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공동체에 '함께' 다녀왔습니다]

 

지난 목요일(29일), 연구소에서 김장호, 윤혜경, 이숙희 선생님과

함께 도봉구에 위치한 오늘공동체에 다녀왔습니다.

 

오늘공동체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박민수 대표, 이화영 소장, 김장호 선생, 윤혜경 선생, 이숙희 선생이 같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늘공동체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박민수 대표, 이화영 소장, 김장호 선생, 윤혜경 선생, 이숙희 선생이 같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개인가구가 늘어나는 요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오늘공동체인데요!

 

오늘공동체에 거주하고 있는 분에게 직접 오늘공동체 공간을 소개받고 있다. 

너무 멋있는 공간에서 대안적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오늘공동체에서 우리 선생님들과 커피 한 잔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연구소의 후원회원이기도 한 오늘공동체와

무언가 재미난 일들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법률] 최근 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 재심의 심각한 문제점 

 

 군부독재 시절, 수많은 조작간첩 사건들이 날조되었다. 당시 대서특필되었던 간첩단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을 조작했던 국가 공무원들은 특진과 함께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그렇게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조금씩 당시 수사와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이었는지 재심을 하나씩 통해 밝혀지고 있다. 그 시절 자행된 수많은 조작 사건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를 지난 2010 7 15일 재일동포 이종수 간첩사건의 재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이강원 부장판사가 판결문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사건은 재일동포 유학생을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국군기무사 전신)
안기부
(국정원 전신) 명의로 피고인을 불법 연행하여 39일간 강제구금한 상태에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고, 
그로 인하여 피고인이 5 8개월간 아까운 청춘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된 사건이다. 재외국민을 보호하고 내국인과
차별대우를 해서는 안 될 책무를 가진 국가가 반정부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정권안보 차원에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피고인이 한국어를 잘못하여 충분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을 악용하여
, 재일동포라는 특수성을 무시하고
오히려 
공작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이 판결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국가기관들은 모국을 찾은 재일동포들의 약점(특수성)을 파고들어 국민을 보호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린 채 재외국민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작정치의 희생양으로 활용했다. 또한 그 행위가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불법 연행과 강제구금, 그리고 모진 고문으로 조작된 증거들을 가지고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사법부에서 하나의 통과의례로 치른 것이 재판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불법이었다는 점을 전제로 40여 년이 지난 지금 재심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재일동포 故 김병주 선생과 故 손유형 선생의 재심 과정에서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목도되고 있다. 1980년대 모국을 찾은 두 명의 재일동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간첩누명이었다. 불법구금, 강제구금, 그리고 모진 고문의 결과 각각 14 6개월과 17년을 모국의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이후 이들은 출소하고 모국이 아닌 일본으로 돌아가 고문 후유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정신적 및 경제적 고통을 함께 보고 겪어야 했던 유가족이 재심을 청구해 지금 재판이 진행 중이다.

 

 <사진-1> 5월 13일 고 김병주 선생 재심 후, 조영선 변호사와 생존자 모임 회원들이 질의 응답하다.

  故 김병주 선생의 경우, 지난 1 29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40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내렸지만, 특수탈출 혐의에 대해서 유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변호인은 즉각 항소를 제기하여 5 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 재판이 개시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던 재판은 지난 7 6일 검찰 측에서 2명의 증인을 추가로 요청하였고, 이를 재판부가 받아들이면서 재판이 지연된 상태다.

 

<사진-2> 7월 6일, 고 김병주 선생 재판에서 검찰의 증인신청이 재판부에서 받아들여지고 향후 재판에 대해 변호사와 생존자 모임 회원들이 대화를 나누다.  

   손유형 선생의 경우 지난 5 25일 서울 고등법원에서 재심을 신청한 유족들이 모두 최후진술을 마쳤고, 당시 재판부는 재판의 재심 개시 결정이 늦어진 점에 대해 사과하며 7 13일 선고를 예정했다. 그러나 지난 7 13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손유형 선생에게 20년을 구형했으며, 재판부는 이 재판의 주범인 손유형 선생에 대한 선고는 8 31일로 연기하고, 종범인 손종규, 손유승, 손유배 선생에게만 무죄를 선고했다.  손유형 선생의 선고는 오는 8 31일 오후 2 20분에 있을 예정이다. 일본에 있는 유가족들은 또다시 피가 마르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사진-3> 5월 25일 고 손유형 선생 재판 후 김중민 변호사에게 유가족, 생존자 모임 회원들이 설명을 듣다.   
<사진-4> 7월 13일 고 손유형 선생 재판 후 김중민 변호사와 유가족, 생존자모임 회원들이 선고연기에 대한 우려를 나누다.

