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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기록] 독재정권에 저항한 가톨릭 성직자 증언집 발간. “1970~80년대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한 가톨릭 성직자 증언집”을 엮어내다. 인권의학연구소는 10월 말에 “1970~80년대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한 수도자·성직자 증언집”을 출간하였다. 이 증언집의 기획은 지난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권의학연구소는 (사)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성직자와 수도자의 증언” 발간을 위한 연대사업을 제안했고, 이를 위해 두 단체가 함께 심층인터뷰를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증언자는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하에서 국가폭력을 직접 겪은 경험이 있다고 알려진 성직자와 수도자들 중 심층인터뷰 참여에 동의한 15명으로 정하였다. 심층인터뷰 진행을 위해 임채도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장과 김상숙 정회원, 이화영 상임이사는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전라.. 더보기
[아버지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들은 간첩조작 사건으로] [아버지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들은 간첩조작 사건으로] 우리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 가족에게 고스란히 남겨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6·25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15일 여수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집을 나섰다가 다음날 다른 희생자 120여명과 함께 여수 애기섬(현 남해군 소치도) 앞바다에서 총살당한 후 수장됐다. 그리고 그 아들은 1986년 2월 간첩 누명을 쓰고 광주 505보안대의 모진 고문수사를 받고 간첩이 되어 7년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우리는 과연 이 이야기를 억울한 한 가족의 서사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며,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와 같다. 아래는 이 사건의 피해자인 김양기 선생의 인터뷰입니다. https://www.hani.co.kr/.. 더보기
[한국일보] 36년 만에 무죄...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인생의 족쇄 풀렸다" 36년 만에 무죄...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인생의 족쇄 풀렸다" - 출처: 한국일보 - 게재일: 21.08.13. "인생의 대부분을 간첩이라는 굴레 속에 살았는데, 모든 족쇄가 풀려나가는구나, 이제는 풀리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7월 29일 대법원에서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김성만, 양동화 씨에게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무려 36년 만의 기다림 끝에, 두 사람은 '간첩'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정희 독재정부가 물러나고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당시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적 술수를 만들었던 국가권력. 36년이 흘러서야 그 정치적 술수가 잘못되었음을 사법부가 인정함 셈이 되었다. 자세한.. 더보기
[국가기관과 함께 언론도 가해자입니다] [국가기관과 함께 언론도 가해자입니다] 국가폭력의 가해자는 단순히 국가만이 아닙니다. 허위 사실을 진실인 것마냥 여론을 호도하는 ‘언론’도 공범입니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일부러’ 왜곡하는 언론도 동일한 가해자입니다. 예를 들어,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형을 사신 국가폭력 피해자를 향해 재심의 과정을 통해 국가는 일정부분 배상의 책임을 안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공범이었던 언론은 어떤 법적 책임을 안게 될까요? 안타깝지만, 언론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아래 기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신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877 국정원·검찰 간첩조작에 영합한 언론보도,.. 더보기
[후원회원 인터뷰] 가장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닌 오늘공동체 [후원회원 인터뷰] 가장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닌 오늘공동체 -오늘공동체의 박민수 대표를 만나다- 지난 8월 12일 도봉산 자락에 위치한 오늘공동체 박민수 대표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약 80여 명의 공동체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공동체원들이 함께 사는 집이 너무 멋있는 건물이어서 여러 건축상을 받은 공동체. 이러한 내용과 달리 오늘공동체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가장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녔고, 그들과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오늘공동체는 어떤 곳인지, 오늘공동체와 우리 고문 피해 선생님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해드리겠습니다. Q. 박민수 선생님, 반갑습니다. 굉장히 바빠 보이시는데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박민수) 일단 기본적으로 (오늘)공동체에서 정기적으로.. 더보기
[다큐인사이트] 재일동포 간첩 조작사건 "스파이" 이 유투브 영상은 지난 8월 19일 KBS에서 방영된 영상입니다. 해방 후 60만 명의 동포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차별과 설움 속에서 성장했다. 성장한 아이들은 모국 유학을 선택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1ww7ytaxco 조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파이의 올가미였다. 1970-80년대, 북에서 내려오는 간첩이 줄어들자 한국의 정보기관은 일본을 경유한 ‘우회 침투’에 주목했다.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어항 속의 물고기였다. 불법 연행과 고문, 그리고 한국사회의 외면 속에서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스파이가 되었다. 스파이라는 낙인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2010년부터 .. 더보기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언급' 징역형, 42년만 재심서 무죄 [4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무죄를 받기까지 42년이 걸렸지만, 당시 유죄를 받은 이유를 보면 기가 막힌다. 이번에 무죄를 받은 이씨는 "1979년 10월 27일 정훈장교(소령)로 복무하던 중 이발소에서 동료들과 박 전 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보도 내용에 관해 얘기했다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계엄법 위반)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얼마나 옹졸한 국가였는가. 아래 링크를 통해 관련 기사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812121800064?input=1195m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언급' 징역형, 42년만 재심서 무죄 | 연합뉴스 (청주=연합뉴스) 천경환 기자 = 군에 근무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사건'과 관련한 신문 .. 더보기
"'과거사 정리 지겹다?' 피해자에게 국가폭력은 초시간적이다" [국가폭력은 공소시효가 없어야 한다] "한국에는 유신 시절에 일어난 일이라도 판결은 불가침이라는 사유가 팽배하다. 재심 절차 이용도 쉽지 않다. 그런데 독일은 연합국이 점령하던 시기에 나치 법원의 판결을 무효로 선언했다. 1998년에는 '나치 불법판결 청산법'을 만들어 그 범위를 더 넓혀 나치 특별재판소 판결을 전부 무효화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0216205369894?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DKU "'과거사 정리 지겹다?' 피해자에게 국가폭력은 초시간적이다" 지난달 27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신청 사건에.. 더보기
[동행] 하원차랑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동행] 하원차랑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21년 7월 21일 오후 6시30분, 하원차랑 선생이 소천했다. 향년 81세. 이튿날 22일 오전 소천 소식을 접한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김장호 선생, 임채도 선생, 박민중 활동가와 함께 경상남도 밀양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빈소가 마련된 밀양병원 장례식장에서 하원차랑 선생의 영정을 마주하니 모두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지난주 하원차랑 선생이 병원을 퇴원하면 국가폭력 피해생존자 자조모임 회원들과 함께 밀양 방문을 계획하고 있던 터라 그 아쉬움은 더욱 진하게 남았다. 하원차랑 선생은 1941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부산에서 주로 사업을 했으나, 1970년대 말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 불황으로 일본 오사카 숙부를 통해 .. 더보기
영원한 우리의 친구!! [영원한 우리의 친구!!] 7월 20일 오후 6시 30분경 하원차랑 선생님은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게도 아파하시던 선생님께서 이제 더는 아프시지 않을 영원한 안식처로 편안히 가셨답니다. 가시는 길에 북망산 굽이굽이 돌아 저희들을 생각하며 되돌아보셨을지,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직도 형 갑장 동생 하며 부르시던 모습이 우리들의 온몸에 꽉 차 있건만, 여전히 하원차랑 선생의 모습이 우리들의 뇌리에 아지랑이처럼 맴돌기만 합니다. 너무도 아쉬운 부분은 무죄 선고받고 이제 좀 재미있게 세상에서 두 어깨 으쓱이며 남부럽지 않게 가족들과 좋은 곳으로 여행도 제대로 못 하시고, 우리와 해외여행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원차랑 선생을 놓아주면 안 되었지만, ‘잘 가라 친구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