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20년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옛 치안본부였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과 경찰 수장인 경찰청장은 공식적으로 과거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고문에 대해 사죄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과 이후에 실질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조작' 간첩 피해자들은 누명을 벗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던 고문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간첩조작'으로 특진했던 공안 경찰들의 통계는 없습니다. 또한, 1967년부터 조선일보와 경찰청(옛 치안본부)이 공동으로 민주화 운동가와 학생, 시민을 때려잡은 경찰들에게 수여했던 청룡봉사상 수상 명단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대표적으로 이 상을 수상했던 사람들이 바로 고 김근태 의원을 고문한 이근안(1979년), 박종철 고문치사 관련자 유정방(1972년), 부림사건 가담자 송성부(1983년) 등 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1년이 되기 전, 고문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실질적인 조치들이 발표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 정부와 국정원, 국방부, 경찰청이 나서서 당시 고문 가해자들의 이름과 서훈을 받았던 이들의 서훈 취소에 나서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www.nocutnews.co.kr/news/5363649?fbclid=IwAR3I_vQQq27rK9l4ItTBTX5qP9nroB8aJGcaZ0OZl4dJ5VcIVmpe6D_rqFQ

지난 2 25~27일에 ()인권의학연구소 심리상담전문가 네트워크 소속 심리상담사들은 남영동 인권센터에서 현장 교육의 기회를 가졌다. 현장 교육은 유동우 소장(기념관추진단, 남영동 인권센터 보안관리소장)의 해설로 진행되었다. 남영동 인권센터는 (가칭)민주인권기념관으로로 거듭나기 위해 2021 3월부터 2023 6월까지 잠정적으로 2년간 폐관하게 되어, 올해로서는 마지막 현장 교육이 된 셈이다.

 

(사진) 남영동 인권센터 마당에서 본 건물과 설립 배경을 설명하는 유동우 소장

불행했던 한국의 현대사에서 치안본부(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 `남산`으로 불리던 중앙정보부(국정원), `서빙고호텔`로 불리던 보안사령부(안기부) 대공분실과 함께 3대 고문수사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공식명칭은 `경찰청 보안3`이나 공식명칭보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란 별칭이 훨씬 잘 알려져 있다.

 

1호선 남영역 플랫폼에서 바라다 보이는 검은색 건물의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가 대간첩 수사를 명목으로 만들었다. 검은 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던 김수근이 설계하였다. 김수근은 자신의 대표적 건축물인 '공간' 사옥과 같이 검은 벽돌로 이 건물을 건축했다. 김수근은 당시 존경받는 유명한 건축가였으나, 남영동 치안본부의 건축구조를 보면 그 용도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애초에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세력을 탄압하거나, 이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희생양을 만들 목적으로 충실하게 설계된 건물이다.

 

(사진) 남영동 인권센터의 설립과 연혁을 설명하는 유동우 소장

우선 입구에 들어설 때 굉음을 내며 열리는 육중한 쇠문은 연행되어 눈을 가리운채 끌려온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남영동 대공분실은 다른 수사기관과 달리 조사실을 지하에 두지 않고 꼭대기 층인 5층에 두었다. (이후 1983년,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2개 층을 더 증축해서 현재와 같은 7층 건물이 되었다. 마당으로 들어와 검은 벽돌건물을 올려다보면 당시 조사실(고문실)이었던 5층의 창문이 다른 층과는 확연히 다른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문을 받다 고통에 못이겨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성인의 머리가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의 좁은 이중창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남영동 치안본부로 불법연행된 사람들은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해서 5층 조사실까지 이동했다. 대개 2명의 수사관에게 앞 뒤로 머리카락과 허리춤을 붙잡힌 채로 몇 층인지를 알 수 없게 설계된 나선형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마침내 5층에 도착한다. 또는 3명이 타면 꽉 차는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조사실로 이동하기도 했다.

 

(사진) 나선형 계단을 통해  5층 조사실로 이동하는 상황을 재연하는 유동우 소장과 임채도 선생

유동우 소장의 설명을 들으며 상담사들은 나선형 계단을 한참 올라 5층 조사실 복도에 이르렀다. 5층에는 15개의 조사실이 서로 대각선으로 마주보게 설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사실 문이 열려도 맞은 편 조사실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똑같은 구조의 `조사실` 공간에는 책상과 의자, 침대, 욕조, 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설치된 가구들은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각방은 내부를 감시하는 CCTV 시설이 있었고 각 방에 있는 창문은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긴 2개의 창문만 나 있어 비명소리가 새어나가기 어렵게 장치되어 있다. 남영역에서 쉽게 올려다 보이는 5층 조사실이지만, 1985 515호에서 김근태 전 민청련의장이 물고문, 전기고문의 고통에 시달리고, 1987, 509호에서 박종철 학생이 물고문을 받으며 죽어가던 그 시절, 남영역을 지나는 전철 안 일반 시민들은 이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반인권적 가혹행위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인권의학연구소, 김근태기념치유센터에서 심리상담 중인 고문피해자 중 상당수가 남영동 대공분실 피해자들이 있다. 이들의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심리상담사들이 피해자의 고문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남영동 피해자였던 유동우 소장의 해설을 들었던 이 날의 경험은 피해자 사건에 대한 시대적 이해가 확장될 뿐 아니라 당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개소 4주년과 UN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김근태 기념치유센터 “숨” 개소 4주년과 UN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가 지난 6월 23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국회헌정기념관 강당에서 열렸다.

