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긍정의 힘으로 또 다시 일어나기 위해 -     
어느 돌멩이의 외침
유동우 지음
출판사 - 청년사
초판일 - 1984-04-15
책 소개
『어느 돌맹이의 외침』은『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과 더불어 70년대 노동현장을 고발하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80년대 대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에 실린 글은 1977년 1월부터 3월까지 3회에 걸쳐 월간「대화」에 연재되었던 글들이다. 그 다음해에 이 글들을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가 절판이 된 후 1984년에 다시 발간되었다. 최근 이 책을 다시 출판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1978년 초판 발간이후 절판과 재발간 그리고 다시 절판과 재발간을 거듭한 셈이다.
“이 책은 빈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온갖 고난을 뚫고 주체적 인간으로 서기까지의 과정을 감동깊게 서술한 삶과 투쟁의 기록이다. ..70년대 노동현실과 노동운동에 관한 값진 역사적 기록이며 70년대 노동자문학의 가장 빼어난 고전적 작품인...유동우의 이 체험수기는 그 개인의 것으로서의 특수성보다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관통하는 보편성으로 인하여 더욱 값진 기록이 된다. 그렇다, 이 책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나, 나에게 있어서나, 그 누구에게 있어서나 하나의 작은 씨알이요 꽃눈이다. 계속 싹을 틔우고, 무성하게 자라나 온 산하를 푸르게 덮어야 할 씨알, 온 산하를 현란하게 수놓아야 할 꽃눈이다.”
-발문 중에서
저자 유동우(본명 유해우)는 1949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안정 남부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8년 상경,천일섬유,유림통상,방성산업,삼원섬유주식회사 등에서 공원으로 일하였다.

유해우선생님은 필명 ‘유동우’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노동운동에서 그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환경개선과 노동법준수 등을 외치며 전국의 공장지대를 다니며 노동운동을 한 실천가였다. 6,70년대를 배경으로 도시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겪는 노동의 삶과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을 담아낸 그의 자전수기<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본격 노동자 문학의 출발을 알리며 당시 운동권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하는 노동운동가로서 유해우 선생님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외침’으로 다가올까 궁금했다.  
지난 11월 21일 정오 인권의학연구소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는 자그마한 키에 약간 구부정한 허리,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카락, 그리고 안경너머 차갑고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중년을 넘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젊은 시절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벼운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갔다.

 

선생께서 어렸을 때 자라온 환경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든지,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그야말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집성반촌의 타성받이로 살아오면서, 명절 때면 동네 어른들께 세배도 다닐 수 없을 정도였구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죠. 산에서 땔감 마련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게 제 일이었어요. 그래서 차라리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서울로 올라왔지요......그러나 70년대 노동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더 알아야한다고 믿었죠.”

청년기부터 노동운동에 헌신하셨는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시절 그 엄혹하던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노동운동에 참여하셨는지요. 기억나는 활동은?

“출퇴근시간도 없이 일하고, 밤샘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성과급이라는 것도 없는 그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기계부품 취급당하는 노동현실이 암담해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어요.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도 해결이 안되었는데, 조화순 목사의 도시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어 노동법을 공부했습니다. 동료 노동자인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약자에 대한 연민이 있었는데, 현실타파를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운동을 해서 개선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체험을 책으로 내고 난 다음 전국의 노동현장을 다니며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연을 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소위 ‘학림(전국민주 학생. 노동자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치안본부 대공분실(일명 남영동)에서 고문피해를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시간 동안 선생님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선생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는지요.

