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인권의학연구소 최창남 이사는 작년 12월 1일 울릉도 간첩단 조작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울릉도 1974" 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연구소의 집단상담 치유과정에 참여하시면서 목격하신 은폐된 역사의 아픈 상처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쓰셨다고 합니다. 아래는 최창남 이사가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하여 나눈 인터뷰 내용입니다.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관용(이하 정). - "울릉도 1974"란 책으로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진면목을 파헤 친 최창남 목사를 스튜디오에 모십니다. 지금 목사님이지만 목회는 안 하시죠. 그런데 다양한 일들을 해오셨어요. 옛날에 민중가요의 고전인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이런 노래를 만드셨지요. 만드실 때가 언제였지요?
최창남(이하 최). - 1985~6년입니다. 제가 작곡을 좋아했었어요.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는 제가 전도사로 산동네에서 목회할 때 만들었고, <노동의 새벽>은 제가 전도사 생활을 그만두고 현장으로 이전해 노동운동할 때 만들었습니다.
정 - 빈민운동 겸 목회하시다가, 현장에 가서 노동운동 하시다가, 또 그사이에 노래도 만드시고. 그 후 다시 교회로 돌아오셨지요?
최 - 예. 1992년에 돌아왔습니다. 다시 그만둔 것은 2006년이구요.
정 - 왜 그만두셨어요.
최 - 교회를 계속 하다 보니 내가 하고자 하는 것과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부딪힐 때가 많아요. 그래서 좀 자유롭게 목회를 해야 되겠다, 저는 이것도 목회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을 살리고 지키고 하는 말씀의 정신들을 지켜가는 활동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정 - 지금은 백두대간 하늘길 이사장이신데요.
최 - 제가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했었는데요. 전에는 산에 대해 잘 몰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랄까, 하나님의 생명살림이랄까, 상생과 공동체의 원리들이 자연 속에, 숲속에, 산속에 다 있더라구요. 그냥 산에 오르내리는 등산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보존하고 숲을 살리고, 산행을 할 때도 가치지향적인 산행을 하고 조화를 이루는 산행을 하자는 가치운동의 의미에서 뜻있는 분들과 단체를 만든 것입니다.
정 - 워낙 다채로운 활동해오셨는데요. 울릉도 간첩단사건과는 또 어떻게 연결되었고, 이 책을 쓰시게 되었는지요.
최 - 재작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울릉도 사건 피해자 트라우마 치유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어요. 제가 이 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는데 저의 도움이 필요했던가 봐요. 울릉도 피해자 분들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서도 보안관찰을 받으면서 사람들을 못 만나고 괴로우니까 신앙에 많이 귀의하시게 되셨어요. 사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닌데 어떤 분은 ‘나는 신앙 안에서 다 해결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그런 신앙적인 부분은 의사선생님들이 말씀 나누기가 힘드니까 목사인 저에게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나누고 듣고 하다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 - 심리치유과정에서 처음 만나게 된 거군요. 자. 울릉도 간첩단사건, 모르시는 분이 많이 있으니까. 어떤 사건입니까. 개요부터 설명해 주시죠.
최 - 1974년 3월 15일 발표된 사건인데요. 한마디로 유신정권의 통치 필요성에 따라 조작된 간첩단 사건이죠. 그해 2월부터 울릉도를 비롯한 지역 여기저기서 불법 체포되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까지 불법 구금되고 고문을 통해 울릉도 간첩단사건으로 발표되었어요. 울릉도와는 아무런 관련없는 전라도 사람들까지 같이 묶어 모두 47명이, 그 중에 3명은 사형당하셨죠. 인혁당 사법살인이라고 하는, 선고받고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한 일이 있었는데, 이 분들과 같은 날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그런데 인혁당 사건만 알려졌지요.
정 - 47명 가운데 울릉도 사셨던 분은 몇 분이나 되나요?
최 - 20여명, 절반 정도입니다.
정 - 그런데 뭔가 있으니까 그런 사건으로 엮인 것 아닙니까?
