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정의2014. 1. 14. 16:29

[뉴스1]'울릉도 간첩단', 40년만에 간첩누명 벗었다

 

고법 "고문 등 사정으로 임의성 결여…증거능력 없어 무죄"

 

고 최규식씨 등 3명, '입북 혐의'는 유죄 판단...시효 지나

 

(서울=뉴스1) 김수완 기자 =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 징역형 등을 선고받았던 피해자들이 40년만에 간첩누명을 벗게 됐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문용선)는 10일 '울릉도 간첩단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낸 국가보안법 위반 등 재심사건에서 손두익씨, 전국술씨 등 10명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사들이 제출한 증거는 고문 등 사정으로 인해 임의성이 없어 증거능력이 없다"며 "이 증거만으로는 범죄가 증명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미 고인이 된 최규식씨에 대해서는 간첩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도 북한 탈출·잠입 등 혐의는 인정해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일본 유학 중 입북했다가 남한으로 들어온 점이 인정된다"며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면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체류기간이 짧은 점 등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사건으로 사형된 3명 중 한 사람인 고 전영관씨와 이미 고인이 된 전영봉씨 2명에 대해서도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단하면서 북한 탈출·잠입 등 혐의는 인정해 "공소시효가 지나 면소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날 선고가 끝나자 피고인석에 서 있던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은 "감사합니다"라며 재판부에 짧은 감사를 표했다.

 

손씨 등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에는 방청석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74년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한 이후 재일한국인 관련 공안사건으로 조작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당시 47명이 체포돼 불법감금, 고문, 협박 등을 당했다.

 

이들 중 3명은 사형을 당했고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은 수십년간 많은 피해를 입어왔다.

 

앞서 같은 사건의 피해자인 이성희 전 전북대 수의학과 교수도 지난 2012년 11월 재심을 통해 손씨 등에 앞서 간첩 혐의를 벗었다. 다만 이 교수도 북한 잠입·탈출 등 혐의는 인정돼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위 내용은 2014년 1월 10일 '뉴스1'에 게재되었던 기사입니다. 기사 원문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news1.kr/articles/1489729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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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정의2014. 1. 14. 16:21

[뉴시스] '고문 못이겨 허위자백' 납북어부 29년만에 무죄

 

 

【서울=뉴시스】천정인 기자 = 1971년 울릉도 북쪽 해역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중 납북된 어부가 간첩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29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황병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이 확정돼 옥살이를 한 김모(57)씨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10일 밝혔다.

재심 재판부가 적법하게 채택해 조사한 증거들에 따르면 김씨는 1984년 4월 보안사 소속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34일 동안 보안사 분실에서 영장 없이 구금된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수사관들은 김씨에게 간첩 혐의를 인정하는 취지의 진술을 하거나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하면서 몸 전체를 각목으로 구타하거나 얼굴이 천장으로 향하도록 각목에 몸을 묶은 다음 코 주위에 물을 붓는 고문을 가하는 등 각종 가혹행위를 했다.

이에 재판부는 "김씨는 당시 민간인에 대해 수사할 권한이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에게 불법 연행·구금 돼 폭행이나 가혹행위 등을 당하는 과정에서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진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 및 검찰에서 한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고 나머지 증거들만으로는 간첩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김씨는 1971년 울릉도 북쪽 해역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납치돼 북한에 머무르면서 북한의 강요에 따라 교육을 받거나 견학을 한 뒤 다시 귀국했다.

이후 보안사는 김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남파돼 군부대 및 해안 초소 위치 등을 파악하는 등의 간첩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불법 체포·조사한 뒤 자백을 받아냈고, 재판에 넘겨진 김씨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됐다.

 

 


 

 

(위 내용은 2014년 1월 11일 '뉴시스'에 게재되었던 기사입니다. 기사 원문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110_0012650528&cID=10201&pID=10200

 

참고: '뉴스타파' 최후변론 간첩이 된 납북어부  http://newstapa.tistory.com/510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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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정의2014. 1. 14. 16:09

[경향] ‘변호인’의 군의관처럼, ‘고문 보조’ 양심선언할 의사는 없을까

 

 

▲ 피해자 증언만 있고 실체는 안 드러나… 그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과연 어떤 양심으로 고문 보조자로 일할 수 있었을까

1987년 1월15일 오후,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한 남자 대학생이 사망한 사실이 짤막한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중앙일보 1987년 1월15일 석간 사회면)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사망 시간은 14일 오전 11시20분경, 사망 장소는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현재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09호, 사망 원인은 ‘목 부위 압박에 의한 질식’이었다. 즉 박종철은 ‘남영동’으로 끌려간 지 세 시간도 채 안 되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머리를 욕조에 밀어 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해 사망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신은 16일 아침 부랴부랴 벽제화장장에서 화장 처리되었다.

