 연결되었고, 이 책을 쓰시게 되었는지요.

 

최 - 재작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울릉도 사건 피해자 트라우마 치유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어요. 제가 이 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는데 저의 도움이 필요했던가 봐요. 울릉도 피해자 분들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서도 보안관찰을 받으면서 사람들을 못 만나고 괴로우니까 신앙에 많이 귀의하시게 되셨어요. 사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닌데 어떤 분은 ‘나는 신앙 안에서 다 해결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그런 신앙적인 부분은 의사선생님들이 말씀 나누기가 힘드니까 목사인 저에게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나누고 듣고 하다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 - 심리치유과정에서 처음 만나게 된 거군요. 자. 울릉도 간첩단사건, 모르시는 분이 많이 있으니까. 어떤 사건입니까. 개요부터 설명해 주시죠.

 

최 - 1974년 3월 15일 발표된 사건인데요. 한마디로 유신정권의 통치 필요성에 따라 조작된 간첩단 사건이죠. 그해 2월부터 울릉도를 비롯한 지역 여기저기서 불법 체포되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까지 불법 구금되고 고문을 통해 울릉도 간첩단사건으로 발표되었어요. 울릉도와는 아무런 관련없는 전라도 사람들까지 같이 묶어 모두 47명이, 그 중에 3명은 사형당하셨죠. 인혁당 사법살인이라고 하는, 선고받고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한 일이 있었는데, 이 분들과 같은 날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그런데 인혁당 사건만 알려졌지요.

 

정 - 47명 가운데 울릉도 사셨던 분은 몇 분이나 되나요?

 

최 - 20여명, 절반 정도입니다.

 

정 - 그런데 뭔가 있으니까 그런 사건으로 엮인 것 아닙니까?

 

최 - 이 사건의 배경은 먼저, 시대적으로 70년대 초반 데탕트, 미소전략무기 제한협정도 있었고, 미중 화해 무드가 생기고 긴장이 완화되면서 국내에서도 유신정권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죠. 그러면서 이들에 대한 탄압 필요성이 커졌지요. 긴급조치도 나오게 되고. 장준하 선생의 개헌청원 백만인운동, 또 학생들의 반유신운동을 잠재우기위해, 국민들의 안보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필요해진 거죠. 그래서 울릉도간첩단사건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게 사실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국면의 전환이 잘 안되었어요. 지금도 이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바로 이어서 인혁당, 민청학련과 같은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거죠.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 - 그러니까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의 첫 스타트와 같은 사건이군요. 그런데 47명의 사람을 무엇을 가지고 이 사건을 엮었을까요.

 

최 - 울릉도에 사셨던 분들 중에서 6·25사변 때 가족 중에 월북한 분이 있어요. 그러다 월북했던 이분이 1962년 겨울에 울릉도에 가족을 보러 온 거에요. 그게 빌미가 된 거에요. 두 번째로 전주에 사는 분들 중에서는 이성희 교수 같은 분은 동경대 박사과정 유학중에 북한에 대해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으신 거예요. 그 때는 60년대니까. 북한이 잘 살고 있는 것도 너무 충격적이고. 자기가 알고 있던 김일성에 대한 내용과 일본에서 접하는 책, 자료들과도 너무 다르고. 그래서 내가 분단시대 지식인으로서 북한에 직접 가서 실상을 비교하고 직접 보자, 그래서 자진해 다녀온 거죠. 그런데 그 후 10년이 지나 사건이 된 거죠.

 

정 - 북한도 그냥 보내 줬나요. 노동당 가입 같은 것도 아니고?

 

최 - 그렇죠. 물론 수사기관에서는 노동당 가입했다고 주장하지만, 3박4일 정도 다녀온 거예요. 60년대 중반에.

 

정 - 당시만 해도 그렇게 왕래하는 분들이 있었죠.

 

최 - 6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에서는 그렇게 자주 왔다갔다하고 그럴 때니까요. 그런데 이 사건 핵심적인 부분에 중앙정보부의 차철권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에서 수사받고 사망했을 당시 수사관인데, 이 사람이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크게 만든 거죠. 그러면서 전혀 상관이 없는 울릉도와 전라도를 연결하고, 재일교포 이좌영이라는 사람을 간첩으로 몰면서 큰 간첩단 사건으로 만든 거죠.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 만든 거예요.

 

정 - 빌미는 아무튼 울릉도 사시는 분 중에 어떤 한 분이 6·25 때 북한에 넘어갔다 1962년에 다시 왔다, 그런데 이 걸 어떻게 수사기관이 알게 되었을까요?

