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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국가폭력 피해자를 두 번 죽인 사법부 [사법부는 국가폭력 피해자를 두 번 죽이다] "그동안 사법부가 VIP(대통령)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 인혁당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군부독재 하에 행정부와 사법부가 한 통속이 되어 양산했던 수많은 국가폭력의 사례들. 우리는 쉽게 이런 일들이 4-50년 전의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 또는 유가족들은 여전히 이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재심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다루는 행정부와 사법부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고려하여 이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습니다. 지난 양승태 대법원장.. 더보기
[31살에 사형된 언론사 사장] 민족일보와 조용수. 대부분이 기억하지 못하는 언론사와 그 언론사 사장의 이름입니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 창간이 되었습니다. 창간 당시, 민족일보는 4가지 경영방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2.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3.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4.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이 같은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있던 민족일보는 창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매일 4만 여부를 발행하는 신문이 되었고, 당시 가판 판매 부수는 1위였다고 합니다. 이런 민족일보를 박정희 군부독재는 가만 놔둘 리 만무했습니다. 결국,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서른한 살 언론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바른 소.. 더보기
[이숙희 선생 인터뷰-②] “노동운동, 10년의 재판, 그리고 개인 이숙희” [이숙희 선생 인터뷰-②] 노동운동, 10년의 재판, 그리고 개인 이숙희” 이숙희 선생에게 노동조합 활동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힘들지 않고, 재미 있었던’ 긍정적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지난 인터뷰에서 어린 이숙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노동자가 되고 노동 조합을 만났는지 알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활동, 근 10년 동안 이어졌던 청계피복 노동자 법정 싸움, 그리고 선생의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장소를 달라! Q. 72년 당시 청계피복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이숙희) 교육 장소가 없었던 것이 힘들었죠. 그때 노동조합 사무실이 7평 정도밖에 안되어 평화시장 옥상에 의자를 깔고 교육을 했거든요. 한 번은 노동조합에서 중등부 과정을 신설했는데, 200명이 넘게 신청한.. 더보기
[이목희 전 의원, 40년 만에 무죄] [이목희 전 의원, 40년 만에 무죄] 어제(1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목희 전 의원이 40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지만 노동조합원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이목희 의원은 어떻게든 노동운동의 불씨를 끄기 위한 독재정권의 악랄한 꼼수의 첫 번째 피해자였습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당시 노동운동을 하면서 국가로부터 피해를 보셨던 분들의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고통이 보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아래 링크는 관련 기사입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715_0001514395&cID=10201&pID=10200 '3자개입 옥살이' 이목희.. 더보기
“아버지, 특별법이 통과됐대요. 특별법이…” [73년이라는 세월의 눈물] 지난 6월 29일, 국회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되었습니다. 73년 만에 수많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씻어줄 길이 열렸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고, 당시 여순사건 주모자로 지목당해 아직까지도 아버지의 주검을 찾지 못하는 피해자의 딸이 주검 없는 빈 무덤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아버지, 특별법이 통과됐대요. 특별법이…” 73년 동안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눈물이 터졌을까. 그 모진 세월 동안 감내해야 했던 그 아픔과 설움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국가와 사회는 이러한 국가폭력을 직면해야 하며, 이러한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는 던져야 한다. "과연 국가와 사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더보기
[남편의 간첩활동 방조범으로 몰린 아내…49년 만에 무죄] [남편의 간첩활동 방조범으로 몰린 아내…49년 만에 무죄] 이번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70대 여성분에게 적용됐었던 혐의는 '간첩 방조죄'였다. 1968년 서해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던 남편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당시 국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아온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 남편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여성분에게는 '간첩 방조죄' 혐의를 씌웠다. 그리고 49년 만에 그 억울함이 재심을 통해 조금이나마 풀린 것이다. 단순히 기사의 내용이 아니라 잠시나마 내가 이 피해자가 되어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다. 한평생 억울함은 물론 이로 인해 경제적 불이익을 평.. 더보기
[미법도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48년 만에 무죄] [미법도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48년 만에 무죄] 지난 6월 29일, 서울고등법원 김형진, 최봉희, 진현민 재판부는 미법도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의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무죄를 받은 故 박남선 씨는 대표적인 고문기술자인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허위자백을 하고 7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리고 2005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아픔과 상처는 도대체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거 군부독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간첩조작 사건을 만들었기에... 끝까지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관심을 가지고 피해 당사자와 그 유가족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아래 링크는 관련 기사입니다. https://www.news1.kr/articles.. 더보기
치졸한 대한민국의 현실 [치졸한 대한민국의 현실] "전두환 집권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간첩 조작 희생양이 됐는데 가해자는 아무런 사죄나 사과도 없다" "과거 폭력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모습이 대한민국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1981년 전두환 정권 당시 억울하게 충청남도 대공분실로 끌려가 집단 구타와 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받고,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3년을 확정받은 간첩조작 피해자의 재판 후의 억울한 외침입니다. 억울하게 하루아침에 인생이 망가진 것도 모자라, 여전히 사법부의 판결을 보면 화가 납니다. 사법부는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 액수를 3억 원으로 정하면서도 구금에 대한 보상 및 재심 재판비용으로 이미 받은 형사보상금을 제외한 6,117만 원만 최종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치졸한 행위가 어디 있을.. 더보기
6월 29일, 여순 특별법 통과!! [여순 특별법 통과] 좋은 소식입니다. 지난 6월 29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수, 순천, 광양 등 전남권 전역에 1만여 명의 주민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여순사건은 제16대 국회부터 제20대 국회까지 여러 차례 특별법안이 발의됐으나 모두 자동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전남 동부권 주철현, 김회재, 소병철, 서동용, 김승남 등 다섯 명의 국회의원이 주축이 되어 특별법 단일안을 제시했고, 지난해 7월 28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152명이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드디어, 지난 73년을 고통 속에 살아온 희생자 유가족과.. 더보기
간첩조작 사건으로 수감 중 사망…법원 "국가, 유족에 배상" [배상금의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반갑지만 가슴이 먹먹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1970년대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신 한 국가폭력 피해자의 민사재판에서 사법부가 과거 국가기관의 잘못을 인정하고 유족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짧은 기사에서는 몇 가지 팩트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주요 내용들이 재판 결과를 통해 얼마의 배상금을 유족들이 받게 되는지를 적고 있었습니다.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리고, 출소를 얼마 앞둔 1977년 2월 이 피해자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이 단순히 배상금의 액수가 아니라 이러한 사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