 

 

 


■ ‘박종철 고문 사망’ 왕진의·법의학자 진술로 밝혀져

박종철의 죽음이 AP와 AFP 등 통신사들을 통해 국제적으로, 다시 한국으로 알려지는 등 사안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15일 오후 6시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사건을 해명했다. “박군이 밤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여러 컵 마신 뒤 심문 시작 30분 만에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고 쓰러졌다.”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킨 어처구니없는 변명이었다. ‘박종철 고문 살인사건’이 몇 달 뒤 ‘6월 시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데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망언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명언’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빼라고 한단다. 학생들이 우리 역사에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며. 독재와 거짓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싸워온 우리 역사가 부정적이라는 뜻인지?

다음 날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한 선배 교수가 치안본부장의 해명이 믿긴다고 했다. 자신이 남영동 같은 데에 잡혀가면 수사관이 탁 치기도 전에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질 거라면서. 그 말에 역설적인 진실이 담겨 있을 것이다. ‘남산’이니 ‘동빙고동’이니 ‘옥인동’이니 하는 소리만 들어도 뒷덜미가 댕기고 가위눌리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규명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함께했다. 첫 번째 보도뿐만 아니라 사실을 밝히려는 언론인들의 취재가 ‘보도지침’의 틈새를 뚫고, 또 그것을 넘어서면서 이어졌다. 사망 직후 왕진을 가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내과의사와 부검을 집도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학자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내 19일, 치안본부장은 며칠 전의 발언을 번복하고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그 발표도 축소, 왜곡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아마도 당국이 정치적 또는 공안 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사망을 인정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박종철의 죽음에 앞서 많은 고문 피해자의 폭로와 증언이 있었다. 폭로는 보복을 낳을 수 있기에 가히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당국은 그때마다 사실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투쟁전술로서 고문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라고 피해자들을 매도했다. 바로 그 전해에는 수사를 받던 도중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대생의 폭로도 있었다.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이에 대해 당국은 조사 결과 약간의 폭언과 폭행은 있었지만 성적인 부당행위는 없었다고 발표하면서, 오히려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또 다른 성폭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2년 뒤 법정에서 피해자의 주장이 완전히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1987년을 거치면서 한국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된 덕분이었다.

■ ‘인혁당’ 사건도 고문으로 날조됐다는 사실 드러나

영화 <변호인>이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각색을 한 것이지만 실화 ‘부림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1980년대초 부산 지역의 대표적 공안 사건인 부림 사건에 대해서 법원은 작년 3월 재심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재심 이유로 “피고인들을 영장 없이 20일 이상 구금함으로써 형사소송법을 위반하고 불법체포 및 감금죄를 범한 사실”을 들었다. 또한 비슷한 성격의 용공 조작 사건인 학림 사건, 오송회 사건, 아람회 사건 등이 이미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로 확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부림 사건 역시 무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8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사법 살인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도 고문으로 날조된 것임이 재심을 통해 명명백백히 밝혀지기도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군의관 윤성두 중위가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허구의 인물이다. 비슷한 사람은 없었을까? 고문 피해자를 치료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문 과정에 참여했고 나중에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한 의사는,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없다. 고문에 관여했다고 스스로 밝히거나 알려진 의사도 여태 없다. 우리와 비슷하게 독재정권과 고문 사건들을 숱하게 경험한 칠레, 브라질 등 남아메리카 나라들과 다른 점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을 뿐이다.