 

최 - 수사과정에서 때리고 맞는 과정에서 조사받던 사람이 그것 때문에 그런 거다 이렇게 얘기하고, 이걸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하고 그러면서 점점 확대된 거죠.

 

정 - 그러면 시작은 북한에 있다 62년에 온 분이 아니라는 얘기잖아요. 그러면 시작은 뭐에요?

 

최 - 처음에는 몰랐죠. 맨 처음 시작은 차철권 이라는 수사관이 재일동포 이좌영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이 사람이 한국에 세운 신한섬유라는 회사 주변 사람을 조사하면서 ‘어, 북한에 다녀온 놈이 있네’하고 알게 되면서 커지게 된 것이지요.

 

정 - 그러면서 시나리오가 더 풍부하게 된 것이군요. 그 사람은 체포되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재일동포 이좌영을 간첩으로 만들려고 그 사람이 한국에 세운 회사 주변 사람을 조사하며 풀어나가다 보니 북한에 다녀 온 사람이 있었다...

 

최 - 그 회사를 간첩의 근거지 처럼 만든 거죠. 나중에 그 회사는 수사기관에 협조한 사람에게 다 넘어갔죠. 원래 정상적으로 하면 정부의 재산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개인에게 다 넘어갔습니다. 다 확인된 사실입니다.

 

 

 

 

 

정 - 이제 우리가 이 사건을 간첩조작사건으로 명시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조작 사건이라는 판정은 어디서 내린 것입니까?

 

최 - 2006년 이 사건 피해자 중 이성희 전북대 수의학과 교수가 진실화해위원회에 고문에 의해 거짓 진술한 것이라면서 진상규명 신청을 했어요. 이 분이 고문 폭력을 당한 것이 모든 증거를 통해 볼 때 확인이 되면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고 이 결정문을 가지고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신청을 했습니다. 작년 10, 11월 달에 재심 판결이 나왔습니다. 모든 간첩죄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무죄결정이 되었고 북한에 갔다온 것은 사실이니 단순 잠입, 탈출로 공소변경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습니다.

 

정 - 그러니까. 북한에 다녀온 것은 유죄지만 간첩행위를 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법원이 인정한 것이군요. 이렇게 재심 판단까지 간 경우는 이성희 교수 한 분입니까?

 

최 - 네. 지금까지 한 분이고. 나머지 분은 재심 중에 있습니다. 이 분이 제일 먼저 하신 것이지요.

 

정 - 47명 가운데 3명이 사형당했고, 마흔 네 분 가운데 이미 돌아가신 분에 있을 텐데..

 

최 - 얼마 전 치유모임에 나오셨던 분도 한 분 돌아가시고..

 

정 - 연세가 많으시죠.

 

최 - 많으시죠. 젊으신 분이 60대입니다.

 

정 - 보통 몇 년씩 감옥에 계셨습니까

 

최 - 이성희 선생의 경우, 사형선고 받고 무기로 감형되어서 형집행정지로 나올 때까지 17년 사셨죠. 또 15년,10년, 5년씩 사신 분이 계시죠. 17년을 살고 나오면 그만큼 또 보안관찰을 받기 때문에 실지로는 나와서도 다른 활동을 하기 힘들죠.

 

정 - 울릉도 지역에서 연루된 분들은 거의 어민들이었습니까. 직업은 어떤가요.

 

최 - 어민도 계시고, 양조장 운영하신 분도 계시고, 직업은 다양합니다.

 

정 - 이 책은 생존해 계신 분들을 만나고 그 얘기를 정리한 글이고. 당시 부모가 다 구속된 자녀도 만나셨다고.

 

최 - 사형 당하신 전영관 선생, 그 부인은 불고지죄 등으로 10년형을 받으셨고요. 부부가 같이 체포된 거죠. 그분들의 딸을 만났어요. 중학교 1학년 때 그 일을 당했는데. 울릉도에 3년 정도 있다가 고등학교 때 대구로 동생 셋을 데리고 나왔어요. 학교를 보내 뒷바라지를 해야 했으니까 버선 만드는 공장에 나가 시다부터 시작해서 미싱사가 되었어요. 고생을 많이 했지요. 30대부터 만성 신부전증이 와서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하면서.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게 한 그런 사건이군요. 이 책 첫머리에 보니까 목사님은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쓰셨는데, 뭘 잘못해서 그런 말을 쓰셨어요?