최 - 이 사건의 배경은 먼저, 시대적으로 70년대 초반 데탕트, 미소전략무기 제한협정도 있었고, 미중 화해 무드가 생기고 긴장이 완화되면서 국내에서도 유신정권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죠. 그러면서 이들에 대한 탄압 필요성이 커졌지요. 긴급조치도 나오게 되고. 장준하 선생의 개헌청원 백만인운동, 또 학생들의 반유신운동을 잠재우기위해, 국민들의 안보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필요해진 거죠. 그래서 울릉도간첩단사건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게 사실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국면의 전환이 잘 안되었어요. 지금도 이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바로 이어서 인혁당, 민청학련과 같은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거죠.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 - 그러니까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의 첫 스타트와 같은 사건이군요. 그런데 47명의 사람을 무엇을 가지고 이 사건을 엮었을까요.
최 - 울릉도에 사셨던 분들 중에서 6·25사변 때 가족 중에 월북한 분이 있어요. 그러다 월북했던 이분이 1962년 겨울에 울릉도에 가족을 보러 온 거에요. 그게 빌미가 된 거에요. 두 번째로 전주에 사는 분들 중에서는 이성희 교수 같은 분은 동경대 박사과정 유학중에 북한에 대해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으신 거예요. 그 때는 60년대니까. 북한이 잘 살고 있는 것도 너무 충격적이고. 자기가 알고 있던 김일성에 대한 내용과 일본에서 접하는 책, 자료들과도 너무 다르고. 그래서 내가 분단시대 지식인으로서 북한에 직접 가서 실상을 비교하고 직접 보자, 그래서 자진해 다녀온 거죠. 그런데 그 후 10년이 지나 사건이 된 거죠.
정 - 북한도 그냥 보내 줬나요. 노동당 가입 같은 것도 아니고?
최 - 그렇죠. 물론 수사기관에서는 노동당 가입했다고 주장하지만, 3박4일 정도 다녀온 거예요. 60년대 중반에.
정 - 당시만 해도 그렇게 왕래하는 분들이 있었죠.
최 - 6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에서는 그렇게 자주 왔다갔다하고 그럴 때니까요. 그런데 이 사건 핵심적인 부분에 중앙정보부의 차철권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에서 수사받고 사망했을 당시 수사관인데, 이 사람이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크게 만든 거죠. 그러면서 전혀 상관이 없는 울릉도와 전라도를 연결하고, 재일교포 이좌영이라는 사람을 간첩으로 몰면서 큰 간첩단 사건으로 만든 거죠.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 만든 거예요.
정 - 빌미는 아무튼 울릉도 사시는 분 중에 어떤 한 분이 6·25 때 북한에 넘어갔다 1962년에 다시 왔다, 그런데 이 걸 어떻게 수사기관이 알게 되었을까요?
최 - 수사과정에서 때리고 맞는 과정에서 조사받던 사람이 그것 때문에 그런 거다 이렇게 얘기하고, 이걸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하고 그러면서 점점 확대된 거죠.
정 - 그러면 시작은 북한에 있다 62년에 온 분이 아니라는 얘기잖아요. 그러면 시작은 뭐에요?
최 - 처음에는 몰랐죠. 맨 처음 시작은 차철권 이라는 수사관이 재일동포 이좌영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이 사람이 한국에 세운 신한섬유라는 회사 주변 사람을 조사하면서 ‘어, 북한에 다녀온 놈이 있네’하고 알게 되면서 커지게 된 것이지요.
정 - 그러면서 시나리오가 더 풍부하게 된 것이군요. 그 사람은 체포되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재일동포 이좌영을 간첩으로 만들려고 그 사람이 한국에 세운 회사 주변 사람을 조사하며 풀어나가다 보니 북한에 다녀 온 사람이 있었다...
최 - 그 회사를 간첩의 근거지 처럼 만든 거죠. 나중에 그 회사는 수사기관에 협조한 사람에게 다 넘어갔죠. 원래 정상적으로 하면 정부의 재산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개인에게 다 넘어갔습니다. 다 확인된 사실입니다.
정 - 이제 우리가 이 사건을 간첩조작사건으로 명시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조작 사건이라는 판정은 어디서 내린 것입니까?