 아이러니하게 과거 간첩사건이었던 두 재판에서의 핵심 쟁점은 국가보안법이나 간첩죄가 아니었다. 핵심은 이 재판이 재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이 군부독재 하의 당시 원심 법정에서 했던 진술이 법적 효력이 있는지를 다투고 있는 부분이다. , 당시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등과 같은 국가기관에 의해 불법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조작된 증거를 가지고 피고인들이 법정에 나와 자신들의 범행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2021년 재심 재판에서도 법정 증거로서 효력이 있는지를 다투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심각한 문제점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어떤 부분이 이 재판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하는가? 첫째, 사회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재판부의 접근방식이다. 앞서 이강원 부장판사가 판결문에서 지적했듯이, 과거 재일동포 조작간첩 사건은 국가가 재일동포라는 약점을 이용해 불법 연행하여 강제 구금하고, 거기에 모자라 모진 고문으로 조작해낸 사건이다. 이 일을 했던 기관들이 국가기관들인데, 그러한 사회적 맥락에서 피고인이었던  김병주 선생과  손유형 선생은 법정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과 다른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까. 당시 재판정에는 피고인들을  고문했던 수사관들이 방청석에 앉아있었고, 법정에서 공소장 내용과 다른 말을 하면 다시 고문 수사하겠다고 협박하였음을 앞서 진행되었던 재심  피고인들의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1975년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의 한 피해자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 자백을 했지만, 원심 재판 법정에서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했다. 그리고 용기 내어 진술한 진실의 대가는 더 가혹한 고문이었다. 그 피해자는 다음부터 법정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진술하지 않고, 철저히 수사관들이 원하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지금 2021년 재판부는 1970-80년대 재판부의 현실이 지금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적 맥락을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피고인 두 명은 이미 고인이 되어 방어권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두 분 모두 재일동포이면서 동시에 이미 고인이 되어버려 당시 재판 과정에서 자신들이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말할 수가 없다. 만약 이분들이 재일동포가 아니었다면, 당시 재판에 가족들 또는 친구들이 참석했을 개연성이 높으며, 그들이 지금 재심에 증인으로 나와 당시 재판 상황을 증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이 현재 살아계시다면 재심 법정에서 왜 당시 법정에서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모두 고인이 되어 이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결국, 법정 증거주의와 같은 법리를 내세워 당시의 시대적 맥락 그리고 고인이 되어버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주어진 80년대 법정 증언을 가지고 이것이 2021년 현재 재심 과정에서도 법정 효력이 있는지를 열심히 다루고 있는 것이 현 실태다. 모국을 찾은 재일동포를 아무런 영장도 없이 불법 구금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40일 이상씩 고문하면서 만들어낸 간첩죄. 그리고 고문수사를 받으면서 했던 자백과 다른 진실을 법정에서 말하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전보다 더한 고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피고인이 과연 무슨 용기로 진실을 내뱉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연행부터 불법으로 점철된 이 같은 사건들의 진상을 밝히고자 2021년 재심을 시작한 것인데, 여전히 재판부는 시대적 맥락과 고인이 되어버려 방어권을 상실한 피고인의 상황을 묵인한 채, 단순히 교과서에 쓰인대로 재심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7 14 () 오후 5, 인권의학연구소는 제3차 정기이사회를 온라인 줌회의로 개최하였다. 코로나-19 4차 대유행 상황에서 지난 제2차 이사회에 이어 현장 회의 대신 온라인 회의방식을 결정하였다. 이날 이사회에는 함세웅 이사장, 이화영 상임이사, 박재영 이사, 백재중 이사, 손창호 이사, 유충희 이사, 이상희 이사, 주영수 이사, 최창남 이사와 염형국 감사가 참석하였다.

< 사진 1.  줌회의로 개최한 인권의학연구소 제 3 차 이사회  (7.14)>

이화영 상임이사의 지난 2차 이사회 회의록 보고에 이어 사무국에서 2021년도 2분기 사업과 재정에 대해 보고하였다. 사업 보고 후 교육팀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의료인 대상 인권교육사업 교재의 단행본 출간 여부에 대한 박재영 이사의 질문과 후원 중지 회원의 중지 이유에 대한 유충희 이사의 질문이 있었다.