 

최 - 유신 정권이 가한 폭력이지만, 넓게 보면 우리 사회가 한 일이고, 저도 우리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사회가 가한 폭력인데요,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게 무관심이라고 생각해요. 이 분들이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먹고사는 것도 고통이 많았겠지만 냉소, 소외, 무관심 이런 것이라고 봐요.

 

정 - 그냥 무관심이 아니라 상당한 부분은 간첩,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이었겠지요.

 

최 -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70,80년대에 간첩, 간첩의 아들 딸로 산다는 것이 상상할 수 있는 고통이었겠습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지요. 미안합니다.

 

정 - 정말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정말 빚을 진거지요. 청취자 최형규 님께서 ‘울릉도 간첩단 사건 정말 금시초문이네요’, 또 울릉도 사시는 분인데 ‘굉장히 큰 간첩단 사건. 제 친구도 연루가 되었지요.’ 그런 기억을 가진 분도 계시네요.

 

최 - 울릉도 분들은 기억하시겠지요.

 

정 - 이런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잘못된 과거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취지에서 이런 책을 낸 것이 아니겠어요.

 

최 -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창한 담론에 빠져 있어, 곁에 있는 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을 사건의 재구성이 아니라 그분 한분 한분의 삶을 들여다본 것으로 했거든요. 진보든 보수든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을 위해 이데올로기가 있고, 사람을 위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얘기를 하고 또 나누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 - 사람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예. 우리가 다 잊고 있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다시 일깨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 긍정의 힘으로 또 다시 일어나기 위해 -     
어느 돌멩이의 외침
유동우 지음
출판사 - 청년사
초판일 - 1984-04-15
책 소개
『어느 돌맹이의 외침』은『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과 더불어 70년대 노동현장을 고발하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80년대 대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에 실린 글은 1977년 1월부터 3월까지 3회에 걸쳐 월간「대화」에 연재되었던 글들이다. 그 다음해에 이 글들을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가 절판이 된 후 1984년에 다시 발간되었다. 최근 이 책을 다시 출판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1978년 초판 발간이후 절판과 재발간 그리고 다시 절판과 재발간을 거듭한 셈이다.
“이 책은 빈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온갖 고난을 뚫고 주체적 인간으로 서기까지의 과정을 감동깊게 서술한 삶과 투쟁의 기록이다. ..70년대 노동현실과 노동운동에 관한 값진 역사적 기록이며 70년대 노동자문학의 가장 빼어난 고전적 작품인...유동우의 이 체험수기는 그 개인의 것으로서의 특수성보다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관통하는 보편성으로 인하여 더욱 값진 기록이 된다. 그렇다, 이 책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나, 나에게 있어서나, 그 누구에게 있어서나 하나의 작은 씨알이요 꽃눈이다. 계속 싹을 틔우고, 무성하게 자라나 온 산하를 푸르게 덮어야 할 씨알, 온 산하를 현란하게 수놓아야 할 꽃눈이다.”
-발문 중에서
저자 유동우(본명 유해우)는 1949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안정 남부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8년 상경,천일섬유,유림통상,방성산업,삼원섬유주식회사 등에서 공원으로 일하였다.

유해우선생님은 필명 ‘유동우’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노동운동에서 그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환경개선과 노동법준수 등을 외치며 전국의 공장지대를 다니며 노동운동을 한 실천가였다. 6,70년대를 배경으로 도시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겪는 노동의 삶과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을 담아낸 그의 자전수기<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본격 노동자 문학의 출발을 알리며 당시 운동권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하는 노동운동가로서 유해우 선생님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외침’으로 다가올까 궁금했다.  
지난 11월 21일 정오 인권의학연구소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는 자그마한 키에 약간 구부정한 허리,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카락, 그리고 안경너머 차갑고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중년을 넘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젊은 시절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벼운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갔다.

 

선생께서 어렸을 때 자라온 환경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든지,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그야말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집성반촌의 타성받이로 살아오면서, 명절 때면 동네 어른들께 세배도 다닐 수 없을 정도였구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죠. 산에서 땔감 마련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게 제 일이었어요. 그래서 차라리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서울로 올라왔지요......그러나 70년대 노동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더 알아야한다고 믿었죠.”

청년기부터 노동운동에 헌신하셨는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시절 그 엄혹하던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노동운동에 참여하셨는지요. 기억나는 활동은?

“출퇴근시간도 없이 일하고, 밤샘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성과급이라는 것도 없는 그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기계부품 취급당하는 노동현실이 암담해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어요.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도 해결이 안되었는데, 조화순 목사의 도시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어 노동법을 공부했습니다. 동료 노동자인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약자에 대한 연민이 있었는데, 현실타파를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운동을 해서 개선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체험을 책으로 내고 난 다음 전국의 노동현장을 다니며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연을 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소위 ‘학림(전국민주 학생. 노동자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치안본부 대공분실(일명 남영동)에서 고문피해를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시간 동안 선생님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선생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는지요.

