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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밥풀이가만난사람

[고문생존자 인터뷰]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지만"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지만"

이성희 선생님 인터뷰

(조작간첩사건인 울릉도사건으로 17년 복역)

 

 

1974년 3월, 박정희 정권은 아무런 죄가 없는 40여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간첩 누명을 씌웠다. 이성희 선생님도 그 중 하나였다. 선생님은 원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7년을 복역해야 했다. 그 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이니, 당사자들을 어떠하겠는가. 너무나도 끔찍했던 일이었기에 다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어쩌면 시간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이성희 선생님 역시 당시의 시간을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 사건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알렸고, 재심을 청구했다. 이성희 선생님을 비롯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누명을 벗을 기획을 갔게 되었다. 40년 만에

 

"내가 일본 유학 당시 재일교포 이좌영씨는 중학교 3년 후배로 일본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내가 유학 4년 중 3년 동안 이좌영씨로부터 생활비, 학비 등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좌영씨가 간첩으로 의심받아 나를 비롯하여 이좌영씨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좌영씨의 지령 하에 행동한 것으로 간주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전원 간첩으로 조작 입건 재판에 회부한 것입니다."

 

중앙정보부 전주 분실에서 수사관들이 손으로 따귀를 때리고 머리를 때리면서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부터 1m 정도의 몽둥이로 사정없이 구타하더니 권총을 보여주면서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학생들 눈치 채지 못하게 풀어준다, 분명히 뭔가 더 있으니 빨리 진술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하였고 잠을 못 자게 계속 찌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옆방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와 집사람이 와서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중략)

 

남산분실로 이동해서 조사 받을 때 수사관들이 '동생 옷 벗게 해야 하는데 아직 결정이 안 되었으니 협조하라'며 회유를 하다가 얼마 뒤 건장한 청년 3~4명이 들어와 장작을 바닥에 깔더니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한 뒤, 야전 침대에서 각목을 빼서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이 '난수표, 무전기를 내놓아라' 하면서 1시간 정도 때려서 정신이 반쯤 나갔으며 온몸은 피와 내복이 엉겨 붙어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는 조서를 작성하였다. 구타를 당하고 조서를 작성하기를 반복했다.

 

(중략)

 

수사관이 서울구치소로 찾아와 보안과정 입회하에 조사를 하는데 보안과정 소파에 앉히더니 제자 중 진 아무개를 아느냐고 물어봐서 사진이라도 보여주면 기억할 수 있겠다고 하자, 중정 수사관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이런 놈은 죽여버려야 한다.'며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발길질을 해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문 중-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넣기 위해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성희 선생님에겐 간첩으로 의심되는 이좌영씨와 친분이 두텁고, 북한에 다녀온 사실이 있으며, 당시 대구 2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로 재직 중이던 동생 이삼희 준장과 하루 밤을 함께 지내며 국가의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부인했지만 돌아온 건 발길질과 매질이었다. 결국 그 어느 하나 진실이 아니었던 조소를 강제로 받아써야만 했다. 재판에서 이성희 선생님도, 그의 동생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재판 결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 이렇게 해서 만 17년의 징역을 살게 됐다.

 

"그렇게 나의 인생 49에서 66세까지 형무소에서 보냈습니다." 

 

17년의 수감생활이었다. 계절이 열일곱 번 바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끔찍하고 긴 시간 동안 이성희 선생님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었다.

 

"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의무과에서 간병부로 복역했습니다. 간병부로 일하는 동안 출소할 때까지 불쌍한 사람들을 정말로 성심껏 돌보았습니다. 불쌍한 재소자들이 나 때문에 목숨을 유지한 사람도 한두명이 아닙니다. 징역 사는 동안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재미로 모든 고통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수감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사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돌보고 싶은 것은 가족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으로 인해 비참하고, 두렵고,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언젠가는 단 하루라도 위로하고 봉사하고 싶다는 소망을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다. 출소 후에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계속되는 보혼 감찰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이렇게라도 다시 가족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냈다.

 

"출소 후의 시간은 다만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말도 꺼내기 싫은 큰 아주 큰 슬픔과 아픔이 있지만 그냥 덮겠습니다. 우리 부부의 불문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어 감정을 헤집고 싶지 않았던 선생님의 대답이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냥 덮고 싶다'던 짧은 대답으로 짐작한다. 회상만으로도 전신이 아파오는 고통이 아닐까 하고.

 

 

선생님은 자신의 유년 시절, 청년 시절은 '무난'했었다고 기억한다. 어릴 적 신식교육을 받은 아버지와 동네에서 자선가로 명망 높았던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어머니는 걸인들에게 밥과 반찬을 성심껏 차려서 대접하였고, 겨울철에 동네 사람들에게 거절하지 않고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때문에 6.25 전쟁이 나고 동네마다 부자들은 대부분 인민위원회에 불려가서 곤혹을 치루는 중에도, 선생님의 집은 그 소란을 비껴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쌓아둔 인망 덕분이었다.

 

 

청년기에도 큰 사건은 없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청년기에 대해 '박정희 시절 학업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현재 선생님의 박정희에 대한 입장은 무척이나 뚜렷하다.

 

"박정희는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항상 믿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군에서 남로당 조직책으로 있으면서 사건이 불거지자 동료들의 명단(남로당 조직원)을 넘겨주고, 자기 혼자 사형을 면죄 받은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2012년 11월 22일(목) 오전 10시, 이성희 선생님이 38년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판사 김동오)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 이성희 선생님 재심에서 반국가단체 특수잠입하고 군사기밀을 탐지한 혐의(국가보안법상 간첩 및 특수잠입·탈출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밀입 북한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범죄사실을 자백했기 때문에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나머지 증거들 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반국가단체 지령을 받았다거나 재일교포 이좌영이 반국가단체 구성원임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동생으로부터 군사기밀을 탐지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결문에 명시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북한에 잠입·탈출했다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온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다만 북한 실정과 사회적 호기심 때문에 밀입북한 것으로 보이는 점, 잠입 기간이 짧고 국익에 해하는 정도는 아닌 점 등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이성희 선생님은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전북대학교 수의학과 교수이자 교무처장을 지내던 중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이를 억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울릉도에서 북한을 왕래하며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47명을 검거하였다며 고문에 의해 조작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