 

<사진 2.   온라인 줌회의로 개최한 교육사업 기획회의>  
< 사진 3.   온라인 줌회의로 개최한 교육사업 자문회의 >  

이어진 ”2021년 국제고문피해자 지원의 날과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개소8주년 기념행사 안건에 대해 코로나-19 확산으로 행사 개최가 현실적으로 어려워 대신 수녀원 마당에서 고문피해자들의 고문피해자 지원법을 제정을 촉구하는 피케팅 퍼포먼스로 대체했음을 보고했다. 또한 현재 준비 중인 자료집 디자인 작업을 마치면 8월 중 자료집을 출간하여 후원회원에게 발송하기로 하였다.

< 사진 4.  2021  국제고문피해자지원의 날에  ” 고문피해자 지원법안 제정 “ 을 촉구하는 고문피해 생존자들

세 번째 안건 토의를 위해 이화영 상임이사가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를 위한 평생교육안에 대한 제인 설명을 하였다. 참석이사들은 교육 내용, 장소, 명칭, 시간대 등을 당사자 요구도에 맞춰 계획할 것과 피해생존자 대상 특정교육으로 운영할 것을 주문하였다.

 

네 번째 안건은 2020-21년 신규회원 및 10년 이상 장기후원자에 대한 비대면 웰컴,감사 파티안이다. 온라인 만남의 장을 통해 회원들의 기부효능감을 증대하고, 연구소 활동에 회원들의 적극 참여를 독려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비대면 웰컴파티와 감사파티 및 릴레이 인터뷰 사업을 제안했고 참석이사들은 이 제안을 전폭 지지하였다.

 

다섯 번째 안건은 고문가해자 정보공개 안건이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2018년부터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훈포상 취소 고문수사관 명단공개를 촉구하는 행정소송을 진행하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인권의학연구소는 고문수사관의 명단을 취합 작성하여 보도자료와 SNS를 통해 고문수사관의 실명을 공개하고자 하는 안건을 이사회에 제안하였다. 참석이사들은 실명을 공개할 경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등 고문수사관의 역공이 예상되더라도 공익을 위한 실명공개이므로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훈·포상 취소 고문수사관들의 실명을 공개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였다.

 

다음 이사회(4) 2021 10 13 () 6, 인권의학연구소 1층 소강당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제3차 이사회를 마무리 하였다.

 

(끝)

[동행] 하원차랑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21 7 21일 오후 6시30분, 하원차랑 선생이 소천했다. 향년 81. 이튿날 22일 오전 소천 소식을 접한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김장호 선생, 임채도 선생, 박민중 활동가와 함께 경상남도 밀양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빈소가 마련된 밀양병원 장례식장에서 하원차랑 선생의 영정을 마주하니 모두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지난주 하원차랑 선생이 병원을 퇴원하면 국가폭력 피해생존자 자조모임  회원들과 함께 밀양 방문을 계획하고 있던 터라 그 아쉬움은 더욱 진하게 남았다.

<사진-1> 하원차랑 선생의 영정 사진이 있는 장례식장 모습.

  하원차랑 선생은 1941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부산에서 주로 사업을 했으나, 1970년대 말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 불황으로 일본 오사카 숙부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였다. 그떄 현장 감독의 부탁으로 귀국하면서 부산에 살고 있는 감독의 친척에게 잠바 하나를 선물로 전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1983년 7월 하원차랑 선생은 보안사에 의해 느닷없이 불법 연행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후 간첩이 되었다. 보안사는 일본에서 잠시 일했던 공사 현장 감독의 부탁으로 선물 하나를 심부름 했던 하 선생을 지령을 받고 국내 잠입한 간첩으로 조작하였다. 당시 보안사에 두달 가까이 불법감금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한 하 선생은 허위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이 허위자백을 증거로 당시 법원은 간첩죄로 형을 선고하였다. 

 