(그는 무척 떨리고 어눌하고 쉬엄쉬엄 먼산 바라보며 말했다. 그 때의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고문을 재경험 하는 듯 했다.) “사실 고문이야기 여태껏 해본 적이 없어요, 최근에 와서야 김근태 의장이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갔을 때 그 자리에서 나도 여기서 고문당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죠”

 (고문은 피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그 주변의 친지. 친구의 관계까지도 앗아가 버린다. 그래서 고문에 의한 조직사건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선뜻 나서서 자신의 고문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해우 선생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참고로, 1981년 8월,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노동자와 학생세력이 연대하여 현 정부(당시 5공정권)를 무너뜨린 뒤 사회주의를 건설’하려했다는 혐의로 노동자, 학생 24명을 구속했다며 소위 학림사건을 발표하였다. 선생은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달간 경찰병원에 3차례 실려가야할 만큼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또 집단구타와 물고문 등으로 인해 갈비뼈 3대가 금이 가고, 앞니 2개와 어금니 2개가 심하게 흔들리고, 밥을 먹지 못하는 등 상태가 심각해서 서대문구치소로 넘어가서도 내내 병사에 수감되어 있었다. 구속자 총 24명(여성 3명 포함)중 유해우 선생만 유일하게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도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악화 때문이었다.

 

 

 

 

 

 

 “ 출소이후 가난한 노동자의 형편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화 되어갔어요. 흔들리던 이빨 4개는 이내 빠져버렸고, 갈비뼈에 금이 간 것도 석방 뒤 X-ray를 찍어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극도의 공포감과 악몽에 시달렸고, 불면증이 심해졌어요. 90년도에는 자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건으로 수사관이 집으로 찾아오자, 아파트 4층에서 뒤쪽베란다를 타고 도망치다 떨어져 발가락 3개가 골절상을 입기도 했어요. 자칫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무모한 탈출이었어요.”

“ 방에 혼자 있으면 누가 꼭 잡으러 오는 것 같아 수시로 집을 나갔고, 몇 달이고 노숙자 생활과 구걸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아내와 딸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했어요.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사람들과 만나기가 꺼려지더군요. 이렇게 해서 잊힌 사람이 되었기에 그 고통의 정도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학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사건인데,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보상 신청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신청을 하게 되셨는지, 진행하시면서 생각하고 느끼신 점과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운동을 한 게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의식이 팽배했었고, 우리 사건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엮여 있었는데, 학생출신들은 나름 다 살기가 그렇게 빠듯하지 않았죠. 노동자출신들은 생활현실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고, 가장이고 혼자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해서. 그러나 국민의 정부시절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신청은 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주장했습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빨갱이로 낙인찍혀 남편에게, 시부모에게,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 이중고를 겪고 있었기에 명예회복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유해우 선생은 지금 이렇게 담담하게 지난 일을 반추하면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과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1년 전, 한 지인의 권유로 정신과적 치료와 인권의학연구소의 트라우마 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유를 진작에 할 수 있었더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치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헤어진 아내와 딸에 대한 미안함과 속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또한 그 덕분이다. 아직도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수시로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다스리지 못해 애를 먹는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희망을 갖는다고 말한다.

 

 유동우 선생은 지난 11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보상․치유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에 토론자로 나와 고문피해 경험을 말했다.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당시의 고문피해사실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가 용기를 낸 것은 고문피해자들의 삶, 특히 고문당한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약자를 위해, 소외받는 동료와 이웃을 위해 주저없이 자신을 던지는 선생의 모습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에 향해 날아가는 분노의 ‘돌멩이’로 남아 있다.  

'학림사건' 피해자들 31년 만에 무죄

1980년대 대표적인 공안 사건인 '학림사건' 피해자들이 31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돼 7년 4개월간 복역한 이태복(62)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24명에 대한 재심사건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의자신문조서가 임의성 없는 자백에 해당해 증거능력을 부정하고, 나머지 증거들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계엄법 위반에 대해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해 신군부가 행한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로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해당한다"며 "이를 저지 또는 반대한 것은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등은 1981년 6월 민주운동과 저임금ㆍ장시간 노동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기소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학림(學林)사건은 전민학련 첫 모임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가진 데 착안해 '숲(林)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며 당시 경찰이 붙여준 명칭이다.
2012.6.15.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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