“고문은 끝난 게 아니었다. 1986년 5월7일 날이 새자 이들은 피의자(김문수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현재 경기도지사)를 앰뷸런스에 태워 천호동 소재 피의자의 친구 집을 찾아가면서 약도가 틀린 것 같다고 5, 6명이 몹시 때리고 전기방망이로 손과 발을 50회 이상 지져댔다. 못 견뎌 기절하자 다시 송파보안사로 데려와서 의사가 진찰을 했다. 상태가 심각했는지 피의자를 어디인지는 모르나 큰 군병원에 데리고 가서 X-레이를 찍고 약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보안사로 데려와 매일 목욕과 마사지를 시키고 상처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었다고 한다. 피의자는 고문이 이어지는 4일간 소변과 대변을 보지 못하는 등 고통을 당했으며 변호사를 만난 5월23일에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보고서 제2집’. 1987년 2월10일 발간)

■ 나치·일본 731부대처럼 가혹행위 직접 한 의사도

“여러 수사기관, 특히 안기부에서 조사받았던 사람들은 고문 도중에 의사가 건강 이상 징후를 체크하거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희식씨의 경우 ‘안기부 자체 의료진으로 보이는 의사 2명’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이런 진술과 증언들을 모아보면 분명히 안기부 내에는 전속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사 자격을 얻은 후 어떤 양심으로 고문의 보조자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1>. 291쪽)

고문 과정에 의사가 관여한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일이다. 우선 고문 피해자를 치료하는 경우다. 이것은 대부분 인도주의적 목적보다는 고문을 은폐하거나 또 다른 고문을 시행하기 위해서다. 또 인체에 대해 잘 아는 의사가 고문을 비롯한 가혹행위를 직접 행하기도 한다. 독일 나치와 일본 731부대의 의사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 만큼 의사들이 고문에 관여하는 것을 경고, 금지하고 나아가 의사들이 고문을 근절시키는 데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1975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제29차 총회에서 ‘도쿄 선언’을 채택한 일이다. ‘억류와 투옥에 관련된 고문과 그 밖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비열한 조치와 처벌에 관한 의사 지침’이다. 이 선언이 1975년 가을에 발표된 것은 그 무렵 한국의 사법 살인 사건 등 국가폭력이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의사회는 그 뒤에도 상황 변화에 맞게 ‘도쿄 선언’의 내용을 보완하고 구체화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 의사가 고문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도쿄선언’

도쿄 선언의 핵심은 의사가 고문에 참여하거나 조장·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의사가 고문을 위한 시설·도구·지식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고문이나 그 밖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관여하거나 묵인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위협과 보복을 받는 의사들을 지원하는 것도 선언의 주요 내용이다. 요컨대 고문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묵인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선언의 정신이자 핵심 내용이다. 윤 중위의 증언은 이 ‘도쿄 선언’을 따르는 것이자 그 선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법정 의사단체인 대한의사협회는 2001년 처음으로 ‘의사윤리지침’을 제정했다. 총 6장 78조로 구성된 이 지침의 제4장은 ‘의사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이며 그 아래 다음과 같이 고문과 관련된 조항이 있다.

제45조(인권 보호 의무) ① 의사는 고문 등 인권을 유린하거나 침해하는 행위를 자행·교사·방조하거나 그러한 행위를 묵인 또는 은폐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제1항에서 규정한 고문에는 신체적 폭행뿐만 아니라 불법적 감금, 정신적 압박, 언어적 폭력, 성적 폭력, 강제 급식, 잠 안 재우기 등도 포함된다.

③ 수사에 관여하는 의사는 수사와 관련하여 고문의 의심이 있는 경우 그 사실을 상급수사기관, 인권 관련 기구 또는 의사회 등에 고발, 보고하여야 한다.
 

④ 수사와 무관한 의사라도 고문의 의심이 있는 경우 그 사실을 상급수사기관, 인권 관련 기구 또는 의사회 등에 고발, 보고하여야 한다.

지침을 만드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침조차 없는 것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터이다. 대한의사협회는 2006년 ‘의사윤리지침’을 전문 개정하면서 인권 보호에 관한 조항을 완전히 삭제했다. 한국은 고문이나 인권 유린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고문에 대한 항거의 기억조차 국가기관이 나서서 지우려는 판에 과연 그럴까?
 
황상익(서울의대교수, 의사학)

 


 

(위 내용은 2014년 1월 10일 경향신문』'황상익의 의학파노라마(5)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에 게재되었던 기사입니다. 기사 원문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02057165&code=210100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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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정의2013. 4. 25. 14:59

 아는 사람을 아는,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그러나 안다고 하는 사람도 잘 모르는, 그리고 모른다고 하는 사람도 사실 다 알고 있는 그런 일이 있다. 고문 문제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발생한 고문 문제에 관한 매우 의미 있는 도서가 재출간되었다. 재일동포 김병진 씨가 최근 다시 펴낸 『보안사(2013. 이매진)라는 책이다.

