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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센터 소식

[치유] 국가폭력 생존자회, 개야도를 방문하다.

[치유] 국가폭력 생존자회, 개야도를 방문하다.


지난 5월 9일 오후 3시, 국가폭력 생존자회 회원들 12명과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전라북도 군산항에서 개야도(開也島)행 페리호에 올랐다. 군산항에서 배로 50분 거리인 개야도에 거주하는 정삼근 선생(82세)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제주도 역사기행에서 강광보, 임문준 선생과 해후(邂逅)했던 생존자회 회원들은 연로한 국가폭력 생존자의 방문을 올해 주요사업으로 정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차에 하원차랑 선생, 함주명 선생이 차례로 소천하자 마음이 공연히 바빠진 탓이다.

 

<사진 1. 군산항에서 개야도까지 배로 50분 거리이다. 개야도 선착장에서 일행을 맞이하는 정삼근 선생과 함께>

 


군산 개야도는 ‘간첩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작간첩사건의 피해가 대규모로 발생했던 섬이다. 정삼근 선생은 1980년대 조작간첩사건 피해 생존자이다. 거슬러 올라가 개야도 출신인 정삼근 선생이 납북되었던 것은 1968년이었다. 스물 다섯살의 선생은 어선을 타고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조기잡이를 하다가 북한에 끌려갔다. 5개월 만에 귀환하여 납북귀환어부가 되었지만, 반공법 위반으로 당시 징역 1년을 살았다. 어업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기에 이후에도 고기잡이를 하며 1남 5녀의 자녀를 키웠다. 그러던 중 1985년, 느닷없이 간첩 혐의로 또 붙잡혀갔다. 정삼근 선생은 처제 결혼식으로 군산 처갓집에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차에 실려 끌려간 것이다. 이후 보안대 고문에 못 이겨 수사관이 건넨 진술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 간첩 혐의가 되었고 징역 7년의 옥고를 치뤘다. 그 기간에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좁은 섬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고 아이들은 '간첩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개야도 주민이었던 납북귀환어부 고(故)서창덕 선생의 사건을 뉴스에서 처음 들었을 때 정삼근 선생은 "뭐 할 짓이 없어 간첩질을 하냐"고 했었는데 딱 1년 후에 본인이 잡혀가고 보니 만들어진 조작 간첩인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 2. 개야도 납북귀환어부 조작간첩사건 피해를 설명하는 정삼근 선생>

 


전두환 정권에서 조작간첩 사건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분단 상황에서 북한과 대결하면서 힘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건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유독 더 심해졌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학원 배후에는 간첩이 있다’라는 프레임으로 학생들의 저항을 억누르고, 자신들의 광주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정삼근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납북어부 조작간첩사건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사진 3. 여수에서 온 김양기 선생이 감옥에서 정삼근 선생을 처음 만나던 날에 대한 기억을 전한다.>

 


정삼근 선생은 2010년 재심을 통해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고 했다. 선생의 부인은 당시 행방불명이 된 남편을 찾아 2개월이 넘는 시간을 헤매고 다녔다. 부인이 남편을 애타게 찾던 중, 빈집에 혼자 남아있던 큰딸(당시 17세)은 불쑥 찾아온 수사관들을 맞닥뜨린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수사관들은 "네 아버지가 간첩이디."라며 온 집안을 뒤졌다. 딸은 충격을 받아 그만 실신을 했고 이후 정신 이상이 생겼다. 7년 후 출소한 선생이 병원에 데려가 정신장애 판정을 받았으며, 지금도 데리고 살고 있다. 군산경찰서 타자수로 일하던 둘째 딸은 이내 해고됐다. 출소 뒤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고 해도 동네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말조차 걸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 억울함은 풀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악몽을 꾸는 일이 여전하다.

 

<사진 4. 정삼근 선생의 개야도 자택을 방문한 생존자회 회원들과 가족>

 


정삼근 선생은 반가운 얼굴로 선착장까지 생존자회 일행을 맞이하였다. 옥고를 함께 치룬 감방 동기도 있고 진실규명을 위해 함께 동분서주하던 동료의 모습도 있다. 다리 부상으로 걸음이 못내 불편해 보였으나, 백발 가득한 선생의 표정에선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개야도 마을을 설명하는 선생은 일행을 언덕 위 자택으로 인도하였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자리한 일행은 선생의 삶을 때로 웃으며, 떄로 숨죽여 눈물지으며 듣는다. 80세가 넘은 선생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쉼 없이 쏟아내는 세월의 무게가 절절히 전달된다. 사건 당시 40대였던 선생은 그 세월을 견뎌내고 이제 80세 노인이 되었으나, 생존자회 회원들과의 만남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고통스럽던 시간을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남은 세월 자주 만나 회포를 풀자는 다짐도 한다.

 

 

<사진 5~7. 개야도를 천천히 한바퀴 도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로 작은 섬이다.>

 

 

이튿날 함께 개야도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정심근 선생은 개야도 노인회 회장이라고 한다. 일행은 노인 회관에 들러 개야도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현재 학생이 2명만 있다는 초등학교를 지나 고즈넉한 해변에 도착했다. 일행은 바위 틈에서 바지락을 캐거나 언덕에서 나물을 캐기도 했다. 한때 국가폭력의 광풍이 지나간 개야도는 이제 한적하고 평화로운 섬으로 남아있었다. 해변을 뒤로 하고 산기슭을 느리게 산책하며 정자에 앉아 묵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느새 배가 들어올 시간이 되었다. 일행은 선착장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사진을 찍는다. 떠나가는 배를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고 서있는 선생의 모습이 정겹고 뭉클함을 더하고 있었다. 6월에 서울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지만 일행을 떠나보내는 선생의 아쉬운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사진 8. 군산항으로 떠나면서 개야도 선착장에서 정삼기 선생의 건투를 화이팅으로 응답하는 생존자회 회원들>

 

 

정삼근 선생은 재심 무죄로 누명을 벗었지만, '국가의 사과', '수사관 처벌', '남아있는 이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일'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지금도 동네에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된 이를 돕는다고 한다. "억울하게 납북된 사람들, 지금까지 그 누명을 못 벗고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걸 국민이 알아야 할 거 아니냐"면서 "나는 무죄를 받기는 했어도, 지금도 국가 사과를 받고 싶다.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잘못한 수사관들 제대로 처벌받게 하고 싶다.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 한다"는 말을 남겼다.

 

정삼근 선생을 수사했던 수사관은 현재 훈 포상이 취소되고 그 정보가 공개되었다.

 

"정삼근 선생님, 우리 모두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