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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센터 소식

[법률] 사법부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법률] 사법부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

 

2005 5,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통과됐다. 이로 인해 2005 12월부터 약 5년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이 무렵, 2005년 취임한 이용훈 대법원장 하에 법원은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를 정리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확보할 수 있는 과거사 판결문 약 6,000여 건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법원행정처는 이 가운데 과거 사법부가 잘못 판단한 사건으로 보이는 224건의 과거사 사건을 분류한다. 이는 과거사 정리를 위한 기초 자료이며, 사법부가 스스로 과거 자신들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반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당시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법부에게 224건 목록을 요청했지만 대법원은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법부는 문제가 있는 과거사 판결을 선별해놓고도 추가 조치는 없었고, 재심을 청구·권고할 수 있는 검찰과 진실화해위원회에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사과와 반성을 위해 꼽아낸 224건의 과거사 사건들은 더 이상 재검토되거나 추가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경향신문 전현진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224건들에는 인권의학연구소와 오랜 인연이 있는 피해자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224건 목록은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이 만든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khan.co.kr/kh_storytelling/2022/covered224/)

 

<사진-1> 이동석 선생이 재심 재판에 항상 챙겨가는 노트를 살펴보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전현진 기자)

첫 번째 사례는 이동석 선생이다. 이동석 선생은 1971년 처음으로 모국 땅을 밟았다. 이후 자신의 뿌리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던 이동석 선생은 1973년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하며 다시 모국을 찾았다. 모국에서 즐거운 생활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부푼 꿈을 안고 있었지만 1975 11 22일 당시 보안사령부의 수사관들이 이동석 선생이 사는 서울의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이후 한 달 넘게 불법감금된 채 구타, 물구나무 세우기, 볼펜으로 손가락 비틀기 등의 고문을 받았다. 1976 12월 대법원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를 인정해 이동석 선생에게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이동석 선생은 5년형을 거의 꽉 채워 198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이동석 선생은 출소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도 1980년대 본인과 비슷한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을 위한 구원회 활동을 지속하며 목소리를 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1기 진화위가 만들어지고, 주변에서 재심 신청을 하는 사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이동석 선생도 2013년 재심을 신청했다. 2013년 시작된 재심은 검찰의 상고를 거쳐 2016년이 돼어서야 무죄가 확정됐다.

 

아무리 봐도 청년 이동석 선생에게 모국은 모질다 못해 잔혹했다. 이런 모국이라면 누가 다시 찾겠는가. 그러나 이동석 선생은 무죄를 받고 한국외대를 찾아갔다. 3학년까지 다니다 체포되면서 다닐 수 없게 된 대학생활을 다시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재입학을 하고 한국외대 불어과를 당당하게 졸업했다. 그가 재입학을 한 건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 중 3분의 2는 교도소에서 보냈다. 조국은 그를 이미 한 번 버렸었지만, 그는 끝내 조국을 버리지 못했다. 한국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이야기하면서 그는 지난 시간을 되돌려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 달에 한두 번 법원에 온다. 자신과 같은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의 재심 재판에 참여해 그 소식을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양심수동우회에 전하고 있다.

 

<사진-2> 지난 7월 15일 서울 성북구 성가소비녀회에서 인터뷰한 뒤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전현진 기자)

두 번째 사례는 김장호 선생이다. 김장호 선생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건축 관련 일을 했다. 10대에 일본으로 넘어가 20년 넘는 세월을 버티며 어렵게 삶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결혼도 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을 찾았는데, 김포공항에서 안기부 직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여느 간첩조작 사건들이 그렇듯이 불법구금과 고문이 이어졌다. 그렇게 1983 5 3,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 법정에서 뒤에 앉아있던 수사관은 말 잘 들으면 참작해줄 거야.”라며 이야기했지만,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장호 선생의 옥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어 15년 넘게 이어졌다. 1998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을 땐 마음 터놓을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여권도 나오지 않아 일본에 다시 갈 수도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간첩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취업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던 김장호 선생은 2015년이 되어서야 재심을 청구하고 2017년 재심에서 모든 혐의에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알고 보니 김장호 선생의 사건이 224건 중 154번째였다. 김장호 선생은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날조된 진술서를 가지고 사형을 선고했던 사법부가 30년이 지나 자신의 사건을 대법원 판사들이 검토한 적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2008년 이용훈 대법원장은 과거 사법부 행태에 국민께 사과한다고 했지만 김장호 선생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2017년 김장호 선생은 재심에서 무죄 선고가 있던 날 재판부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과거 자신을 불법 구금하고 고문했던 안기부 수사관도, 안기부의 날조된 진술서를 가지고 기소했던 검찰도, 이를 토대로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교도소에 가둔 재판부도, 재심을 한 재판부도 김장호 선생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도대체 당사자들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알 수조차 없다. 김장호 선생은 국가가 일개 개인에게 허리 숙여 사과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겠지만, 섭섭하긴 했죠.”라고 이야기했다.

 

40대에 간첩으로 몰려 60대에 출소한 김장호 선생은 이제 80대가 되었다. 15년을 감옥에서, 30년을 간첩 꼬리표를 단 채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안기부보다, 검찰보다, 사법부보다 훨씬 당당했다.

 

<사진-3> 김양기 선생이 여수 자택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사건 자료와 보도 내용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전현진 기자)

세 번째 사례는 김양기 선생이다. 김양기 선생은 1970년대 일본에 친척이 있었고, 당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을 오가며 선원과 화물차 운전기사로 일을 했다. 그러나 이게 재일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북한에 알려줬다는 혐의가 되어 1987 12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을 받기까지 5번의 재판에서 김양기 선생은 법원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5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1991 5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김양기 선생의 사건은 224건 중 213번째다. 김양기 선생은 2006 1 1기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고, 2009 7월 광주 고등법원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 이 시기가 정확하게 대법원에서 잘못된 과거사 판결 224건을 인정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1987년 당시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재심 재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심 재판에서는 초기 재판에서 가장 중요하게 재판부가 인정했던 자백과 영사증명서 등이 증거로 볼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특히, 재심 재판부는 증거를 기초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따져보는 원심의 사실인정에 대해 도저히 수긍할 수 없고 그 위법성이 중대하다고 했다. 또한, 재심 재판부는 이 사건에 제출된 증거들은 공허하고 허무하다무엇보다도 최후의 인권 수호기관인 법원은 최고법원에 이르기까지 5번에 걸친 재판을 거쳤음에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피고인과 그 변호인들의 주장에 관하여 눈과 귀를 막은 채 공허한 증거들이 그려낸 허상만 바라보았다.”고 지적했다.

 

무죄를 받은 지 10여 년이 흘렀지만 김양기 선생은 여전히 불법 체포된 2월이 되면 불안에 떤다. 자다가도 잠에서 깨고 몸이 떨린다고 한다. 동시에 자신을 고문하거나 재판에 넘기고 유죄 판결을 내린 가해자들은 훈장을 받고 승승장구해 국가유공자가 되는 등 혜택을 받지만,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생계와 당장의 병원비 걱정을 해야만 하는 현실을 보며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몸과 마음의 상처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 

 

18세기 영국의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은 유죄의 증거는 신중하게 인정해야 한다 죄 없는 한 사람이 고통받는 것보다 열 명의 죄인이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재판의 목표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 스스로 과거 잘못된 판결이라고 뽑은 224건의 사례를 살펴보면, 무기징역이 34, 사형이 21, 징역 10~20년형이 30건에 이른다. 또한, 224건 중 104건은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거나, 재심이 개시되지 않아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