(그는 무척 떨리고 어눌하고 쉬엄쉬엄 먼산 바라보며 말했다. 그 때의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고문을 재경험 하는 듯 했다.) “사실 고문이야기 여태껏 해본 적이 없어요, 최근에 와서야 김근태 의장이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갔을 때 그 자리에서 나도 여기서 고문당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죠”

 (고문은 피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그 주변의 친지. 친구의 관계까지도 앗아가 버린다. 그래서 고문에 의한 조직사건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선뜻 나서서 자신의 고문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해우 선생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참고로, 1981년 8월,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노동자와 학생세력이 연대하여 현 정부(당시 5공정권)를 무너뜨린 뒤 사회주의를 건설’하려했다는 혐의로 노동자, 학생 24명을 구속했다며 소위 학림사건을 발표하였다. 선생은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달간 경찰병원에 3차례 실려가야할 만큼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또 집단구타와 물고문 등으로 인해 갈비뼈 3대가 금이 가고, 앞니 2개와 어금니 2개가 심하게 흔들리고, 밥을 먹지 못하는 등 상태가 심각해서 서대문구치소로 넘어가서도 내내 병사에 수감되어 있었다. 구속자 총 24명(여성 3명 포함)중 유해우 선생만 유일하게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도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악화 때문이었다.

 

 

 

 

 

 

 “ 출소이후 가난한 노동자의 형편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화 되어갔어요. 흔들리던 이빨 4개는 이내 빠져버렸고, 갈비뼈에 금이 간 것도 석방 뒤 X-ray를 찍어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극도의 공포감과 악몽에 시달렸고, 불면증이 심해졌어요. 90년도에는 자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건으로 수사관이 집으로 찾아오자, 아파트 4층에서 뒤쪽베란다를 타고 도망치다 떨어져 발가락 3개가 골절상을 입기도 했어요. 자칫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무모한 탈출이었어요.”

“ 방에 혼자 있으면 누가 꼭 잡으러 오는 것 같아 수시로 집을 나갔고, 몇 달이고 노숙자 생활과 구걸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아내와 딸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했어요.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사람들과 만나기가 꺼려지더군요. 이렇게 해서 잊힌 사람이 되었기에 그 고통의 정도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학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사건인데,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보상 신청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신청을 하게 되셨는지, 진행하시면서 생각하고 느끼신 점과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운동을 한 게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의식이 팽배했었고, 우리 사건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엮여 있었는데, 학생출신들은 나름 다 살기가 그렇게 빠듯하지 않았죠. 노동자출신들은 생활현실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고, 가장이고 혼자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해서. 그러나 국민의 정부시절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신청은 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주장했습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빨갱이로 낙인찍혀 남편에게, 시부모에게,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 이중고를 겪고 있었기에 명예회복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유해우 선생은 지금 이렇게 담담하게 지난 일을 반추하면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과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1년 전, 한 지인의 권유로 정신과적 치료와 인권의학연구소의 트라우마 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유를 진작에 할 수 있었더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치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헤어진 아내와 딸에 대한 미안함과 속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또한 그 덕분이다. 아직도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수시로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다스리지 못해 애를 먹는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희망을 갖는다고 말한다.

 

 유동우 선생은 지난 11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보상․치유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에 토론자로 나와 고문피해 경험을 말했다.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당시의 고문피해사실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가 용기를 낸 것은 고문피해자들의 삶, 특히 고문당한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약자를 위해, 소외받는 동료와 이웃을 위해 주저없이 자신을 던지는 선생의 모습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에 향해 날아가는 분노의 ‘돌멩이’로 남아 있다.  

'학림사건' 피해자들 31년 만에 무죄

1980년대 대표적인 공안 사건인 '학림사건' 피해자들이 31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돼 7년 4개월간 복역한 이태복(62)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24명에 대한 재심사건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의자신문조서가 임의성 없는 자백에 해당해 증거능력을 부정하고, 나머지 증거들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계엄법 위반에 대해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해 신군부가 행한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로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해당한다"며 "이를 저지 또는 반대한 것은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등은 1981년 6월 민주운동과 저임금ㆍ장시간 노동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기소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학림(學林)사건은 전민학련 첫 모임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가진 데 착안해 '숲(林)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며 당시 경찰이 붙여준 명칭이다.
2012.6.15.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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