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밥풀이가만난사람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인권클리닉 인터뷰]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1972년,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어떠한 단체행동도 허락되지 않던 살벌한 상황에서 원풍모방 노조는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1970년대 민주노조 중에서도 ‘전설’로 불릴 만큼 활동적인 사회 참여와 노동자 투쟁을 전개했던 자타공인 최강의 노조였다.

 

 

“내가 18살 때, 그러니까 72년에 한국모방에 들어가서 회사가 원풍모방으로 이름이 바뀌고 원풍 노조가 해체되던 82년까지 10년 있었으니까, 그 역사를 모두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어요.”

 

 

박순애 선생님은 원풍모방 노조가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던 당시 부지부장을 지냈다. 최강의 노조였지만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이름하에 단행된 정권의 칼날은 너무 거셌다. 회사에 조합원들을 가두고 5일간 수도와 전기를 끊어버린 뒤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냈다. 어두컴컴한 지하방에 데려가 윽박지르며 협박하는데 도저히 사표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원풍모방 노조는 해체되었다. 
하지만 원풍에서의 10년은 박순애 선생님에게 있어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위해 무엇이든 함께 주장하고 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장이 불러요. 조장은 (회사 간부 쪽이 아닌) 노동자 쪽 사람이었는데, 본인 이 움직이기엔 너무 눈에 띄니까 입사한지 한 달 밖에 안 된 나를 불러서,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내일 새벽에 기계 스위치 몇 시에 끄는지 물어보고 오래요. 아마 그게 특근 거부 투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입사 1개월 차였던 박순애 선생님이 겪었던 것은 한국 모방 노동자들이 일당 320원의 저임금, 상여금 미지급, 10분 지각에 특근 1시간 공제, 3년 미만 근무시 퇴직금에서 중식대 공제 등 회사 측의 온갖 횡포에 맞서기 위해 벌인 투쟁이었다. 당시 지동진 지부장을 선두로 투쟁을 끌어나갔지만 회사는 노조를 전면적으로 탄압했다.

 

 

“새벽 6시가 되니까 서로들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 기계 스위치를 내렸어요. 그랬더니 전부 내려요. 그리고 정사과로 모이라고 해서 그리로 달려갔더니 이미 현장 간부들이 나와 있더라고요. 우리보고 기숙사에 가서 대기하래요.”

 

 

하루를 꼬박 기숙사에서 대기 하고 있는데 열린 창문으로 종이가 돌에 묶여 날아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정문까지 빠져나오라는 지도부의 쪽지였다. 당시 기숙사에 많은 노동자들이 합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숙사의 노동자들만 동원해도 충분히 큰 움직임을 만들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은 정문을 빠져나가 명동성당에 갔다. 그렇게 하루를 또 기다렸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하라는 말에 이틀 밤을 꼬박 새고 출근을 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노조 지도부가 노량진 경찰서로 잡혀갔다는 말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한국 모방이 부도가 났지요.”

 

 

부실 경영으로 한국 모방은 1973년 부도를 낸다. 이에 노조는 회사 측과 노사연합 공동체를 구성하여 경영에 참여하는 등 회사 정상화에 앞장섰다. 1974년 회사는 원풍산업이 인수하였다. 그러나 신임 경영진은 취임 시 노조와 약속했던 사항들을 이행하지 않았고 이에 불만스러워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노조를 사사건건 탄압해댔다.

 

 

“하여간 시도 때도 없이 잡아가는 거예요, 지도부랑 지부장을. 한번은 기숙사 사감으로 공수부대 출신이 왔어요. 대통령이 보냈대요, 참, 우습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대통령이 뭐 이런 회사에까지 신경을 쓰시느냐고 그랬죠. 그랬더니 대통령 모독죄라고 또 구속시키고요.”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무고한 방용석 지부장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함’ 진정서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하지만 조합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로 대책회의를 열고 남부경찰서에 찾아갔다. 경찰서에 찾아가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항의했다. 일이 끝나면 회사 식당에 모여 앉아 민중가요를 큰 소리로 계속 불렀다. 노동 3권 중 단체 교섭권과 단결권은 있었으나 행동권이 없던 시기였다. 파업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일부러 기계에 잔 고장을 냈다. 회사가 물증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만 생산력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매번 회사를 이겼다. 노동자의 힘이, 그 힘의 연대가 만들어낸 승리였다.

 

 

“우리 노조가 정말 강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 참 좋았지요. 2교대 근무에서 3교대 근무로 바꿨어요. 그 당시에 3교대 근무하는 건 우리 회사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근로 조건을 개선시켜나갔어요. 기숙사 시설도 우리만큼 좋은 곳이 없었어요. 임금도 아주 높았고요.”

 

 

무엇보다 2교대 근무와 3교대 근무는 실로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2교대 근무 때는 하지 못했던 활동들을 아름아름 꾸려나갔다. 영등포 산업 선교회와 대학생들과도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며 노조 내 소모임을 기반으로 많은 활동들을 전개해 나갔다.

 

 

“우리가 2교대였으면 그렇게까지는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3교대이니까 시간이 충분하잖아요. 그래서 정말 많은 활동을 했어요. 유인물도 나누어주고요. 다른 노조들 지원도 굉장히 많이 다녔어요. YH 신민당사 농성 때 가서 설렁탕도 사들고 가고, 그 분들 나중에 감옥 갔을 때 우리가 조 짜서 매일 매일 면회를 갔어요. 동지들이 투쟁하다가 감옥에 갔는데 외로우면 안 된다고요.”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사회 참여를 하기도 했다.

 

 

“80년에 광주 민주화 항쟁이 나고 나서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주기 위해서 모금을 한 거예요. 450만원을 모았어요. 그 돈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해줬죠.”

