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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사건보다 더 큰 상처주는 2차 피해, 대책이 필요하다 폭력 사건보다 더 큰 상처주는 2차 피해, 대책이 필요하다 이 화 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 치료받지 못하는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 폭력적 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겪은 이들은 신체적 상해보다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으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특히 고문이나 강간과 같은 폭력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피해자의 약 90% 이상에서 만성적 심리 이상을 결과한다. 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후에 오게 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 때문이다. 과거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폭력은 수사기관에서의 고문이나 가혹행위와 같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었다. 구금시설이나 군대와 같은 폐쇄적인 조직에서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여성이나 아동과 같은 약자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은 지금도 높은 비율로.. 더보기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인권클리닉 인터뷰] “내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원풍모방 노동조합 박순애 전 부지부장 인터뷰 1972년,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어떠한 단체행동도 허락되지 않던 살벌한 상황에서 원풍모방 노조는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1970년대 민주노조 중에서도 ‘전설’로 불릴 만큼 활동적인 사회 참여와 노동자 투쟁을 전개했던 자타공인 최강의 노조였다. “내가 18살 때, 그러니까 72년에 한국모방에 들어가서 회사가 원풍모방으로 이름이 바뀌고 원풍 노조가 해체되던 82년까지 10년 있었으니까, 그 역사를 모두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어요.” 박순애 선생님은 원풍모방 노조가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던 당시 부지부장을 지냈다. 최강의 노조였지만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이름하에 .. 더보기
안토니오 가우디의 성가정성당 안토니오 가우디의 성가정성당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 유충희 (신부, 천주교 원주교구) 가우디는 마드리드에 이어 스페인 제2의 도시인 까딸류나 지방의 바르셀로나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1878년 건축학교를 졸업했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만든 모든 건축물들은 바르셀로나를 찾는 사람들의 중요한 관광코스이다. 당시 대부호였던 ‘돈 에우세비오 구엘’이라는 사람이 가우디의 능력을 인정하여 자신의 저택과 공원 그리고 다른 건축물의 설계를 가우디에게 위임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처럼 구엘은 가우디라는 천재가 세상에 그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후원자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18년 구엘이 죽기 전까지 40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가우디가 구.. 더보기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 이영문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개인의 치료와 사회적 치유의 연관성 이 영 문(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김근태기념치유센터설립추진위원) 올해로 제주 4.3사건은 64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보면서, 반성하지 않는 오만한 부패권력들의 잔인함과 뻔뻔스러움에 우리들 가슴은 분노로 뒤엉켜 있습니다. 개인의 심리적 성향이 중심이지만, 불가항력적인 폭력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속에 내재된 분노와 두려움이 일상생활을 뒤덮게 됩니다. 집단에 가해진 무차별적 폭력에 대해 개인이 겪게 되는 정신병리에 대한 규명은 나치하의 “강제 수용소 증후군”과 같은 연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한 연구보고서에도 비교적 .. 더보기
유충희신부의 성당건축 살펴보기 - 롱샹성당 유충희신부의 성당건축 살펴보기 - 롱샹성당 롱샹 성당 (The Chapelle of Notre Dame du Haut in Ronchamp) 프랑스 유충희 (신부, 천주교 원주교구) 스위스 바젤에서 서쪽으로 가면 스위스와 독일의 국경 근처인 프랑스 벨포르(Belfort)가 나오고 거기서 북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롱샹(Ronchamp)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롱샹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150m 언덕 위에 20세기 가장 빼어난 종교 건축물로 칭송을 받는 성모 순례 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이 성당은 스위스 출신의 화가요 건축가요 도시설계가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 1887-1965)의 설계로 지어졌다. 프랑스 브장송 대교구의 뒤부르(Dubourg) 대주교는 1950년 초 개신교도요 사회주.. 더보기
"인권을 살리는 치유,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프로그램" 운영하는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소장을 만나다 - 장남수 "인권을 살리는 치유,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프로그램" 운영하는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소장을 만나다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여기, 사람이 있다!”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망루에서 외치던 사람은 그러나 끝내,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시커멓게 무너져 내리는 건물잔해처럼 철거민들의 삶은 무너졌다. 죽고 끌려가고 울부짖는 현장에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체 따라 울다 천막귀퉁이에서 웅크리고 잠들었다. 용산참사 피해자 지원활동을 하던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빈민사목 팀의 눈에 이 아이들이 박혔다. 천막에서 자고, 밥 먹고, 등교하고, 천막으로 돌아와 이해할 수없는 험한 상황을 매일 목격하는 이 아이들의 마음상태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이사장, 함세웅신부)의.. 더보기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인권의학연구소 최창남 이사는 작년 12월 1일 울릉도 간첩단 조작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울릉도 1974" 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연구소의 집단상담 치유과정에 참여하시면서 목격하신 은폐된 역사의 아픈 상처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쓰셨다고 합니다. 아래는 최창남 이사가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하여 나눈 인터뷰 내용입니다. 정관용(이하 정). - "울릉도 1974"란 책으로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진면목을 파헤 친 최창남 목사를 스튜디오에 모십니다. 지금 목사님이지만 목회는 안 하시죠. 그런데 다양한 일들을 해오셨어요. 옛날에 민중가요의 고전인 , 이런 노래를 만드셨지요. 만드실 때가.. 더보기
울릉도에 머물다 - 최창남건립추진위원의 글입니다. 울릉도에 머물다 최창남 (작가,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숲 사이로 난 길은 아늑했고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은 따스했다. 오랜 세월 동안 울릉읍과 북면을 이어주던 옛길이다. 산길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봄 햇살 가득했다. 숲은 충만한 봄의 생명력으로 인해 싱그러움으로 수런거리고 있었다. 살을 에는 모진 바람을 이겨내던 기다림과 봄을 맞는 설렘이 바다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그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설렘 가득한 숲과 달리 산길은 지나는 이 없어 조용하고 고요했다. 발걸음 소리, 바람 소리, 흔들리는 나뭇잎들과 풀잎들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산길 끼고 있는 산자락마다 여우꼬리사초 가득했다.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풀이다. 가는 풀잎의 끝에 수술 같은 것이 달려 있어 붙은 이름인 것 같았다... 더보기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을 위해 먼저 나선 사람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권은 억압적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이들의 헌신과 정권 유지를 위해 고문으로 내몰렸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의 대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고문이 일상화되었던 시대도 또한 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지나고 나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무관심 속에 홀로 저마다의 고통을 이해하고 견뎌야 했습니다. 김근태 역시 그랬습니다. 홀로 고통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떠나갔지만 우리에게 기억과 치유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건립을 위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김근태들이 고통을 홀로 견디다 쓰러져 가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깨우침때문입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이 땅의 수많은 피해자들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리.. 더보기
김근태의 이름으로 짓는 “고문피해자 트라우마 치유 센터” 김근태의 이름으로 짓는 “고문피해자 트라우마 치유 센터” 인권의학연구소 (imhrc@naver.com) 지난 해 12월 30일 영면한 고 김근태 의장의 영결식이 열린 명동성당. 오전부터 추모객들이 모여들었다. 추모미사를 집전하는 함세웅 신부는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졌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생전에 김 고문에게 '더 싸우라', '더 열정적으로 앞에 나서라'고 요구했다"며 "그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함세웅 신부는 "전기 고문을 당한 김 고문은 이전과 다른 내적, 외적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분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청년 시절의 열정을 갖고 앞장서라고 밀어붙였다"며 "그걸 반성하고 인재근 여사에게 사죄드린다"고 고개.. 더보기