 

 

『보안사』김병진 씨가 1984년부터 1986년 사이 약 2년동안 보안사에서 근무하면서 경험한 고문의 실상을 충격적으로 증언한 기록물이다. 저자 김병진 씨는 1986년 보안사 근무를 마치자마자 탈출하듯 일본으로 돌아가 원고를 썼다고 한다. 그 원고는 1987년 일본 아사히 신문 논픽션 부문 공모작에 당선되어 일본어로 출판되기도 했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내에서 출판(소나무 출판사)되었을 때는 당국에 의해 대부분 압수되었고, 곧 절판되어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이 책에 나온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의 진실이 하나둘씩 사실로 밝혀져 피해자들이 수십 년 만에 무죄판결을 연이어 받으면서 이 책의 내용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재일동포 3세인 김병진 씨는 1980년 일본에서 대학을 중퇴한 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유학와 1983년경 같은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삼성연수원 일본어 강사로 일하던 중,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에 불법 연행되어 구금된 후 고문을 당하고 '공소 보류' 처분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제20조)과 「공소보류자 관찰규칙」에 의하면 '공보 보류' 처분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에 대해 2년 동안 협조를 요구하고 보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보류자가 수사기관의 지시·요구에 불응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보류 처분 취소와 재구속하여 불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처분에 따라 김병진 씨는 그 후 2년 동안 보안사에서 재일동포 간첩사건 수사의 통역과 번역 업무를 강제로 담당하게 되었다.

 

 

<김병진 사건 보도기사(동아일보, 1983. 10. 19.자)>

 

 김병진 씨가 보안사에서 근무한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보안사에서 일본 관련 간첩사건을 여러 차례 발표한 시기이다. 당시 보안사는 매년 80~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연행해 조사했다고 한다. 근년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이종수, 허철중, 윤정헌, 조일지 씨 등이 모두 이즈음에 보안사에서 수사한 사건들이다. 이 책은 같은 시기 보안사에서 일어났던 재일동포 간첩조작의 전말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1984년 로마 교황 방한을 앞두고 보안사에서 가톨릭 사제를 대상으로 진행한 '평화공작', 기독교계를 대상으로 한 '거미줄 공작' 등 일반인의 시각에서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되었으리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국내 유일한 고문관련 내부자 고발서 

 

지금까지 고문 문제에 대한 저술들은 피해자의 피해 증언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워낙 고문이 지하 밀실에서 목격자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입을 다무는 한 피해증언만 있고 통상 목격 진술이나 가해 진술은 없게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병진 씨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보안사 수사관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직접 목격한 당시 고문 장면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보안사』는 국내 고문 관련 문헌자료 가운데 유일한 내부자 고발서이며,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발생한 고문 폭력에 관한 사실 여부 논란에 동지부를 찍는 증거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아가 이 책은 고문 폭력의 매커니즘과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상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1차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승진과 (수사)공작금 수령을 위해 혈안이 된 수사관들의 무차별적인 고문조작의 형태와 함께 이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으로 몰래 눈물을 흘리는 가해자의 모습도 나타나 있다.

 

 

<추재엽 고문피해자 김병진, 나종인 씨 고법에 탄원서 제출 ⓒ안민 기자>

 

  『보안사』초판본(소나무)과 다른 점으로 2013년 재출판된 『보안사』에는 저자 김병진 씨와 당시 보안사 수사관 추재엽 씨(양천구청장)와의 질긴 악연이 일지형식으로 추가되어 있다. 김병진 씨는 추재엽 씨의 당시 고문가담 사실 여부를 두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 1988년 초판에서 "보안사를 조국의 땅에서 매장해버리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 했던 저자는 2013년 개정판 서문에서 "가해의 진실까지 밝히지 않으면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 아니다"라며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지 않던 자가 훈장을 받고, 포상금을 나누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진급하고, 지금은 정년퇴직해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피해자와 그 가족은 인생이 파괴되고, 고문후유증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주위의 눈총까지 받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결과 과거사 청산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쓰러진 『보안사』 저자 김병진 씨>

 

쓰러진 저자

 