 

 


 이 날 행사에는 고문 생존자분들과 여러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 그리고 성가소비녀회 수녀님 등 약 300 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1부 함께 하는 마당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씀으로 시작되었다. 함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국가폭력의 문제는 희생자 치유지원 뿐 아니라 가해자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새로운 정부에서 국가폭력의 가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적절한 조치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서 인사말에서 김근태 기념치유센터 의 공동대표인 인재근 국회의원 역시 고문피해자 문제의 국가적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특히 올해에는 현재 발의상태인 고문피해자 치유지원법안의 입법화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축사를 하였다. 우원식 의원도 국회차원에서 고문피해자 문제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노력을 약속하였다.


 손창호 소장은 지난 1년간 김근태 기념치유센터의 활동을 소개하였다. 고문피해자들에 대한 개인 및 집단상담 그리고 재심 법정동행 지원은 예년과 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트라우마 치유” “사회적 트라우마 치유”“내 삶이 인권을 만나다” 등의 주제 아래 지난 1년간 총 10회의 대중 공개강좌를 하였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내에 재일동포 양심수 역 사전시실을 개관한 바 있다. 특히 2016년에는 김근태 기념치유센터가 국제 고문피해자 재활협회(IRCT)의 회원이 됨으로써 국제적 연대활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올 해의 감사패는 유해우(유동우) 선생에게 주어졌다. 유해우 선생은 지난 40년 이상의 세월을 노동운동에 헌신해 왔다. 본인 역시 1981년 소위 “학림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고통을 겪은 바 있는 유해우 선생은 2012년 이후 인권의학연구소와 함께 고문피해자 치유지원에도 힘써오고 있다.



 1부 마지막으로 성가소비녀회 수녀님들의 합창이 있었다. 이번에 부른 노래 “꽃”은 청중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선사하였다.


 2부 치유마당은 임진택 명창의 지도하에 준비한 고문생존자 판소리 모임인 길음 판소리의 공연으로 시작하였다. “사철가” 와 “농부가”로 흥이 돋워진 청중의 신명은 앵콜곡 “고고천변”에서 최고에 이르렀다.


 두 번째 무대는 이소선합창단 대표를 맡고 있는 테너 임정현 님이 맡아주었다. “님이 오시는 지” “남촌” “후대에게” “상록수” 그리고 “그날이 오면”을 열창하였다. 특히 “상록수”와 “그날이 오면” 은 청중들과 함께 부르며 참석자 모두가 하나 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공식 행사가 모두 마친 후에 국회 헌정기념관 식당에서 참석자 분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이날 행사는 마무리 되었다.

<상처꽃-울릉도 1974> - 특별한 가족의 출연

 

<상처꽃- 울릉도 1974>는 다양한 분들의 카메오출연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419일 토요일은 참 특별한 가족이 무대에 섰다.

 

70년대 노동운동사에 빛나는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쓴 노동운동가 유동우선생이 주심판사로, 그의 딸과 사위가 배석판사로 나란히 법복을 입었다.

 

 

[상처꽃-울릉도1974_4월 19일_유동우, 유현경(딸), 조명진(사위)]

 

몇 달 전 EBS <동행>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화제를 낳은 바 있는 그의 가족사는 우리시대가 만든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유동우선생도 남영동에서 받은 모진고문의 후유증으로 병들고 피폐해지면서 불행한 가족사가 만들어졌다. 딸은 처자를 버리고천지를 떠돌며 헤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꽁꽁 한이 맺혔다.

 

그렇게 사람을 기피하고 떠돌던 유동우선생은 지난 해 인권의학연구소의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의 창 하나가 가만히 열렸다고 했다. 주변의 응원을 통해 딸에게 손을 내밀어볼 용기도 얻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딸도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서는 잠깐의 동행을 위해 이날도 멀리 군산에서 남편과 아이들 함께 달려왔다. 그리고 아버지 옆에 앉아 연극을 보는 내내 흐느꼈다.

 

연극이 끝난 후 눈이 붉어진 사람들이 서로 따뜻한 포옹을 나누었다. 이 연극 중에서 특히 유동우선생의 딸 유현경씨를 더 울렸을 여자배우 정연심씨가 그들 부녀가 출연했던 프로그램 동행을 보았다며 유현경씨 손을 잡고 또 울먹였다.

 

 

[상처꽃-울릉도 1974-유동우, 유현경(딸), 조명진(사위), 손주들, 조화순 목사, 신인령 선생, 임진택 감독]

 

감자탕 집에 마련한 뒤풀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유현경씨를 보는 순간 와락 부둥켜안았던 조화순목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였던 신인령선생, 권영길선생, 임진택감독,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소장……

 

조화순목사는 기막힌 인연을 풀어놓았다.

1974년 대구의 교도소에서 울릉도간첩단사건으로 구속된 김용희선생과 옆방에서 징역을 살았다는 것이다. 조화순목사는 긴급조치위반이었지만 워낙이 빨갱이로 악명(?)높았던 터라, 여자간첩이 둘이나 들어왔다고 교도소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두 분은 각각 독방이었는데 고개를 내밀 수도 없는 배식구에 팔을 넣어 내 저으며 통방을 통해 우정을 쌓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도 두 분이 가끔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고.

인연이 이렇게도 이어져있구나 싶어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은 새삼 놀라워했다.


 

[상처꽃-울릉도1974_ 울릉도 사건 고문생존자 김용희(연극의 송인숙)과의 감옥에서의 인연을 설명하시는 조화순 목사]

 

그러나 세월호침몰 사건으로 주로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온 사람들은, 우울한 역사의 한 장면 앞에서 거듭 무겁고 침통해했다.

다행히 아직은 어른들의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유동우선생의 어린 손주들 해맑음에 잠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상처꽃-울릉도 1974-유동우, 유현경(딸), 조명진(사위), 해맑은 미소의 손주들]

 

 

글 : 장남수

(노동저술가, 『빼앗긴 일터』(창작과비평사, 1984) 저자, 前원풍모방노동자,

인권의학연구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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