 하원차랑 선생은 1990년 10월 2일 출소하기까지 약 8년의 시간을 억울하게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그 기간 동안에 하원차랑 선생은 계속된 전향공작과 회유를 뿌리쳤다. '간첩인 적이 없으니 전향할 것도 없다' 면서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던 선생의 감옥 생활은 더욱 가혹했다. 8년을 출역도 없이 독방에서 홀로 버텼으니 이를 통해 선생의 올곧고 강직한 성격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1970-80년대 재일교포 등 일본 관련 조작간첩 사건에 연루된 많은 피해자들이 그렇듯 하원차랑 선생도 터무니없는 국가 공작에 의해 인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1970년대 말, 숙부를 통해 일자리를 얻고자 일본으로 간 선택이 간첩으로 몰리게 될 줄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렇게 건너간 일본에서 선생은 공사현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그 공사현장에서 만난 현장감독이 알고 보니 조총련계였다. 하원차랑 선생과 그 감독은 단순히 일하는 직장에서 만난 사이였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가 발표한 하원차랑 선생의 죄목은 그 감독에 의해 간첩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했다는 것이다. 그때 하원차랑 선생이 부탁받은 것이라곤 지령이 아니라 현장감독의 국내 처조카에게 전달할 잠바 하나였다. 직장 상사의 처조카에게 잠바 하나를 전달해준 것이 간첩 행위이고, 그것으로 8년의 옥살이를 했다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당시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었지만, 일본 오사카의 조총련과 민단 사이엔 38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총련과 민단의 관계가 당시 남한과 북한처럼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남한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조총련이라고 하면 무조건 북한과 연결해 왜곡하여 이용하면서, 국민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력을 연명하기에 급급했다. 하원차랑 선생도 그 한반도의 분단과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 정권이 만들어낸 수많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사진-2>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유족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결정, 그리고 공사현장에서 만난 현장감독의 잠바 전달 부탁은 하원차랑 선생의 인생에서 40대를 지우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의 40대의 삶이 사라지는 동안 그의 가족 또한 말로는 다 옮기지 못할 모진 사회적 냉대와 아픔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와 그의 가족의 삶 전체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8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하원차랑 선생은 중장비 기술을 가지고 공사현장을 뛰어다니며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다. 어찌 보면 국가에 의해 망가져버린 자신과 가족의 삶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사회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첩이라고 하면 가족도 받아들이지 못하던 당시 한국 사회의 정서를 고려해보면, 이미 가족에게 남겨진 상처의 깊이는 생각처럼 쉽게 아물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이 하원차랑 선생도 그리고 그 가족에게도 가장 큰 아픔이자 비극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 피해자다.

 <사진-3> 하원차랑 선생 장례식에 참석한 이화영 소장, 김장호 선생, 임채도 선생이 하원차랑 선생의 부인이 구정자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례식에서 영정으로 남아 있는 하원차랑 선생과 그 옆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남았다. 조문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국가와 사회는 과연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가 어떻게 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파괴하였는지 알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가족 역시 피해자이나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각자의 상처로 인해 가족끼리도 소원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아픔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나. 이것은 단순히 사법부의 재심 무죄선고와 배보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철저히 피해자 중심의 사고에서 우리 사회와 국가가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그 이유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이고, 피해자와 가족은 여전히 그 상처로부터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폭력 피해자 선생들의 소천 소식이 향후 계속해서 들려올 것이란 생각에 공연히 마음이 바빠진다. 생존해 있는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고통의 무게를 나누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피해자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관계가 원상으로 회복되지 못한 그들의 남은 삶에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고통을 기계적으로 계산한 배보상금으로 해결하려는 국가의 사과 방식과 이를 당연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에 큰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폭력 피해자의 구제는 개인과 가족의 삶을 파괴하였다는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구제지원책은 파괴된 개인과 가족의 관계, 삶을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진-4> 조문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밀양역 앞에서 김장호 선생과 이화영 소장.

 하원차랑 선생을 동료 그리고 친구로 여기며 평소에 매일같이 통화로 일상을 나누던 김장호 선생의 글을 공유한다. 김장호 선생은 하원차랑 선생을 영원한 우리의 친구라 부르고 있다. 피해자들이 미처 가족과도 못했던 이야기와 정을 서로 나누고 있었음을 짐직하게 한.

 

 

영원한 우리의 친구!!

 

7 20일 오후 6 30분, 하원차랑 선생님은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게도 아파하시던 선생님께서 이제 더는 아프시지 않을

영원한 안식처로 편안히 가셨답니다.

 

가시는 길에 북망산 굽이굽이 돌아 저희들을 생각하며 되돌아보셨을지,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직도 형, 갑장, 동생 하며 부르시던 모습이 우리의 온몸에 꽉 차 있건만,
여전히 하원차랑 선생의 모습이 우리의 뇌리에 아지랑이처럼 맴돌기만 합니다.

 

너무도 아쉬운 부분은 무죄 선고받고 이제 좀 재미있게 세상에서 두 어깨 으쓱이며 남부럽지 않게 가족들과 좋은 곳으로 여행도 제대로 못 하시고, 우리와 해외여행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원차랑 선생을 놓아주면 안 되었지만,
잘 가라 친구야 하며 고작 머리 숙여 인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원차랑 선생이 영원한 안식처에서 이제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원차랑 선생이 우리 곁에 안 계시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면 하원차랑 선생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2021년 7월 22일

김장호 드림 

[영원한 우리의 친구!!]