 지난 1월 9일 김병진 씨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졌다. 『보안사』의 복간을 불과 1주일 남겨둔, 추재엽 씨와의 소송에서 이긴 바로 그날이었다. 저자의 부인에 따르면(현재 저자는 뇌출혈로 인해 심각한 언어 후유장애를 겪고 있다), 1986년 일본에 돌아간 후 김병진 씨의 가족은 보안사 사건의 피해자들로부터도 '보안사 수사관'으로 고문조작에 참여했다는 비난과 협박을 받아왔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서 내쳐진 상황에서 심리적 충격이 컷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당시 다수의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고문조작 사실을 밝히고 무죄판결을 받는 대해 저자 김병진 씨는 이 책에서 "고마운 소식은 내가 책을 통해 밝히려 한 간첩조작 피해자 대부분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피해자들이 법원에 내 책을 증거물로 제출한 사실이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늦었지만 그나마 내 고발이 나름대로 제 몫을 해내서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 김병진 씨는 영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두개의 문'의 김일난 감독 등과 함께 '환경재단'에 의해 2012년에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33인에 선정되었다>

 

 25년만에 재출판된 이 책은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에게 묻고 있다. 우선, 고문을 통해 간첩을 조작해낸 일은 '애국'으로 포장될 수 없다. 공무원으로서 국가공권력을 남용하여 사욕을 추구함으로써 정당한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조장하고 혈세로 조성된 국가자원을 낭비했으며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준 행위를 '애국'이라 말한다면 가해자들은 국가를 두 번 배신하는 것이 된다. 가해자들에게 허용된 진정한 애국의 길은 다시는 고문조작이 없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는 것에 있지 않겠는가.

 

 이 책은 동시대 피해자들에게도 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국가권력의 압도적 힘에 의해 지배당해 온 피해자들에게는 자신과 주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심리적 상황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고 주체적인 삶을 구축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 피해자 범주에 머물고 있는 의식과 행동을 극복하고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대자적 태도도 필요하다. 때로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방향을 일헝 사랑하는 가족 혹은 같은 피해자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아픔을 주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현재 저자 김병진 씨는 다행히 큰 고비를 넘기고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일본 땅에서 외롭게 싸우며 어려운 치료과정을 앞두고 있는 이 가족분들에게 따뜻한 도움과 격려말씀이 큰 힘이 된다. 아울러 일본 현지에 있는 가까운 피해자들의 격려도 구한다.

 

일본에 있는 김병진 씨의 이메일 주소는 kilsori@gmail.com 이다.

 


 

 

글쓴이: 임채도(인권의학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임채도 연구기획실장은

인권 이슈 가운데 고문 범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많은 고문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만난 경험이 있답니다.

김근태기념 치유센터, 고문방지법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2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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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정의2013. 4. 22. 14:53

1980년 4월 발생한 사북민주항쟁의 33주년 기념식이 4월 20일(토) 오후 2시 옛 동원탄좌 구내에 건립된 “뿌리관”에서 개최되었다.

 

<사진출처. 인권의학연구소>

 

 

 기념식은 ‘지역살리기공동추진위원회’와 ‘사북민주항쟁동지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정선군수, 군의회 의장, 강원랜드 사장 등 지역 각계 인사들과 주민 200여 명이 참석했다. 눈비가 흩날리는 가운데 행사는 주최 측의 인사말과 내빈 기념사, 기념시 낭송 순으로 진행되었다. 정선군수, 강원랜드 사장 등 내빈들은 지역의 아픈 상처를 잊지 말고 후대들이 기억하도록 하자고 발언했다. 행사 후 이원갑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과 신경, 강윤호, 윤병천, 안원순 등 사북항쟁 동지회 참석자들은 인근 식당에서 향후 기념사업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조직의 안정화와 기념사업의 확대를 결의하였다.

 

 

사북민주항쟁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는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와 주민들이 노조지부장 사퇴 등을 요구하며 사북읍 일대를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였으나 노·사·정 대표간의 협상을 통해 사태 해결에 합의하였는데, 같은 해 5월 6일부터 6월 17일 동안 1군 계엄사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이 200여명의 주민들을 재차 정선경찰서에 연행, 구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가한 사건”으로 규정한바 있다.

