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생존자 인터뷰] “진실이 나를 살게 했어요”
(조작간첩사건인 울릉도사건으로 17년 복역, 현재 재심을 기다리며 위암투병 중인 최규식 선생님)
1974년 박정희 유신정권은 독재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1월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하여 민주인사들을 영장 없이 체포한 데에 이어 4월 긴급조치 4호 때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250여명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한다. 긴급조치 4호 발령 무렵 재일 한국인이 연루된 간첩사건이 발표된다. 이 사건이 바로 ‘울릉도 사건’이다. 재일 한국인 이좌영씨(전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구원하는 가족․교포회 회장)의 인맥을 중심으로 작은 연결고리라도 있던 모든 사람이 체포되어 간첩으로 몰렸다. 총 47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북에서 지령과 공작금을 받아 공작활동을 행하고 정부전복을 획책했다고 발표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일본 유학 경력이 있었던 최규식 선생님은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 후 17년을 복역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조총련과의 접촉으로 북한에 왕래하였으며 재일공작조직원에게 간첩 교육을 받은 혐의였다.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협박과 폭언과 고문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고문 피해 당사자인 선생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두웠던 시절 장막 뒤에 감쳐져있던 진실을 꼭 듣고 싶었다. 그래야만 역사가 진정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보건의료인이 인간의 권리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옆 동네의 우익 성향 청년단이 와서 우리집을 테러했어요. 새벽에 와서 전부 부숴버렸어요. 그게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숟가락 하나가 성한 것이 없었어요. 무지막지한 테러를 한 거예요. 그렇게 당하고 보니까 집이 험해지고, 낮에 들어가도 동굴처럼 캄캄하고. 이런 것들이 내 의식을 굉장히 압박을 했달까, 현실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달까, 아니면 이런 것들 때문에 현실을 알려고 노력했달까.”
최규식 선생님은 아버지가 민족 운동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때문에 아버지가 도망 다니면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아침마다 형제들을 불러놓고 일본어로 된 동양역사책을 강의해주셨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데, 특히 5·4 운동 무렵의 중국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생계가 막막하니까 온 가족이 논에 나가서 일을 했는데, 그 와중에도 아버지가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항상 무산자 해방을 말씀하셨고 약소민족의 해방을 참 많이 말씀하셨지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는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공 사상에 대해 자연스레 의문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는 이북 사람들이 다 머리에 뿔났고, 못 산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이북 사람을 봤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거지. 이상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진실을 알고 싶어지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나 궁금해지는 거고.”
일본에서 수의학을 공부할 때도, 북한에서는 관련 분야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최규식 선생님은 북한을 ‘적군’이 아닌 ‘동포’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북한의 현실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도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68년에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여름 방학 때 청진에 다녀오게 된 거예요.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캐피탈리즘(자본주의)와 소셜리즘(사회주의)의 차이었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알고 싶었던 겁니다. 1주일 정도 있다가 돌아간댔더니 (북한측에서) 더 쉬었다 가시지 그러냐고 그래요. 그런데 나는 그게 쉬는 게 아니라 고역이었지. 그 사람들과 나는 의도가 애초에 달랐어요. 나는 현실을 보고 싶었던 것이고, 그 사람들은 나를 교육시켜서 자기네들 목적을 위해 써먹고 싶었던 거예요.”
선생님은 연구실에서 키우던 실험동물에게 사료를 줘야하는 것이 떠올라 급히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북한을 방문해서 그 곳의 사람들 머리에 정말 뿔이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인데 당시 사회는 그를 간첩으로 몰아갔다.
“한마디로 말해서 울릉도 사건은 조작 간첩 사건 중에 가장 큰 사건이에요. 사람이 셋이나 죽었어요. 40명 넘는 사람을 연루시키고. 74년도에 검거해서 일망타진을 시키려고 하는데 만약 내가 일본에 유학을 안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시작은 이문동이었다. 74년 2월, 일본에서 돌아와 캐나다 유학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조건 패는 것’으로 심문이 시작되었다고 선생님은 기억한다. 중앙정보부에 도착하자 수사관들은 ‘네가 전라북도 부안고창 7지구당 부위원장이다. 북한 권력 없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느냐’며 없는 이야기를 하며 구타를 시작했다.
“인간이 아니야, 저 놈들이. 인간이 아니야. 서울법대 최교수 얘기를 고문하면서 해요. ‘최교수 왜 죽어나갔는지 알지?’ 하면서. ‘너 여기서 죽으면 넌 끝이야. 너 이북 세 번 갔다왔다고 만들 수도 있어.’라고 협박했어요. 개처럼 부리더라고. 매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홀라당 벗기고 막 후려치는데, 아니 대가리를 그냥 개대가리 패듯이 패니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맞는 것도 고역이지만 때리는 것도 정신 멀쩡해서는 그렇게 못 때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때려요. 때리다가 자기들 닭튀김 안주에다가 소주 마시고. 또 ‘시작하자’ 하면서 몽둥이 들고 오고. 그렇게 맞는 거예요. 나의 정신 상태를 황망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야. 이건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요.”
고문을 당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최규식 선생님은 눈물을 보였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연민이 혼란스럽게 겹쳐 황망함 이외의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진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으로만 남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확신을 가진 거야. 사회 발전에 대한 확신. 내 자신에 대한 확신. 어떤 데서도 굴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내 속는 진실이 있었거든. 그 진실에 대한 확신이 나를 바로 잡아주는 거예요. 어떠한 사리사욕도 없이 역사를 바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실에 따른 나의 실천들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 했지요.”