 

7월 20일 오후 6시 30분경 하원차랑 선생님은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게도 아파하시던 선생님께서 이제 더는 아프시지 않을

영원한 안식처로 편안히 가셨답니다.

 

가시는 길에 북망산 굽이굽이 돌아 저희들을 생각하며 되돌아보셨을지,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직도 형 갑장 동생 하며 부르시던 모습이 우리들의 온몸에 꽉 차 있건만, 여전히 하원차랑 선생의 모습이 우리들의 뇌리에 아지랑이처럼 맴돌기만 합니다.

 

너무도 아쉬운 부분은 무죄 선고받고 이제 좀 재미있게 세상에서 두 어깨 으쓱이며 남부럽지 않게 가족들과 좋은 곳으로 여행도 제대로 못 하시고, 우리와 해외여행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원차랑 선생을 놓아주면 안 되었지만, ‘잘 가라 친구야’ 하며 고작 머리 숙여 인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원차랑 선생이 영원한 안식처에서 이제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원차랑 선생이 우리 곁에 안 계시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면 하원차랑 선생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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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평소 하원차랑 선생님을 동료 그리고 친구로 여기며 평소에 매일같이 통화로 일상을 나누던 김장호 선생님께서 먼저 소천하신 하원차랑 선생님을 생각하며 쓰신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피해자 선생님들은 차마 가족과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와 정들을 서로 나누고 있음을 그리고 있었음을 조심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조문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밀양역 앞에서 김장호 선생님과 이화영 소장님.

[사법부는 국가폭력 피해자를 두 번 죽이다]

 

"그동안 사법부가 VIP(대통령)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

 

부산에서 활동하는 변영철 변호사는 2018년 재판거래 사법농단 피해자 구제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부산지법 앞에서 진행했다. (출처: 프레시안)

인혁당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군부독재 하에 행정부와 사법부가 한 통속이 되어 양산했던 수많은 국가폭력의 사례들.

 

우리는 쉽게 이런 일들이 4-50년 전의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 또는 유가족들은 여전히 이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재심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다루는 행정부와 사법부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고려하여 이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습니다.

지난 양승태 대법원장 하에 일어났던 어처구니없는 일은 사회에 더 알려져야 합니다.

 

양승태 대법원장 하에 법원행정처는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자신들의 과거 잘못에 대해 눈감는 것은 물론 엉터리 같은 재심 판결을 통해 그 피해자를 두 번 죽였습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는지 아래 기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1910284403020?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DKU 

 

'청와대 협조 사례'... 판사님, 어떤 증거를 더 원합니까?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 자기 방으로 초대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사건을 맡은 재판장과의 독대, 역시 변호사가 된 후 처음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판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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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와 조용수.

 

대부분이 기억하지 못하는 언론사와  언론사 사장의 이름입니다.

 

1961년 8월28일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법정에 들어서는 <민족일보> 간부 조용수·송지영·안신규(왼쪽부터) (출처: 연합뉴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 창간이 되었습니다.

창간 당시, 민족일보는 4가지 경영방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2.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3.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4.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이 같은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있던 민족일보는 창간  달도 지나지 않아 매일 4만 여부를 발행하는 신문이 되었고, 당시 가판 판매 부수는 1위였다고 합니다.

 

이런 민족일보를 박정희 군부독재는 가만 놔둘 리 만무했습니다.

결국,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서른한 살 언론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바른 소리, 옳은 소리 하는 개인과 집단을 향해

국가는 그들을 놔두지 않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과거의 잘못이라고 그냥 넘어갈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잘못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와 사회의 역할입니다.

 

아래 링크는 관련 기사입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1814535386027#0DKU

 

47년 만에 밝혀진, 31살에 사형된 언론사 사장의 진실

지난달 27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신청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2기 진실화해위에는 지난달 21일 기준 3636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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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 선생 인터뷰-②] 노동운동, 10년의 재판, 그리고 개인 이숙희”

  

 이숙희 선생에게 노동조합 활동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힘들지 않고, 재미 있었던’ 긍정적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지난 인터뷰에서 어린 이숙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노동자가 되고 노동 조합을 만났는지 알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활동, 근 10년 동안 이어졌던 청계피복 노동자 법정 싸움, 그리고 선생의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장소를 달라!

 

Q. 72년 당시 청계피복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교육 장소가 없었던 것이 힘들었죠. 그때 노동조합 사무실이 7평 정도밖에 안되어 평화시장 옥상에 의자를 깔고 교육을 했거든요. 한 번은 노동조합에서 중등부 과정을 신설했는데, 200명이 넘게 신청한 거예요. 선착순 50명만 신청을 받았는데 다 수용할 수 없어서, 결국 25명을 다시 돌려보냈어요.