 

 

<사진출처. 사북항쟁동지회>

 

 

이 사건은 1960,70년대 우리나라 탄광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배경으로 '어용노조 지부장의 퇴진',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던 노동자들이 정보경찰의 노조활동 감시에 분격하여 회사와 강원도 정선군 사북면 일대를 완전 장악하고 경찰, 군인과 대치한 끝에 11개항의 타협안에 합의한 후 평화적으로 사태를 마무리 한 탄광노동쟁의사건이었다. 그러나 평화적 타결 이후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노동쟁의를 주도한 광부와 가족들 수백 명을 야밤을 틈타 정선경찰서에 설치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무차별 불법연행하여 물고문, 고문호스 구타, 성고문 등 말할 수 없는 집단 고문을 자행한 후 31명을 구속하는 등 8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 처벌하였다.

 

 

 

<사진출처. 사북항쟁동지회>

 

 

 당시 고문 피해자들은 지금도 그 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국가는 적어도 과거의 고문가해에 대해 책임있는 사과와 원상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아픈 기억의 상처는 33번의 딱지를 떼고도 아물지 않았다. 어떠한 보상이나 훈장보다 피해자들에게는 가족와 이웃들의 인정과 존경이 큰 힘이 된다. 사북항쟁이 지금까지 멍에를 지고 싸웠던 것도 가족와 이웃들의 믿음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안식을 주어야 할 때다. 사북항쟁의 역사적 재조명과 기념사업에 더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사진출처. 사북항쟁동지회>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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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정의2013. 4. 3. 15:38

남들지 않는 남도 - 제주섬의 상처 위로 65번째 유채꽃이 피고 진다.

 

 

 

                  <사진출처. 진실화해위원회>

 

지난 2008년 제주대 김문두 교수팀의 조사결과, 4.3항쟁 희생자와 유족의 68.6%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53.3%가 우울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 4.3항쟁과 같은 시기 발생한 여순사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2012년 12월 실태조사에서도 여순사건 피해자의 35.8%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현재 제주 4.3 희생자와 유족의 상태는 정확히 파악된바 없다. 

 

 

 

<사진출처. 인권의학연구소>

 

 

  제주 4.3항쟁 피해자 유족의 트라우마 실태에 관한 정확한 조사에 기초하여 피해자 유족의 아픔을 씻어낼 대책이 필요하다. 관련하여 4.3특별법의 개정을 통해 피해자 유족에 대한 보상 확대, 트라우마 치유 대책 등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특히, 제주지역의 문화적 동질성, 특유의 공동체적 정서가 4.3사건의 정신적 피해를 극복하고 지역사회를 다시 하나로 응집하여 도민들의 화합과 나라의 하나됨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도 4.3의 역사적 수레바퀴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희생자 유족회 어르신들과, 묵묵히 헌신하고 계시는 4.3 관련 단체 일꾼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존경과 연대의 인사를 보낸다.

 

 

 

인권의학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임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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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정의2013. 3. 21. 11:15

 

 

 

 

 

울릉도에 머물다

 

 

 

최창남 (작가,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숲 사이로 난 길은 아늑했고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은 따스했다. 오랜 세월 동안 울릉읍과 북면을 이어주던 옛길이다. 산길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봄 햇살 가득했다. 숲은 충만한 봄의 생명력으로 인해 싱그러움으로 수런거리고 있었다.
살을 에는 모진 바람을 이겨내던 기다림과 봄을 맞는 설렘이 바다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그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설렘 가득한 숲과 달리 산길은 지나는 이 없어 조용하고 고요했다. 발걸음 소리, 바람 소리, 흔들리는 나뭇잎들과 풀잎들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산길 끼고 있는 산자락마다 여우꼬리사초 가득했다.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풀이다. 가는 풀잎의 끝에 수술 같은 것이 달려 있어 붙은 이름인 것 같았다.

 

바람에 풀잎 흔들리고 있었다. 숲 출렁이고 길 흐르는 것 같았다. 풀이야말로 진정한 산의 주인이며 생명의 바탕이다. 풀이 없다면 토사 흘러 내려 산은 이내 형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풀은 확실히 민중들을 닮았다. 아니 민중들이 풀을 닮았다. 그래서 민초(民草)라는 말이 생겨났으리라. 참된 주인이면서도 외면당하는 것 또한 꼭 닮았으니 말이다.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섬 가까이 바다 위에 작은 섬이 보였다. 바단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마치 환영 같았다.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에 취해 발걸음을 쉬 뗄 수 없었다. 죽도다. 한 집 두 집 떠나 지금은 단 한 가구가 살고 있다는 섬이다.