최 - 2006년 이 사건 피해자 중 이성희 전북대 수의학과 교수가 진실화해위원회에 고문에 의해 거짓 진술한 것이라면서 진상규명 신청을 했어요. 이 분이 고문 폭력을 당한 것이 모든 증거를 통해 볼 때 확인이 되면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고 이 결정문을 가지고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신청을 했습니다. 작년 10, 11월 달에 재심 판결이 나왔습니다. 모든 간첩죄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무죄결정이 되었고 북한에 갔다온 것은 사실이니 단순 잠입, 탈출로 공소변경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습니다.
정 - 그러니까. 북한에 다녀온 것은 유죄지만 간첩행위를 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법원이 인정한 것이군요. 이렇게 재심 판단까지 간 경우는 이성희 교수 한 분입니까?
최 - 네. 지금까지 한 분이고. 나머지 분은 재심 중에 있습니다. 이 분이 제일 먼저 하신 것이지요.
정 - 47명 가운데 3명이 사형당했고, 마흔 네 분 가운데 이미 돌아가신 분에 있을 텐데..
최 - 얼마 전 치유모임에 나오셨던 분도 한 분 돌아가시고..
정 - 연세가 많으시죠.
최 - 많으시죠. 젊으신 분이 60대입니다.
정 - 보통 몇 년씩 감옥에 계셨습니까
최 - 이성희 선생의 경우, 사형선고 받고 무기로 감형되어서 형집행정지로 나올 때까지 17년 사셨죠. 또 15년,10년, 5년씩 사신 분이 계시죠. 17년을 살고 나오면 그만큼 또 보안관찰을 받기 때문에 실지로는 나와서도 다른 활동을 하기 힘들죠.
정 - 울릉도 지역에서 연루된 분들은 거의 어민들이었습니까. 직업은 어떤가요.
최 - 어민도 계시고, 양조장 운영하신 분도 계시고, 직업은 다양합니다.
정 - 이 책은 생존해 계신 분들을 만나고 그 얘기를 정리한 글이고. 당시 부모가 다 구속된 자녀도 만나셨다고.
최 - 사형 당하신 전영관 선생, 그 부인은 불고지죄 등으로 10년형을 받으셨고요. 부부가 같이 체포된 거죠. 그분들의 딸을 만났어요. 중학교 1학년 때 그 일을 당했는데. 울릉도에 3년 정도 있다가 고등학교 때 대구로 동생 셋을 데리고 나왔어요. 학교를 보내 뒷바라지를 해야 했으니까 버선 만드는 공장에 나가 시다부터 시작해서 미싱사가 되었어요. 고생을 많이 했지요. 30대부터 만성 신부전증이 와서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하면서.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정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게 한 그런 사건이군요. 이 책 첫머리에 보니까 목사님은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쓰셨는데, 뭘 잘못해서 그런 말을 쓰셨어요?
최 - 유신 정권이 가한 폭력이지만, 넓게 보면 우리 사회가 한 일이고, 저도 우리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사회가 가한 폭력인데요,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게 무관심이라고 생각해요. 이 분들이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먹고사는 것도 고통이 많았겠지만 냉소, 소외, 무관심 이런 것이라고 봐요.
정 - 그냥 무관심이 아니라 상당한 부분은 간첩,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이었겠지요.
최 -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70,80년대에 간첩, 간첩의 아들 딸로 산다는 것이 상상할 수 있는 고통이었겠습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지요. 미안합니다.
정 - 정말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정말 빚을 진거지요. 청취자 최형규 님께서 ‘울릉도 간첩단 사건 정말 금시초문이네요’, 또 울릉도 사시는 분인데 ‘굉장히 큰 간첩단 사건. 제 친구도 연루가 되었지요.’ 그런 기억을 가진 분도 계시네요.
최 - 울릉도 분들은 기억하시겠지요.
정 - 이런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잘못된 과거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취지에서 이런 책을 낸 것이 아니겠어요.
최 -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창한 담론에 빠져 있어, 곁에 있는 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을 사건의 재구성이 아니라 그분 한분 한분의 삶을 들여다본 것으로 했거든요. 진보든 보수든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을 위해 이데올로기가 있고, 사람을 위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얘기를 하고 또 나누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 - 사람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예. 우리가 다 잊고 있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다시 일깨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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