 

Q. 교육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엄청났네요
(이숙희) 그렇죠. 한 달에 한 번 전체 교육을 하려면 장소가 없으니까 청계천 2가의 청소년회관을 빌리거나 영등포 돈보스코 회관까지 가야 했어요. 그러니 당시 노동조합에서 가장 급선무였던 부분이 바로 장소 확보였어요. 그런 와중에 분야 부장이 모범여성근로자로 뽑혔고, 청와대에 가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 분야 부장이 청와대에서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만났는데,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육영수 여사가 비서관들에게 장소를 마련해주라고 한 거죠.

 

<사진-1> 청계피복 노동조합 노동교실 7기 개강식에 참여한 이소선 여사와 노동자들.  

Q. 청와대에서 직접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위해 교육장소를 마련해 줬어요?
(이숙희) 그건 아니고요. 청와대에서 평화시장 사장들한테 노동자들 교육장소를 마련해주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그랬더니 사장들이 미싱 한 대당 150원씩을 다고 해요. 그 돈을 모아 동아상가 5층에 노동교실을 만들게 된 거죠.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저희는 정말 기뻤어요. 근데 이소선 여사는 사장들만 돈을 낼 게 아니라 우리도 벽돌 한 장 값이나마 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당시 일요일 작업을 안 할 때여서 일요일 작업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죠. 근데 우리 노동자들이 수당을 받지 않고 두 번 일요일에 작업을 해주기로 결정한 거예요. 노동자들도 장소 마련을 위해 참여를 한 거죠. 마침내 1973 5월에 동아상가 옥상에서 노동교실 개관식을 했어요. 합창도 하고, 많은 준비를 했죠.

 

Q. 청와대가 직접 장소를 마련한 게 아니라, 사장단과 노동자들이 합의해서 노동교실 장소가 마련되었네요.

 (이숙희) , 그렇죠. 저희도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는데, 개관식 이후 바로 노동교실 문을 닫는 거예요.

 

Q. 개관식을 하자마자 누가 노동교실 문을 닫았어요?
(이숙희) 사장 대표단이죠. 그때 사장 대표단에서 내세운 이유가 정말 웃겼어요. 노조에서 개관식에 재야인사인 함석헌 선생님을 초청했다는 것과 노조가 만든 개관식 초대장에 자주색 글씨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사진-2> 1973년 5월 21일에 가진 동아상가 5층 노동교실 개관식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Q.  초대장 글씨가 자주색이어서?
(이숙희) . 자주색 글씨가 있어서 이 노조의 사상이 불손하다는 거예요. 그때 사진을 보면 개관식 하기 전에는 다들 기쁜 표정이었는데,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표정들이 다 안 좋아요. (웃음) 그게 지금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결국 개관식을 하자마자 노동교실 문이 닫혀버렸어요.

 

1975 2 7

 

Q. 사장대표단은 왜 그렇게 했던 건가요?
(이숙희) 아마 사장단은 노동교실을 만들어 주는 대신 노동조합을 길들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사장단에서 노조 간부 4명을 내보내라고 했었거든요. 함석헌 선생에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을 비롯해서 마음에 안 들었던 간부들이었던 거죠. 저희가 1년인가를 버티면서 싸웠어요. 사장단은 노조에게 그들이 원하는 지부장을 세우라고까지 요구했어요.

 

Q.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노동조합에서는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이숙희) 그게 73년도에 있었던 일예요. 그 이후 75년까지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동아상가 복도를 돌아다니며 노동교실을 돌려달라는 구호를 외치고, 사장 대표에게 협박과 애원의 편지도 쓰고, 노동청에도 편지를 보냈었죠.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는데도, 안 되는 거예요. 저희가 내린 결론이 싸울 수밖에 없다였어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은 없었어요.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사장단은 노조간부들을 자르려고 했기 때문에 간부들이 이걸 사전에 알게 되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노조간부들에게 알리지 않고 75 2 7일 날 동아상가 옥상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다음에 교실이 있는 옥상으로 점심시간에 한 200여 명이 다 뛰쳐 올라가서 문을 잠갔어요.

 

Q. 집단행동을 하신 건가요? 

(이숙희) , 처음으로 농성을 한 거예요. 그전에는 그렇게 싸워본 적이 없었는데, 2년의 시간 동안 저희 의식도 성장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했거든요.