 

 

<울릉도에 머물다 - 최창남건립추진위원> 

 

 

‘저렇게 아름다운 섬이 자신의 삶에 그렇게 끼어 들어올지는 자신도 도저히 알 수 없었으리라... 어린 시절에는 그 작은 섬 죽도에서 뛰어 놀고 헤엄치기도 했겠지...’

 

소위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손두익 선생은 당시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에게 가해진 혐의는 죽도를 거점으로 간첩들을 실어 날랐다는 것이었다. 1964년 강원도 거진항에서 명태잡이 갔다가 불행히 납북되었던 사건이 빌미가 된 것이다. 당시 약 30일 간 납북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법에 따라 처벌을 다 받았지만 다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선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혐의를 부인하였지만 고문에 의해 시인하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지장을 찍었다고 했다.

 

 

<울릉도에 머물다 - 최창남건립추진위원> 

 

 
선생은 사건이 일어났던 74년 이후에도 여전히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산허리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었다. 집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다 계단으로 올라선 곳에 선생의 집은 있었다. 세월을 닮은 낡은 처마의 끝에 오징어를 건조하기 위한 건조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건 일어나기 전 선생은 배를 소유한 선주였지만 출소 후에는 생계를 위해 오징어 말리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 마저도 그만 둔지 오래 되어 오징어 건조대에는 지나는 바람만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마당이라 할 수 없는 좁은 통로에는 고무호스, 양동이와 그릇들이 쌓여 있었다. 통로 한 쪽에 널려 있던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문 곁에 붙어 있던 계량기에 문패 대신 손두익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불 들어오지 않아 전기장판이 깔려 있는 방 안은 울릉도의 세찬 바람을 견뎌 내느라 베니어합판으로 덧대어 있었다.

 

산자락 사이사이에 붉은 동백꽃 떨어져 있었다. 간간이 초설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 마삭줄도 보였다. 지나는 이 없는 산길에 든 낯선 이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랐는지 박새 울음이 더욱 요란스러웠다. 북면으로 들어서니 내쳐 걸으니 이내 석포였다. 숲 사이로 이어지던 길은 해안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파란 하늘 맑아 눈부셨다. 푸른 바다는 투명하고 깊었다. 바람 세찼다. 걷기 힘들었다. 쟈켓을 꺼내 입었다. 머리까지 쓴 후 단단히 여몄다. 바다는 일렁이고 출렁였다. 홀로 고기잡이 나가던 배 또한 곧 뒤집어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것이 어디 배 뿐이냐... 흔들리는 것이 어디 바다 뿐이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천부였다. 저동포구로 돌아왔다. 모진 세월을 선생과 함께 견뎌낸 따님과의 저녁 약속이 있었다.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 사이로 비릿한 내음이 전해졌다. 저녁 어스름 내린 포구의 비릿함이 꽤나 친근히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민박집에 지친 몸을 뉘인 밤 동안 내내 출소하신지 27년이나 지났음에도 아버지의 수번호 ‘3965’가 잊히지 않는다던 따님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 웅~웅~ 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밤 내내 그렇게 노래하고 그렇게 울었다.

 

모두들 떠났지만 선생은 울릉도에 남아 있었다.
자신을 내친 땅에 남았다.
어쩌면 감옥에서보다 견디기 힘들었을 그 모진 세월을 그저 묵묵히 몸으로 견뎌냈다.
그렇게 깊은 밤 지났다.

 

아침이 되었다. 울릉도를 떠나는 날이었다.  선표를 구하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도동포구에서 저동포구로 이어진 해안 따라 난 길을 걸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바다는 여전히 투명하고 깊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기암괴석이었다.
돌아보니 멀리 절벽 위로 등대가 보였다. 갈매기들 날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흘린 눈물이 많은 땅이어서 그런지 그 눈부신 아름다움들이 서글펐다.

 

 

 

<울릉도에 머물다 - 최창남건립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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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최창남 (목사.작곡가. 작가)
              교회안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늘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등의 여러 민중
               가요를 작곡했다. '개똥이 이야기' '그것이 그것에게'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울릉도 1974"등 몇 권의 책을 냈다.
                현재 연세대학교대학원에서 통일학을 공부하고 있다.
            (사)'백두대간 하늘길'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글은

                     (사)인권의학연구소 뉴스레터 20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Posted by 김근태기념치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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