1991년 2월 25일은 최규식 선생님의 출소날이었다. 17년만에 돌아온 사회는 적응하기에 쉽지 않았다. 그간 돈을 쓰지 않아 지폐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건널목을 건너는 것이 불편했다. 차가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 멈칫거리기를 반복했다. 선생님은 그 무렵 곁에서 친지들과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고 회상한다. 함께 술자리에 어울려준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이 있었고, 늘 정신적 지지가 되어준 아내가 있었다. 자식들과 조카들은 선생님을 이해해줬고 믿어줬다.
“인권 클리닉(인권의학연구소 트라우마치유 프로그램) 할 때 우리집 애들 조카애들 다 와서 다 들었어요. 유일하게 우리 가족만 온 거예요. 내가 그 동안 가족들에게 받은 신뢰가 그렇게 나타난 게 아닌가 싶어요. 내 가족들이 나를 사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봤으면 그렇게 안 했을 겁니다. 감옥살이 하고 났는데, 내가 돈을 벌었어, 명예를 얻었어, 아무것도 없잖아요? 가족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자살하고 말았을 거예요. 나는 내 자식들 내 형제들 내 가족들만이라도 분단의 고통을 같이 함께 하는 그것이 나에게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가족들은 분단으로 인해 선생님이 겪은 고통을 함께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큰 위안이 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아버지의 소식이었다. 선생님의 출소를 불과 서너개월 남겨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재회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는데 너무 억울했다. 평생 제대로 된 효도 한번 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뉘인 곳 아래에 움막을 짓고 1주기까지 시묘를 하였다.
“내가 뭘 했어도 사회 운동을 했을 거야.”
고된 시간이었지만 이 사회의 정의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한 확신이 생겼다. 선생님은 단 한번도 고문 사실과 감옥 생활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오히려 사회의 정의를 원하는 선생님에게는 귀하고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출소 이후엔 아내와 작은 봉고차를 마련하여 전국으로 집회를 찾아다녔다. 박정희 정권 이후 이 땅에 팽배해진 군사 문화와 권위주의의 비민주성으로부터 전통 문화와 휴머니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 운동의 한 가운데에 선 것이다. 그런 선생님에게 사회는 여전히 ‘간첩 누명’을 씌워댔다. 한번은 지역 신문에서 선생님과 선생님의 아내를 간첩으로 몰았다.
“2003~2004년의 일입니다. 부안에 방폐장을 짓겠다며 김종규 군수가 MBC 100분 토론에서 ‘민주주의 질서에 의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군수의 신념과 결단만이 필요하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민주주의 질서를 위한 모임을 인터넷에서 만들어서 싸웠어요. 그랬더니 지역신문에서 민주주의 질서를 위한 모임의 수장은 간첩이고, 그 뒤에서 새끼간첩이 날뛴다며 기사를 냈던 거죠.”
신문에서는 ‘노란 손수건’을 운운해가며 두 사람이 견디며 지내온 17년의 시간을 조롱했다. 결국 신문을 상대로 해서 재판을 했고 승소를 했지만, 당시 사건과 그때의 억울함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치가 떨린다.
“나는 간첩이 아닌데 간첩이 되어버렸잖아요. 어떻게해서든지 재심을 받아서 나는 간첩이 아니라는 것만 밝히고 죽고 싶어요.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재판 시작만이라도 보고 죽고 싶은 것입니다. 생명 연장만을 바라면서 악착같이 투병생활 하고 있어요.”
위암으로 투병을 시작한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병의 예후가 좋지 못해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오래 사는 것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누명만은 벗고 싶다고 재심이 시작되는 것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 현재 선생님의 소망이다. 이 사건이 있기 이전, 선생님은 역사를 피해가는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피해 당사자가 아님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살아왔지만, 17년의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는 피해갈 것도 없고 피해갈 수도 없고 맞받아치자. 그렇게 바뀌었어요.”
누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침해당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사회와 사회의 충돌, 세계 평화, 자유와 평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국민들이 너무 잘 몰라요. 그렇지만 모르는 게 그분들 잘못이 아니야. 역사를 곡필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파들이 잘 사는 것, 독재정권의 후손들이 잘 사는 것, 그 족속들이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거예요. 사람들이야 나름대로 그들이 성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할 거야. 사회적으로 금전적으로 누구에게 꿀리지 않고 산다고 사니까. 그런 식으로 역사가 크게 빗나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예요.”
이 땅의 역사가 정말로 바로 서려면 박정희 정권의 과거사를 완전히 청산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독재자의 딸이 버젓이 웃는 얼굴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총선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 2012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독재의 또 다른 귀신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선생님은 이렇게 잘못된 부분들을 정의의 품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아직까지는 역부족이었다고 평가한다.
“사람들이 책도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고, 책에 대해 그룹별로 토론을 해서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의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는만큼 함부로 인권을 유린하거나, 돈이 없다고 소외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앞으로도 인권, 정의, 인류애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의사가 많이 양성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1970년대는 분단 현실의 고통과 고사해버린 민주주의만이 전 사회를 뒤덮은 시대였다. ‘울릉도 사건’ 뿐만 아니라 ‘유럽간첩사건’, ‘남매간첩사건’ 등 전부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작 간첩 사건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죽임까지 당했다. 40년이 지난 이제야 재심을 거쳐 피해자들이 복권되고 있다. 느리게나마 역사가 바로 잡혀나가고 있다는 점에 낙관하되, 아직까지도 가려지고 왜곡되어있는 진실들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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