 

<사진-3> 강제해산에 맞선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점거농성. (출처: 성공회대 NGO 자료관)

Q. 옥상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가 농성을 했어요?
(이숙희)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죠. 원래 저는 동원조인데, 구호를 외치기로 한 사람이 못들어 온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나가서 구호를 외쳤어요. 계속 구호만 외칠 수는 없어서 다 같이 애국가를 부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 통일 대신에 배움을 넣어 부르고 그랬죠.

 

Q. 언제까지 농성을 했나요?

 (이숙희) 그날 저녁 7시까지 그렇게 있었는데, 경찰들이 오고 난리가 난 거죠. 그때 사장단과 협상을 해서 노동교실을 저희에게 다 돌려주기로 한 거예요. 다만 동아상가 옥상은 안된다고 해서 그곳의 집기들을 다 옮겨서 다른 곳에 얻기로 했어요.

 

Q. 노동교실을 어디로 옮겼어요?
(이숙희) 동대문운동장, 지금 DDP 맞은편에 유림빌딩이라고 있어요. 그곳 2,3,4층을 얻었어요. 2층은 복지원이라는 병원이 들어갔고, 3, 4층을 노동교실로 쓰게 된 거죠.

 

<사진-4> 당시 동대문에 위치한 유림빌딩의 사진.

Q. 그렇게 모두가 함께 단결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네요.

(이숙희) , 그랬던 거죠. 돌이켜보면 제가 노동조합에 72년에 들어갔는데 75년도에 그런 결과를 얻어냈으니까 그 사이에 의식이 많이 성장했어요. 그리고 그 싸움을 통해 노동자들이 용기를 얻게 된 거죠. 75년도가 굉장히 중요한 한 해가였어요. 2월에 노동교실을 되찾는 싸움부터 시작해서 그해 12월까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어요. 마침내 아침 9시 출근, 저녁 8시 퇴근이라는 작업시간 단축과 시다 임금직불제 도입 등 노동환경 개선을 이루게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75-6년도에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었죠.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야 하는 재판과정

 

Q. 최근 청계피복 노조원들의 국가배상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죠? 재판 과정과 결과를 말씀해 주세요.
(이숙희) 2010 1월, 55명의 청계피복 노조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나긴 재판이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2005년에 설립된 1기 진화위에도 저희 사건을 신청했어요. 진화위에서 저희 사건과 관련해서 국가의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이를 근거로 2010년 민사배상 소송을 시작해서 2012 1, 2013 2심에서 저희가 승소했어요. 근데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해서 꼬이기 시작했죠. 이후 고등법원에서 다시 승소했어요. 이번엔 대한민국 정부가 2019년에 재상고를 한 거예요. 그때는 재판이 너무 편파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이 밝혀지면서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2년이 지난 지난 4월에 다행히 대한민국 정부가 상고를 취하하면서 찝찝한 승소를 하게 된 거죠.

<사진-5> 2019년 청계피복 노조 재판 관련 KBS 뉴스 사진.

Q. 오랜 재판 과정이었네요.
(이숙희) 10년이 넘는 너무 긴 재판 과정이었어요.

 

Q. 재판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재판은 증거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니 증거를 저희가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어느 공장에서 언제 노조원이 되었고,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를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데, 당시 평화시장은 취업규칙이나 이런 게 없잖아요. 또, 공장이 망하기도 했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기가 어려웠어요. 특히, 전두환 군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게 광주5.18항쟁 탄압이, 두 번째가 바로 민주노조 말살이었거든요청계피복노조 같은 경우, 간부들이 다 퇴근하고 난 뒤에 (정부에서) 노동조합 문을 뜯고 들어와서 기물이나 자료들을 모두 가져갔어요.

  

Q. 법정에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 자료가 그때 없어진 것예요?
(이숙희) , 그래서 재판 증거로 제출할 자료들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 부분이 정말 어려웠는데, 2-3년 전에 청계피복의 9.9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어요. 특히, 다큐멘터리 PD들이 도움을 많이 주었어요. 함께 삼송에 있는 수장고에 가서 일일이 찾아서 찍었어요. 그런데도 증명이 안 되는 노조원들이 남아 있었어요. 왜냐하면 호적상 이름과 우리가 아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이었죠. 고민을 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그게 결혼식 사진이예요. 결혼식 사진에는 저희 조합원들이 다 참석해서 찍혀있으니까 증거로 효력이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결혼식 사진을 찾아서 거기에 나온 조합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직접 적어서 법원에 제출했어요. 이것은 변호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잖아요. 이 작업을 해서 변호사한테 가져다주었죠. 이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가 우리를 증명해내야 하는 과정이.’

