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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센터 소식

[특집] 동학농민혁명, 보다 인간된 권리와 정치적 주체로서의 삶을 위해

[동학농민혁명, 보다 인간된 권리와 정치적 주체로서의 삶을 위해]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계승해야 할까요? 숱한 역사적 사건들의 기록과 기억 속에서 무엇을 교훈삼고 체화하여 살아가야 할까요? 후대에게 무엇을 가치와 미덕으로 전해주어야 할까요? 과연 무엇을 승계하여 이로써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아닌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기 위해, 오늘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맞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의 부패정권에 저항하는 혁명이자, 일제의 침략야욕을 저지하는 전쟁이었습니다. 민중의 지역 연대를 통해 나타난 전국적 규모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조정의 무능과 일제의 무력에 좌절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와 패배로 일본은 거리낌 없이 침략의 마수를 뻗었습니다. 10여년 뒤 을사조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겼으며, 5년 뒤 한일합병조약으로 일제에 병탄되었습니다. 일제강점 36. 전 국토와 국민이 일제에 짓밟혔습니다.

 

<사진 1.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 민족기록화(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9세기 서양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동북아시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청은 영국에 연달아 패하였고, 일본은 미국에 강제로 개항하였습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고종과 민씨 정권의 구태는 더욱 심해져 매관매직이 창궐하였고, 이로 인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은 백성의 피고름을 짜 제 배를 불렸습니다. 1894215(음력 110) 동학 접주인 전봉준을 필두로 동학교도와 농민 1,000여 명이 모여 고부 관아를 습격, 수탈과 학정의 상징인 만석보를 쳐부수었습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폭도로 규정, 고문하고 처형하는 등 탄압하였습니다. 425(음력 320)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4,000여 명은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고 무장에서 봉기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백산에 주둔하며 10,00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511(음력 47)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르고 5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사진 2. 1893년 고부에서 작성된 사발통문(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고종과 민씨 정권은 체제의 모순과 무능으로 인한 민중의 저항을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하려 하였습니다. 후에 민영휘로 개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준을 중심으로 청군의 도움을 받으려던 그들의 행위는 청의 진군과 더불어, 텐진조약을 구실삼아 일본군이 조선 땅에 들어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청일 군대가 주둔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조정과 전주성에서 화약을 맺고 해산하였습니다. 화약 조건으로 일종의 지방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안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723(음력 621) 경복궁을 불법 점거, 청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사진 3. 텐진조약을 구실 삼아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1016(음력 918) 삼례에서 집결, 서울로 향하였습니다. 10월 말에 이르자 삼남 지방에 시작한 봉기는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일대까지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관군의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추가 파병까지 하여 진압을 주도하였습니다. 화력의 열세로 동학농민군은 무참히 쓰러졌고, 127(음력 1111) 우금치에서 크게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 대부분이 붙잡혀 사형을 당하며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을 맺었습니다.

 

<사진 4.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 후 압송되는 전봉준(출처 : 경향신문)>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의 보다 더 인간된 삶을 누리겠단 열망과 정치적 주체로 나서겠단 의지는 일제의 침략야욕에 대한 의병전쟁, 일제 병탄 후 3.1운동,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인권증진과 민주화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일제강점에 대한 독립운동으로, 군사독재에 대한 민주화운동으로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정권의 유지를 위해 고문, 간첩조작, 학살 등 국가폭력을 자행한 군사독재정권은 그들의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을 이용하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우금치에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설을 지원하며 5.16군사정변과 유신체제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은 1983년 황토현 기념관을 세우고, 친일 조각가 김경승으로 하여금 전봉준 동상을 조각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분노한 시민들은 위령탑 비문에 새겨진 유신’, ‘박정희등을 파버렸고, 2021년 김경승이 조각한 전봉준 동상을 철거, 지난해 새로이 불멸, 바람길이란 이름의 동학농민군의 행렬을 조각한 동상을 건립했습니다. 군사독재의 정당화나 합리화를 위한 역사적 이용이 아닌, 보다 더 인간된 권리와 정치적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동학농민군의 진정한 바람을 오늘날에도 이어 후대에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사진 5. 박정희 정권은 우금치 동학농민군 위령탑을 세우고, 5.16 군사정변과 유신체제를 정당화하였다.(손호철, 프레시안)>
<사진 6. 2022년 새로이 건립된 동학농민군 '불멸, 바람길' 동상(전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