 

 

비상계엄 전국 확대실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안기부와 합동수사본부를 동원하여 회사의 협조 하에 본격적인 노조 해체 작업에 착수했다. 조합원들에게 아버지 역할이 되어주던 방용석 지부장은 수배 조치가 내려져 회사를 떠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1980년 12월, 합동수사본부는 노조 지도부 50여명을 연행하여 강제 사표를 쓰게 했다.

 

 

“일단 가면 옷을 전부 벗기고 군복 같은 걸 입혀요. 거기서 수사관들이 그래요. 광주를 돕는다는 건 간첩을 돕는다는 거라고요. 그러면서 산업 선교회 다니냐, 친구는 누가 있냐 꼬치꼬치 캐묻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항의를 하죠. 내가 사표를 써도 회사에서 써야지 왜 여기서 쓰냐. 그러면 윽박지르고 협박을 해요. 우리를 자기네들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고 막 그래요. 거기서 남자들은 순화 교육 보내기도 하고 그랬지요.”

 

 

12월 8일에 시작되어 정확히 크리스마스 이브날까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노조 간부들이 서대문에 있는 범진사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노조 구성을 보면, 지부장이 있고 그 밑에 부지부장이 있고 그 밑으로 각 부의 부장들과 차장들이 있어요. 그 상황에서 부장급 위로는 다 연행해가서 사표 쓰게 만든 거예요. 나는 당시에 교육선전부 차장이어서 현장 복귀가 가능했어요. 그렇게 복귀해서 부지부장을 맡게 된 거지요.

 

 

탄압은 있었지만 조합원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지도부가 뭉텅 잘려버린 상황에서 노조 활동을 빠르게 정상화 시켜나갔다. 회사는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부산의 원풍타이어노조와 통합시키려고도 했다.

 

 

“두 곳 모두 이름이 원풍인데 노조가 두 개이면 안 된대요. 단일 노조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원풍모방노조랑 원풍타이어노조랑 합쳐야 한대요. 거기는 어용노조였으니까 그쪽에 우리가 합쳐지기를 원했나봐. 그래서 표결로 부치자고 했더니 우리 쪽 위원들을 회사가 자꾸 포섭해가요.”

 

 

하지만 역시나 노동자들의 통쾌한 승리로 끝났다. 원풍모방은 원풍타이어와 공동위원장을 세움으로서 회사의 탄압을 좌절시켰다.

 

 

1982년 9월 전면적인 노조 와해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른바 9.27 사태이다. 이날 회사 남성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노조 사무실에 무단 진입하여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지부장 정선순을 감금하여 폭행과 협박을 가해 사표를 쓰도록 강요했다. 이 소식에 6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곧바로 농성 투쟁에 돌입하였는데, 회사는 건물을 봉쇄하고 수돗물을 끊었다. 박순애 선생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손이 찢어졌어요. 농성 시작하던 날. 손에서 피가 철철 나니까 일단 병원으로 실려 갔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농성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함께 투쟁했어요.”

 

 

사흘 후, 전경들과 회사가 고용한 용역이 농성 현장에 들이 닥쳐 폭행을 가해 조합원들을 해산시켰다. 이 비인권적이고 폭력적인 진압으로 200명 이상이 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한다. 500명 넘는 조합원들은 강제 해고를 당했다. 박순애 선생님을 포함한 55명이 구류 선고를 받았다. 1983년 1월, 마지막 민주 노조라고 불리던 원풍모방 노조는 공식적으로 해산하였다.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9.27 사태 당시의 사진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1년 선고 받고 10개월 지내다 광복절 특사로 나왔어요. 참 어이가 없는 게, 우리 다 석방시켜주는데 시간 차이를 두고 따로 따로 내보내는 거예요. 우리끼리 못 만나게 하려고. 아예 나오자마자 탈 수 있게 차를 대기시켜 놨다가 고향 집까지 데려다 주더라고요. 딴에는 보호 차원에서 그런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딱 봐도 감시하는 건지 알겠잖아요. 고향집에 갔더니 관할 경찰소에서 또 슬슬 감시하러 오고. 다시 일하려고 일자리 알아보고 다니는데 취직도 안 되고.”

 

 

3교대 근무라 하더라도 8시간을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내리 꼬박 일해야 하는 힘든 환경이었고, ‘민주’라는 말이 반역죄 마냥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노동조합의 민주화 투쟁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게다가 감옥에서의 시간과 그 이후 겪었을 경제난까지. 이 시절을 견뎌내게 해준 원동력이 궁금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이 있었어요. 참, 너무 좋은 사람들이 거기 있었어요. 하나같이 너무 좋은.”

 

 

선생님은 이 모든 활동이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작은 것 하나 나누는 동지들이 있었고 추운 날 손 마주 잡을 동지들이 있었기에 힘든 줄도 모르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겐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이만큼 살게 해줬다는 말에 아직도 코웃음만 나온다. 박순애 선생님은 그 시절의 ‘나’와 ‘내 동지들’이 산업 역군이었음이 아직까지도 자랑스럽다고 한다.
다만, 앞으로의 노동운동은 당사자들이 ‘다치지 않게’ 되도록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해 나아갔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내 삶의 권리를 찾아서 하는 투쟁이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이 다치면 회복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런 이유에서 쌍용차 투쟁을 보며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지요. 아직도 투쟁장들이 많잖아요?”

 

 

선생님은 노동권이 지켜져야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아직도 우리 사회가 정말 건강하지는 못한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 변해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들이 쌓여서 많은 사람들이 제 권리를 찾을 수 있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선생님은 다시 강조한다. 그것은 분명 함께 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정리 : 김규연 (인권의학연구소 인턴)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20호에 실린 글입니다.

==============================================================

 

[인권클리닉 인터뷰]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