 

Q. 국가 피해자인데, 국가를 상대로 내가 피해자임을 또 증명해야 하는게..
(이숙희) 그렇죠.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도 힘들었고, 재판이 너무 길어져서 힘들고 그랬죠.

 

Q. 그렇게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게 한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숙희) 일단 이 재판은 우라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사실 청계피복은 자료의 측면에서 너무 취약했기 때문에 억울한 부분이 더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항상 같이 했으니까 할 수 있었고, 제가 지속적으로 전태일 재단과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증거를 찾아내는 게 너무 힘든 과정이었지만 다큐를 찍는 감독님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죠. 마지막으로 전태일기념관도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감사하죠. 그 도움이 없었다면 자료를 찾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을 거예요.

<사진-6>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사진. (출처: 한겨레)

개인 이숙희, 그리고 꿈

 

Q.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10, 20대 이숙희라는 노동자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이숙희) 전태일을 만나기 전에는 좀 우울한 노동자였죠. 제가 원해서 평화시장에 취직을 했지만 너무 싫었거든요. 말을 함부로 하는 (작업장) 환경도 싫었고요. 늦게까지 일하고 정말 힘든 환경이었어요. 그래서 별로 희망이 없는 삶이었는데, 노동조합을 만나고 전태일을 만나면서 변한 거잖아요? 그래서 20대 저는 정말 열심히 역할을 했다고 봐요. 만약 제가 20대에 그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욕심많은 사람이 되어 공장 차려서 노동자를 학대하면서 돈 벌어야 돼!’ 이랬을지도 모르잖아요?(웃음) 제가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도와준 게 바로 노동조합이고, 전태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 노동조합과 전태일은 20대 이숙희에게 신세계를 보여주었죠. 그것 때문에 20대 이숙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앞으로 꿈이 있다면?
(이숙희)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아요.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마 (현실적) 여건이 안 되니까 아예 꿈을 안 꾸고 살았던 것 같네요.

 

Q. 당시 10, 20대 이숙희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요?
(이숙희) 만약에 여건이 되었다면, ‘공부를 계속했겠죠. 제가 어렸을 때, 아나운서가 되거나 선생이 되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것을 향해서 갔겠죠.

 

Q. 그럼 지금 여건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이숙희) 무엇인지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싶어요. 다른 생각 하나도 안 하고. 그런 환경이 된다면....

 

  2시간에 이르는 인터뷰 동안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같았다.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어린 노동자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었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준 큰 학교였다. 인터뷰 중에 한국 노동운동, 특히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를 볼 수 있었고, 어린 노동자를 지금의 인권활동가로 우뚝 성장하게 만든 그 힘을 확인하기도 했다. 

 

(인터뷰 진행:  박민중) 

[이목희 전 의원, 40년 만에 무죄]

 

어제(1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목희 전 의원이 40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노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목희씨가 15일 선고 뒤 기자들과 만나 소감을 말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지만 노동조합원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이목희 의원은 어떻게든 노동운동의 불씨를 끄기 위한 독재정권의 악랄한 꼼수의 첫 번째 피해자였습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당시 노동운동을 하면서 국가로부터 피해를 보셨던 분들의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고통이 보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아래 링크는 관련 기사입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715_0001514395&cID=10201&pID=10200 

 

'3자개입 옥살이' 이목희, 재심서 무죄…"희대의 악법"(종합)

[서울=뉴시스] 옥성구 기자 =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외부에서 노동조합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 이른바 '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이목희 전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이 40년 만에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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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이라는 세월의 눈물]

 

지난 6월 29일, 국회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되었습니다.

73년 만에 수많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씻어줄 길이 열렸습니다.

 

지난 1일 오후 전남 화순군 사평면 벽송리 한 야산의 아버지 묘지 앞에 선 송순기씨. (출처: 한겨레)

이 법이 통과되고, 당시 여순사건 주모자로 지목당해 아직까지도 아버지의 주검을 찾지 못하는 피해자의 딸이 주검 없는 빈 무덤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아버지, 특별법이 통과됐대요. 특별법이…”

 

73년 동안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눈물이 터졌을까.

그 모진 세월 동안 감내해야 했던 그 아픔과 설움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국가와 사회는 이러한 국가폭력을 직면해야 하며, 이러한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는 던져야 한다.

 

"과연 국가와 사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래 링크는 관련 기사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03253.html

 

여순사건 주모자로 몰려 억울한 죽음, 73년만에 해원 가능할까

송욱 전 여수여중 교장 딸의 비원진압군 ‘민간인 총지휘자’ 지목…군법회의 회부 소식 뒤 종적 끊겨

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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